제 99화 : 당장 내게 싸움을 걸어라.
많은 기자들이 모여있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출입문쪽을 자꾸 흘긋 거린다.
이른바 결승전을 앞두고 벌어지는 미디어 데이다.
“아무리 주인공이라고 해도 그렇지 너무 하는 것 아냐?”
“특종을 얻는 첫 번째 방법, 취재 대상이 나타날 때까지 절대 불평 불만을 하지 않는다. 아함!”
그러면서 자신도 조금 지루 했는지 하품을 했다.
“백두호 선수 뭔 일 있나?”
어느 기자가 말했다.
“스타는 늦게 나와.”
“정일준 선수는 이미 나와 있잖아 저렇게?”
일준은 핸드폰 게임에 열중이다.
드르륵!
문이 열리고 직원이 들어섰다.
“백두호 선수 입장합니다.”
예수와 두호가 들어섰다.
게임을 하고 있던 일준의 눈썹이 모아졌다.
‘분명히 어제 작업했다고 했는데.’
두호는 단상 위에 올라와 의자를 쭉 빼고 자리에 앉았다.
책상에 설치된 마이크를 잡아당겼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바로 시작하시죠.”
두호가 사과의 말을 전하자 이내 기자들과 방송국 직원들이 분주해졌다.
‘씨발 진짜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은데.’
일준의 눈이 부지런히 두호를 훑는다.
곧바로 기자회견이 시작되었다.
기자들의 질문은 단순했다.
이길수 있느냐.
몸 상태는 어떠냐는 등 흔히 있는 질문이 오갔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질문의 방향이 한곳으로 향했는데 그건 과거 두 선수의 대표선발전 경기 결과에 대한 것이었다.
“지금 봐도 당시 경기는 백두호선수의 완승이었는데?”
“정일준 선수는 자신이 이겼다고 확신합니까? 솔직한 대답을 듣고 싶습니다.”
모든 시선이 정일준에게 멎었다.
정일준은 씨익 웃더니 마이크를 당겼다.
“아니란 거요?”
야릇한 미소가 얼굴 전체로 퍼진다.
“심판은 분명 내 손을 들었어. 심판이 진놈 손을 드는 경우도 있냐!”
화악!
모두가 소스라친다.
일준이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결승전에서 내가 저 새끼를 어떻게 잡는지 직접 보라고, 보고나서도 그런 좆같은 질문을 하는지 보겠어.”
꽈당!
앉아 있던 의자를 발로 차버리더니 두호에게 다가갔다.
“야 그때 누가 이겼냐? 니 입으로 말해봐 씨발아.”
두호가 앉아 웃는다.
“네가 이겼지.”
“들었어?”
일준이 씨익 웃으며 회견장을 나가 버렸다.
‘누가 보면 짠줄 알겠네.’
두호는 피식 웃었다.
* * *
장충체육관이다.
결승전만큼은 제대로 격을 갖추자는 뜻이었다.
장충체육관은 한국 스포츠의 요람이고 무덤이다
많은 선수들이 여기서 활짝 피었고, 쟁쟁하던 선수가 속절없이 주저 앉았던 곳.
누군가는 장충체육관을 일컬어 우리 민족의 빼앗긴 역사 만큼이나 아픈 곳이라고 했고, 또 다른 이는 나에게 꿈을 심어 주던 곳이라고 말한다.
물론 역사와 전통만을 가졌다고 여기서 결승전을 여는건 아니다.
한국 체육에 중심인 이곳을 마지막 무대로 선정한데는 나름 필린의 노림수가 있었다.
비주류였던 격투기가 주류가 되었다는 것을 상징함과 동시에 서울 중심부로 이동하여 관객들을 대폭 모으겠다는 의도였다.
예상대로 경기 시작 전부터 수 많은 관객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내부 구조도 변환하여 과거에 비해 20퍼센트 더 수용 능력이 생겼다.
체육관 입구 반대편에서 채호가 서 있었다.
오늘 경기 관계자들을 위한 뒷문이었는데 이번 PRIDE-K의 투자자들을 의전하기 위해서 있다.
결승전인 만큼 채호가 직접 맡기로 한 것이다.
검은색 차 한 대가 들어온다.
이내 채호가 넥타이를 다시 조여매고 천천히 차 앞으로 다가간다.
벌컹!
벌컹!
조수석과 운전석 문이 동시에 열린다.
경수와 태건이었다.
태건이 차 뒷문을 열자 수미가 내렸다.
수미는 채호와 눈이 마주치자 마자 빙긋 웃었다.
“어르신.”
“마지막인데 한번은 와봐야지.”
적지 않은 고비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채호는 매우 냉철하고 차분하게 위기를 넘겼다.
“자네라는 사람 참 대단해.”
채호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태건 선수.”
태건이 가볍게 목례를 했다.
그러나 표정은 예전보다 많이 부드러워졌다.
나중 본인 입으로 말하기를 PRIDE-K가 세상을 살아가는 자신의 안목을 많이 바꾸었다고 고백했다.
“들어가시죠!”
채호의 안내로 세 사람은 천천히 대회장 안으로 입장했다.
* * *
주민의 표정은 싸늘했다.
“정말 어떻게 된 일인지 말씀 안해주실 겁니까?”
두호는 잔뜩 인상을 쓰고 있는 주민을 빤히 보고 있었다.
탁현이 한마디 거들었다.
“물론 말씀 주신다고 달라질 건 없지만, 그래도 세컨으로서 상황은 알아야 합니다.”
두호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내가 괜찮다는데.”
“아이 증말.”
주민이 버럭 짜증을 냈다.
두호의 옆구리 위쪽으로 들어간 자상.
다행히 깊이는 그렇게 위험하지 않았지만 격투 스포츠 특성상 한쪽 코어의 부재는 엄청난 불리함으로 작용한다.
거기에 허벅지도 스쳤지만 작은 자상이 있다.
“형님. 여기요.”
준모가 따뜻한 물 한잔을 건넨다.
물을 마시는 두호를 쏘아보던 탁현이 주민에게 눈짓을 하며 바깥으로 나간다.
입이 없어서 침묵하는 것이 아니다.
말할 필요를 느끼지 않기 때문에 꽉 다무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다그치고 자백하라고 화낼 것이 아니라 자리를 비켜 조금이라도 안정을 찾도록 배려하는 것이 앞선 세컨의 모습이다.
준모만 남고 모두 나간다.
“준모야!”
“예 형님!”
“고생 많았다.”
의미심장한 두호의 말에 준모의 표정이 굳는다.
이내 두호는 눈을 감더니 빙긋 웃는다.
일준도 대기실에서 몸을 풀고 있었다.
거울을 보며 가상의 두호를 놓고 좌우 옆구리에 이어 어퍼컷이 올라간다.
한참 쉐도우 복싱을 하더니 뭔가 생각 난 듯 돌아섰다.
찌익!
가방의 지퍼를 열더니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은색 케이스.
이제는 숨길 필요도 없다고 느꼈는지 버젓이 책상 위에 올려놓는다.
“윽.”
아직도 적응이 안되는지 작게 신음을 흘린다.
스으으으!
금방 차분해지면서 근육의 미세한 떨림부터 피의 이동까지 고스란히 느껴진다.
몸이 망가지겠지만, 상관없다.
여기까지 와서 주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푸후!
다시 거울앞에서 쉐도우 복싱을 한다.
누군가는 꼭 그렇게 살아야 하냐고 묻는다.
그렇게 해서라도 이겨야 하냐.
승부란 당당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이다.
그것은 패배자들의 논리다.
승부는 무조건 이겨야 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기면 그것이 지배자인 것이다.
3년의 기다림.
이겼지만 그 어떤 치욕보다 우울했던 시간들이다.
오늘 두호를 무릎 꿇리지 못하면 3년전 경기는 진 것이다.
* * *
-팟
파파팟!
환하게 켜져있던 조명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케이지로 빛 한줄기가 쏘아졌다.
미주가 마이크를 들고 서 있다.
“지난 3개월의 혈투, 사람이 다치고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오늘 누가 마지막으로 쓰러질지, 누가 우승컵을 거머쥘지 자웅을 겨루는 날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오늘 두 선수는 다르다는 것이죠. 이기고 살아남고 쟁취해낸 한국 제일의 격투가입니다.”
입석까지 3만여 명이 꽉 들어찼지만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상금 10억과 T-90 그리고 수 많은 부상들을 차지하는 왕좌의 주인공은 누굴까요! 백두호 대 정일준. 정일준 대 백두호! 지금 시작합니다!”
삽시간에 모든 경기장의 조명이 켜졌고 관객들의 모습이 비춰졌다.
-와아아!
자신들을 보며 관중들은 환호했다.
* * *
한편 수미는 조용히 체육관을 빠져 나왔다.
오색 찬란한 조명이 소낙비처럼 쏟아지며 노래가 흘러나온다.
강렬한 EDM 소리.
불을 뿜는 조명사이로 한 사람이 걸어나온다.
일준이다.
예선과 차이나는 진중한 표정.
“일준아! 백두호만 때려잡으면 저거 다 니꺼다!”
“너가 진짜 챔피언이야 믿는다!”
일준의 팬들이 아우성이다.
팬들의 외침에도 표정하나 눈빛 한 번 돌리지 않고 걸어간다.
닥터와 심판의 마지막 점검 후 그는 케이지로 들어섰다.
빠방!
고막이 터질 것 같은 음악이 벼락치듯 처지고 경기장 불이 꺼졌다.
빠방!
다시 한번 짧은 소리가 터지면서 이번엔 반대편으로 조명이 켜졌다.
강렬한 화이트 조명과 함께 안개가 뿜어지며 흘러나오는 음악.
THE SCORE – LEGEND.
시원한 기타리프 소리와 함께 두호가 등장했다.
-우와아아!
일준의 응원과는 차원이 다르다.
고막이 터질 것 같은 함성에 일부 관중들은 손으로 귀를 막았다.
“진짜 나 형보고 힘 많이낸다! 꼭 이겨!”
“두호야 가즈아!”
걸어가던 두호가 멈칫하며 한곳을 돌아 보았다.
교도소 시절 정신적으로 흔들리는 자신을 위로해주던 오정배 교위와 가족들.
어깨동무를 하고서 백두호를 외치는 야탑고 권투부.
양성학 감독.
가게는 어떻게 하고 왔는지 모를 올레 시장 사람들.
그리고 오지 말라고 했는데 기어이 나타나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부모님도 있다.
“형님 다른 사람은 몰라도 엄마 아버지에게 손 한 번 정도는 흔들어 주시죠.”
하지만 두호는 꼼짝하지 않았다.
척!
닥터와 심판앞에 도착하여 똑같이 최종점검을 마친다.
이내 케이지 안으로 들어섰다.
쿠와아아아!
함성에 체육관 지붕이 들썩인다.
* * *
수미의 옆에 누군가가 털썩 앉았다.
수미가 밝은 미소를 띄우며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한다.
“오셨어요? 오는데 불편하시지는 않으셨나요?”
“요새는 버스가 잘 되어있더라고. 그래서 편히 왔네.”
옆 자리에 앉은 사람은 황성태였다.
두호의 결승을 같이 보자는 수미의 제안에 황성태는 오랜만에 서울 나들이를 한 것이다.
“두호는?”
“저기 있네요.”
수미가 케이지 안을 가르키자 황성태가 무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요새 일이 많았다고?”
“이쁜 꽃이 꺾였습니다.”
“아까운 일이구만.”
가벼운 한숨과 함께 황성태는 성호경을 그었다.
뒤에 앉아있던 태건과 경수는 황성태를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녀가 이만한 예를 차리기에는 그의 옷이 너무 남루했기 때문이다.
“경기 시작하려나봐요.”
수미와 황성태가 케이지 안을 바라보았다.
일준은 자신의 코너 앞을 왔다 갔다 했다.
반면 두호는 꿈쩍도 않고 서 있었다.
씨익!
일준이 웃는다.
백두호 우린 이렇게 또다시 만나는구나.
이런 걸 운명이라고 하지.
그리고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죽어야 하는 팔자라고도 한다.
오늘 널 이 자리에서 죽여주겠다.
죽는 것 어려운 일 아니지.
내가 때리면 넌 맞아 죽는 거야.
왜 너만 보면 이렇게 심사가 뒤틀리고 가만 있지 못하겠는지 모르겠다.
답답해서 점쟁이를 찾아갔더니 전생에 너와 내가 호랑이였단다.
한 산에 어찌 두 마리의 호랑이가 살 수 있겠냐면서 반드시 하나는 죽어야 한다고 하더라.
오늘 널 죽여주겠다.
“청코너 레디?”
일준이 고개를 끄덕인다.
“홍 코너 레디?”
두호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이 파이트!”
심판의 손이 거칠게 내려가며 이내 마지막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때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