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4화 : 당장 내게 싸움을 걸어라.
두 사람이 들어서자 민영이 반갑게 맞이했다.
“결국 마지막까지 올라가고야 말았습니다. 두호선수!”
민영이 생긋 웃는다.
놀랍다는 뜻이다.
두 사람은 민영의 맞은편에 앉았다.
민영은 자신의 컴퓨터에 두호의 차트를 꺼내보이며 하나씩 확인을 시작했다.
두호의 경기 스타일로 미루어보았을 때 골절이 있을 확률은 희박하지만 태건과의 일전은 두호 역시 피를 볼 정도로 위험했다.
고수들의 싸움은 외상보다는 내상을 많이 입는다.
멀쩡하다고 그대로 경기에 투입하면 제대로 주먹도 뻗지 못하고 죽사발 난다.
민영은 직접 혈압을 재고 몸속 상태를 보기 위해 피를 뽑았다.
그리고 몇 가지 묻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xray 찍죠. 김 간호사”
조금전 자신들을 안내했던 간호사가 나타났고 민영은 엑스레이 촬영을 지시했다.
두호는 간호사를 따라 나갔다.
간호사를 따라가는데 핸드폰이 울린다.
준모다.
“어때?”
두호는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
간호사가 xray실 앞에 도착해서 문을 열었다.
“어. 나 지금 검사 들어가야 한다. 병원으로 와라.”
두호는 핸드폰과 여러 소지품을 작은 바구니에 담았다.
동생 문제는 잘 진행이 되고 있으며 끝나는 대로 이곳에 오겠다는 준모였다.
* * *
조촐한 술자리다.
수미가 태건을 위로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였다.
오랜만에 파전이 만들어지고 구수한 막걸리가 잔을 가득 채운다.
좀체 술을 않는 태건과 경수지만 수미가 따라주었기에 거침없이 마셨다.
“태건 군!”
수미의 눈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정말 미안해. 황부사장을 이렇게 떠나보낼 줄은 몰랐는데.”
“어르신.”
태건이 깜짝 놀란다.
“황부사장 때문에 경기에 많은 지장을 받았을 거야. 하나뿐인 친구가 죽었는데 어찌 주먹인들 제대로 나갔을까.”
태건은 고개를 떨군다.
“경기에 방해가 될것이기에 숨겼는데 그 늙은이가 선수를 쳐버렸지.”
당시 찾아온 사내가 모영배쪽 인물이라는 걸 뒤늦게 알게 된 태건은 치를 떨었다.
“대회가 끝나면 제대로 공사 들어갈거야.”
모영배를 제거하겠다는 뜻이다.
수미의 얘기는 계속 이어졌고 태건과 경수는 앉아 들었다.
바깥으로 나갔던 태건이 들어오는데 손에 작은 나무 상자 하나를 들고 있었다.
느닷없는 상자에 수미도, 경수도 바라본다.
자리에 앉은 태건은 나무상자를 경수에게 건네 주었다.
“뭡니까?”
“열어 봐.”
경수는 상자 뚜껑을 열었다.
화악!
뚜껑을 연 경수는 깜짝 놀랐다.
상자속에는 한 자루 칼이 들어 있었다.
일반적인 사시미칼과는 다르게 손잡이가 짧았고 유려한 곡선으로 이루어졌다.
혼슈 카람빗 나이프.
특수부대원들이나 킬러가 사용한다는 그 칼이었다.
“형님!”
경수의 목소리가 떨린다.
누구보다도 이 칼의 역사를 잘 알고 있다.
오늘날 태건을 이 자리에까지 올려준 분신 같은 물건이다.
칼이라기 보다는 필요할 때 은밀하게 사용하는 제3의 팔이라고 할 수 있었다.
“갈수록 어르신을 귀찮게 할 사람들이 많아질거야.”
“감사합니다. 형님!”
이제 경수가 부사장, 즉 수미의 경호대장이다.
목숨을 걸고 지키라는 뜻이다.
수미가 잔잔한 웃음을 지었다.
좋다.
정말 마음에 드는 사람이다.
똑똑!
노크소리에 고개가 돌아갔고 문이 열리며 한 사내가 들어섰다.
사내의 표정이 굳어있다.
“조금전 모영배 아이들이 급히 이동했다는 소식입니다.”
“어디로?”
“그건 아직.”
태건이 슬쩍 수미의 눈치를 살핀다.
조금전까지 수미 얼굴을 가득 채우고 있던 미소가 씻은 듯 사라졌다.
탁!
수미가 들고 있던 젓가락을 힘차게 탁자 위에 놓고 소리쳤다.
“두호야!”
수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영배가 백두호를 노린다. 전부 출동준비 해.”
수미의 말이 떨어지고 백평파전 앞으로 사내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 * *
검사가 끝났다.
혈액과 소변 검사 결과는 저녁쯤 나온다고 했고 나머지는 이상 없었다.
“아참 정문으로 오는 길이 너무 막힌다고 후문으로 오겠다더군요.”
예수가 잊을 뻔 했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두 사람은 계단을 내려와 왼쪽으로 꺾어졌다.
소롯길이다.
비록 바닥은 벽돌로 포장되어 있지만 그럭저럭 운치가 있었기에 두 사람은 말없이 걸어갔다.
후문은 작은 골목으로 이어진다.
두 사람은 한참을 걸어 후문을 나섰다.
부우웅!
승용차 한 대가 다가왔는데 준모 차다.
끼익!
차가 멈추고 준모가 내렸는데 환한 표정을 했다.
“형님! 예수님!”
두호 역시 마주 웃으며 다가가려다 멈칫했다.
십여 대의 차량이 갑자기 골목길을 가득 채우며 나타나더니 멈춰섰다.
그리고 문이 열리며 사내들이 쏟아져 내린다.
“뭐야?”
준모가 놀라 외친다.
모영배 부하들이다.
두호는 준모를 미행해 왔다는 걸 알아차렸다.
흉기를 숨길 마음이 없는 듯 쇠파이프와 예리하게 번뜩이는 회칼을 들고 다가온다.
“저 새끼 눕혀!”
두호는 사내들을 바라보았다.
“형님!”
두호의 옆으로 다가온 준모는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누...누굴까요?”
“예수씨 데리고 가.”
있어봤자 짐이다.
피해주는 것이 돕는 길이다.
그렇다고 이 위험한 현장을 떠난다는 건 양준모 답지 않은 일이다.
문제는 예수였다.
그녀는 두호의 매니저다.
평소의 성품을 보건데 자신의 관리를 받는 선수를 놔두고 혼자 살겠다고 도망칠 여자가 아니다.
예수 때문이라도 일단 자린 피해야 했다.
준모는 가지 않으려는 예수를 끌어 당기며 조그만 샛길로 빠져 나갔다.
스윽!
두호는 양쪽 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는 이번 대회를 무너뜨리려고 갖은 방법을 동원했다.
약물을 이용한 덫을 놨고, 도박 사이트를 통해 대회를 추락시키려고 했다.
황석희까지 죽여 대회 최대 후원자인 수미를 흔들려고 했다.
수미가 비틀거리면 채호가 입는 데미지도 크다.
심지어는 자신과 태건의 멘탈을 흔들어 경기를 난장판으로 만들기 위해 직접 찾아오기까지 했다.
그리고 이제는 주위 시선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을 직접 사냥하러 왔다.
죽어도 결승전이 열리는 건 볼 수 없다는 뜻이다.
천천히 걸어간다.
손님이 오면 마중을 나가는 것이 예법 아니던가.
부우웅!
처음 달려오는 사내의 야구배트를 고개를 젖혀 피해낸 다음 목과 팔 한쪽을 안아 업어 쳤다.
곧바로 따라 들어오는 사내의 가슴팍을 발로 차버리고 바로 옆 사내한테 원투를 꽂는다.
빠...바박!
세 명의 사내가 맥없이 무너지자 뒤에 있던 사내들이 멈칫했다.
“뭐해, 지금 시합하냐. 일대일로 저 새끼를 무슨 수로 당하냐고, 다구리쳐!”
사내들이 다시 온다.
두호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이래저래 김도혁이든 백두호든 청춘을 싸움으로 살아온 존재들이다.
목숨을 건 사투라는 말은 익숙해 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한 조각 숨구멍만 살아 있다면 결코 포기하지 않고 기어이 상대의 목숨을 끊었다.
슈우욱!
두호는 사내들 속으로 뛰어 들었다.
그런 두호를 향해 칼과 쇠파이프가 빗발친다.
슈슉!
쉬익!
링위에서처럼 멋진 위빙으로 공격을 피하며 파고드는 칼 한 자루를 옆구리 사이로 흘린다.
이어 사내의 손목을 쥐고 부러뜨러 버린다.
투욱!이어 빼앗은 칼을 사내의 가슴에 박고 거칠게 밀어 버린다.
꽈당!
사내가 나동그라지며 포위망이 흔들린다.
뻐억!
오른쪽 사내의 얼굴을 니킥으로 박살내며 담장을 등지고 섰다.
다수와의 싸움에서 중요한 것은 등 뒤를 내주지 않는 것이다.
제아무리 날고 뛴다해도 보이지 않는 등은 취약할 수밖에 없다.
사내들은 갑자기 주춤했다.
두호의 시야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자신들을 발견한 것이다.
“그래 오늘 제대로 한 판 벌려보자.”
사내가 검도하듯 야구방망이를 내려쳤다.
두호는 슬쩍 왼쪽으로 몸을 틀어 피하며 약간 앞으로 허리를 구부린 사내의 얼굴에 주먹을 받았다.
빠악!
팟!
그리고 사내의 손에 들린 야구방망이를 빼앗았다.
따악!
방망이로 사내의 머리통을 한 대 더 갈기고 왼쪽에서 파고드는 칼을 야구방망이로 친다.
따앙!
사시미 칼이 허공으로 날아가고 방망이가 옆구리를 후려쳤다.
퍽!
쉬이익!
그때 뭔가 번쩍하며 눈이 부셨다.
두호는 직감적으로 칼이라는 걸 간파했지만 피하기에 늦었다.
빙글!
재빨리 몸을 틀었으나 옆구리가 따끔했다.
칼이 스친 것이다.
깊지는 않은 듯 했지만 뜨거운 것이 주위로 퍼지는 걸 보면 피가 흐르고 있다.
두호는 이를 지그시 물며 칼을 놓은 사내의 얼굴에 무릎을 꽃아 넣고 쓰러지는 사내의 뒤통수에 방망이를 한 방 더 먹인다.
슈욱!
쿠우우!
시간이 길어지는 것에 위기를 느낀 듯 사내들이 동시에 덤벼든다.
몇 명이 희생을 각오하는 대신 반드시 두호를 잡겠다는 의지다.
빡!
퍼퍼퍽!
한 명씩이 아닌 여러 명이 그물을 놓듯 달려들 땐 적수공권이 훨씬 낫다.
야구방망이를 놓고 주먹과 발을 이용해 박투를 벌인다.
좁은 공간에서 치고 받는 양쪽의 전쟁은 숨 막히는 긴장과 살벌한 파육음이 터졌다.
뼈 부러지는 소리, 턱이 날아가는 소리, 고통을 참지 못하고 뱉어내는 비명소리.
“우훅!”
두호가 또 한 번 숨을 들이마신다.
칼 하나가 왼쪽 허벅지 위쪽을 베고 지나간다.
조금만 스텝이 늦었다면 정통으로 꽂혔을 것이다.
두호는 처음으로 위기를 느낀다.
무서움이 아닌 결승전 경기를 떠올린 것이다.
사내들은 오늘 기어이 자신의 사지를 잘라 결승전 경기를 망치겠다는 결의를 내뿜는다.
“한 놈도 보내지 마라.”
빠져나갈 길을 찾을 때 귀에 익은 음성이 들려온다.
악!
아이고!
갑자기 비명들이 터지며 공격하던 사내들이 픽픽 쓰러졌다.
두호의 눈이 커졌다.
태건이다.
태건이 부하들을 데리고 나타나 청소를 시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막 승용차에서 내리는 사람이 있다.
수미가 직접 온 것이다.
다다다!
일부가 도망치면서 골목은 썰물이 빠져 나간 듯 조용해져 버렸다.
“으음!”
두호는 신음을 흘리며 애써 괜찮은 척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하지만 두 곳의 상처가 생각보다 얕지 않아 보인다.
“괜찮으십니까?”
태건이 다가왔다.
두호는 가볍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또각또각!
단화소리가 들리며 수미가 다가온다.
수미의 표정이 굳어있다.
“안색이 안좋군.”
대번에 알아차린다.
하지만 두호는 별일 없다는 얼굴이다.
“온 식구 다나왔군요.”
별것도 아닌데 너무 미안하다는 뜻이다.
수미의 시선은 두호의 옆구리에 멎었다.
칼에 잘려나간 옷자락이 펄럭 거린다.
“어서 병원으로 데려가게.”
그제서야 잘려 나간 옷자락을 발견한 태건의 눈이 커졌다.
“가시죠.”
두호는 태건의 차를 타고 병원으로 떠났다.
수미는 우두커니 서 있었다.
골목은 사내들이 흘리고 간 핏자국으로 지저분했고 어디선가 주인 잃은 핸드폰이 악을 쓰며 운다.
‘이거야말로 이판사판이군’
모영배를 잘안다.
시끄럽게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 아니다.
조용히, 은밀하게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그가 벌건 대낮에 사람을 보냈다는 건 한가지 이유다.
더 이상 팻감이 없다.
어떻게 해서라도 이번 대회를 무너뜨려야겠고 그러자면 결승에 진출한 두호를 잡는 일 말고는 방법이 없다.
‘한 발 더 가까이 왔군. 죽음에.’
길게 숨을 내쉬며 어금니를 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