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쟁의 신이 케이지 안으로-97화 (97/204)

제 97화 : 당장 내게 싸움을 걸어라.

가게 안은 손님으로 가득했다.

“이모 여기! 얼큰이 하나랑 보통 하나요!”

주방 창문으로 고개만 살짝 내민 아주머니가 크게 소리쳤다.

“네! 여기 얼큰이 하나! 보통 하나!”

조상무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본다.

“손님이 많군요.”

“이 집이 한 50년 정도 됐나? 아는 사람은 다 아는 맛집이지.”

모영배가 조심스레 모자를 벗어 옆 자리에 내려놓는다.

외투를 벗고 편안하게 앉아 있는 모습은 그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다.

“자주 오시는 곳입니까?”

“40년 됐을걸세. 서울에서 이만한 집 찾는 게 여간 힘든 게 아니었어.”

모영배는 익숙하게 손을 뻗어 각종 양념장이 올려진 자기그릇을 자신 쪽으로 가져왔다.

깍두기를 다른 접시에 퍼 담으며 조상무를 힐끔 보았다.

“왜 싫은가?”

“아닙니다. 전혀.”

조상무가 깜짝 놀란다.

“먹어봐.”

주문한 음식이 두 사람 앞에 놓여졌다.

조상무의 그릇 앞에는 특(特)이 놓였고 모영배는 보통이다.

“좀 많은 것 같습니다.”

“젊은 사람이 많이 먹어야지. 늙은이들이 많이 먹어서 무엇해.”

조상무가 알았다는 듯 꾸벅하며 숟가락을 들 때 모영배의 젓가락이 쑤욱 들어온다.

그의 젓가락에는 부추가 많이 집어져 있었는데 조상무의 순대국에 넣는다.

“정구지를 많이 넣어야 맛있어.”

“네. 감사합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순대국을 먹기 시작했다.

조상무는 무척 조심스럽다.

모영배 앞이어서 조심스러운 것이 아니라 한 번도 먹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식당은 아예 발을 들여 놓지도 않았다.

하지만 깨작거리는 듯 하던 숟가락질이 어느 한순간 삽으로 돌변했다.

모영배가 그 모습을 보며 옅은 미소를 띄운다.

“현성회라고 아나?”

조상무가 뜨던 밥 숟갈을 내려놓고 모영배를 바라보았다.

“광복이후 가장 큰 전국구 조직 아닙니까?”

조상무보다 한 세대 이전의 일이었다.

하지만 이 바닥에서 그들을 모를 수는 없다.

자신의 주인도 그곳 출신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입으로 직접 언급한 것은 처음 듣는다.

“돈도 명예도 그리고 권력까지. 말 그대로 무소불위였네.”

모영배가 옛 추억에 젖는 듯 팔짱을 낀다.

“하지만 더욱더 그곳이 대단한 것은 실력행사까지 완벽했다는 거였어.”

돈, 명예 그리고 권력으로도 통제가 안되는 것을 직접 처리할 수 있는 실제적인 능력.

현성회는 그렇게 한국의 밤이 되었다.

“그런데 그 현성회가 무너진 이유가 무엇인지 아나?”

“뭡니까.”

“실리를 거부했어.”

현성회 소속원들은 한국 최고의 카르텔이 되기를 원했지만 수미는 거부했다.

“생각해봐. 올빼미가 어떻게 낮에 다닐 수 있나. 있어야 할 곳에 있어야지. 우리가 낮에 돌아다니면 뭐가 되겠냐고.

그렇게 현성회는 수미의 이탈을 시작으로 사분오열 되었다.

“조상무!”

“예 회장님!”

“많이 먹게. 사람은 배가 든든해야 돼.”

* * *

차 한 대가 올레시장 근처 도로에서 멈춰섰다.

준모가 고개를 돌리며 뒷 자석에 두호를 바라보았다.

“형님 도착했습니다!”

“벌써.”

준모는 재빨리 차에서 내려 뒷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매서운 눈길로 주위를 살폈다.

“왜?”

“혹시나 불손한 생각을 가진 놈들이 형님을 공격하지 않을까. 살피고 있습니다.”

두호는 터지려는 웃음을 이를 악물고 참는다.

가끔은 준모가 너무 재밌다.

그런데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것이 본인은 너무 진지하다는 것이었다.

호텔에 갇혀 있느니 며칠 바람이라도 쐬이는게 어떻겠냐는 채호의 말을 듣고 부모님을 찾아 온 것이다.

“준모야.”

“네.”

“늘 고맙다.”

준모의 눈이 커졌다.

마음으로 전달할 뿐 좀체 입을 열어 감정 표현을 않는 두호다.

“형님 무슨 일 있으세요? 설마 누구한테 협박을 당하신다거나...”

두호는 끝내 웃고 말았다.

스윽!

두호가 지갑에서 명함 한 장을 꺼냈다.

“깜빡 잊을 뻔 했다.”

“뭡니까?”

명함을 받아든 준모는 눈을 좁혀 명함을 읽었다.

“서울대병원...이게 뭐에요?”

“한국에서 간담췌 쪽으로는 최고 권위자야. 동생 얘기해놨으니까 이곳으로 옮겨가. 잘 봐주실거야.”

준모는 멍한 눈으로 두호를 바라보았다.

“형님이 그걸 어떻게...”

두호는 빙긋 웃어보이며 자신의 짐을 챙겼다.

“내일보자.”

곧바로 차 문을 열고 나간 두호는 소복상회를 향해 걸어갔다.

두호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도 한참 동안 차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이고 성아야.”

한참 동안 핸들에 얼굴을 묻고 우는 준모였다.

두호는 시장길을 걸어갔다.

그런데 사람들이 소리쳤다.

“올레시장 자랑!”

“두호야!”

시장 상인들과 손님들이 몰려들며 백두호를 외쳤다.

그중 한 아주머니가 튀어나온다.

호떡 하나를 들고 나오며 두호의 입에 물리려고 한다.

“세상에 그 이쁜게 이렇게 마른 것 봐. 요새 힘들지?”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잘 먹어야 힘내서 잘 싸우지. 그 누구냐? 너와 싸울 놈.”

“정일준요.”

“그 인간이 정씨다. 나 정씨라면 몸서리 나거든.”

평생을 경마에 묻혀 살다 죽은 남편 얘기다.

“죽여버려 알았지.”

사람을 죽이라고 하면서 너무 친절하게 웃는다.

두호는 잠깐 고개를 숙여 웃음을 참는다.

두호는 팬들과 시장 상인들의 환영을 받으며 부모님 가게를 향해 걸어갔다.

소복상회가 보인다.

그런데 두호의 눈이 커졌다.

* * *

“뭐야.”

승용차가 멈추고 경수와 태건이 내렸다.

암자 수준의 작은 절은 고요했다.

어디선가 스님의 독경소리가 울려 퍼졌고 두 사람은 조그만 일주문을 통과하여 본전으로 향하는 길을 따라 올라갔다.

독경소리는 좀 더 선명하고 가까워졌다.

처억!

두 사람이 대웅전 앞마당에 올라섰다.

독경소리는 활짝 열린 대웅전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두 사람은 천천히 대웅전을 향해 걸어갔다.

다섯 개의 계단을 올라 열린 문 앞에 선 두 사람은 깜짝 놀란다.

붉은 가사를 걸친 노스님이 열심히 목탁을 치며 독경하는데 왼쪽으로 한 여자가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수미다.

백평파전에 도착했지만 수미는 없었다.

직원중 한 명이 그동안 열심히 짜던 털 목도리를 들고 나갔다는 말을 듣고 잠시 고민하다 혹시나 하여 왔는데 제대로 찾아온 것이다.

툭!

경수가 태건의 옆구리를 친다.

태건이 놀라며 돌아보자 턱으로 저 앞을 보라고 가리킨다.

화악!

태건의 눈이 커졌다.

아직 백일 탈상을 하지 않아 대웅전 한켠에 황석희의 사진이 놓여 있었는데 빨간 목도리가 단정하게 둘러있다.

수미의 뜨개질은 황석희의 목에 목도리 하나 걸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건강한 몸인데도 유난히 감기를 달고사는 황석희다.

평소 목을 따뜻하게 해야 감기에 걸리지 않는다고 말하던 수미가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자 직접 뜨개질을 하며 목도리를 만든 것이다.

태건은 조용히 신발을 벗고 들어가 황석희의 영정사진을 보며 절을 하기 시작했다.

‘아석조소제악업(我昔所造諸惡業)

개유무시탐진치(皆由無始貪嗔癡)

종신구의지소생(從身口意之所生)

일체아금개참회(一切我今皆懺悔)‘

예로부터 지은 모든 악업은

다 탐진치 삼독으로 말미암아 몸과 입과 생각으로 지은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저는 지금 모두 참회합니다.

스님의 독경에 맞춰 태건은 계속 절을 올렸다.

백겁적집죄(百劫積集罪)

일념돈탕진(一念頓蕩盡)

여화분고초(如火焚枯草)

멸진무유여(滅盡無有餘)

죄무자성종심기(罪無自性從心起)

심약멸시죄역망(心若滅時罪亦亡)

죄망심멸양구공(罪亡心滅兩俱空)

시즉명위진참회(是則名爲眞懺悔)

백겁을 살면서도 쌓인 죄업

참회하는 일순간에 다 없어져서

불이 마른 풀을 태우듯

하나도 없게 하소서.

죄는 본질이 없어 마음에서 일어난 것

죄짓는 마음이 없을 때에 죄는 따라서 없어집니다.

죄와 마음이 다 없을때에

참으로 참회이옵니다.

땀을 흘린다.

후둑!

툭!

태건의 얼굴에서 떨어지는 땀방울이 대웅전 바닥에 떨어진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석희야.

태건은 계속 미안했다.

이렇게 떠날 줄 알았으면 좋아하는 소주라도 한잔 사줄걸.

자제해서 그렇지 황석희는 무척 술을 좋아했다.

언제 적의 칼날이 목을 파고들지 몰라 항상 긴장해야 하는 까닭에 절제한 것이다.

눈물인지 땀방울인지 태건의 얼굴이 흠뻑 젖었다.

경수와 수미는 대웅전 앞 마당에 있는 커다란 벚나무 아래 서 있었다.

우거진 잎이 내리 쬐는 태양을 막아 주었다.

“아이가 올해 몇 살이라고 했지?”

“세 살입니다.”

경수가 어색하게 웃는다.

“한참 예쁠때로군.”

수미의 목소리에 포근한 느낌이 배어 있다.

경수는 약간 놀란 얼굴로 수미를 돌아보더니 입술을 달싹거렸다.

뭔가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힘들게 자제하는 모습이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물어봐.”

“아...아닙니다.”

“결혼했냐고?”

흠칫!

경수는 깜짝 놀랐다.

수미가 자신이 묻고 싶은 내용을 정확히 말한 것이다.

“자네가 보기에는 어떤가? 했을 것 같은가?”

“잘 모르겠습니다.”

수미는 길게 한숨을 내 쉬었다.

“결혼은 해본 적이 없지. 그러나 누군가를 사랑해본 적은 있네.”

경수는 다시 한 번 놀란 얼굴이다.

“너무 사랑했어. 너무 좋아 했는데 끝내 입 밖으로 그런 감정 한 번 내뱉지 못했어.”

“누구? 지금 살아 있습니까?”

“건강하게 살아 있어. 언젠가 한 번 만나고 온 적도 있지.”

“그쪽은?”

“거기도 혼자 살아. 하지만 여자와 혼인을 할 수 없는 운명이지. 저 안의 스님처럼.”

대웅전의 독경이 끝나고 스님이 신발을 신고 계단을 내려온다.

수미가 돌아서서 수고했다며 합장했고 스님은 미소를 지으며 요사채로 걸어갔다.

그때 땀이 범벅이 된 태건이 걸어 나왔다.

태건이 다가와 허리를 구부린다.

“감사합니다.”

수미가 무엇이 감사하냐는 눈빛으로 본다.

“석희 목도리 말입니다. 제가 몇 개 사준 적이 있긴 한데 답답하다고 자꾸 풀어버려서.”

그건 곧 어르신이 손수 짜준 것이라면 절대 벗지 않고 잘하고 다녔을 것이라는 말이기도 했다.

수미가 천천히 길을 내려갔고 두 사람이 좌우를 따른다.

“중국 속담에 군자의 복수는 십 년이 가도 늦지 않다는 말이 있지.”

황석희 복수를 서두르지 말라는 뜻이다.

“흐르면 흐르는대로, 어차피 바다에 가면 모두 만나는 것이 강물 아니던가”

복수 차원이 아니라 모영배 인생을 치려는 모양이다.

* * *

준모는 서울대병원 앞에 도착했다.

두호와 헤어진 후 받은 명함 속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교수에게 소개받은 인물이라고 말을 전하니 이곳으로 환자와 함께 오라고 했었다.

준모는 교수와 만나기로 한 포플러 나무 아래 벤치에 앉았다.

만나기로 한 약속시간이 5분 정도 남았다.

명함을 내려다 보며 누군지 궁금해하고 있는데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들자 흰 가운을 걸친 쉰 가량의 안경 낀 사내가 다가온다.

준모는 직감적으로 느껴지는 바가 있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준모씨?”

“안녕하십니까 교수님!”

“오셨군요. 환자분은?”

교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준모는 잠시 화장실을 다니러 갔다고 말해 주었다.

“앉으시죠.”

준모가 자릴 권했고 두 사람은 벤치에 앉았다.

임성훈 교수가 몇 가지 환자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준모는 질문에 차분하게 대답을 해주었는데 임성훈의 표정이 갈수록 굳어진다.

설명만으로도 양성아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느낀 모양이었다.

그때 짧은 머리를 한 마른 체구의 여자가 걸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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