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쟁의 신이 케이지 안으로-96화 (96/204)

제 96화 : 당장 내게 싸움을 걸어라.

관객들은 박수를 치며 두호의 이름을 연호한다.

“백두호! 백두호!”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는 괸중들의 모습을 보며 두호는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미주가 링 안으로 걸어 들어와 두호와 인터뷰를 시작했다.

두호는 차분히 미주의 질문에 대답했다.

관중들은 두호의 한마디가 나올 때마다 함성을 지르며 백두호를 외친다.

모영배가 경기장 바깥으로 나왔다.

담배를 피우고 있던 조상무가 달려왔다.

“인터뷰는 안 보십니까? 던지는 질문에 대답이 거침없던데?”

조상무의 손에 쥐어진 핸드폰에서는 두호의 인터뷰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승자의 말은 언제나 미화되기 마련이지. 인생에 도움이 되는 건 패배자의 말이야.”

조상무는 머쓱한 표정을 했다.

그때 모영배의 눈이 반짝 빛나는가 싶더니 방향을 틀어 오른쪽으로 걸어갔다.

호텔 로비 왼쪽 입구로 유리관에 둘러싸인 화분 하나가 있었다.

굵은 수염 뿌리가 흙 속에 있지 않고 땅 위로 올라왔는데 마치 헝클어진 수염 같았다.

잎이 넓적한 편이며 나뭇가지처럼 엇갈리게 뻗어 났다.

“오호.”

다가선 모영배의 눈이 빛난다.

유리보호막 한쪽으로 글씨가 붙었다.

‘우승자에게 주어질 부상 임’

조상무는 밋밋한 시선이었는데 콧구멍이 벌렁거린다.

코끝을 파고드는 닿을락 말락 하는 향기.

처음 맡아보는 향기였는데 요사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진하지도 않다.

가느다랗지만 분명한 자기 모습을 갖고 있는 차분한 내음에 코를 벌름 거린다.

“나도풍란이라는 거지. 워낙 귀하여 고가로 거래되며 웬만해서는 보기 힘든데.”

모영배의 눈에 탐욕의 빛이 서린다.

모영배는 난 애호가이다.

그가 기르는 란(蘭)만 해도 20여종이 되는데 갖고 싶은 욕심을 숨기지 않는 걸 보아 무척 귀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조상무가 고개를 돌렸다.

“웃!”

조상무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터뜨렸다.

다가온 사람은 이채호였다.

“마음에 드시나 보군요?”

뚫어져라 난을 살피던 모영배가 이번에야 들은 듯 고개를 돌렸다.

물을 담은 작은 은주전자를 들고 있는 채호를 발견하고 모영배는 허리를 세웠다.

“필린의 이채호 대표라고 합니다.”

채호는 자신의 품 안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명함을 받은 모영배는 눈살을 찌푸리며 살피더니 이내 표정을 풀었다.

“이 대표!”

모영배가 호방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뻗었다.

채호는 망설이지 않고 손을 내밀어 잡는다.

“그렇잖아도 한번 뵙고 싶었습니다.”

“핫핫! 천하의 필린 대표님께서 나 같은 늙은이를 만나고 싶었다니 영광이라고 해야 하나, 그래 무슨 일로 만나고 싶었는지 들어 봅시다.”

채호는 환하게 웃었다.

“그냥!”

“그냥 보고 싶었단 말?”

채호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그냥 보고 싶으면 안됩니까? 그런 것 있잖습니까?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은 어떤 이유나 조건 없이 보고 싶어지는 것.”

모영배의 표정이 굳어진다.

“그럼!”

채호가 허리를 구부리고 돌아섰다.

“저런 개자식이.”

조상무가 나서려 하자 손을 들어 제지한다.

스윽!

조상무는 화를 삭이지 못해 붉으락푸르락하며 걸어가는 채호를 노려본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은 그냥 보고 싶어진다’

자신을 좋아할 리 없다.

웃으며 말했지만 결코 웃음으로 들리지 않는 이 기분.

소리장도(笑裏藏刀)인건 분명하다.

냉철하기가 얼음보다 더 하다는 말을 들을 만큼 쉽게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젊은 사업가.

‘재밌군!’

모영배는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 * *

-척

태건이 가방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이어 가방속으로 여기 저기 널려진 자신의 짐을 하나씩 집어넣는다.

PRIDE-K 에서의 시간은 사실 유쾌하지 못했다.

오래보고 지낸 부하들과의 시간도 불편할만큼 사회성이 없는 자신에게 이런 단체생활은 곤욕에 가까웠다.

다만 무언가에 이렇게 열중해 본 기억이 아직까지는 없었다.

잡생각도 없이 오로지 한 곳에만 집중하는 시간.

다행히도 그 시간이 준 의미는 작지 않았다.

두호와의 일전을 떠올린다.

냉정한 이성과 완벽한 육체능력.

케이지 전체를 가득 채웠던 특유의 기세.

태건은 헛웃음을 지었다.

‘천외천(天外天) 인거지.’

그렇게 하나둘 물건을 모두 집어넣고 나니 액자 하나가 남았다.

10년전 황석희와 찍은 유일한 사진.

자신은 싫다고 정색을 했지만 황석희가 무시하며 막무가내로 사진을 찍었었다.

그마저도 아니었으면 그와 함께한 사진은 한 장도 없을 테니까.

잠시 말없이 사진을 바라보던 태건.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생각에 잠겨있을 때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린다.

“태건님! 정리 끝나셨나요?”

직원의 부름에 태건이 그제서야 액자를 가방 안에 조심히 넣는다.

방문을 열고 나가자 직원들이 미소지으며 그를 반겼다.

PRIDE-K의 본선 진출자는 패배 즉시 퇴실을 해야한다.

느끼기에 따라서는 섭섭한 처우.

패배한 것도 서러운데 곧장 나가라니 인심 한번 사납다는 생각을 가질만 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보면 그런 규칙이 PRIDE-K를 더욱 뜨겁게 만드는 이유일 수도 있다.

직원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태건을 보며 친절한 미소를 짓는다.

“이번 대회 고생 많으셨습니다.”

“네.”

짧은 대답을 하는 태건을 보며 직원은 머쓱한 표정이었다.

긴 대회 기간동안 제일 자주보는 사람들이 필린의 직원들이다.

그러다보니 친해지지는 않더라도 가벼운 농담 정도는 주고받는 경우가 있지만 태건은 일절 그러지 않았다.

곧이어 도착한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직원과 태건.

로비를 향해 복도를 꺾어 들어가자 누군가가 나타났다.

태건이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경수였다.

“형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경수의 행색을 본 직원은 긴장한 듯 꿀꺽 침을 삼켰다.

얼굴에 길게 나 있는 칼자국과 검은 정장.

일반인들이 놀라 돌아본다.

“태건 선수, 모시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직원의 인사에 태건이 빙긋 웃는다.

아직까지 단 한 번도 웃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웃음이란 즐거울 때 나타나는 신체 반응이라는 것에 익숙해 있는 직원의 눈이 흔들린다.

졌으니 오히려 더욱 인상을 써야 하는데 저 구김없는 미소는 뭐란 말인가.

“행운을 빕니다.”

직원은 천천히 돌아섰다.

“가방 주십시오. 제가 들고 가겠습니다.”

“고맙다.”

경수는 태건이 건네주는 가방을 받아 들었다.

두 사람은 차에 탈 때까지도 별말이 없다.

“부사장님한테 먼저 가시겠습니까?”

차가 출발하고 경수가 물었다.

“어르신한테 먼저 가자.”

멈칫!

경수가 눈을 빛낸다.

절친 황석희를 찾아갈 줄 알았다.

“예!”

부우우웅!

차는 리조트 호텔을 떠났다.

그야말로 실록의 계절이다.

국도를 달리는 차량 안으로 시원한 바람이 들어온다.

“부 사장직을 맡기로 했다고?”

태건이 덤덤하게 물었다.

경수는 약간 더듬거린다.

“형님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어르신이 당최...”

수미는 황석희의 죽음으로 인해 생긴 공백을 태건이 아닌 경수로 임명했다.

부사장의 위치는 공식적인 수미의 오른팔이자 얼굴이다.

하지만 서열과 실력으로만 본다면 태건이 부사장을 맡아야 하는 것이 맞다.

어째서 수미는 태건이 아닌 경수를 선택했을까.

경수는 슬그머니 태건의 눈치를 살폈다.

황석희와 달리 어려운 성격의 태건.

충분히 섭섭하거나 불쾌감을 느낄수도 있는 주제였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태건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창밖을 보고 있었다.

“나보다 네가 훨씬 잘할거라고 믿는다.”

“열심히 하겠습니다만.”

그 자리는 형님이 앉아야 하는데 하는 경수의 시선이다.

“잘 해봐.”

드르륵!

태건이 의자를 뒤로 젖히더니 드러 눕는다.

* * *

‘백두호 vs 정일준’

‘3년만에 리벤지 매치 성사’

‘두 선수의 질기고 질긴 악연 과연 매듭 지어지나’

‘한국 격투기 최대 이벤트. 좌석 예매수 30만 돌파’

‘필린이 만든 격투기 붐. 취미로 배우려는 사람들의 발걸음 붐벼...’

이마에 작은 거즈를 붙인 두호가 읽던 신문을 두 번 접어 책상에 올려놓았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채호가 외투를 벗으며 빙긋 미소 지었다.

“뜨겁죠?”

두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한국 역사상 이 정도의 관심을 보인 매치는 없었다.

격투기 매치라고 하면 복싱이 가장 많다.

70년부터 80년 초까지 세계타이틀을 포함하여 국내 선수끼리의 라이벌 경기는 암울한 시대에 유일한 안식이자 국민들의 피난처였다.

이후 리벤지 매치는 없었다.

그리고 수십 년 세월이 흘렀고 영원히 사라질 것 같은, 이른바 라이벌전이 챔피언 자리를 놓고 벌어진다.

더욱이 이번 둘의 경기는 비극적인 스토리까지 더해진다.

흥행에 모든 조건을 채운 두 사람의 승부에 대한민국이 집중하고 있었다.

그런데 두호를 보는 채호의 눈이 걱정스럽다.

“기분은 좀 어떠세요?”

어제 태건과의 경기 직후 심적 컨디션을 묻는 것이다.

정상에 올라선 선수들은 어느 분야든 심적 컨디션, 이름하여 평상심을 얼마나 빨리 되찾느냐에 승패가 결정난다.

“그래, 그냥!”

그때 누군가 방 문을 두드렸다.

“식사 하시죠!”

요리사 복장을 한 두 여자가 음식을 담은 카트를 밀고 들어왔다.

외부 음식, 특히 여럿이 먹는 직원들 식당 이용도 안된다.

2014년 일본 격투기 대회에서 음식속에 금지약물을 누군가 넣어버린 사건이 일어났다.

당사자는 알지도 못한 채 금지약물을 복용한 저열한 선수가 되어 상상을 초월한 여론의 뭇매를 맞고 은퇴한다.

물론 아직도 본인은 아니라고 부인하고 있으며 여전히 누가 넣었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거액의 판돈이 걸린 게임인 만큼 야쿠자 개입설이 가장 가능성 있었으나 분명한 결과는 드러나지 않았다

“우리도 그런 일 생기지 말란 법 없잖아요.”

그러면서 채호는 서류 봉투 한 개를 내밀었다.

두호는 뭐냐는 듯 바라본다.

“당분간 조심해야 할 것 같습니다.”

두호의 눈썹이 꿈틀했다.

봉투를 집어 든 두호는 내용물을 꺼내 살핀다.

맨 위에 올라온 장은 도핑테스트 관련 서류였다.

“아침에 민영닥터가 보고 올린 것입니다.”

서류 내용은 민영 닥터의 소견이 적혀있었다.

두호는 서류를 천천히 읽어보고 있었다.

긴 문장속 마지막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도핑 테스트 적발 성분은 불검출. 하지만 이뇨제 성분이 검출된 걸로 보아 의심정황이 있다’

두호는 서류를 내려놓았다.

다른 문장들은 중요하지 않다.

의심정황.

그리고 물증이 없을뿐 그 의심은 확실하다는 의미.

“경우의 수는 두 가지겠죠.”

채호는 먹던 앞 접시를 옆으로 살짝 밀어놓았다.

“현재의 한국반도핑 기구의 기술을 넘어서는 신약 디자인까지 완료되었거나, 아니면 극히 희박한 확률로 정말 도핑을 하지 않았다거나.”

하지만 채호의 표정은 전자를 확신하는 듯 싶었다.

두호는 무덤덤하게 듣기만 했다.

사실 말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두호는 여러 가지 상황을 가정해 플랜을 짰다.

일준과 약물에 의한 경기를 치렀고 패배로 종결된 잊을 수 없는 청춘의 악몽을 두 번 다시 겪지 않기 위해서 많은 준비를 한 것이다.

“무조건 조심하라고?”

절대 열 장정 한 도둑 못 잡는다.

더구나 일준은 그 방면에 노련한 경험자이고 부친이 제약회사 사장이다.

“얼마전 저희쪽에서는 강서 경찰서 노장철 반장과의 합작으로 도박 사이트를 검거해냈습니다. 그리고 약물 공장도 어르신 쪽이 확실히 제거해주셨구요.”

채호는 컵에 물을 따라 마셨다.

그래도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는 눈빛이다.

“어쩔 수 없지. 지금이야말로 임기응변 말고는 확실한 대책이 없잖아.”

적의 움직임을 모르므로 그때 그때 대처하는 것이 최선이다.

“일주일 후면 결승인데.”

모영배 쪽에서도 새로운 계획을 세우기에는 촉박한 시간이다.

그러나 기존에 세웠던 방법은 상당부분 노출되었고 그렇다고 포기할 모영배가 아니다.

막무가내로 일을 저지를 가능성이 커진다.

“도망갈 구멍은 적당히 내주면서 했어야 하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모영배에게 길을 터주는 게 낫지 않느냐는 뜻이다.

지금 상황에서 시끄러울수록 필린만 손해다,

“이 대표!”

채호라고 부르지 않고 이대표라고 했다.

채호의 눈이 좁혀진다.

“우리가 언제 피 없이 이긴 적 있었나?”

전쟁에서 완전무결한 승리는 없다.

흘린 피가 많을수록 거머쥐는 영토는 넓다.

이런 큰 대회를 유치하는데 어찌 불나방들이 끼어들지 않겠냐.

두호는 자신의 컵에 담겨있던 희석된 고삼차를 한 입 마셨다.

입에는 쓰지만 몸에는 좋다는 차.

기분 탓인지 머리가 맑아지는 듯 했다.

“조심할게.”

두호가 채호를 안심시키기 위해 빙긋 미소 지었다.

“잃을게 없는 놈들이 제일 무섭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두 사람의 식사는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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