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5화 : 당장 내게 싸움을 걸어라.
손끝에 닿는 미세한 입질이라도 있길 바랐지만 일체 반응하지 않았다.
슉!
태건이 창 같은 깊은 스트레이트를 던진다.
두호가 왼쪽으로 숙이며 더킹해내더니 왼쪽 복부를 노리며 빠르게 리버샷을 찔러넣었다.
-쾅
그리고 복부를 노리고 파고드는 두호의 오른발 미들킥.
연속으로 터뜨린 공격이지만 태건에게 충격을 주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 또한 속임수였다.
자신의 공격이 컸기에 태건 정도면 빈틈을 노리고 역습으로 들어올 줄 알았다.
그때를 대비해 회심의 일격을 단단히 준비해뒀다.
공격이 크면 반드시 빈틈이 생긴다.
하지만 태건은 반응하지 않았다.
채호가 허리를 폈다.
그야말로 숨이 막힌다.
단 잠시라도 두 선수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다.
마치 야구에서 투수전을 보는 기분이다.
0대0.
팽팽한 투수전보다 더 긴장감 넘치는 경기는 없다고 한다.
점수를 내지 못할수록 점수가 나올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닝이 거듭되면서 양쪽 투수는 피를 말리고 타자들은 더욱 한 개라도 치기 위해 적극적으로 달려든다.
지금 두 사람이 그러했다.
하지만 누구도 아직 분명하게 이거다 하는 것은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때앵
1라운르 종료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라운드 내내 참아왔던 관객들의 함성소리가 같이 터져 나왔다.
“미쳤다!”
“뭐가 이래, 숨을 못쉬겠네.”
두 사람은 고생했다는 듯 가볍게 손을 내밀어 터치글러브를 하고는 몸을 돌렸다.
두 사람이 각자의 코너로 돌아가고 주민이 손수건을 들고 뛰어 올라왔다.
삭삭!
주민은 두호 얼굴의 땀을 닦았다.
호흡에는 전혀 이상이 없고 좋은 컨디션이 유지되고 있음을 알아챈 주민이 미소지었다.
“대단하죠?”
두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필린 사람들 중에서 채호와 준모를 제외한다면 코치진들이 두호를 가장 오래보았을 것이다.
그 어떤 미션이나 논란에도 흔들리지 않았고 얼마든지 상대를 자신의 페이스로 끌여들어 요리를 했다.
그러나 지금은 얼굴은 약간 상기되었는데 태건이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다는 뜻이다.
‘으음.’
갖고 있는 모든 걸 쏟아 내지 않으면 위험할 수도 있다.
주민이 빙긋 웃었다.
“긴장하셔야 합니다.”
두호는 주민의 얘기를 조용히 가슴으로 받아 들인다.
“답답하네. 저 아저씨 피곤해.”
준모가 불편한 시선으로 태건을 바라본다.
수미 밑에 있는 사람들중 모르는 이는 거의 없다.
특유의 친화력으로 그들 대부분을 끌어들였다고 자부하지만 태건만큼은 요지부동이다.
오히려 자신을 보면 눈을 부라렸다.
그렇다고 자신을 때리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여기까지와서 두호를 성가시게 하는 것이 무척 불만스럽다.
“형님, 안되면 되게하라. 아시죠?”
타탁!
준모가 두호의 어깨를 주무른다.
두호는 건너편의 태건을 바라보았다.
태건쪽 코치가 무언가를 열심히 이야기하지만 그의 시선은 전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태건의 몸이 서릿발처럼 곤두선다.
‘왜 그러지.’
두호는 태건이 던지는 시선을 쫓았지만 특이한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평소 태건의 모습이 아니다.
경기 시작 10초전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물건들은 챙긴 주민이 걸어나갔다.
“빠샤아!”
준모가 두호의 양어깨를 크게 흔들고 달려 내려간다.
때앵!
두 사람은 링 중앙으로 걸어나와 동시에 손을 뻗어 터치글러브를 했다.
일 라운드를 통해 서로의 수준을 알았고 어느 정도의 탐색이 끝났다.
태건 그는 강하다.
더 이상의 탐색은 시간낭비라는 듯 두 사람은 빠르게 주먹을 내며 파고든다.
파팍!
벅!
한참 주먹을 뻗어내던 두호의 눈썹이 모아졌다.
‘어!’
태건의 주먹이 다르다.
1라운드와 바뀐 것이다.
주먹이 가벼웠는데 설마 1라운드 뛰고 지쳤을 리는 없다.
주먹이 붕 떠 있는 느낌.
1라운드에서는 자신을 넘어뜨려야 할 적으로 보는 것 같은 묵직하고 예리한 주먹이었다.
그런데 2라운드 주먹은 가볍다.
집중하지 않고 딴데 정신을 팔고 있는 그런 기분이다.
느낌이 틀리지 않다는 듯 두호의 원투가 깔끔하게 태건의 얼굴에 적중했다.
퍽!
퍼어어!
경기를 시작한 이후 처음 나온 유의미한 유효타.
이런 수준의 경기는 언제나 한순간에 무너지기 시작이다.
그건 시작이었다.
점점 큰 공격들이 태건의 몸에 틀어박힌다.
그에 반해 태건의 주먹은 허공을 가르기까지 하며 흔들렸다.
팍!
두호가 태건을 케이지 벽으로 밀어 붙였다.
태건은 두호의 공격을 클린치로 제어하려 했다.
두호의 겨드랑이에 팔을 끼워넣으며 두호의 공격이 잠시 멈추었다.
잠시 숨을 돌리는 두 사람.
그 순간 두호가 한숨을 내쉬었다.
화악!
다시 한 번 세차게 태건을 벽으로 밀어버리고 링 중앙으로 물러 나오는데 방향을 틀었다.
그냥 물러섰다면 자신의 코너쪽이다.
하지만 방향을 틀어 코너에서 9시 방향으로 물러난 것이다.
“백두호 뭐하는 거야?”
“빨리 끝내!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쓰러질 것 같은데?”
관중들이 아우성이다.
태건이 가드를 올리며 다가왔는데 또 한 번 흘긋 한다.
태건이 무엇을 그렇게 보려는 건지 확인하기 위해 일부러 방향을 틀어 물러났다.
뚝!
두호의 시선이 멈춘 곳은 VIP라운지였다.
‘모영배’
두호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지금 태건보다 더 괴로운 사람은 없을 것이다.
태건과 황석희는 그야말로 친구를 넘어 전우(戰友)라고 할 수도 있었다.
피가 튀고 살이 베어지는 수많은 뒷골목 전장을 같이 뒹굴고 살아왔다.
땀이 아닌 피로 맺어진 둘의 삶.
그런 황석희를 죽인 모영배가 떡 하니, 그것도 VIP석을 차지하고 앉아 있으니 눈이 뒤집힐 것이다.
“제대로 안 하십니까?”
태건이 흠칫 하더니 표정이 굳어졌다.
처음 모영배를 발견했을 때는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
경기고 뭐고 때려치우고 달려가 모영배를 찢어죽이고 싶었다.
몇 번을 포기하고 달려갈까 망설였다.
‘어쩌면 내가 그렇게 나오길 유도하기 위해 왔는지도 모른다’
모영배 입장에서는 이 대회를 망치는 것이 수미에게 복수하는 것이다.
황석희까지 죽였는데 여기에 나타나지 못할 것도 없다.
모영배도 막판인 것이다.
참아야 했다.
모영배 작전에 걸려들면 안된다.
이를 깨물고 솟구치는 분노를 짓누르며 1라운드에 집중했다.
하지만 1라운드 종료 직후 모영배는 자신을 보며 히죽 미소 지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철창 안의 갇힌 자신을 비웃기라도 하듯.
결국 태건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교활한 늙은이입니다. 나도 찾아왔습니다.”
태건의 눈이 빛난다.
나도 당신처럼 황석희의 죽음에 분노하지만 화를 내는 건 모영배 계략에 걸리는 것이라고 판단하여 침착하게 경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나도 사실 지금 그다지 마음이 편치 않다.
“경기는 경기입니다.”
태건은 좌우로 위빙을 하며 다가섰다.
“나보다 먼저 당신의 재능을 알아본 황 부사장님을 위해 집중하십시오.”
자신의 목숨까지 걸어가며 태건의 재능을 마음껏 펼칠 무대를 만들어주었다.
그런데 한 순간의 감정을 자제하지 못해 경기를 망쳐버린다는 것은 그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이다.
태건은 자신의 뺨을 한 대 툭 쳤다.
좌우로 힘껏 흔들며 정신을 집중하려 노력한다.
정중하게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
싸움은 재개 되었다.
슈슉!
태건의 잽이 살아있다.
두호는 피하면서 만족스런 표정을 했다.
분노로 이성을 상실하고 있는 상대를 이기고 싶은 마음은 없다.
스포츠에서 이기는 것이 최우선 과제이지만 전력을 다한 상대였을 때 그 가치는 더욱 빛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잡념도 태건을 방해해서는 안된다.
촤아아!
동시에 서로를 향해 달려든다.
칫!
태건의 펀치가 두호의 이마를 스치듯 지나갔다.
두호는 몸을 틀며 어퍼컷을 날리지만 태건 역시 고개를 틀어 피해냈는데 조금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만큼 두 사람은 속도있는 난타전을 보였다.
각자의 머리카락이 들릴만큼 빠르고 강한 펀치들을 쏟아냈다.
콱!
두호가 태건의 뒷목을 잡은 채 팔꿈치를 날렸다.
태건은 곧바로 고개를 숙여 두호의 하단을 부여잡고 밀어붙였다.
경기 중 처음으로 선보이는 태건의 그래플링.
두호가 뒤로 넘어질 듯 기우뚱 거리더니 자연스럽게 누워 버린다.
바닥에 등이 붙는 순간 두호의 눈이 반짝였는데 넘어지며 태건의 다리 사이로 자신의 두 발을 끼워넣은 것이다.
파팍!
이윽고 관성을 이용하여 바닥을 차올리듯 몸을 뒤집는다.
한 바퀴를 굴러 두호가 태건의 탑을 점유한 상태가 되었다.
스포츠신문 일 면을 장식할만한 그림같은 스윕이었다.
그렇다고 태건이 가만 있진 않는다.
완전한 포지션을 잡지 못한 두호의 앞가슴을 뻥하니 차버려 공간을 만들었다.
순식간에 스탠딩 자세로 돌아간 두 사람.
잠깐이지만 엄청난 공방에 사람들은 환호하며 열광했다.
와아아!
“그렇지. 이제 좀 볼만하네.”
두 사람의 펀치가 서로에게 교차되어 적중했다.
경쾌한 크로스 카운터.
관객들의 함성을 뚫고도 들려나오는 엄청난 파열음.
-타앙
-파악.
서로가 몇 걸음씩 물러날 정도의 힘이 실린 듯 주먹이었다.
씨익!
처음으로 태건이 웃는다.
그건 모영배를 떨쳐 냈다는 뜻이다.
‘거리감이 잡혔다.’
태건은 망설이지 않는다.
두호 또한 감각이 몸 안에 들어왔다.
서로에게 쇄도한다.
피하고 막아내는 싸움이 아닌 정타교환이 쉼 없이 일어난다.
태건의 주먹이 두호의 뺨에 적중했다.
고개가 돌아갔어도 두호의 킥은 태건의 옆구리에 정확히 닿았다.
서로의 얼굴과 몸에는 상처가 늘어났으며 어느새 태건과 두호의 얼굴은 피로 빨갛게 물들었다.
모영배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느긋해 보이던 자세까지 힘이 들어가 있는 것이 뭔가 심기가 불편한 모양이었다.
백두호는 만나고 5분도 지나지 않아 뺀치를 맞았다.
최소한 자신을 향해 욕이라도 퍼부을 줄 알았는데 팬이라고 약을 올리자 오히려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며 돌아섰다.
그리고 지금 조태건도 놓쳤다.
그를 자극하기 위해 거액을 들여 VIP자리를 차지했다.
케이지에서 가장 잘보이고, 태건의 감각 정도면 자신을 몇 번이고 발견할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다.
그리고 성공했다.
태건이 자신을 발견하면서 온 몸의 털이 일어나는 걸 보았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저 놈이다’
두호가 필시 뭔가 얘기를 해주어 태건을 가라앉혔을 것이다.
‘백두호’
경기중인 케이지를 노려보는 모영배 눈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살기다.
갑자기 백두호가 태산처럼 느껴진다.
어린놈이지만 감정 컨트롤이 산전수전 겪은 자신을 훌쩍 넘어선다.
“으음!”
죽이고 싶어졌다.
백두호를 죽이는 것이 수미를 무너뜨리는데 더 빠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지칠 줄 모르는 난투중 2라운드의 끝을 알리는 종이 울려왔다.
때앵!
두 사람은 엉켜 있는 자세를 풀었다.
하지만 1라운드 끝났을 때와 달리 이마를 맞대고 노려본다.
지금 이 순간 만큼은 둘 모두 승부사였고 챔피언이 되기 위한 격투기 선수일 뿐이었다.
피칠갑을 한 얼굴을 맞대고 노려보자 관중들은 더욱 흥분했고 관계자들까지 만족한 표정이다.
준결승 다운 살벌한 경기다.
심판이 달려들어 두 사람을 갈라놓자 그제야 코너로 돌아가는 두 사람이었다.
뚝뚝!
핏방울이 떨어진다.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려는 주민을 준모가 막는다.
“왜요?”
“닦지 마세요.”
“준모씨!”
“피를 본 맹수가 무섭죠.”
그 한마디로 왜 얼굴을 닦지 못하게 하는지 준모의 속내가 드러났다.
‘준모씨도’
평소의 가볍고 즐거운 모습이 없다.
그 역시 같이 경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땡!
휴식시간이 끝나는 종소리가 울린다.
홀린 듯이 일어나는 두 사람.
세컨들이 모두 빠져나가고 서로에게 다시 다가간다.
태건은 깨끗한 반면 두호의 면상이 붉은 페인트를 칠해 놓은 것 같다.
-때앵
공이 울렸고 두 사람은 달려들었다.
채호는 1라운드가 시작되기 직전 진행요원이 가져다준 음료수를 단숨에 비웠다.
2라운드 초반까지 불편했다.
그런 식의 경기면 이 대회의 꽃을 제대로 피울 수 없다.
하지만 이제야 자신이 원하는 PRIDE-K 경기답다.
쿠우우!
태건이 카운터 펀치를 날렸다.
두호가 고개를 숙이며 피하면서 오버핸드 훅으로 받아쳤다.
뻐억!
휘청거리는 태건을 향해 두호의 주먹이 다시 뻗어간다.
발끝에서 허벅지로.
허벅지에서 허리.
허리에서 어깨를 넘어 팔로 넘어오는 가장 완벽한 중심과 속도.
세 가지의 동작이 하나로 완벽함을 이룬다.
스피드, 각도, 자세
콰악!
태건의 턱이 돌아간다.
최선을 다해 일어서려 하지만 이내 털썩 쓰러진다.
두호가 덮치려 하자 심판이 가로막으며 손을 저었다.
게임아웃.
‘백두호 선수의 믿을 수 없는 TKO 승리 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