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4화 : 당장 내게 싸움을 걸어라.
“감사합니다!”
두호는 정말 팬들을 대하듯 깍듯하게 머리를 숙였다.
흐트러짐 없는 인사에 모영배의 눈이 가늘어졌다.
자신이 누군지 모르지 않는다.
황석희가 누구의 손에 죽었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
수미의 스폰을 받는 사람이라면 곧장 달려들어 자신을 치고 때리면서 죽이려고 해야 한다.
“두호씨!”
부르는 소리에 두호는 고개를 돌렸다.
진행팀 직원이 자신의 손목시계를 가르키며 시간이 다 되었음을 알렸다.
“경기 시간이 되어 그만 가봐야겠습니다.”
가볍게 목례를 한 뒤 돌아섰다.
진행요원은 두호와 나란히 복도를 걸어갔다.
“아는 분입니까?”
“예, 아주 잘 알죠.”
멈칫!
진행요원의 눈이 빛난다.
잘 안다는 말투가 이상하다.
말이라기보다는 금방이라도 상대를 벨 것 같은 날이 곤두 선 칼이다.
진행요원은 의아한 눈빛으로 말없이 걸어갔다.
“회장님!”
조상무가 멀리서 다가왔다.
엘리베이터 앞에 멈추자 달려온 조상무가 한 발 먼저 버튼을 누른다.
모영배는 불이 들어오는 엘리베이터 층 번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었다.
쨍!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고 조상무는 흘긋 거리며 모영배 눈치를 살핀다.
호랑이 굴속이다.
어디서 호랑이가 튀어나와 공격할지 모르는데 말도 없이 혼자 다닌 것에 대한 불안과 불만이다.
“헛헛!”
갑자기 모영배가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지금 누굴 만나고 오는지 아는가?”
이곳에 모영배를 죽이려는 사람은 지천이지만 아는 사람은 없다.
“그 친구를 만났어. 백두호.”
흠칫!
백두호라는 말에 조상무 눈이 흔들렸다.
평범한 이름이 아니다.
황석희도 거물이지만 백두호 역시 작은 그릇이 아니다.
“자기 팬이라고 했지.”
“뭐라고 하던가요?”
“감사하다고 했네. 그것도 아주 정중하게 말이야.”
조상무의 눈이 커졌다.
“정말입니까?”
“행복한 여자야.”
모영배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 * *
“백두호 선수 입장하겠습니다.”
진행팀이 거친 목소리로 두호의 입장 사인을 주었다.
카메라의 불이 켜지고 복도를 걸어간다.
세컨인 주민과 준모가 좌우로 따르는데 숨길 수 없는 긴장의 얼굴들이다.
아직 체육관 문을 열고 들어서지도 않았는데 관중석의 함성과 장내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코너를 돌아가자 불과 10m 앞으로 체육관 문이 있다.
저 문은 누구든 들어갈 수 있다.
문제는 나올 때의 모습이다.
과연 오늘 어떤 모습으로 자신은 저 문을 걸어 나올까.
벌컹!
주민과 준모가 동시에 문을 열어 젖혔고 두호가 들어선다.
강력한 라이트가 두호를 감쌌고 관중들의 함성이 체육관 천장을 뚫고 나갈 듯 했다.
‘정말 오래 기다렸습니다. 코리안 몬스터. 한국 격투기의 미래! 백두호 선수입니다’
와아아아!
귀가 멍멍해졌다.
함성에 마이크로 들리는 장내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갈기갈기 찢겨지고 있었다.
‘백두호 선수의 격투기는 극복을 담고 있습니다! 가난과 부조리함. 핍박과 부침 속에서 그는 결국 끝까지 주먹 하나만을 바라보며 4강전에 진출했습니다’
두호는 글러브를 낀 양팔을 들어올리며 각오를 다졌다.
관객들은 그런 모습에 더욱 흥분했다.
“두호형! 알지? 나 진짜 형 덕분에 용기낸다!”
“보여줘! 코리안 몬스터!”
살면서 한두 번 쓰러져 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랴.
쓰러졌기에, 실패가 너무 컸기에 그들에게 두호는 더욱 희망이고 의지의 길잡이일 것이다.
두호의 머리 위로 파랑색 비닐 봉투가 흩날린다.
준모는 날아 앉는 비닐봉지를 잡고 환하게 웃는다.
‘소복상회.’
두호의 부모님이 건어물 가게를 한다는 것을 안 팬들이 ‘소복상회’글씨가 새겨진 비닐봉지를 제작해 뿌린 것이다.
“아 진짜 이게 뭐야!”
준모가 투덜거렸다.
별것 아닌데 가슴이 울컥 한 것이다.
심판에게 최종 점검을 마친 두호는 천천히 케이지 안으로 들어갔다.
케이지 철망을 잡고 눈을 감는다.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다.
소복상회 이름이 새겨진 비닐 봉지 때문이다.
이제 익숙해질 때도 되었는데 왜 이렇게 부모님을 생각하면 마음이 착잡해 지는건가.
후우!
두호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얼음이 단단한 건 차갑기 때문이다.
단단해지기 위해서는 냉정하고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눈을 뜬 두호가 돌아섰다.
채호가 팔짱을 끼고서 바라보았다.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있었다.
결국 여기까지 왔다.
물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아직 하나의 단계가 더 남아 있긴 하지만 아직까지는 완전무결했다.
필린에서 어떤 이득이나 편리함을 제공하지 않았고 승패에 영향을 끼치는 주문이나 이른바 불순한 작업 따위도 없었다.
두호 혼자서 여기까지 올라온 것이다.
‘역시 뭐가 달라도 달라.’
뜨거워진 가슴을 식히기 위해 길게 숨을 내쉬며 주위를 둘러본다.
환호하는 관중들을 바라보던 채호의 눈이 멈칫했다.
‘모영배!’
흰색의 두루마기를 걸친 모영배가 VIP라운지 한가운데 앉아 있었다.
틀림없는 모영배다.
VIP 라운지는 몇백만 원을 호가하는 가격이 형성되어있다.
꿀꺽!
놀라움보다는 당황스럽다.
적도 아니고 적장이다.
적장이 아군기지 CP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나무는 숲에 숨기고 사람은 인파속에 숨기라는 말이 있다.
오히려 조용한 곳은 티가 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지 않을 수 없는 최고의 좌석에 떡하니 앉아 있다.
‘뭐 하자는 거지.’
적어도 염탐은 아니라는 말.
더군다나 수행원 한 명 없이 앉아있다.
채호는 직원 한 명을 불렀다.
“VIP라운지 촬영하지 말라고 전해주세요.”
직원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채호는 다시 팔짱을 끼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케이지가 아닌 VIP라운지에 고정되어 있었다.
* * *
태건이 입장하고 있었다.
태건의 팬들 역시 대단한 열정을 보여 주었다.
“백두호 저거 다 이름 빨이야!”
“우리 돌부처님 화나면 얼마나 무서운지 보여줘라!”
태건은 여전히 무덤덤하다.
응원하는 팬들 쪽으로 시선 한번 주지 않는데도 팬들은 그저 좋고 즐거워 한다.
태건의 시선이 두호를 바라본다.
두호는 아무 말도 없고, 어떤 행동도 하지 않으며 그저 묵묵히 서 있다.
길바닥 싸움판에서 져 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목숨을 걸고 싸운다.
오늘도 그렇게 싸울 것이다.
경기라기보다는 싸움으로 반드시 이겨보고 싶은 백두호였다.
심판 앞에 도착한 태건 역시 최종 점검을 마치고 케이지 안으로 입장했다.
와아아!
조태건, 조태건!
관중들의 함성이 메아리가 되어 체육관을 울린다.
심판이 두 사람을 케이지 중앙으로 불러 모은다.
룰 설명이 시작되었다.
두 사람은 알았다는 듯 고개만 약간씩 끄덕일 뿐이었다.
룰 설명을 끝낸 심판은 두 사람에게 코너로 돌아갈 것을 명했다.
두호는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렸지만 태건은 움찔하며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레디?”
두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레디?”
태건은 그제서야 시선을 거두었다.
“오케이. 파이트!”
심판의 손이 거침없이 내려갔고 이내 종이 울렸다.
-때앵.
두 사람은 케이지 중앙으로 걸어들어간 뒤 손을 뻗어 글러브 터치를 했다.
턱!
둘 모두 타격의 달인들답게 거리를 유지한 채 한쪽으로 돌기 시작했다.
내 거리를 만들려는 것이다.
그런데 조용했다.
조금전까지 떠들던 관중들 모두가 입을 다문다.
누군가 실질적인 결승전이라고 봐도 된다고 말한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만큼 조용해져 버린 체육관 모습에 모영배는 침을 삼켰다.
꿀꺽!
모영배 눈이 조금씩 타오른다.
그건 욕망이었다.
보물을 얻고 싶어하는 강한 소유욕이다.
“음!”
무거운 신음을 흘린다.
또 한번 무언가 갖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다.
저 케이지 안에 맞서 있는 두 사내를 얻을 수만 있다면 자신이 최고가 되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 갑자기 인상을 썼다.
저 둘을 모두 가까이 두고 있는 수미에 대한 질투와 살의가 샘솟는다.
콱!
자신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적을 죽이면 그가 가진 모든 것은 내 소유가 된다.
죽여야 한다.
두 사람의 팔은 올라가고 자세가 잡아졌다.
두 사람의 스텝은 어느 선수와 비교해도 차이가 두드러질 만큼 가볍고 움직임에 리듬이 있었다.
심판의 눈이 빛난다.
많은 경기를 치러왔지만 이렇게 차분한 경기는 처음이다.
모든 선수들은 힘과 박력을 내 뿜어 상대를 제압하려 든다.
하지만 그건 하수의 행동이다.
진짜 고수들은 지금 이들처럼 서둘지 않고 굳이 억지로 자신을 드러내려 들지 않는다.
삭!
처억!
다가서면 그만큼 물러나고, 돌면 돈 만큼 같이 돌아준다.
스으으!
태건이 앞으로 나아갔다.
슉!
오늘 경기 첫 주먹이다.
태건의 왼손 잽이 가볍게 날아갔다.
탁!
두호 역시 자신의 왼손으로 태건의 잽을 패링해 냈다.
순간 태건의 앞 발이 움직인다.
휙!
두호의 허벅지를 노리고 들어가는 인사이드 로우킥(inside lowkick. 일반적으로 허벅지 바깥쪽을 노리고 차는 킥이 아닌. 허벅지 안쪽을 노리는 로우킥)이 날아 들었다.
잽으로 상대의 시선을 돌린 뒤 하체를 노린 것이다.
그러나 두호 역시 재빠르게 자신의 다리를 튕기듯이 들어 로우킥을 막아내었다.
그리고 곧바로 들어간 두호는 원투을 날렸다.
슉!
슉!
오른손을 얼굴 앞에 둔체 상체를 깊게 뒤로 젖혀 원투를 피해내는 태건이다.
슈슛!
팍!
갈수록 주먹과 발길질이 빨라지지만 아직 누구도 상대를 정확히 가격하지 못한다.
빠르고 또 빠르다.
* * *
케이지 밖에서 지켜보던 채수가 미소지었다.
두 사람 모두 탁월한 타격 센스로 상대를 적중시키는 스타일이다.
하지만 서로가 절대 거리를 허용하지 않고 공격이 들어오면 거기에 어떤 함정이 들어 있는지 간파해 버린다.
스파링이 아닌 실전에서 이런 상대를 만난 것은 둘 모두 힘든 일이다.
절대 아무것도 주지 않고서는 이길 수 없는 상대들이다.
이기려면 버금가는 아픔을 건네주어야 한다.
화악!
둘 모두 벼락처럼 파고들었다.
인파이팅이다.
그런데 어깨가 붙을 만큼 가까이 다가섰지만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내가 때릴 수는 있다.
그러나 때린 만큼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절묘한 상황이 되자 둘 모두 주춤 한 것이다.
부우!
두호가 주먹을 날린다.
왼쪽 바디와 오른손 숏 어퍼컷.
그러나 태건은 두호의 공격을 피하며 라이트 훅을 크게 감아 넣는다.
이어 깊게 찔러들어가는 왼손 스트레이트.
츄육!
두호의 눈은 차분했다.
고개를 숙여 태건의 훅을 피한다음 왼손으로 후속공격인 잽을 커트 해냈다.
따악!
효과적인 공격은 없지만 조금씩 거칠고 빨라지면서 케이지 안에 둘의 숨소리가 가빠진다.
관객들은 숨 소리조차 내뱉지 못하고 둘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과연 한국에서 이런 싸움을 본 적이 있었을까.
끊임없이 서로를 향해 지독한 허수를 던진다.
하나라도 물까.
단 한 순간이라도 방심을 하는 순간이 올까.
승리의 굶주린 맹수라면 물지 않고는 못배길 지독한 미끼를 던진다.
실패를 염두에 두지 않는 공격들.
어차피 한두 번의 낚시질로 대어를 낚을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손끝의 닿는 미세한 챔질.
그것이 두 사람을 더욱 애타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