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쟁의 신이 케이지 안으로-93화 (93/204)

제 93 화 : 당장 내게 싸움을 걸어라.

일준이 달려든다.

아까와는 달리 아웃파이팅이 아니라 인파이팅을 선택한 듯 곧장 파고들었다.

구열은 숨을 크게 내쉬었다.

어차피 이제 흐름은 자신에게로 넘어왔다.

‘굳히기다.’

일준도 밀고 들어왔고 구열도 피하지 않는다.

서로가 피하지 않으면 정면충돌 말고는 길이 없다.

붕!

푸부부!

구열은 처음보다 더욱 단단하게 턱을 붙이고 펀치를 날렸다.

교과서같이 던지는 뒷손.

일준의 뺨에 정확히 꽂혔다.

-쾅

구열의 주먹을 맞은 일준의 얼굴은 여전히 덤덤하다.

아파하거나 힘들어하는 기색 없이 일준은 더욱 치고 들어온다.

-쾅

일준의 펀치 역시 묵직하게 구열의 뺨에 꽂힌다.

잠시 뒤로 물러난 두 사람.

그러나 일준의 반응이 조금 더 빨랐다.

재차 펀치를 날렸고 구열 역시 신속하게 응수했다.

빠악!

퍽!

무자비한 난타전이 이어진다.

일준의 눈가에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구열 역시 이마에 상처가 나 피가 떨어진다.

두 사람의 펀치공방에 바닥은 피와 땀으로 얼룩졌다.

때앵!

곧 2라운드가 끝나는 종이 울렸고 심판은 두 사람을 제지했다.

첫 라운드처럼 두 사람에게 각자의 코너로 돌아갈 것을 명했다.

그러나 일준은 망설임없이 몸을 돌렸지만 구열은 한참을 서 있었다.

잠시 일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그는 고개를 갸우뚱 하며 코너로 돌아갔다.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피가 얼굴을 덮는다.

구열은 꼼짝 않고 맞은편 일준을 바라보았는데 뭔가 이해가 안된다는 얼굴이었다.

준모는 경기 내용의 감탄한 듯 박수를 쳐댔다.

“와 구열씨! 진짜 대박이네요.”

경기의 질은 최상위권이었다.

더군다나 우승후보라고 꼽히는 일준을 상대로 이 정도의 경기력이라면 그동안 구열의 저평가된 대중의 시선은 바뀌어야 할 것이었다.

“형님. 진짜 이러다가 구열씨가 이길 수도 있겠는데요?”

준모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나 두호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더 희박해졌다.”

“네?”

“아직까지 따라가잖아.”

확실히 구열의 전략은 유효했다.

KO는 아니었어도 분명히 일준은 몇 번 위기에 몰렸다.

바디 트라이앵글은 보통 라운드 하나를 통째로 가져갈 만큼 위협적인 포지션이지만 일준의 다리가 풀린 것으로 증명할 수 있다.

그러나 스탠딩 선언 후 짧은 휴식시간.

그 이후에 인파이팅 흐름은 일준이 끌고 갔다.

체력이 회복되었음과 동시에 구열의 기본적인 전략까지 간파했다는 뜻이다.

확실했던 1라운드의 양상과는 달리 2라운드는 구열이 내준 상황이 되었다.

주먹은 많이 뻗었지만 일준이 훨씬 정확히 때려 박았다.

“음!”

일준의 광기가 언제 나올까.

약의 위력이 지금도 나오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두호는 염려스런 시선으로 구열을 보았다.

탁현은 수건으로 구열의 피를 닦아주었다.

그러나 그의 입가엔 밝은 미소가 걸려있었다.

“너무 훌륭했습니다. 구열 선수.”

탁현의 말에 대답하지 않은 구열.

거친 숨을 내쉬며 회복에 집중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어딘가 복잡해 보였다.

물 한 모금을 입만 적실정도로 마신 그가 탁현에게 말했다.

“이상하네요.”

탁현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어보았다.

“뭐가 말입니까?”

구열의 눈이 좁혀지며 반대편 코너의 일준을 바라보았다.

표정은 다운되어 있지만 주먹을 섞어본 자신은 알 수 있었다.

“리듬이 다 살아났어요. 회복시간도 없었는데 인파이팅 할 체력까지 와있고.”

“그건...”

탁현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 역시 의문인 부분이었다.

KO급의 펀치를 맞고 나면 체력은 몰라도 반사신경은 죽기 마련이다.

하지만 구열의 인파이팅에서 우위를 점할 정도로 반사신경이 살아있다는 것은 듣도보도 못했다.

털어내자.

이 생각에 더 이상 사로잡혀 있어봤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승리에만 집중하더라도 부족한 시간이다.

“일단은 2라운드는 분명히 챙겨왔습니다. 3라운드는 구열씨 장기로 녹여봅시다.”

구열은 힘차게 대답했다.

“네!”

3라운드 시작 10초전을 알리는 벨이 울렸다.

탁현은 구열의 어깨를 두드리며 케이지를 빠져나갔다.

구열은 다시 한번 각오를 다졌다.

‘다 왔다.’

일준이 어슬렁 거리며 걸어나온다.

피곤한 것인지, 아니면 아직 힘이 펄펄 나는지, 어떤 작전을 노리고 있는 것인지 걸음걸이와 얼굴을 봐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구열은 그 모습에서 어딘가 꺼림직함을 느꼈다.

“라운드 3. 파이트!”

때앵!

구열은 웅크린다.

‘무엇이 막든 견디고 나아가는 것 그게 내 복싱이다.’

순식간에 일준을 향해 달려들었다.

-빠악.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리며 한 사내가 쓰러졌다.

일준이 맞았을거라는 예상과 달리 쓰러진 사람은 구열이었다.

“으악!”

관객들은 갑작스럽게 일어난 상황에 어리둥절한 표정이었고 파악을 하지 못했다.

“뭐야?”

“구열이 왜 갑자기 쓰러져.”

심판 역시 놀란 표정으로 구열에게 달려들었다.

“괜찮으세요?”

심판이 그의 몸을 살피자 왼 다리에서 이상을 느꼈다.

구열의 무릎과 고관절이 빠진 듯 다리의 모양이 틀어졌다.

“의료진!”

케이지의 문이 열리며 의료진과 탁현이 뛰어 들어왔다.

구열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다리를 감싸쥐고 있었다.

지독한 승부근성의 구열이 눈이 시뻘개질 만큼 힘들어한다는 건 너무나 이례적이었다.

의료진은 조심스럽게 들것에 구열을 싣고 케이지 안을 빠져나갔다.

의료진이 빠져나가자마자 탁현이 일준의 앞에 마주섰다.

보기드문 탁현의 흥분한 표정이었다.

“이 개새끼가 이게 뭐하는 짓이야?”

그러자 일준의 코치가 그 둘 사이를 끼어들었다.

여유로운 표정으로 탁현을 쳐다보았다.

“지금 남의 선수한테 뭐하는 짓이세요?”

코치를 데리고 참석한 선수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필린이 지원한다.

일준의 코피는 필린 직원이 아닌 것이다.

탁현은 여전히 격양되어 있었다.

“저 새끼 하는 짓 못봤어?”

그러자 케이지 위쪽에 설치된 전광판에 방금전 상황이 재생되었다.

달려드는 구열.

일준은 오른발을 들어 발로 구열의 디딤발 무릎 위를 차버린 것이다.

오블리크킥(Oblique Kick. 대각선으로 자세를 잡아 발바닥으로 상대의 무릎을 타격하는 발차기).

느린 화면으로 오블리크킥을 맞은 구열의 무릎과 고관절이 빠지는 영상이 재생되었다.

사람들은 탄식을 내지르며 안타까워 했다.

몇몇 격투단체에선 반칙으로 지정되어있으며 프로 시합에서도 지양하는 추세이다.

PRIDE-K가 아무리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격투기 대회이지만 엄연한 아마추어 대회이다.

분명 일준의 행동은 잔인한 것이었다.

채호 역시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케이지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하지만 표정은 그다지 어둡지 않았다.

그건 일준이 보여준 플레이가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채호와 심판 그리고 양측의 코치진이 모여 의논을 할 때 일준이 버럭 소릴 질렀다.

“씨바, 방송화면 돌려봐. 심판이 뭐라그랬는지.”

심판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버팅 로블로 써밍 그리고 사점 니킥 금지라고 하지 않았냐고, 했어 안했어?”

심판을 향한 일준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정일준 선수.”

탁현은 인상을 썼다.

“뭐? 내가 틀린 말 한다고?”

일준의 얘기는 최초 심판이 반칙사항을 얘기해주었고 그 세부 사항에 오블리크 킥은 없었다는 것이다.

금지하는 플레이는 분명하게 말해줘야 하는데 듣지 못했다.

그러니 자신이 찬 킥은 엄연한 하나의 기술로 봐야한다는 것이다.

심판이 지양해달라는 건 금지가 아닌 자제의 뜻에 더 부합하다는 것이다.

일준의 말이 틀린 건 없다.

하지만 심판의 입에서 나왔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모든 스포츠에서 심판의 입에서 어떤 말이 흘러나오면 단호하지 않더라도 해서는 안되는 금기다.

하지만 일준의 말을 거꾸로 뒤집어 보면 못찰 것도 없는 것 아니냐.

그래서 노리고 찬 것이다는 뜻으로 노골적인 반칙 의도를 드러낸 것이다.

채호의 표정은 굳어졌다.

채호는 심판을 불러 둘만이 이야기를 나눈다.

심판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채호는 자리에서 빠져나갔다.

심판이 진행팀에게 마이크를 건네 받았다.

“부상 상황과 경기 판정 안내드리겠습니다.”

일순간 경기장은 정적에 휩싸였다.

“정일준 선수의 발차기로 인하여 최구열 선수는 무릎과 고관절에 탈구 현상이 생겨 경기가 중단되었습니다.”

심판을 진행팀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PRIDE-K 규정과 인케이지룰에서 오블리킥의 관한 어떠한 조항도 없으므로 최구열 선수의 TKO. 정일준 선수의 승리로 판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관객들은 들끓기 시작했다.

“에라이 개새끼들아.”

“필린이고 좆이고 불질러 버려야돼. 그런 판정이 어딨어.”

“더러워서 간다. 퉤퉤 씨밸럼들아!”

구열의 팬들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빠져나갔고 일부는 온갖 기물들을 부수며 집어 던졌다.

준모는 입을 떠억하니 벌렸다.

주민도 안타까운 듯 고개를 저었다.

“준모야 꺼라.”

두호가 자리에 일어나며 말했다.

준모는 모니터의 화면을 종료했고 두호는 잠시 팔짱을 끼더니 살며시 눈을 감았다.

꼭 약 때문은 아니다.

정일준은 타고난 심성 자체가 악랄하다.

수백 명이 참가한 이번 대회에서 오블리킥을 시전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선수들 스스로가 위험성을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스포츠 맨십에 한참 벗어난 반칙행위라는 걸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일준은 저질러 놓고도 태연하다.

오히려 내가 뭘 잘못했느냐고 포악하게 따지고 든다.

‘구제불능’

두호는 어금니를 물었다.

구열의 경과가 기다려지면서 제발 별일 없기를 마음속으로 기원했다.

그러면서 일준에 대한 분노는 더욱 높아져 갔다.

똑똑!

대기실의 문을 누군가 두드렸다.

“진행 팀 박서영입니다!”

주민이 문을 열어주자 진행팀 요원이 걸어들어왔다.

“지금 장내 정리를 위해 5분정도 딜레이 되었습니다.”

다음 경기가 지연될 것이므로 그렇게 알라는 통지다.

주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주민은 문을 닫고 돌아서서 두호를 본다.

두호는 대기실 한쪽으로 난 창문을 통해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할까.

경기전 멘탈 관리는 굉장히 중요하다.

즉, 다른 일에 정신이 분산되어서는 안된다.

물론 구열을 향한 두호의 각별한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지금은 오직 태건과의 경기에만 신경을 쏟아야 하는 것이다.

“너무 걱정 마세요.”

두호는 주민을 향해 빙긋 웃어 보이곤 밖으로 나갔다.

수도꼭지에서 세찬 물줄기가 쏟아졌다.

두호는 차가운 물로 흥건히 세수를 하고 거울을 바라본다.

물에 젖은 얼굴이 오늘따라 약간 창백해 보인다.

어디 아픈 곳은 없다.

마음이 아픈 탓이다.

퍼퍼퍽!

다시 한 번 소리를 내며 얼굴을 씻고 핸드타월을 뽑아 얼굴을 닦아냈다.

구열의 사건은 안타깝고 화가 나지만 휘말려서는 안된다.

툭!

휴지를 버리고 화장실을 걸어나온다.

“백두호 선수.”

처음 듣는 목소리에 두호가 고개를 돌렸다.

두호의 인상을 찌푸렸다.

인상을 찌푸린 채 한참을 보더니 대번에 눈이 확 커졌다.

몇 번을 확인해도 그 사람이다.

모영배였다.

수미와 피의 충돌을 하고 있는 그가 적진 한가운데라 할 수 있는 곳에 나타났다.

여긴 그에게 사지(死地)라고 할 수 있다.

이번 대회를 짓밟으려는 그를 채호가 좋게 볼 리가 없다.

‘용병시절 같으면 딱 한 방에 보내는 건데’

모영배의 훼방에 분노를 참지 못한 채호의 말이었다.

모영배가 다가온다.

발목 근처까지 내려오는 흰색의 긴 두루마기에 바지 끝단을 대님으로 단정하게 묶었다.

비록 구두를 신고 갓을 쓰지는 않았지만 차림새에서는 단아하고 조금은 고고한 기품이 흐른다.

그야말로 딱 선비다.

“모로해피캐피탈 모영배라고 합니다.”

두호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별로 놀라지 않는군요?”

“날 만나러 오셨습니까?”

길게 말 섞고 싶지 않으니 찾아온 용건만 말하란 투다.

“얼마 전에 큰 별 하나가 졌어요. 내가 생각해도 무척 안타까운 일이죠.”

황석희를 말하는 것이다.

두호는 무덤덤했다.

감정이 상한다고 얼굴에 표정을 드러내는 아마추어는 이제 아니다.

“어때요? 오늘 경기?”

두호의 눈이 좁혀진다.

대답을 들을 생각 없다는 듯 모영배의 말이 이어졌다.

“파이팅해요. 난 두호씨 팬입니다.”

두호의 안색이 변했다.

팬(fan)!

운동 경기나 선수 또는 연예인을 열광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을 말한다.

지금 모영배는 자신의 팬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두호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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