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쟁의 신이 케이지 안으로-92화 (92/204)

제 92 화 : 당장 내게 싸움을 걸어라.

주먹이 흐릿해지는 순간 일준에게 주먹이 날아가고 있었다.

슉!

튼튼한 다리에서 나오는 주먹의 속도는 일반인이 감히 눈으로 쫓기에도 힘들었다.

하지만 일준은 부드럽고 빠른 더킹으로 구열의 주먹을 벗겨내며 간간히 힘이 실린 주먹을 집어 넣었다.

탁!

타탁!

웬만한 주먹은 겁을 내지 않는 구열이다.

맞으면서도 자기 페이스대로 다가오고 주먹을 뻗고 틈을 노린다.

보고 있던 두호가 미소를 지었다.

구열의 재능은 단순히 맷집과 운동능력이 아니다.

학습능력.

반복적으로 허용하는 펀치를 본능적으로 학습해 피해를 줄이는 것이다.

바디에 꽂히는 펀치도 허리를 틀어 조금씩 충격을 완화한다.

얼굴로 향하는 공격은 이마로 받아내며 조금씩 일준의 속도를 따라잡고 있었다.

철퍼덕!

구열은 결국 일준을 케이지로 몰아넣는 것에 성공했다.

서로를 감싸안은 채 클린치 상황이 시작되었다.

“어이 샌드백, 괜찮냐?”

일준이 자신의 주먹을 맞고도 잘 버티는 구열을 자극했다.

“졸라, 밥도 못먹고 사나.”

무슨 주먹이 그렇게 힘이 없느냐는 구열의 비아냥이 이어졌다.

팍!

일준이 팔이 구열의 가슴팍에 얹혀졌고 케이지의 반동을 이용하며 구열을 밀어냈다.

일준의 센스가 일견 엿보이는 동작이다.

동시에 서로를 향해 주먹이 뻗어간다.

-콰앙

-꽈앙

서로의 주먹이 상태의 턱을 찍었다.

그러나 쓰러지는 선수는 없다.

퍽!

퍼펑!

갑자기 치고 받는다.

잡거나 피하는 것이 없는 그야말로 이판사판 같이 죽자는 듯 공격일변도의 난타전이다

- 맹수들의 싸움인가요? 어느 쪽도 피하거나 후퇴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듯 보입니다.

해설위원도 흥분한 듯 큰 목소리로 외쳤다.

서로의 앞무릎이 닿아있다.

어지간한 펀치는 다 견뎌버리겠다는 듯 상대를 향한 공격외에는 그 어떤 것도 신경쓰지 않았다.

얼굴을 맞았으면 다리로 갚는다.

복부를 맞았으면 얼굴로 갚는다.

상대를 눕히는 것에만 열중인 듯 두 사람의 시선은 흔들림이 없다.

눈은 상대의 몸상태를 읽을 수 있는 창문이다.

초점은 얼마나 체력적으로 변화가 있는지는 보여주는 틀림없는 증거였다.

빡!

빠바바!

주먹은 여전히 빗발쳤고 둘은 눈빛은 마른장작 불처럼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죽여라!”

“그랗지, 물러서는 놈이 지는 거야.”

관중들이 흥분해 소리쳤다.

때애앵!

그 순간 1라운드가 끝났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왔다.

심판이 두 사람 사이를 재빠르게 뛰어들어 코너로 돌아갈 것을 명했다.

둘 모두 아쉬운 얼굴로 돌아선다.

멈칫!

두호와 같이 경기를 보고 있던 주민이 약간 놀란 표정을 했다.

두호의 표정이 살짝 굳어있었기 때문이다.

“구열씨 잘 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두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구열씨는 정말 상상 이상으로 잘해내고 있죠.”

그래플링에 강점을 보이는 일준이 구열을 상대로 스트라이킹(타격) 싸움을 하게 했다는 것만으로도 구열의 작전은 성공한 것이다.

구열은 맷집으로 견뎌내 버리면서 일준의 파워를 도발한 것이다.

그리고 경기 막판 숨 가쁜 난타전은 구열이 이끌어 낸 작전의 백미였다.

하지만 두호의 표정이 밝지 못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대로 판정까지 간다면 아마 유효타가 많은 일준의 승리로 끝날 것입니다.”

“그렇죠.”

준모는 굉장히 놀란 눈치였다.

“어? 내가 보기엔 구열씨가 더 때린것 같던데?”

준모가 보기에는 절대 구열이 뒤지지 않았고 어떤 장면에서는 우위를 보이기까지 했다.

준모가 좀 더 설명을 해달라는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두호는 어금니를 물었다.

맞다.

누가봐도 엇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복서로 단련된 두호의 눈은 매와 같다.

일준이 뻗어내는 주먹은 구열보다 적었지만 정확도가 앞선다.

또한 훨씬 강력한 주먹이었다.

한 방 한 방이 뼈를 부술 듯 틀어 박혔다.

단지 구열의 맷집이 버텨낸 것이다.

주먹만 많이 낸다고 하여 점수를 우월하게 주지 않는다.

구열의 세컨으로 나온 탁현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구열의 얼굴이 약간 달아올라 있다.

그건 일준의 주먹이 많이 들어왔다는 뜻이다.

탁현이 구열의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말했다.

“1라운드 좋았습니다. 아마 저 친구 성격상 분명히 이번 라운드 역시 맞불을 놓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구열은 가슴과 뒷목에 얼음을 댄체 거친 숨을 내쉬었다.

“우리 연습한 것 기억하십시오. 제가 콜을 주면 곧바로 시작하는 겁니다.”

구열은 의지 가득한 눈빛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탁현이 어금니를 문다.

4강 진출자중 격투가의 정신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선수가 있다면 단연 구열을 꼽았다.

자기 생각뿐만 아니라 필린의 전문가들 모두 구열의 손을 들어준다.

관중은 이기는 선수도 좋아하지만 물러서지 않는 전사의 투혼에 더욱 미치는 것이다.

질 것을 예상해 기가 죽는 것은 격투기 선수의 마음가짐이 아니다.

지더라도 자신이 훈련한 모든 것을 쏟아붓는 것.

‘눈빛 하나는 이미 챔피언이다.’

탁현은 이어 물었다. 이제 중요한 것은 하나다.

“체력은 괜찮습니까?”

“밤새 할 수 있습니다.”

그때 라운드의 시작 10초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왔다.

-때앵

구열이 앉고 있던 의자를 집어 든 탁현은 밝게 웃었다.

“할 수 있습니다.”

“네. 해낼 겁니다.”

구열은 양손을 탁탁 부딪히며 악어를 때려잡을 준비가 되었음을 보여주었다.

이내 라운드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왔다.

-때앵

두 선수는 다시 중앙으로 다가섰다.

1라운드 초반은 팽팽한 긴장속에 탐색전이 있었다.

하지만 2라운드는 틀리다.

퍽!

빠악!

곧바로 난타전으로 돌입했다.

잠깐의 휴식이 몸을 재빨리 정상으로 돌려놨을까 난타전으로 시작된 2라운드는 입식 경기를 보는 듯 했다.

구열이 뻗은 잽을 살짝 고개만 틀어 피한 일준은 곧바로 복부를 후려쳤다.

빠아아!

그러나 구열은 개의치 않고 일준을 향해 뒷손을 던졌다.

일준은 고개를 크게 숙여 구열의 뒷손을 피해낸 다음 멀리 뒤로 빠르게 물러난다.

‘지켜내야 한다.’

구열이 쫓아가며 빠른 속도로 훅을 날렸지만 닿지 않았다.

‘동생을 지켜내야 한다.’

계속 쫓아가며 구열은 주먹을 던졌다.

‘아버지가 아닌 남자의 손에서 동생을 데리고 나올 수만 있다면 난 죽어도 괜찮다’

물러서고 다가가는 상황이 이어진다.

그 순간 탁현이 크게 소리쳤다.

“구열씨 지금입니다!”

정확히 들려오는 작전 사인.

구열이 갑자기 상체를 숙인다.

꿈틀!

일준의 눈썹이 꿈틀했다.

끝까지 타격으로 갈 것을 예상했는데 구열의 지금 자세는 태클을 하겠다는 것이다.

그래플링 싸움을 걸어온다는 의미는 곧 자신을 상대로 그라운드에서 자신감이 있다는 얘기였다.

일준은 곧바로 태클을 방어하기 위해 팔을 아래로 뻗었다.

하지만 구열의 노림수는 태클이 아니었다.

구열이 고개를 깊게 숙이더니 전광석화와 같은 주먹을 덮어 씌우듯 날렸다.

오버핸드훅(팔을 머리 위로 높게 들어 내려치는 훅).

그 펀치는 정확히 일준의 뺨에 꽂혔다.

-빠악

워낙 급작스럽고 예상못한 변칙이었기 때문에 피할 수가 없었다.

꽈당!

일준은 다리가 풀린 듯 바닥으로 넘어졌다.

링 주위에 앉아 있는 채호는 표정없는 얼굴로 흘러가는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왼쪽 옆으로 앉은 일본 격투기 협회 부회장 고바야시가 나직한 목소리로 감탄했다.

“완벽한 전략이군요. 역시 운동은 머리가 있어야 해요.”

하지만 채호의 생각은 달랐다.

누구보다 일준을 잘 알고 있다.

누군가 정일준을 안개 같은 선수라고 했다.

몸도 마음도 무엇을 원하는지 간파가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긴장이 된다.

과연 이대로 끝날지 아니면 정일준다운 뭔가 한 방을 보여줄 건지.

설혹 그것이 매우 야비한 수(數)일지라도 말이다.

관객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크게 벌렸다.

“어...어떻게 저럴수가.”

“우리 일준 형님이.”

반면 구열의 팬들은 미친 듯 소릴 질렀다.

“빨리 죽여. 얼른 죽이라고.”

기회다.

강력한 우승후보인 일준을 상대로 승리가 한 발자국 가까워졌다.

구열은 파운딩을 꽂기 위해 팔을 높게 쳐들었다.

‘잘가라!’

도끼를 찍듯 빠른 속도로 구열의 주먹이 날아간다.

그 순간이었다.

일준이 발을 뻗어 구열의 하체를 걷어차듯 차올렸다.

그리고 떨어지는 구열의 팔을 낚아채 차올린 방향으로 끌어당겼다.

타탁!

한 마리의 뱀이 구열을 감싸듯 그의 백(back : 등)으로 넘어갔다.

연결동작이 너무나 부드러운 스윕(swip)이다.

와아아!

그럼 그렇지.

일준의 팬들은 물론 해설위원까지 목소리를 높였다.

-믿을수 없는 기술을 보여주는 정일준 선수입니다!

바디 트라이앵글(Body triangle: 상대의 등 뒤에서 양 다리로 상대의 상체를 감싸놓는 기술.)

구열은 온전히 등을 내준 채 붙잡혔다.

준모는 머리를 감싸쥐며 아쉬워했다.

“으아! 끝난줄 알았는데.”

주민 역시 준모의 말에 공감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두호는 화면을 응시할 뿐이었다.

구열의 작전과 실행은 완벽했다.

설령 저 펀치를 최구열 본인이 맞았더라도 견뎌낼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일준이 지금 보듯 바디 트라이앵글로 역습에 성공했다.

저런 펀치를 맞고 저런 역공이 가능할까.

불가능하다.

그건 말이 안된다.

하지만 일준에게는 다른 이가 버틸 수 없는 걸 버티게 만드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

약물.

그래서 약물이 무서운 것이다.

그런 초인적인 능력을 가져다줌으로 스포츠 선수들이 선수 생명을 걸고 투약을 시도하는 것이다.

어쨌든 그 상황에서 저런 반격을 하는 일준의 지능 자체만큼은 칭찬해줘도 무리가 없었다.

절대절명.

그 위기의 순간에 반격을 잊지 않았다.

저런 건 실력이라기 보다는 타고난 본능이다.

파닥!

등을 잡힌 구열이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하지만 상체가 잡혀있었고 구열의 목에 초크를 걸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는 일준 때문에 쉽지 않았다.

일준의 팔을 붙잡은 채 버티고 있는 구열의 이마에 새끼줄 같은 굵은 핏줄이 튀어나온다.

크흐흡!

흐흡!

탈출을 위한 그의 필사적인 노력.

동생을 아버지 밑에서 데리고 나와야 한다.

아버지는 노름꾼이다.

동생은 자폐아인데 노름빚 때문에 동생의 장기를 팔아 치울 것이라는 말이 들려온다.

노름으로 어머니도 가출했다.

그런데 이제 남은 장애 동생까지 아버지는 팔아 치우려고 한다.

그래서 우승을 해야 한다.

살기 위해서.

파파팍!

워낙 발버둥을 치니 일준의 다리가 살짝 풀렸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구열이 빠져나왔다.

학학학!

구열은 거친 숨을 내쉬며 자세를 잡았다.

탈출은 했지만 상대에게 쉴 시간을 주면 안된다.

나도 힘들면 상대도 힘들다.

그런데 금방 덮칠 것 같던 구열이 머뭇거렸다.

구열이 함부로 들어가지 않자 사람들은 일준이 어떤 함정을 파놓았나 싶어 눈을 부릅뜨고 보았다.

케이지 밖에 있는 타이머는 1분이 채 안 남았다.

까닥!

구열이 일어나라는 듯 손짓했다.

일준도 이미 시간을 보았고 그는 누워서 휴식을 취하려는 생각이었다.

약물이라고 하지만 구열은 두려운 상대였다.

남은 시간을 누워 보내기로 한 것이다.

심판이 스탠딩 선언을 했고 일준은 어쩔 수 없이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은 다시 각자의 코너로 돌아갔다.

타격전도 경험했고 그래플링도 지금 붙어봤다.

입만 살아 있는 선수가 아니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라운드가 주먹보다 더 위협적으로 느껴질 정도의 테크닉을 지녔다.

‘이이제이(以夷制夷)’

오랑캐는 오랑캐로 잡는다.

일준의 주기술이 복싱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복싱 선수 출신에게 복싱으로 승부를 거는 건 어리석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장점속에 단점도 같이 갖고 있다.

좀 맞아 봤지만 해볼만 했고 이제 무엇으로 승부를 결(決)해야 할지 정했다.

그래서 스탠딩을 어필한 것이다.

‘저 씹새끼.’

인정하기는 싫지만 구열의 오버핸드훅에 다리가 풀린 건 사실이다.

방금 구열을 놓친 이유도 다리의 힘이 부족해 실수를 하게 된 것이다.

‘기분 드럽네.’

자신을 내려다보는 구열의 눈빛.

자신이 제일 싫어하는 누군가와 똑같았다.

심판은 두 사람의 상태를 확인한 후 곧바로 싸움을 재개시켰다.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일준이 소리쳤다.

“죽자아아! 이 씨벌 새끼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