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1화 : 당장 내게 싸움을 걸어라.
관객들은 의아해했다.
어째서 평소와 달리 이렇게 미리 추첨을 하는 것인가.
미주는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댓글을 확인하며 차분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4강 전부터는 경기수준의 향상을 위하여 미리 대진표를 공개하도록 하겠습니다. 필린은 여러분의 재미를 위해 다양한 이벤트와 프로모션을 준비해놨으니 라이브 방송이 마친 뒤 홈페이지로 들어가...”
미주는 자연스럽게 대화의 논점을 돌렸다.
그녀 역시 자세한 내부사항은 모르지만 미리 필린과 조율을 한 부분이었다.
- 저녁 경찰의 도박 조직 소탕기사가 관련 뉴스를 띄울 것이니 관련 답변은 피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미주는 자연스럽게 답을 회피하였고 시청자들이 좋아할만한 이야기로 화제를 넘긴 것이다.
추첨 방식은 선수들에게 배정된 번호를 미주가 추첨함을 뽑아 선정하는 것이다.
왼쪽 순서부터 차례로 두호 일준 구열 태건 순으로 1,2,3,4.번이 배정되었다.
“그러면 1경기 홍코너를 뽑도록 하겠습니다!”
미주는 희미하게 웃으면서 추첨함에 손을 넣었다.
공을 뽑아 든 미주는 카메라를 향해 공을 비췄다.
“3번 최구열 선수입니다!”
채팅장의 반응은 흥미롭다는 반응이 대다수였다.
구열은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 숨을 내쉬었다.
“후우.”
실질적인 우승후보라고 여겨지는 3명이 남았다.
어느 누구도 쉬운 상대가 없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각오를 다진다.
미주의 손이 다시 추첨함 안으로 들어간다.
“이어서 청코너를 선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재차 공을 뽑아 든 그녀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2번 정일준 선수입니다.”
실시간 반응을 보여주는 채팅창은 잠시 멈췄다.
이윽고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 채팅들.
새롭게 나타난 흥미로운 전개의 관중들은 모두 흥분에 빠졌다.
가장 큰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두호이다.
하지만 가장 대비된 성향을 가진 두 선수.
정일준과 최구열.
묵묵히 자신을 갈고닦는 최구열.
타고난 스타성으로 공간을 지배하는 정일준.
그들의 매치는 PRIDE-K의 한 축으로써 충분했다.
각오를 다지는 구열과 달리 뭔가 불만스러운 일준의 표정이었다.
‘쳇.’
미주는 자연스럽게 남은 두 칸에 백두호와 조태건의 이름을 올렸다.
“이렇게 2경기 대진이 마무리 되었습니다. 방송 이후 안내되는 이벤트들을 잘 참고해주시고 경기 당일날 뵙도록 하겠습니다.”
미주는 차분하게 방송을 끝맺음 지었고 이내 방송은 종료되었다.
방송을 마친 직원들의 표정 역시 흥미진진이다.
“와 최구열이랑 정일준이네. 한 번도 생각 못해봤는데.”
“미친. 백두호 선수랑 조태건 선수. 이거 기록감 매치 아니냐.”
방송이 끝난 직후 태건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을 나가버렸다.
두호 역시 따라 일어났고 직원들과 미주에게 차분히 인사를 하였다.
인사를 마치고 돌아가려는 순간 누군가 두호를 불렀다.
“어이.”
두호가 몸을 돌렸다.
정일준이 다리를 꼰 채 거만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표정속 눈빛의 의미는 승부욕이었다.
“한 계단 남았다. 미끄러지지 마라.”
잠시 말없이 일준을 바라보았다.
허공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엉킨다.
끊임없이 투쟁심을 일으켜 자신을 관리하는 일준과 달리 두호의 표정은 읽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너도.”
두호가 여유로운 표정을 지어보이며 몸을 돌렸다.
회의실을 빠져나가는 두호를 눈을 좁히며 바라보는 일준.
“재수 없는 새끼. 넌 내가 꼭 죽인다.”
그 섬뜩한 한마디에 의자를 정리하던 직원 하나가 얼어붙었다.
복도를 거니는 중 누군가가 두호에게 달려왔다.
최구열이었다.
“두호씨.”
두호는 싱긋 웃었다.
“네. 구열씨.”
결국엔 모두가 경쟁자일 테지만 그런 것 없이 구열이 맘에 드는 두호였다.
구열은 정중하게 고개 숙였다.
“저번의 도움으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두호는 고개를 저었다.
“구열씨의 노력으로 극복하신거죠.”
구열은 두호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참 신기한 사내다.
모두가 경쟁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두호는 아니다.
경쟁보다 더욱 높은 가치를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자신은 아직 그것을 모르겠다.
구열은 나지막히 말했다.
“이길 수 있겠죠?”
두호는 구열을 살펴보았다.
그리 긴 시간이 흐르지 않았음에도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 듯 더욱 단단한 기세를 보여주는 몸.
하지만 그의 눈은 떨리고 있다.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이렇게나 노력했음해도 결국 극복하지 못하고 쓰러질까봐.
두호는 구열의 어깨를 툭 쳤다.
“구열씨. 당신의 재능은 성실과 노력입니다. 걸어온 길과 당신의 몸에 새겨진 훈련을 기억하시면 됩니다.”
구열은 두호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었다.
“묘수는 정수를 이길 수 없다는 말을 증명하세요.”
두호는 구열에게 확신의 눈빛을 보여주었다.
구열의 의심 가득했던 눈동자는 두호와 같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감사합니다. 늘 도움만 받는군요.”
“도움이 됐다니 다행입니다.”
구열은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는 두호가 가야할 길보다 더 곧게 천천히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두호 역시 준비를 해야한다.
드디어 태건과의 승부다.
경기 당일.
전 경기에서 가끔씩 보이던 빈자리는 이제 찾아볼 수가 없었다.
가득 찬 관중석은 벌써부터 경기의 대한 기대치로 인하여 흥분상태였다.
높게 솟은 지미집 카메라가 경기를 기다리는 팬들을 비추자 환호성을 지른다.
그리고 각자가 응원하는 선수들의 팜플랫과 굿즈를 들고서 응원을 해댄다.
“코리안 몬스터 파이팅!”
“어차피 우승은 돌부처다!”
“끝까지 가면 최구열이 다 이겨!”
“선비들은 됐고 정일준이 최고지!”
뜨겁게 불타오르기 시작하는 관중석을 준모가 두호의 어깨를 주무르며 대기실 모니터 바라보았다.
“진짜 장난이 아니네요.”
준모가 몸을 부르르 떤다.
그도 그럴것이 8강전과는 분위기부터 달랐다.
승부 예측을 하는 인터뷰중 팬들끼리 몸싸움까지 일어났다는 얘기를 들었다.
준모는 고개를 숙여 두호를 바라보았다.
편히 다리를 뻗은 채 명상을 하는 두호.
그런 모습을 보며 옅은 미소를 띄우는 준모였다.
‘하여간. 형님은 긴장을 모른다니까.’
그런 두호의 허벅지 부분이 떨리고 있다.
불쑥 고개를 내미는 주민.
그는 이번 4강부터 그의 케미컬 코치의 임무를 맡으며 두호의 허벅지를 풀어주고 있었다.
며칠간 두호의 몸 상태와 컨디션을 조절하는 그의 역할을 톡톡히 느끼는 두호였다.
두호가 싱긋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코치님.”
“아니에요. 이게 제 일인데요.”
주민이 일어나 걸어둔 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는다.
“두호씨. 컨디션은 어떠세요.”
그의 행동의 보답이라도 하듯 두호가 대답했다.
“최고입니다.”
기다렸던 대답이라는 듯 주민이 밝게 웃어 보였다.
준모가 두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형님 시작하나 봅니다!”
두호의 고개가 모니터로 향한다.
구열이 입장하고 있었다.
양 손을 하늘로 뻗으며 거침없이 기합을 지른다.
“아자아자.”
주눅들지 않기 위함이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관객들은 큰 목소리로 그를 환영했다.
“구열아! 소시민의 싸움이 뭔지 보여줘라!”
“언더독 반란은 진짜 너를 위한 말이지!”
그리고는 하얀 손수건이 입장하는 그의 머리 위로 쏟아진다.
피칠갑을 하더라도 쓰러지지 않는 그를 상징하는 물건이 되었다.
힘찬 걸음으로 케이지로 걸어가는 구열.
그가 경기 준비를 마치고 케이지 안으로 입장하자 다시 한 번 환호가 쏟아졌다.
이윽고 조명이 어두워지며 정일준이 등장했다.
뒷골목 왈패 같은 표정으로 껌을 씹은 채 등장하는 일준.
심지어 그의 복장은 청바지와 하와이안 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관객들은 배꼽을 잡았다.
“그렇지! 이게 개성이지!”
“슈퍼스타는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 일준아!”
건방진 그의 모습은 관객들에게 즐거움을 주기 충분했다.
그리고 일제히 사람들은 일준에게 손전등을 흔들었다.
그의 스타성을 상징하는 물건인 것이다.
케이지 앞에 도착한 그는 그제서야 입고왔던 청바지와 셔츠를 벗었다.
운동복으로 환복을 마친 그 역시 케이지 안으로 입장을 완료했다.
“라인업!”
심판이 케이지 중앙으로 선수들을 모았다.
서로를 마주하게 된 두 선수.
심판의 룰 설명이 이어졌다.
“버팅 로블로 써밍 그리고 사점 니킥 금지입니다. 심판이 개입하는 시점부터는 통제를 잘 따라주시길 바랍니다.”
구열은 결연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일준은 금방이라도 구열을 잡아먹을 듯한 표정이었다.
“백두호 새끼 만나나 하고 기대하고 있었는데. 왠 잔바리?”
구열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 입만큼이나 실력이 좋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자 일준은 귀를 후비는 시늉을 하였다.
“하여간 뒤지게 맞아야 정신 차리는 놈들이 있어요.”
심판은 각 코너로 돌아갈 것을 명했다.
각자의 케이지 벽을 등지고 서 있는 그.
구열은 글러브로 자신의 얼굴을 문질렀고 일준은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각자의 코너를 돌아보며 상태를 확인한 심판은 곧 손을 세게 내렸다.
“파이트!”
터치 글러브는 없었다.
두 사람은 천천히 거리를 조여가며 다가선다.
삭!
스으윽!
자세를 잡고 거리를 조절할 뿐 쉽게 서로를 향해 달려들지는 않았다.
일준은 눈을 좁게 떠 구열을 바라보았다.
단단하게 잠근 가드와 딱 붙인 턱.
전형적인 인파이팅 복서의 자세였다.
일준은 순간 누군가가 떠오르는 듯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재수 없게 닮았네. 누구랑.’
천천히 서로에게 붙기 시작했고 어느새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까지 접근했다.
순간 구열의 눈이 빛났다.
구열의 손이 경쾌하게 뻗었다.
일준은 왼팔을 자신의 관자노리에 붙이며 펀치를 방어해냈고 곧바로 카운터가 날아갔다.
일반적이라면 한쪽이 비어있는 얼굴을 노리지만 그의 뒷손은 복부로 향했다.
구열의 펀치는 일준의 몸에 닿지 못했다.
반면 일준의 펀치는 구열의 얼굴에 묵직하게 닿았다.
그런데 일준의 표정은 찡그려졌고 구열의 표정은 밝았다.
사삭!
구열은 다시 깊숙하게 일준의 타격거리로 파고들었다.
푸푸풋!
그러자 교과서를 보는듯한 일준의 더블 잽 과 뒷손 스트레이트가 나온다.
구열은 어렵지 않게 더블 잽을 막았으며 뒷손 스트레이트까지 피해냈다.
휙!
일준은 방금전 보다 훨씬 빨라진 속도의 원투를 구열의 얼굴에 찔러넣었다.
-팡팡
묵직하게 터지는 파육음.
깔끔한 클린히트였다.
하지만 구열은 전혀 상태의 변화가 없었고 일준의 표정이 구겨진다.
경기를 지켜보던 준모가 침을 꿀꺽 삼켰다.
“손이 정말 빠르네요. 현재 일준이 유리한거 맞죠?”
아직까지 구열의 유효타는 한 대도 없었다.
더군다나 일준은 자신의 거리감도 완벽히 잡았으니 준모는 제대로 일준의 흐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두호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쟤 지금 당황했다.”
“네?”
두호의 예상처럼 일준은 몹시 당황했다.
‘뭐 이런 놈이.’
깔끔하게 들어간 일준의 펀치.
더군다나 나오는 펀치를 막아내며 찔러넣는 카운터 펀치였으므로 데미지가 상당했을 것이다.
일반적인 선수들의 펀치도 아니고 엘리트 복서 일준의 펀치인데 구열은 눈빛 하나 변하지 않고 견뎌내 버렸다.
사실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구열은 이미 두호의 펀치도 수십 방을 견뎌낼 정도의 탁월한 내구력을 보여주었다.
일준은 잠시 거리를 벌려 멀어진 뒤 집중해서 구열을 보았다.
‘저거구나.’
굵은 목.
귀밑으로 떨어질 만큼 두꺼운 목이 복싱선수의 주먹마저도 우습게 만들었다.
구열은 호흡을 가다듬고 일준에게 달려들었다.
“흐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