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0 화 : 당장 내게 싸움을 걸어라.
“정말 다행입니다. 사실 승부예정 마케팅이 정말 중요한데 이제라도 할 수 있으니 참 좋은 일인 것 같습니다.”
구열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상대를 안다는 건 구열의 입장에서는 중요한 일이었다.
주위 여건이나 실력적인 면에서 자신이 제일 약세라는 걸 인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죽든 살든 상대의 약점을 물고 늘어질 전략 정도는 세울 수가 있는 것이다.
“선정방식은 어떻게 됩니까?”
구열의 질문에 채호가 가만 웃는다.
“벌써 싸우고 싶은 상대가 있나보죠?”
구열은 고개를 저으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런건 아니고.”
채호의 얼굴에 미소가 사라진다.
팔랑!
자신이 챙겨왔던 서류를 뒤져보며 그중 하나를 집어들었다.
“내일 인터넷 방송으로 실시간 추첨으로 진행할 겁니다. 이번 페이스오프 기자회견은 오전 계체량통과 후 곧바로 시작할 예정입니다.”
채호는 서류를 툭 하고 내려놓았다.
“계약체중은 80KG로 맞춰서 진행하겠습니다. 최저 무게가 태건씨. 79kg. 그리고 두호씨가 81kg 으로 제일 많아서 딱 중간값으로 했습니다.”
1kg 감량과 증량정도는 손 쉬운 탓에 두 사람 모두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채호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럼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내일 추첨 때 뵙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간단한 회의가 끝나고 모두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 * *
태건이 숙소로 들어섰다.
입고 있던 상의를 벗어 침대 위에 올려놓고 잠시 우두커니 서 있더니 길게 숨을 내쉬더니 안쪽 벽 앞으로 걸어갔다.
벽에는 A4용지 석 장이 붙어 있는데 사람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준결승에 오른 두호와 구열 일준이다.
‘사람의 얼굴을 그린다는 건 의지다. 그 사람을 절대 잊지 않겠다는 각오이며 싸움에서 기필코 꺾겠다는 정신의 실천인거야’
만만치 않은 상대가 나타나면 황석희는 항상 상대의 얼굴을 낙서하듯 그렸다.
그림을 그리면서 전의를 불태우는 것이다.
집중하고, 더욱 매달려 어떻게 해서라도 반드시 주먹으로 때려 눕히겠다는 다짐을 하는 것이다.
어제 밤 자신도 그림을 그린 것이다.
그런데 황석희처럼 상대를 반드시 이기겠다는 불타는 살의를 갖고 그린 것이 아니었다.
사람이 보고 싶어서, 그리움이 밀려와서 그린 것이다.
시늉을 내면 그와 같이 있는 것 같은 감정을 갖게 될지도 모른다.
시간이 흐르면 인간의 뇌에 쌓인 기억들이 하나 둘 흐릿해지고 사라진다는데 혹시 자신도 그럴까 염려해서였다.
자꾸 그림을 그리면 잊지 않을 것이다.
황석희는 절대 잊어도 안되고, 잊을 수도 없는 유일한 인생 짝이었다.
“후.”
거친 숨을 토해낸다.
털썩!
바닥에 주저 앉는다.
세상은 살기 좋아졌다는데 왜 그렇게 자신을 둘러싼 가난은 깊고 험악했는지 모른다.
열악한 경제사정은 끝내 부모님을 갈라서게 만들었고 먼저 아버지가 사라지더니 어느날 어머니까지 눈앞에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10살 아이에게 굶주림은 참혹한 형벌이었다.
세상 모든 것이 먹는 것으로 보였다.
-야. 내가 시선을 끌게. 그 순간에 너가 몰래 집어와. 알겠지?-
시장통 빵집 앞에 서 있는데 누군가 다가왔다.
자기 또래의 아이.
행색은 지저분했으나 두 눈은 이글거렸다.
“아줌마 이것 얼마에요?”
소년은 안쪽에 있는 빵을 가리켰고 주인 여자가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태건은 묵직한 카스테라 뭉치 두 개를 들고 번개처럼 사람들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렇게 처음 황석희와 태건은 가족이 되었다.
시간이 흘러 성장한 두 사람은 패싸움 쪽수를 채워주는 조건으로 끼니를 해결했다.
의외로 보수는 괜찮았고 자신들이 싸움에 소질이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게됐다.
그러던 어느날 큰 싸움판인지 처음 보는 거액의 돈을 받았다.
예상대로 그 날의 싸움은 지옥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긴 시간 동안 처절하게 싸웠다.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을 고용한 주인은 벌써 변사체가 되었고 황석희와 태건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살아있는 사람이 없었다.
늑대 같은 사내들이 두 사람을 포위했다.
목숨에는 미련이 없었지만 둘 다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태건은 보내야한다.’
‘황석희는 살려야 한다.’
그렇게 각오를 다지고 쇠파이프와 칼을 단단히 쥐어잡을 때 사내들 사이로 나이 지긋해보이는 한 여자가 걸어나왔다.
수미였다.
싸늘한 표정으로 자신들을 쳐다보는 수미의 눈빛.
잠시 아무 말 없이 자신들을 바라보던 수미는 인상을 찡그렸다.
그런 모습이 어울리기엔 너무 어린 것 아니냐.-
피 칠갑을 한 채 죽기를 각오한 그들은 고작 17살이었다.
수미는 사내들에게 나지막히 말했다.
-정리하자.
그 순간 황석희가 막무가내로 무릎을 꿇었다.
-혹시 밥 한 끼 얻어먹을 수 있겠습니까.
왜인지 모르지만 태건도 황석희를 따라 무릎을 꿇었다.
수미는 빙긋 미소 지으며 몸을 돌렸다.
-그래.
태건은 갑자기 입고 있던 상의를 벗었다.
야자수가 그려진 검정색 티셔츠.
이번 대회 좋은 성적을 거두라면서 황석희가 선물 한 것이다.
태건은 벗었던 옷을 다시 입고 벌렁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거기에 친구가 있었다.
* * *
웨스턴 호텔 루프탑.
한 사내가 무표정한 얼굴로 난간에 팔을 기댄 채 풍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두호였다.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이었지만 어딘가 쓸쓸해 보였다.
“제법 왔네.”
제법 왔다라는 인색한 평가는 사실 맞지 않았다.
두호의 몸으로 들어온지 반년이 조금 더 됐다.
현재 그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뜨거운 인지도를 가진 선수가 되었고 전국에 내로라하는 선수들이 모인 PRIDE-K의 4강 진출자였다.
하지만 그런 두호의 마음이 무거운 이유가 있었다.
‘너무 많은 사람이 다쳤다.’
물론 자신이 만들어낸 사고는 아니다.
다만 그 일들의 시작점과 가장 중요한 이유가 자신이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 그 책임을 통감하고 있는 것이었다.
과거를 돌아보듯 두호가 눈을 감았다.
자신이 만나온 사람들의 모습을 차분하게 돌아보기 시작했다.
그 순간.
“나 불렀어?”
청아한 목소리의 주인공.
무였다.
두호는 헛웃음을 지었다.
만나온 과거를 생각해보다 돌연 가장 처음을 생각하니 떠오른 사람이 무였기 때문이다.
무는 뒷짐을 진 채 살랑이는 걸음걸이로 두호에게 다가갔다.
“왔으면 시선 좀 맞추지?”
장난스럽게 삐친 표정으로 다가오는 무.
두호 역시 몸을 돌려 고개 숙여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셨습니까?”
“나야 뭐 항상 지루하지. 너는 좀 어때?”
두호는 미소를 지었다.
“걱정해주신 덕분에 잘하고 있습니다.”
“그래. 얘기 듣는데 잘하고 있더라. 벌써 4강이라며?”
“네.”
“저기 앉을까.”
벤치 하나를 발견한 무가 두호에게 손짓했다.
두 사람은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경치 좋네. 인간 세상은 이런게 참 부러워.”
무는 다리를 앞뒤로 흔들며 앉았다.
두호는 무를 돌아보았다.
절대자의 모습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젊은 청춘이다.
“그런데 어쩐 일로 찾아오신 겁니까?”
두호는 무가 오랜만에 자신을 찾아온 이유가 궁금했다.
무는 고개를 슬쩍 돌려 두호를 바라보았다.
“고민이 많던데?”
고민이라기 보다는 정확히 말하면 마음의 짐이었다.
고민은 해결을 하기위해 노력을 하면 되지만 마음의 짐은 쉽게 벗어던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무가 손을 젓는다.
그러자 기분좋은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은 어디로든지 흘러가. 때로는 산을 흘러가기도 바다위를 지나가기도 하지. 그 바람이 어디로 향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야.”
무의 얘기는 두호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바람은 부드럽고 무리하지 않는다.
세상 어디든 필요한 사람을 찾아 다니며 시원한 마음을 선물하는 것이다.
“그러나 때론 살을 에는 것처럼 차갑기도 하고 모든 것을 말려 죽일만큼 뜨겁기도 해.”
노력은 해야하지만 흐름을 역행하려 들지마라.
원하지 않는 바람은 원하지 않는대로, 날릴 듯 부는 바람에는 그냥 날아가 주라는 얘기다.
“괜찮아. 그들이 하는 모든 행동에 너가 원인인 것은 없어.”
모든 것을 꿰뚫는 존재의 입에서 나온 조언이라 그런지 마음이 조금 차분해짐을 느낀다.
“그래도 아랫사람도 챙길 줄도 알고 기특해?”
두호는 화들짝 놀랐다.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내가 모르는 게 어디있어.”
준모의 동생인 양성아의 치료에 드는 비용 일체를 자신쪽에서 부담하기로 결정했다.
준모는 아직 이 사실을 모르는 듯 했다.
“잘하고 있어. 한 사람이 수십 명을 바꾸기는 힘들지만 너로 인해 바뀐 몇 명은 수백수천을 바꿔놓기도 하는 게 인간이니까.”
무는 두호를 한번 훑어보았다.
“어때 지금 일은?”
많은 것을 함축한 질문이었다.
두호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아무 말이 없었고 이내 빙긋 미소 지었다.
“괜찮습니다.”
무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하는 그녀.
두호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가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가십니까?”
“가야지. 난 언제나 바쁘니까.”
걸어가던 무는 밝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잘해. 다음에 올 때는 네가 과연 무엇이 되있는지를 확인하러 올 거야.”
* * *
스튜디오에서는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조명! 조명!”
미주의 주위로 스타일리스트와 송대일 PD가 달라붙는다.
그녀는 대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이거 대본 누가 썼어요?”
“박 작가가 짠거지.”
“그러지 말고 그냥 큰 꼭지만 집어주시면 제가 알아서 할게요. 대본이 너무 심심하네.”
송대일은 흘긋 저 멀리 서 있는 박작가를 슬쩍 살피며 말했다.
“그래. 다시 정리하지 뭐.”
대본을 넘겨받아 스텝에게 건네준 송대일은 방송시작을 알리기 위해 크게 휘파람을 불렀다.
휘익
“방송 일 분전!”
직원들의 힘찬 대답과 함께 한쪽으로 시선이 옮겨갔다.
“그림 대박이네.”
그의 눈에 담긴 것은 4명의 파이터들이었다.
이번 PRIDE-K 흥행에 간판들.
긴장한 듯 숨을 내뱉은 최구열을 제외한 두호, 일준, 태건은 모두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이내 스타일리스트 한 명이 PD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됐다는 뜻이었다.
미주가 카메라를 잡고 그들의 맨 왼쪽 자리에 앉아 간단한 눈인사를 했다.
이내 카메라의 빨간불이 켜진다.
미주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반갑습니다. PRIDE-K 시청자 여러분 저희는 오늘 4강 대진표와 여러 안내사항을 전해드리려고 합니다.”
미주는 차분하게 4강 대진표와 전 경기에 대한 소감을 인터뷰했다.
선수들의 컨디션 조절을 위하여 인터뷰는 최대한 짧게 유도해냈고 속도감 있는 진행에 관객들의 반응도 대체로 만족스러운 듯 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이 기다리시던 이번 4강 대진표의 추첨이 있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