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쟁의 신이 케이지 안으로-89화 (89/204)

제 89화 : 당장 내게 싸움을 걸어라.

지하 사무실은 경찰의 등장으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직원들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서 있었고 일부 사내들은 냅다 튀었다.

“저 새끼들 잡아!”

두 명의 형사가 문을 열고 도망치는 사내들을 쫓았다.

퍽!

퍼퍽!

얌전히 손을 머리에 대고 있는 사내들도 있지만 일부는 재떨이와 물주전자 따위를 던지며 저항했다.

“뒤질라고, 가만 있어.”

그러나 결국 바닥에 엎드린 채 수갑이 채워졌다.

“잘들어, 너흰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고 진술을 거부할 수...”

미란다 원칙을 고지한 뒤 형사들은 한 명씩 끌어냈다.

노장철은 승부를 조작하는 컴퓨터 하나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온통 도박 판이구만, 그런데 베팅이 왜 이렇게 한쪽으로 몰렸어?”

다른 형사가 다가와 설명했다.

“서버가 있는 여기서 조작하는 거죠. 베팅을 키우기 위해 한쪽으로 돈이 몰린 것처럼 보여주는 겁니다. 그리고 이건...”

이것저것 한참을 듣던 노장철 팀장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만, 그만!”

골치 아프다는 듯 허리를 펴더니 한쪽에서 긴장한 표정으로 서 있는 노명환을 발견하고 다가간다.

“노명환.”

“예!”

노명환은 긴장했다.

채수가 모든 일을 처리한다고 했지만 은근히 걱정된다.

슥!

갑자기 담배를 내밀자 노명환은 떨리는 두 손으로 담배를 잡고 입에 물었다.

딸칵!

불까지 붙여주고 노장철도 한 개비 문다.

후우우!

길게 연기를 내 뿜던 노장철이 불쑥 묻는다.

“어디 노씨야?”

노명환은 어색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교옹 노씨 입니다.”

그 말을 들은 노장철이 화들짝 놀란다.

“파는?”

“창덕군파 34대요.”

순간 노장철이 표정이 일그러지며 노명환을 다그쳤다.

“이런 버르장 머리 없는 자식이, 내가 창덕군파 32대야.”

“네에?!”

얼른 담배를 내리고 부동자세를 취했다.

“조카 뻘이라고?”

“잘못했습니다. 앞으로는 절대 나쁜 짓 않겠습니다.”

“집안 조카만 아니라면 꽉 잡아가겠는데.”

“정직하게 살겠습니다.”

노장환이 피식 웃었다.

“조카, 세상에 한탕은 없어. 그냥 살아.”

“예 할아버지.”

“이 새끼 할아버지라니까 갑자기 기분 나빠지네.”

그러면서 씨익 웃더니 품 속에서 전화기를 꺼내 번호를 누른다.

“통화 가능하십니까? 여긴 청소 끝났습니다 대표님.”

* * *

호텔 대 회의장에 앉아있던 이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하셨습니다. 언론공개 조율은 저녁쯤에 만나서 하시죠.”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채호는 말없이 가만 앉아있었다.

이제 하나 끝났다.

아직도 무수히 남았다.

돈은 빌려 간 액수만큼 갚지만 피의 빚은 다르다.

용병시절 도혁이 귀가 아프도록 강조하는 대목이 있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비싼 이자는 피 값이다’

팀원 하나가 다치기만 해도 원점을 타격하여 깡그리 몰살시켰다.

선공은 언제나 빼앗길 수 있고 기습 역시 당할 수 있다.

하지만 당한 것에 대한 채무 회수는 정확해야 한다.

댓가가 약하면 반복된다.

황석희라는 팔 하나를 내주었다.

그렇다면 두 배 세 배 더 큰 걸 가져와야 한다.

전쟁이나 사업이나 하나도 다를 것 없다.

거기도 사람 사는 곳이고 여기도 돈을 놓고 치고 받는 전쟁터다.

채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쪽으로 향한다.

드르륵!

창문을 열었는데 더운 열기가 훅 들어온다.

아직 초여름에 들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태양은 모든 것을 태울 듯 열을 올리고 있었다.

‘이래 저래 올 여름은 뜨거울 것 같군’

채호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 * *

-띠잉.

“흐음.”

-타악.

모영배는 심사가 굉장히 불편한 표정으로 듀퐁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한다.

너무 화가 나면 말이 없어진다던가.

모영배는 라이터만 자꾸 건드렸고 조상무가 한쪽에 굳은 표정으로 있었다.

모영배의 밑에서 일한지 10년이 넘어가지만 아직까지 그가 이렇게 분노한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하긴 싸움은 언제나 내줄 것을 생각해야 하지.”

모영배는 분노를 다스리려는 듯 무겁게 중얼거린다.

그러나 내준 것치고 너무 많이 가져가 버렸다.

자신이 운영하는 도박사이트가 통째 궤멸되고 만 것이다.

순식간에 뿌리가 뽑히듯 당해버렸다.

모영배의 시선이 조상무에게 옮겨진다.

그건 꾸중이었고 분노의 표시였기에 조상무는 얼른 고개를 숙여 버렸다.

이럴 땐 그저 엎드리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누가 왔다고?”

“노장철 반장이라고 강서 경찰서 팀장이라고 합니다.”

탁!

따악!

다시 라이터를 두드린다.

어째서 수미가 아니라 경찰이 왔을까.

수미는 경찰을 이용해 뭔가 빚을 받아내는 스타일이 전혀 아니다.

직접 움직이고 자신의 손으로 마무리한다.

‘뭐지!’

갑자기 꺼림칙해진다.

자신의 오른팔을 죽였다.

다른 사람에게 일을 맡길 리는 없었다.

모영배는 지그시 눈을 감고 의자에 몸을 기댔다.

똑똑똑!

누군가가 다급하게 문을 두드렸다.

“뭔데?”

조상무가 문을 열고 묻는다.

문밖에는 체격 좋은 서른 초반 가량의 사내가 서 있었다.

“급히 보고드릴 것이 있어서...”

조상무가 한쪽으로 비켜서고 철웅이 들어섰다.

“약공장에 불이 났습니다.”

톡!

모영배가 손에 쥐고 있던 듀퐁 라이터를 떨어뜨렸다.

“뭐라고?”

조상무가 묻는다.

“공장이 화재로 전소되었습니다.”

벌떡!

모영배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검은 연기가 하늘을 가득 메웠고 소방차들이 소방호수로 물을 뿌리며 진화하고 있었다.

“1조, 대답해 1조.”

소방대장이 무전기에 대고 다급히 불렀다.

“네 1조, 지금 두 사람을 찾았는데 숨어 끊어진 듯 보입니다.”

“살아 있는 사람 없어?”

“아직!”

“2조, 3조!”

무전기에서 큰 외침이 터져 나왔다.

“2조, 연기가 너무 짙어 진입이 불가능 합니다.”

“3조, 천장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잠시 후 와르르 소리가 나고 공장의 천장 한쪽이 무너졌다.

“씨발!”

구경꾼 틈에 서 있는 조상무 입에서 욕설이 쏟아졌다.

약공장이다.

도박 사이트보다 이곳에서 올리는 매출이 더 크다.

지금 생산하고 있는 약들은 웬만한 도핑에는 걸리지 않는 특성을 지녀 이미 엄청나게 주문이 밀려들고 있었다.

“소방서측은 뭐라고 해?”

제복 경찰관 두 명이 얘길 나눈다.

“아직 자세한 결과는 나오지 않았지만 방화로 보는 눈치던데요.”

“방화? 누가 이런 폐 공장에 불을 질러?”

“그렇긴 한데 저 연기들 보세요. 저건 독한 화학약품이나 플라스틱 종류가 탈 때 나오는 독성 연기거든요. 방독면 없이 일반인이 마시면 20초를 못 버티고 쓰러진답니다.”

“아니 그럼 뭐야? 폐 공장에서 다른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는 거잖아.”

“맙소사!”

“왜 그래?”

“시체입니다.”

소방대원들이 들것에 시커멓게 타버린 시체들을 옮기고 있었다.

부드득!

조상무는 이를 갈고 또 갈았다.

‘씨발년!’

누군지 아는 눈치다.

* * *

지하실의 문이 열리고 불이 켜진다.

수미가 계단을 내려왔는데 다른 직원 하나 없이 조용했다.

계단을 내려온 수미는 안쪽 책상 앞으로 걸어가더니 성냥을 집어들었다.

-치익

양초에 불을 붙혔다.

치지직!

불꽃이 파르르 떨며 타올랐는데 초에서 아로마향이 조금씩 퍼져나오기 시작했다.

이어 등을 돌려 뒤쪽 싱크대로 걸어가 수돗물을 틀었다.

수미의 양손이 붉었다.

그건 말라 붙은 피였다.

촤아악!

수돗물에 손에 묻은 피를 씻어낸다.

말라 붙은 피는 수돗물에 씻겨가고 수세미를 들어 손톱 사이에 묻은 것까지 닦아 낸다.

이리저리 씻은 손을 살핀 수미는 옆에 걸린 수건으로 깨끗하게 닦았다.

승!

스극!

이내 자기 자리로 돌아가 앉아 하다만 뜨개질 다시 시작했다.

툭!

투툭!

코 마다 바늘이 들어가야 하는데 갑자기 더듬거리고 한 코를 건너 뛴다.

갑자기 뜨개질을 멈추던 수미의 시선이 한쪽으로 돌아갔다.

멀리 책상 하나가 놓여 있는데 텅 비었다.

앉아 있어야 할 사람이 없다.

앞으로는 영원히 볼 수 없을 것이다.

문득 과거 도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 뜨개질을 해보세요. 마음 안정에 의외로 좋다는군요.

수미는 다시 뜨개질에 집중했다.

하지만 또 다시 바늘 끝이 떨리면서 엉망이 된다.

그래도 해야 한다.

자전거는 멈추면 넘어진다.

* * *

회의실 안에 네 명의 우승후보가 모두 모였다.

가히 이번 PRIDE-K 의 정수라고 말할 수 있는 네 사람이었다.

백두호, 정일준, 조태건, 최구열.

마주 앉아있는 네 명이 뿜어내는 기세가 터질 것 같다.

케이지가 아니지만 네 사람은 지금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것이다.

두호는 맞은편에 앉은 최구열을 바라보았다.

아마 세월이 흐르고 늙어도 쉽게 잊혀지지 않을듯한 친구다.

피칠갑을 하면서까지 이어지는 난타전 끝에 승리한 그는 이번 경기로 대중들에게 각인되었다.

아마도 자신이 아니었다면 PRIDE-K의 가장 어울릴 사람은 구열일듯했다.

열 번 쓰러지면 열한 번 일어나서 다시 자세를 잡는다.

두호와 눈이 마주친 구열.

구열은 약간의 미소를 띄며 두호에게 목례를 하였다.

두호가 아니었다면 자신은 분명히 졌을 것이다.

목표라고 할 수 있을만한 단계를 보았고 자신은 달리면 된다.

두호 역시 싱긋 웃어주며 고개를 숙였다.

두호는 나머지 일준과 태건을 바라보았다.

일준이 뜨겁게 타오르는 불덩이라면 태건은 속을 들여다 볼 수 없는 안개 같았다.

그때 회의실의 문을 열고 채호와 예수가 걸어들어왔다.

채호는 미소를 지어보이며 자리에 앉는다.

“오래 기다리셨죠. 대회가 막바지에 접어들다 보니 이것저것 할 일이 많습니다.”

그러면서 네 사람을 슥 훑었다.

“네 분을 모신건 4강전과 관련한 문제 때문입니다.”

채호는 깍지를 낀 채 책상 위로 팔을 얹었다.

“이번 4강 전부터는 미리 대진표를 짠 뒤 공개를 하려고 합니다.”

모두의 시선이 반짝인다.

지난 몇 경기 동안 대진표를 경기 직전에 추첨했었다.

덕분에 많은 선수들이 분석이랄 것도 하지 못한 채 상대와 싸워야했다.

물론 이들도 필린에서 왜 그런 선택을 해야 했는지 알고 있다.

이 스포츠는 전략과 전술로 이루어진다.

단순히 신체능력으로만 극복할 수 없는 종목이기에 이번 직전 추첨으로 억울하게 떨어진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전략을 수렴하여 단점을 보완했다면 충분히 극복 가능할 수도 있었을 문제인 것이다.

하지만 이제야 원래대로 돌아왔다는 것.

곧 모든 문제점이 해결되었다고 볼 수 있었다.

구열은 고개를 끄덕였다.

태건은 여전히 무표정했고 두호는 슬그머니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일준의 이마가 꿈틀했다.

‘이 영감탱이가 일 처리를 어떻게 하고 있는 거야.’

불법도박 사이트는 자신에게도 엄청난 이점을 가져다주었다.

PRIDE-K는 인터넷 도박의 엄청난 호황을 불러왔다.

많은 사이트가 난립하며 판돈만 해도 족히 천 억을 웃돌 것이라는 게 경찰의 추정치였다.

그중 모영배가 가장 큰 사이트를 운영한다.

경찰과 함께 도박을 막기 위해 경기직전 대진표를 발표한 것이다.

그들의 배팅을 원천 차단하려는 의도였다.

경기 직전 상대를 공개하다보니 도무지 전략이라는 걸 세우지 못했다.

당연히 피지컬로만 서로를 상대해야 했는데 그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앞으로도 자신을 이길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여유가 있다.

우승은 따놓은 당상이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가장 중요한 시기인 지금부터 어떤 득도 없을 수 없게 된 꼴이다

‘이래서 늙은 것들과는 거래가 안 된다니까.’

일준은 화를 애써 삭히며 표정을 관리에 여념이 없다.

채호는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떠올랐다.

그런데 거의 같은 순간 두호 역시도 조용한 실소를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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