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쟁의 신이 케이지 안으로-88화 (88/204)

제 88화 : 당장 내게 싸움을 걸어라.

가볍게 목을 가다듬은 민영은 뚜렷한 목소리로 읽어 내려갔다.

“이번 8강 선수들을 대상으로 채혈과 소변검사를 통하여 도핑테스트를 실시했습니다.”

기자들의 셔터소리가 가득해졌다.

“총 8명의 선수 중 3명의 선수에게서 금지약물인 테스토스테론을 향상시켜주는 아나볼릭 스테로이드와 하이폭센, 트리메타지딘 그리고 마약성 진통제가검출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놀란다.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며 수군거리는 기자들로 장내가 잠시 어수선해졌다.

“8명 중 3명이면 너무 많은 것 아니야?”

“큰데, 이러면 대회 자체가 흔들릴 수도 있어.”

민영은 잠시 조용해지길 기다렸다가 계속 낭독했다.

“그리고 학계에 보고 되지 않은 새로운 검출성분이 포함되어있어 이채호 대표는 경찰수사에 적극 협조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그리로 추후 재발방지를 위한 대책을 내놓을 것이며 PRIDE-K를 사랑해주신 분들에게 진심어린 사과의 말씀 전해드리겠습니다. 이제 질의응답 하도록 하겠습니다.”

한 기자가 손을 번쩍 들었다.

민영은 손을 뻗어 한 기자를 가리켰다.

“그렇다면 선수들이 어떤 경로로 구매한 겁니까?”

“호텔 내부의 CCTV로 확인된 바로는 일반 투숙객, 또는 직원과 심지어 취재진으로 변장하여 접근해 온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상황을 면밀히 분석한 결과 격투 스포츠에 기생하는 단발성 장사꾼이 아닌, 상당히 조직적으로 보입니다.”

민영은 조직적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말했다.

누군가 이번 대회를 무너뜨리기 위해 치밀한 공작을 꾸미고 있다는 발언이다.

또 한 명의 기자가 손을 들었다.

민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사내를 가리켰다.

“그렇다면 약물이 검출된 선수 명단을 공개하실 수 있습니까?”

민영은 발표문을 한 장 넘겼다.

“이번 도핑테스트에 적발된 선수명단입니다.”

민영은 서류를 보며 어금니를 문다.

장내 공기가 얼어붙었다.

누군가 숨 막히는 긴장을 견디지 못하고 침을 삼켰다.

“도핑테스트 결과 불법약물이 검출된 인원으로는 김준훈, 김민수, 유서영 선수입니다.”

“어엇!”

“아니”

너무 놀라 말을 잇지 못한다.

우승후보라고 꼽힌 3명의 선수와 붙었던 상대들.

더군다나 김준훈은 결승을 넘볼 수 있는 실력파로 일찍부터 인정받았다.

아버지의 중국집을 지켜내고 싶다던 그.

가라테 유망주로 인정받던 그는 부상으로 인하여 좌절하고 말았다.

하지만 방황하지 않고 새로운 꿈을 꾸던 그의 성실함은 모두의 귀감이 되기도 하였다.

그래서인지 비난 보다는 여기저기서 토해내는 한숨소리가 적지 않다.

“저희가 이 선수들의 실명을 언급하는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꿈과 도전이라는 PRIDE-K 이념에 전면으로 위배되며 타 선수들의 안전과 다른 참가자들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행위이기에 비난의 소지가 있더라도 감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말을 마친 도민영은 책상에 서류를 탁탁 치며 정리를 하고는 단상 옆으로 걸어나왔다.

그리고 필린의 직원들과 함께 고개숙여 인사를 하였고 이내 회견장을 빠져나갔다.

* * *

“빌어먹을!”

모영배는 분노하며 티비를 향해 재떨이를 집어던졌다.

-쾅

TV 유리가 깨지며 사방팔방으로 유리조각이 튀었다.

옆에 서있던 조상무 역시 움찔했다.

보기 좋게 한 방 먹었다.

필린이 먼저 약물 사용에 대한 입장을 발표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선수들의 약물 사용을 기자들에게 흘려 이번 대회를 폭망시키려는 자신들의 계획이 완전히 어긋나 버린 것이다.

역습.

숨기기는커녕 자청하여 공개를 하고 대상 선수들을 단죄해버린다면 오히려 필린은 이미지 상승의 효과를 가져가게 된다.

더군다나 우승후보들을 조명해준 꼴이 되었다.

약물을 사용했음에도 우승후보들을 이기지 못했다.

약물을 한 선수들임에도 불구하고 하나같이 KO로 무너뜨려 버린 4명의 승자들.

“일준은 왜 명단에 없죠?”

홱!

모영배가 조상무를 돌아보았다.

“정일준이야 말로 약물로 도배가 된 친구아닙니까? 쥐어짤 것도 없이 살갗을 살짝 누르기만 해도 약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놈인데.”

“그러고 보니!”

“두 가지로 봅니다. 정일준을 버리기에는 이번 대회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크죠.”

“흥행 차원에서 덮었다?”

“두 번째는 그가 사용한 약물이죠. 도핑을 빠져나갈 새로운 방법이 있던지. 아니면 투여 약물 자체가 다른건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둘 중에 하나는 확실한 것 같습니다.”

같은 약물을 했는데도 걸린 이가 있고 빠져나가는 선수가 있다.

영리한 토끼는 굴을 여러 개 판다.

다른 선수들에게 넘어갈 약물과 자신이 사용한 약물이 아예 다른 종일수도 있다.

“후자라면?”

“우리가 말을 해줘야죠. 좀 더 진지하고 깊숙한 검사를 해보라고 말이죠.”

정일준은 백두호를 노리고 있다.

반면 모영배는 수미의 목을 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고.

정일준에게 두호는 분명히 버거운 상대다.

무조건 이긴다고 확신할 수 없다보니 결국 약물이 필요했다.

모영배 또한 자신의 뒷골목 사업에 막대한 피해를 주고 떠난 수미를 가만 둘 수 없었다.

이채호 뒤에 있는 수미의 목을 어떻게 쳐야 할까 고민하다 약물을 생각해 냈다.

출전 선수들에게 약을 발라 버리는 것이다.

격투기와 약물.

일준과 모영배는 약물이라는 공통분모로 뭉쳤다.

씨익!

모영배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필린에서 고해성사하듯 선수를 쳤지만 아직 치명적인 히든카드가 남았다.

정일준이다.

준결승까지 올라갔으니 터뜨리면 파장은 지금보다 수십 배 커질 것이다.

운좋게 정일준이 결승에라도 진출한다면, 거기에 우승까지 거머쥐게 되면.

한 번 더 웃는다.

높이 올라갈수록 떨어질 때의 충격파는 크다.

이 어찌 기쁘지 아니한 일인가.

* * *

두호는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민영의 기자회견은 끝났다.

지구촌 스포츠 업계가 금지약물로 몸살을 앓고 있다.

격투기야말로 약물효과의 덕을 보기에 최고에 스포츠다.

‘으흠!’

두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어젖혔다.

단순한 약물이 아니다.

누군가 조직적으로 출전선수들에게 접근하여 불법약물을 뿌린 것이다.

그건 이 대회를 망치려는 세력이 있다는 뜻이다.

‘모영배’

준모와 황석희를 통해서 대충 들었다.

수미가 음지생활을 청산하면서 가장 경제적 타격을 받은 사람이다.

수미에 대한 모영배의 증오와 복수심은 상상을 초월한다.

이번 황석희 죽음도 그의 작품이다.

‘두호씨는 참 특이한 것 같습니다.’

박태준을 차에 실은 뒤 황석희가 말했다.

두호는 무슨 말이냐는 듯 황석희를 바라보았다.

‘사람이 어려워 보이긴 어르신 말고는 두호씨가 처음입니다’

어렵다는 건 무슨 뜻일까.

거의가 아랫사람이 어른을 대할 때 느끼는 감정일 것이다.

그렇다고 황석희 얼굴을 보건데 자신을 어른처럼 보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자주 뵈면 좋겠습니다.’

상대를, 그것도 자신보다 한 참 나이가 어린 사람을 존중하고 대접한다는 건 아무나 지닐 수 있는 인품이 아니다.

그래서 황석희의 죽음이 더욱 안타까운 것이다.

똑똑!

노크소리에 이어 문이 열리고 준모가 들어섰다.

“역시 형님은 대단하십니다. 맞습니다. 수미 어르신도 이채호 대표측 모두 조태건씨에게 사람을 보낸 적이 없답니다.”

그러나 수미쪽에 있다면서 한 사내가 조태건을 찾아와 황석희의 죽음을 전했다.

수미와 채호 모두 치밀한 사람들이다.

대회에 출전한 조태건에게 절친의 죽음을 알리는 따위의 어리석은 짓을 할 리 없다.

팬들과 언론의 조명을 집중 받고 있는 조태건이 만약 장례식장에라도 나타난다면, 친구의 죽음을 견디지 못하고 주먹이라도 휘두른다면 어찌될까.

무조건 게임 아웃이다.

몰려든 기자들이 울분에 가득 차 몸부림 치는 조태건에 대한 기사를 좋게 실어줄 리 없다.

‘PRIDE-K 4강 진출자 조태건 폭력조직에 깊숙이 발을 담그고 있는 걸로 밝혀져’

이런 식의 기사 한 줄이면 이번대회는 끝난다.

조태건과 한바탕 주먹질을 각오하고 막은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누군가 판을 깨려는 자의 음모를 막기 위한 일인 것이다.

“4강까지 올라온 선수를 외부인이 마음대로 만날 수 있을까?”

“누군가 문을 열어 줬다는 것입니까?”

“그럼 닫힌 문을 어떻게 열어?”

준모의 눈이 부욱 찢어졌다.

“이거 보통 싸가지가 없는게 아니네요.”

준모가 씩씩 거리며 문을 열고 나갔다.

* * *

삐그덕 거리며 샷시문이 덜컹 열렸다.

수염이 덥수룩한 사내가 얼굴을 내밀었는데 밖에 서 있는 사내를 향해 손짓을 한다.

“감사합니다.”

밖에 서 있던 사람은 노명환 대리였다.

노명환이 안으로 들어갔고 다시 올려진 셔터는 내려갔다.

안쪽 도어로 된 철문을 열고 들어가자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타났다.

벌써부터 담배찌든내가 물씬 풍겨온다.

계단을 내려가 지하실 문을 열었는데 들어선 노명환은 깜짝 놀랐다.

한쪽 벽면에 수십 대의 컴퓨터가 가동되고 있었다.

불법 도박사이트에 모니터링과 조작을 위해서인지 몇 명의 직원들이 컴퓨터를 옮겨가며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현장 하우스도 겸하는 듯 반대쪽 테이블의 삼삼오오 모여 앉아 카드를 치고 있었다.

‘확실히 여기가 본점이군.’

마침내 이번 PRIDE-K를 놓고 수백억의 판돈을 주무르는 도박조직의 심장부에 들어 온 것이다.

안쪽 사무실로 들어서자 세 명의 정장 사내들이 컴퓨터를 놓고 앉아 있었는데 보나마나 지금 들어오는 판돈을 살피며 승률을 조작하고 있을 것이다.

똑똑!

덥수룩한 수염을 한 사내가 안쪽 사무실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형님 노명환 대리 모셔왔습니다.”

“오! 왔어요?”

잠시 후 정장을 한 마흔 초반 가량의 사내가 나타났다.

노명환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꾸벅했다.

그 사내다.

박종찬.

도박빚을 퉁 쳐줄테니 PRIDE-K의 관련한 정보를 넘겨달라던 사람이다.

“아이고 노대리님!”

반갑게 다가와 악수를 했다.

“앉아요. 이렇게 뵙기는 또 처음이죠?.”

두 사람은 소파에 마주 앉았다.

“이번 대회 죽이던데, 신문 방송 라디오까지 뉴스때마다 pride-k소식이 안 나올 때가 없더만, 협찬사들이 줄을 섰다면서요?”

“좋은 편이죠.”

“그래 4강 대진표를 가져왔다구요? 누굽니까? 누가 누가 붙죠?”

“아마 이것이 소스로 나가면 어마어마한 판돈이 모일 겁니다.”

박종찬이 씨익 웃는다.

당연한 것 아니냐는 의미인데 생각만 해도 온 몸이 짜릿한 듯 몸을 한번 떨었다.

“아차, 손님을 모셔놓고 차 한 잔이 없었다니 잠깐 기다려요. 커피 한 잔 해야지. 그리고 투자 얘기도 이참에 하시죠.”

박종찬이 돌아서는 순간 노명환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숫자패드의 1번을 누르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가 가는 소리가 들리자 재빨리 붉은색 종료 버튼을 눌러 끈다.

그때, 박종찬이 돌아본다.

차가운 시선에 손에 쥔 핸드폰이 땀에 찬다.

노명환을 무심히 바라보던 박종찬이 묻는다.

“블랙? 라떼? 말만하슈. 다 돼. 다.”

“다방커피요.”

노명환이 비식 웃었다.

노명환은 길이 전혀 없는 건 아니라는 채수의 말에 한 가닥 희망을 발견했다.

채수의 요구조건은 간단했다.

도박 사이트 본부가 어딘지를 알아내는 것이었다.

같이 손을 잡고 거래를 하고 있지만 자신들의 심장부를 가르쳐줄 리는 절대 없었다.

그런데 채수는 한가지 귀띔을 했다.

‘4강 대진표를 넘겨주면서 노대리님도 투자를 하고 싶다고 얘기하면 쉬울 겁니다.’

그렇게 하여 여기까지 들어온 것이다.

노명환은 가만 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경찰을 달고 여기까지 온 것이다.

한편 셔터문 밖에는 수십 명은 되어보이는 사내들이 서 있었다.

노명환에게서 온 통화를 확인한 노장철 팀장이 소리쳤다.

“진입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대형 빠루를 들고 있던 두 형사가 셔터의 잠금장치를 비틀기 시작했다.

끄윽!

투투툭!

대여섯 번 밀고 당기자 안쪽 자물쇠가 터져 나가면서 셔터를 밀어 올렸다.

우르르!

형사들이 문을 열고 들어가 지하 계단을 내려갔다.

콰앙!

갑자기 지하실이 시끄러워졌다.

“썩은내가 진동하네.”

출입문이 통째 떨어져 나가면서 노장철 팀장이 들어섰다.

“아 나쁜 사람아니니까 다들 긴장푸시고. 지금부터 불법 도박 사이트 단속과 불법 도박 영업장 개설 단속을 실시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씨익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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