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7화 : 당장 내게 싸움을 걸어라.
일준이 손을 번쩍 내민다.
터치 글러브 사인을 보내니 눈을 찡그리는 오재민이었다.
‘이 자식한테는 모든게 장난인가?’
첫 라인업 상황에서 자신에게 욕지거리를 해대놓고는 이제야 터치글러브라니.
오재민은 손을 저으며 거부 반응을 보였다.
그러자 일준은 손을 들며 왜 터치글러브를 안해주냐는 행동을 취했다.
누가 본다면 정말 매너있는 선수가 아쉬워하는 듯 했다.
오재민은 신중하게 탐색했다.
저런 가벼운 행동은 둘째치고 실력만큼은 우승후보라고 불리는 일준이었으니까.
일준의 통통 튀는 스텝을 밟는다.
재민이 눈이 빛난다.
‘지금 뭐하자는 거지?’
양손을 모두 내린 채로 미소 짓는 일준.
두호는 그 모습을 차분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일준이 던지는 끊임없는 도발과 허수.
만약 일준과 승부를 벌인다면 평정심과 냉철함을 제일 중요시 여겨야 할 듯 싶다.
저만큼 건들거리며 자극하는데 흔들리지 않을 선수가 몇이나 될까.
스으으!
일준이 몸을 튼다.
일반적인 자세가 아니라 한쪽 부위를 완전히 대주는 자세.
격투기를 업으로 삼는 사람이라면 정신을 못 차리고 입을 댈 달콤한 쥐약이다.
이른바 소리장도(笑裏藏刀), 웃음속에 칼을 숨기고 있다.
멋모르고 이때다 싶어 들어갔다간 돌이킬 수 없는 공격을 당할 것이다.
두호는 숨겨진 칼을 보았지만, 재민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사아악!
곧바로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일준에게 달려든다.
슈슉!
기세 좋게 날라가는 더블잽.
일준은 살짝 뒷발만 옮겨 처음 잽 한방을 어깨로 막아냈다.
오재민은 이게 웬 떡이냐라는 표정이 꿈틀거렸다.
‘잘가라.’
두 번째 잽 역시 일준이 오른손으로 패링해 냈지만 오재민의 진짜 노림수는 따로 있었다.
왼손을 걷어내자마자 나오는 오른손 스트레이트.
순간 일준의 표정이 한없이 진지해지며 왼팔을 뻗었다.
‘어?’
-촤악
갑자기 오재민이 얼굴을 감싸 쥐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심판이 굳은 표정으로 달려들었고 일준은 한없이 미안한 표정이었다.
예전 주짓수 수련관에서 보였던 미소였다.
관객들은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쓰러진 오재민을 살폈다.
“뭐야? 뭔 일인데”
“그냥 펀치 맞아서 KO 된거 아니야?”
주위 관중들이 반쯤 일어나 내려다본다.
예수 역시 눈을 좁히며 살피는데 주먹에 맞아 넘어진 것은 아니었다.
“어떻게 된거죠?”
예수가 고개를 돌려 물었다.
“긁었어요.”
“네?”
두호는 눈을 좁혀 떴다.
펀치에 맞는 소리는 여러 가지이다.
퍽!
빠악!
펑!
전문가는 멀리서 소리만 듣고도 주먹인지 발길질인지 아니면 머리로 박았는지 구별한다.
타격의 각도와 맞은 신체 부위에 따라 소리는 또 달라진다.
그렇지만 단언컨대 펀치를 맞았을 때 저렇게 짝 소리가 나기는 불가능하다.
펀치가 아닌 때리는 척하면서 손가락으로 긁었다.
써밍(Thumbimg).
쉽게 말해 손가락으로 눈을 찌르는 행위다.
격투기 경기중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실수이자 반칙이다.
두호의 눈으로 보았을 때 이건 실수가 아닌 치밀한 고의였다.
주먹이 아닌 손바닥으로 소리를 교란한 다음 스쳐 지나가며 손가락으로 눈을 긁은 것.
쓰러진 오재민의 상태를 살피러 닥터들이 케이지 안으로 뛰어 들어온다.
실핏줄이 터진 듯 이미 눈은 많이 충혈되어 있었고 눈물이 멈추질 않는다.
꽤 깊게 들어간 써밍으로 인하여 부상 정도가 심각한 것.
심판이 경고를 하기 위해 일준으로 다가갔다.
“써밍입니다. 오재민 선수 부상이 심해 보입니다.”
일준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아니. 일부러 친 것도 아닌데.”
그 말에 관중석이 술렁거린다.
“고의다!”
“저자식 저거 분명 고의야!”
고의는 반칙패를 줄 수 있다.
그때였다. 쓰러져 있던 오재민이 벌떡 일어난다.
오재민은 눈물이 가득한 한쪽 눈을 매만지면 심판에게 다가갔다.
“진행하시죠.”
심판이 무슨 소리냐는 듯 바라본다.
“부상이 너무 심각해서 안됩니다.”
오재민은 단호했다.
“됐다구요!”
오재민이 버럭 짜증을 낸다.
분노했다.
심판은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심판은 일준에게 경고를 부여하고 경기는 다시 시작되었다.
두 선수는 거리를 두고 서로를 견제했다.
그러나 써밍을 당한 데미지가 회복이 되지 않은 오재민은 자꾸 한쪽 눈을 찡그렸다.
하체는 모든 스포츠의 가장 우선적인 기능인 반면, 눈은 상대의 움직임을 쫓는 레이더의 역할.
그건 곧 발과 눈이 인간이 만든 스포츠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이라는 걸 의미한다.
슉!
슉!
오재민의 주먹은 시야에 문제가 있음을 바로 보여주고 있었다.
자신은 타격거리라고 생각해 주먹을 뻗었겠지만 아슬아슬하게 스치거나 닿지 않았다.
반면 일준은 오재민의 한쪽 시야가 거의 먹통 수준이라는 걸 간파하고 철저한 아웃파이팅을 유도했다.
빡!
파팍!
강력한 일준의 로우킥이 오재민의 앞 다리 허벅지를 찍는다.
로우킥으로 치고 반격해 들어오면 멀리 도망가 버리는 일준.
학학!
오재민의 숨이 끓어 오른다.
분노가 흥분으로 바뀌면서 점차 이성이 마비되고 있다.
부웅!
회심의 한방이 이번에도 빗나간다.
시야가 불편한 오재민은 갈수록 밀렸다.
처억!
아웃파이팅을 하던 일준이 케이지 울타리에 등을 기댄다.
파고드는 오재민이었고 밖으로 도는 일준이었기에 전혀 이상한 행동은 아니다.
씨익!
일준이 웃으며 들어오라는 손짓을 한다.
인파이팅을 하자는 뜻이다.
시야가 제한당하고 있는 오재민으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다.
“컴 온, 내가 기회를 주는 거야. 미안해서.”
뿌드득!
일준은 약을 올린다.
오재민은 더욱 흥분했는데 그럴수록 일준은 재미있다는 듯 실실 웃는다.
일부 관중들이 분통을 터뜨린다.
“너무 하는 것 아냐.”
“심리전도 실력이라지만 이건 스포츠라고, 정일준이 지금 너무 심한데.”
반칙으로 얻어낸 운영과 자극적인 도발.
그리고 쉬지 않고 뱉어내는 오재민을 향한 빈정거림은 경기장을 화약냄새 가득한 전장으로 만들었다.
“후회하지마라.”
오재민은 저돌적으로 들어가면서 주먹을 휘둘렀다.
퍽!
빠바박!
웬일인지 일준도 피하지 않고 맞서 주먹을 뻗는다.
클린치가 없는 치열한 난타전.
두 사람이 뻗어낸 흉흉한 주먹은 금방이라도 상대를 박살 낼 것 같았다.
하지만 둘 모두 뻗어내는 주먹은 많았으나 정타는 그다지 없었다.
서로의 스텝이 좋고 날아오는 주먹을 눈 부릅뜨고 보기 때문이다.
퍼퍼퍽!
오재민은 여기서 끝내려는 듯싶었다.
라운드가 끝나고 눈에 대한 치료가 있겠지만 채 일 분도 안되는 시간 안에 정상으로 돌아올 부상이 아니다.
그렇다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지금 판을 끝내야 한다.
“놀라운데요!”
예수가 눈을 빛냈다.
필사적인 오재민의 주먹이 여러 차례 일준의 몸을 찍었다.
일준도 피하지 않는 것이다.
빡!
빠바박!
오재민의 강력한 훅이 옆구리와 턱을 찍어도 일준의 상체는 요지부동이다.
피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어지간한 오재민의 주먹은 무시하듯 그냥 맞고 자신의 공격에만 전념했다.
‘이건 또 뭐지.’
오재민이 순간 당황한다.
일준은 분명 아프다고 비명을 지른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비명을 질렀으면 신체에 반응이 나타나야 하는데 일준의 몸은 전혀 흐트러짐이 없었다.
하하학!
때리다 지친다.
일준이 헐떡거렸고 주먹의 속도가 느려진다.
뻥!
바로 그때, 오재민이 가쁜 숨을 내쉬기 위해 약간 턱을 들어 올리는 순간 일준의 주먹이 날아와 다친 눈을 정확히 때렸다.
체력이 떨어지면서 가드가 내려가고 턱이 올라가는 기회가 오자 놓치지 않고 때린 것이다.
퍼퍼퍽!
집요하다.
오재민의 다친 눈만을 파고드는 일준의 파상적인 주먹.
사냥감의 약점을 물고 늘어지는 것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사냥 방법이다.
이번에는 숏 어퍼.
서로 상체가 붙어 있다 싶은데도 정확히 들어간다.
팟!
관중석 두호의 눈이 반짝였다.
각도와 타이밍.
그리고 자세까지 자신이 예전 일준을 다운시켰던 기술 중 하나였다.
어퍼컷으로 고개가 들린 오재민.
그러자 창 한 자루를 찔러넣듯 날카로운 스트레이트가 오재민의 턱을 관통한다.
빠아아!
정확했다.
휘청하던 오재민이 스르르 무너진다.
파운딩에 들어가려는 일준을 밀치고 심판이 손을 저었다.
쓰러진 재민은 움직이지 못했다.
그런데 KO를 선언하던 심판의 눈이 커졌다.
바닥에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다친 재민의 눈에서 기어이 피가 터져 흘러내린 것이다.
KO를 끌어낸 일준의 마지막 잽을 오재민이 피하지 못한 것은 눈 때문이었다.
이미 그땐 눈이 핏물로 가득 차버린 것이다.
“으아아아!”
일준은 케이지의 철장 위로 번쩍 뛰어올라간다.
양주먹을 쳐들고 포효하는 그를 향해 관중들이 열광한다.
“오늘 경기 다 재밌네!”
“일준아 우승까지 가자!”
하지만 욕설도 튀어나왔다.
“의도적으로 눈을 찔렀어. 그때 심판이 저 새끼에게 반칙패를 선언했어야 한다고.”
“저 새끼 진짜 끝도없이 더러운 새끼구만!”
주위 관중들의 욕을 들으며 예수는 두호를 살폈다.
두호와 일준의 관계를 아는 그녀로서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두호는 아무 말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찮으세요?”
때려죽여야 할 적은 보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다.
예수는 두호의 마음을 어느 정도 헤아리며 뒤를 따라간다.
‘흠!’
마지막 일준의 숏 어퍼.
그것은 자신의 대한 일종의 선전포고였다.
그날을 잊지 않았다는.
두호는 혼잣말을 하듯 걸어갔다.
“자식 이정표가 정확하네.”
두호는 문을 열고 나갔다.
* * *
TV를 보던 모영배가 껄껄 소리를 내며 웃는다.
“저놈, 인물은 인물이야.”
한쪽에 따로 앉아 텔레비전을 보던 조상무가 고개를 끄덕인다.
“이 바닥 싸움과는 결이 다른 친구죠.”
사람에게 해를 입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자신의 것을 지켜내는 것이 최우선인 사람.
이 바닥 사람들은 그것을 기질이라고 한다.
그리고 일준은 그 기질이 차고 넘치는 사람이다.
그와 붙어본 사람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꼭 짐승이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의 지독함에 슬슬 피하는 것이다.
모영배가 TV를 끄고 천천히 차리에서 일어났다.
“볼수록 마음에 드는 놈인데.”
모영배는 탁자 위에 놓은 마른 한지를 접어 창가로 걸어갔다.
슥!
난 잎을 닦는다.
식물의 잎을 자주 닦는 것도 스트레스를 주는 일이지만 방치해도 좋지 않다.
특히 난이란 놈은 더욱 그렇다.
정성이 들어간 만큼 꽃을 피워낸다.
“저 친구가 우승하면 우리에게 얼마나 떨어지나?”
갑작스런 질문에 조상무의 눈이 좁혀진다.
말에 담긴 속뜻을 간파하려는 것이다.
“적지 않습니다.”
이 바닥의 생리란 참 신기하다.
적이든 동료든 돈이 될 땐 미련 없이 장사에 나선다는 것이다.
즉 일준에게서 좀 더 분명한 돈의 모습이 보인 것이다.
“결승전은 갈 것 같고?”
조상무 넌 어떻게 보느냐는 질문이다.
“갑니다!”
“판이 더욱 커지는군.”
모영배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많은 기자들이 모여있다.
언제든지 카메라 셔터를 누를 수 있는 자세로 잔뜩 긴장해 있다.
삐익!
닫힌 문이 열리며 필린의 직원들이 쏟아져 나왔다.
걸어 나온 직원들은 책상 뒤로 병풍처럼 도열했고 하이힐 소리가 들리며 흰색의 의사 까운을 걸친 도민영이 나타났다.
철컥!
촤르륵!
카메라 셔터 누르는 소리가 소낙비다.
도민영은 의자에 앉았다.
책상 위에 올려진 마이크를 자기 높이에 맞게 조절한 뒤 둘러싼 기자들을 훑어 보았다.
“안녕하십니까.”
그녀는 미리 준비해온 발표문을 읽기 시작했다.
“이번 PRIDE-K의 메디컬팀 팀장인 닥터 도민영이라고 합니다. 제가 오늘 이 자리 선 이유는 이번 대회를 둘러싼 약물 사용의 대하여 입장을 발표하기 위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