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6 화 : 당장 내게 싸움을 걸어라.
태건은 자신을 향해 형님이라고 하는 걸 보아 수미의 부하중 한 명이라고 판단했다.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많아 낯선 이들이 적지 않았다.
“황석희 부 사장님께서 사망하셨습니다.”
콱!
태건은 어느새 사내의 멱살을 거머쥐었다.
“뭐라고? 누가 죽어?”
태건의 눈이 불길처럼 타오른다.
“컥! 캐캑!”
격투기 선수가 쥔 멱살이다.
사내는 금방이라도 넘어갈듯 캑캑거렸다.
태건이 손을 떼며 물었다.
“말해!”
“황 부사장님께서.”
이어 사내는 그동안 있었던 일을 짤막하게 설명했다.
사내의 얘기가 끝났다.
태건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잡아 먹을 듯 했던 불같은 눈빛도 사라졌고 표정도 가라앉았다.
뚝!
경기의 여파가 가시지 않은 땀방울이 복도에 떨어진다.
“전 그만!”
사내는 허리를 숙이고 몸을 돌려 사라졌다.
태건은 그렇게 홀로 서서 움직일 줄을 몰랐다.
‘석희가.’
싸아악!
양손으로 세수하듯 얼굴을 밀어 올렸고 땀방울이 우수수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 자식이 왜 죽어.’
얼어 붙어버린 듯 태건은 움직일 줄 몰랐다.
“진정하시죠. 마음은 알지만.”
필린의 직원들이 지하 주차장에서 쩔쩔매고 있었다.
“태건씨! 지금 팬과 언론들이 얼마나 주목하고 있는지 아세요?”
그들이 막아서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태건이었다.
“가봐야 합니다.”
반드시 가야 할 자리다.
단 한 명 뿐인 친구가 저 세상으로 떠났다.
그는 희망이었다.
실패하여 고개를 숙이면 온화하게 웃었고, 지쳐 비틀 거리면 끌어안고 위로 하던 친구였다.
“이러지들 마십시오. 날 기다리고 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힘으로 제압하여 진정시키고 싶지만 상대가 누구인가.
PRIDE-K 우승후보라고 불리는 조태건이다.
그때 누군가가 주차장 유리문을 열고 걸어나왔다.
모두의 시선이 돌아갔는데 두호였다.
황급히 직원들은 손을 들어 도움을 요청했다.
“두호씨 여기 좀.”
일제히 손을 들자 두호의 고개가 돌아갔다.
두호는 무슨 일인가 싶은 듯 천천히 다가왔다.
직원 한 명이 재빨리 다가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말해주었다.
두호의 안색이 굳어진다.
필린 직원들의 부산한 움직임은 경기장을 메아리치던 관중들의 함성과 흥분을 한순간 눌러 버릴 만큼 돌발적이었다.
그리고 조태건이 왜 여기에 필린 직원들과 대치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이러지 마십시오. 비키시죠.”
태건이 싸늘한 눈빛으로 두호를 보며 말했다.
두호는 고개를 젓는다.
“태건씨!”
“이러지 말라니까요. 왜 나를 힘들게 합니까?”
태건이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왔다.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고 경기중이라면 TKO당할 사정권이다.
“어르신이 아낀다고 저까지 그럴 것이란 생각은 마십시오.”
태건의 눈이 가라 앉는다.
그건 적을 공격하기 직전에 보여주는 조태건 특유의 신체 반응이다.
하지만 두호는 전혀 비켜줄 마음이 없는 듯 움직이지 않았다.
“그 마음 조금은 압니다.”
“뭘 안단 말입니까?”
“나 또한 수 많은 동료들을 잃어본 기억이 있습니다. 10분 전까지 마주보고 앉아 얘기하던 동료가 먼저 간다는 인사 한마디 없이 저격으로 쓰러질 때 그 기분 어떤 줄 아십니까? 무려11개월 만에 맥주 한 잔 마시는데 자살 폭탄테러가 일어나 아홉 명이 죽었습니다. 300CC도 안되는 그 맥주 한잔을 채 마시지도 못하고.”
출렁!
태건의 눈이 흔들렸다.
놀란 것이다.
두호의 눈빛을 보아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지금 당장 타오르는 감정으로 행동하면 결과는 결코 아름답지 못합니다. 지금 가면 어르신과 황 부사장이 해오던 모든 노력이 물거품으로 변한다는 얘깁니다.”
태건이 말없이 앞을 막고 있는 두호를 바라볼 뿐이다.
두호가 갑자기 손을 들었다.
그러자 주차장 안쪽에서 준모가 번개같이 달려와 담배를 내민다.
“여깄습니다.”
슥!
담배를 꺼내 물더니 불을 붙였다.
그리고 천천히 다가가 태건에게 담배 한 개비를 권했다.
태건히 아무말 없이 담배 한 개비를 뽑아 물자 두호는 불을 붙여 주었다.
두 사람 모두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준모의 눈은 더욱 휘둥그레졌다.
넓은 지하 주차장에 두 사람의 담배 연기 내뱉는 소리만이 전부다.
“내가 먼저 죽을 줄 알았는데.”
태건의 목소리가 떨린다.
삶에 미련이 없던 사람은 황석희보다 자신이 아닌가.
너무 일찍부터 고달팠다.
인생의 첫 출발이 제과점 진열대에 있는 고로케 하나를 훔치는 것이었다.
훔치고, 또 훔쳤다.
그러다 어느 한 순간부터는 뺏기 시작했다.
뚝방길에서 제일 잘 뺏는 놈, 굴다리에서 가장 무서운 놈.
황석희와 조태건은 그렇게 만났다.
그리고 인근 중고등학교 학생들에게 둘은 저승사자가 되었다.
“이 대표가 왜 직원들을 보내 앞을 막았을까요?”
태건은 간헐적인 재채기를 하면서도 담배 연기를 끝까지 삼켰다 뱉는다.
“태건씨가 장례식장에 나타나면 기자들이 가만 있을까요. 태건씨는 PRIDE-K강력한 우승 후보입니다. PRIDE-K 강력한 우승후보가 조폭들의 장례식장에 나타났다는 한 줄 기사면 게임 아웃입니다. 죽을 힘을 다해 쌓아 올린 PRIDE-K라는 공든 탑은 무너지죠.”
태건이 눈을 치켜떴다.
“기자가 아니더라도 누군가 악의를 품고 언론사에 귀띔해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아직도 우리사회는 격투기를 깡패들의 싸움 정도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담배를 문 태건의 입술이 부들부들 떨린다.
“황 부사장님이 바라는게 그런 걸까요?”
가야 하지만 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를 더욱 분노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조상무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게 정말이야? 이럴 리가 없는데.”
조상무 인상이 잔뜩 구겨졌다.
“계속 더 기다려 봐.”
“무슨 전화야?”
모영배가 전지 가위를 들고 나타났다.
“두 놈 모두 아직 얼굴을 비치지 않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모영배는 정원 한쪽에 있는 분재 찌들목 소나무를 향해 다가갔다.
용수철 마냥 구불구불 휘어진 줄기와 부채살처럼 옆으로 퍼지는 가지는 아무 곳에서나 볼 수 있는 소나무가 아니다.
“사람을 보내 보지 그러나?”
“그렇잖아도 조수미 부하로 위장하여 황석희 죽음을 알렸습니다만.”
뚝!
모영배가 전지를 하다말고 고개를 돌렸다.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함께 죽는다는 두 놈 아닌가?”
즉 만사를 제쳐두고 장례식장으로 달려가야 정상인 것이다.
만약 나타나기만 하면 자신이 잘 아는 기자 몇 명을 보낼 생각이었다.
백두호는 그렇다 쳐도 조태건은 지금쯤 절간에 있어야 한다.
“그 여자는 뭐하고 있어?”
“봉발탑 앞에 엎드려 매일 백팔배를 올린다고 합니다.”
툭!
전지를 하던 모영배가 가위를 떨어뜨렸다.
“아무래도...”
모영배의 표정이 굳었다.
그리고 흘긋 하늘을 보는데 뜨거운 태양이 무자비하게 쏟아진다.
“헛헛!”
모영배는 실소를 짓더니 떨어뜨린 가위를 들어 다시 전지를 하기 시작했다.
“독이 바짝 올라있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툭!
투툭!
모영배는 말없이 가지를 자른다.
말단 부하가 다치는 것 조차도 용서않는 수미다.
되로 받으면 반드시 말로 갚아준다.
그런데 수족인 황석희가 죽었으니 어떤 마음으로 맨땅에 무릎을 꿇고 백팔 배를 했을지 짐작이 간다.
“바짝 긴장해.”
이제 어느 한쪽이 소멸되지 않는 이상 이 전쟁은 멈출 수 없다.
누가 죽든 죽어야 끝난다.
“무자비한 공격이 오겠지. 어쨌든 삼우제까지는 조용할걸세.”
모영배는 귀한 소나무인 듯 조심스럽게 가위질을 했다.
* * *
이제 PRIDE-K의 8강전은 단 한 경기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케이지 안에서는 지금 가장 인기 있다는 아이돌 그룹의 공연이 진행되고 있었다.
예수는 그 공연을 쓴웃음을 지으며 보고 있었다.
‘방금까지 피터지게 싸운 곳에서 공연이라니...’
실제로 단3경기를 치뤘을 뿐이지만 바닥에는 피가 흥건했다.
공연을 위해 바닥의 피를 닦아 냈지만 아직도 곳곳에 붉은 자국이 보인다.
노래는 잘 나올까 궁금해진다.
척!
기척에 고개를 돌리자 두호가 자리로 돌아와 앉는다.
“방탕소년단이죠?”
“네!”
아무나 부를 수 없는 초특급 아이돌이다.
초대한 가수들의 면을 보더라도 이번 대회에 임하는 이채호의 각오를 엿볼 수 있었다.
‘채호답다’
방탕소년단의 무대가 끝나고 장내 아나운서가 입장했다.
“PRIDE-K 8강전의 마지막 경기. 엘리게이터 정일준 선수와 더 이글 오재민 선수입니다. 큰 박수와 환호 부탁드립니다!”
파팟!
경기장 조명이 꺼졌다.
그리고 입장하는 오재민에게 모든 조명이 쏟아졌다.
관중들이 힘차게 재민의 입장곡을 따라 부른다.
두호는 예수에게 물었다.
“오재민 선수는 어떤 스타일입니까?”
강자로 분류된 선수들의 정보는 대부분 파악했다.
하지만 오재민은 두호도 그렇고 필린에서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돌발 선수였다.
예수는 시끄런 노래 때문에 큰 목소리로 말했다.
“킥복서 출신이에요. 기본적인 그래플링도 잘 장착되어 있어서 고른 능력치를 분포한 선수죠.”
킥복서 출신이라는 말에 두호는 눈을 빛냈다.
같은 스타일의 운동을 했다는 건 살펴야 할 필요성을 보여준다.
오재민이 입장을 마치고 다시 장내는 어둠에 덮였다.
쿵쾅!
갑자기 거친 타악기 소리가 울렸는데 낯익은 멜로디라는 듯 관중들은 재빨리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파팟!
라이트가 켜지고 일준이 걸어 나온다.
QUEEN의 WE WILL ROCK YOU가 울려 퍼진다.
일준은 음악에 맞춰 춤을 추며 나왔다.
“정일준, 정일준.”
“일준이 형님 파이팅. 우승 가즈아!”
팬들이 환호가 있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핏대를 올리기도 했다.
“저 양아치 새끼.”
“재벌집 아들 새끼가 이런델 왜 나오냐.”
“내 말이!”
그때 일준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졌다.
‘오늘도 약이냐’
한 명의 관중이 피킷을 들고 있다.
순간 일준이 씨익 웃더니 가운 손가락을 올렸다.
한마디로 좆까라는 뜻이다.
“저 개새끼!”
“씹새끼!”
여기저기서 삿대질을 하고 흥분한 일부 관중이 물병을 던졌다.
그러자 일준은 날아온 불명 한 개를 받아 관중석으로 던져 버렸다.
“죽여라. 저 시발놈 죽여.”
선수와 관중이 흥분하여 서로를 향해 욕설을 뱉고 고함을 질렀다.
녹화 방송으로 나가기 때문에 이런 장면은 편집되겠지만 장내는 한마디로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일준은 주심에게 주의 사항을 전해 들었고 눈 부위에 바셀린을 바른다.
일준은 껑충 뛰며 케이지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화라락!
연거푸 텀블링을 하더니 쿵 소리와 함께 몸을 세운다.
휘익!
갑자기 케이지 위로 가랑이를 걸치고 올라가 자기 팬들을 향해 주먹을 흔들었다.
“일준, 일준, 일준!”
팬들은 미친 듯 일준이란 이름을 외쳤고 그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맞장구를 쳤다.
“족까라, 족까라, 족까라.”
양쪽 모두의 극렬한 대립에 나머지 관중들은 배꼽을 쥐고 웃는다.
그리고 이 경기야말로 가장 신나고 즐거운 미국판 경기가 될 것이라 기대했다.
바닥으로 내려선 일준은 가운데 모여 심판의 설명을 듣는다.
심판의 룰 설명이 끝나고 각 코너로 돌아갈 것을 명하자 일준이 악수를 청하자는 듯 먼저 손을 내밀었다.
오재민은 정중하게 허리를 약간 구부리며 오른손을 뻗었다.
그 순간 일준의 엄지손가락이 중지와 검지 사이로 틀어박혔다.
그리고 돌아서버리는 일준.
“저런 개새끼가...”
어린애들이나 쓰는 욕을 면전에서 받은 오재민이 흥분한다.
심판은 그러든 말든 힘차게 손을 내린다.
“파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