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5화 : 당장 내게 싸움을 걸어라.
딸랑! 딸랑!
바람에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이 흔들린다.
탁탁탁탁!
넓은 대웅전에 목탁 소리가 울려퍼지며 석가모니불상 아래로 검은 천을 두른 영정사진 하나가 놓여 있다.
‘(원아진생무별염) 이 목숨 다하도록 다른 생각 하지 않고...
(아미타불독상수) 오직 한 길 아미타불 부지런히 정근하며...
(심심상계옥호광) 마음 마음 한결같이 옥호광명 끊이없이...’
목탁소리와 함께 영가(죽은이)의 극락 왕생을 축원하는 장엄불경이 울려퍼진다.
대웅전 좌우로는 검정색 양복을 입은 사내들이 도열해 있었는데 모두가 침통한 얼굴이다.
스윽!
그때 활짝 열린 대웅전 문안으로 채호의 머리가 들어왔다.
누군가를 찾는 듯 살펴보더니 등을 돌렸다.
“대표님!”
대웅전 계단을 내려가는데 누군가 다가왔는데 경수였다.
“아, 예!”
“바쁘실텐데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연히 와야죠. 어르신은?”
채호가 주위를 둘러보자 경수가 한쪽으로 손을 가리켰다.
“가시죠.”
대웅전을 올라오는 길 좌우로 수백 개의 조화가 놓여 있었고 지금도 끊임없이 조화들이 날라지고 있었다.
아랫마당으로 내려간 경수는 왼쪽으로 있는 용화전(龍華殿)이란 현판이 걸린 작은 전각 뒤로 돌아가자 아담한 요사채가 있었다.
“어르신 필린 이채호 대표님 오셨습니다.”
덜컹!
문이 열리고 승복을 입은 승려가 나왔다.
“어서 오십시오.”
젊은 승려가 합장을 했고 채호도 마주 손을 모아 허릴 숙였다.
채호는 신발을 벗고 마루에 올라섰다.
채호가 방안으로 들어가자 승려는 말씀 나누시라면서 문을 닫아주었다.
탁!
수미는 차를 마시고 있었다.
“차 한 잔 하지.”
수미는 찻상 한쪽으로 엎어진 작은 찻잔을 들어 놓았다.
또르르르!
차 주전자에 담긴 연분홍빛 찻물이 잔을 채운다.
“올해 딴 햇차라는데 향기가 좋네.”
채호는 한 손으로 찻잔을 쥐고 다른 한 손으로 밑을 받치며 들어올렸다.
후룹!
조용히 소리내어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잔을 내린다.
침묵이 흐른다.
“잠시 걸을까.”
채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방을 빠져나와 작은 오솔길을 걷는 두 사람.
이제는 확실히 여름인지 매미소리가 조금씩 들려오기 시작했다.
수미는 말없이 뒷 짐을 진 채 걸었고 그 뒤를 채호가 따라가고 있었다.
스님의 독경소리가 더욱 커지고 대웅전을 향해 몰려오는 조문객들의 수가 많아지고 있었다.
막 피기 시작하는 해바라기가 바람에 흔들거린다.
수미는 해바라기를 보며 말했다.
“인생이란 게 참 웃기지 않나.”
갑자기 실소를 터뜨리듯 말꼬리를 비튼다.
“기회는 언제나 고통보다 한 발 늦단 말이야.”
툭!
수미는 손을 뻗어 해바라기 줄기에 붙은 잎사귀 한 개를 떼어냈다.
“기회는 언제나 고통보다 한발 늦지. 그 끝 없는 고통을 이 악물어 참고 포기하듯 흘려보내야 겨우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가.”
수미는 천천히 작은 계단을 내려 좌측으로 걸어갔다.
거기엔 조그만 연못 하나가 있었는데 물위로 쭈욱 올라온 백련이 곧 개화하려는 듯 주먹만큼 뭉쳐 있었다.
“겨우 기회가 왔던거야. 보잘 것 없던 굴다리 양아치 인생에 막 봄바람이 불어 오려는데 이렇게 가버렸어.”
황석희 얘기를 하고 있다.
최측근중 한 명이긴 하지만 생각보다 황석희가 수미의 가슴속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큰 모양이다.
그 때문인지 평소에 하지 않던 속마음이 흘러나왔다.
“황 부사장을 처음 봤을 때 참 좋았네. 이 바닥에서 그런 성격으로 살아남는다는 것이 쉽지 않거든.”
뒷골목을 터전으로 사는 사람들은 싸움으로 인한 죽음보다 배신으로 삶을 마무리한 경우가 더 흔하다.
그 배신의 배후에는 돈이라는 전지전능의 괴물이 웅크리고 있다.
황석희는 달랐다.
부하들에게는 끝 없는 충성을 이끌어냈고 상사에게는 막연한 신뢰를 얻어냈다.
자기 밑에서 그만큼 고생했으면 내 몫 좀 떼어달라고 할 법도 한데 그냥 열심히 일에 열중했다.
수미의 표정은 복잡했다.
“그래. 그런 놈이었어.”
사박사박!
수미의 검정색 단화가 절간의 땅바닥을 밟는다.
부처님의 옷과 밥그릇을 형상화한 둥근 돌탑 앞에서 수미는 절을 하기 시작했다.
채호의 눈은 커질대로 커져 있었다.
수미가 맨땅 흙바닥에서 그대로 무릎을 꿇고서 절을 했다.
초여름 날씨에 입은 것이라고는 검정색 투피스가 전부다.
방석이 깔린 바닥도 아니고 자잘한 모래알들이 가득한 지면에 홑겹 치마가 얼마나 무릎을 보호할까.
‘어떻게...’
땅 바닥이라고 대충이 없다.
대웅전 석가모니불 앞에서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절을 올리는 어머니의 정성과 하나도 다를바가 없다.
오히려 탑을 바라보는 눈은 더욱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초여름이지만 이미 30도에 육박하는 더운 날씨다.
‘서른 여섯...서른 일곱!’
채호는 자신도 모르게 숫자를 세고 있었다.
툭툭!
땀방울이 지면으로 떨어진다.
채호의 눈이 커졌다.
쉰세 번째 숫자를 셀 때 무릎 근처 치마가 물에 젖는다.
피다.
기어이 무릎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만 것이다.
하지만 수미의 동작은 조금도 주춤하거나 머뭇거리지 않았다.
무릎이 닿은 지면에까지 피가 베이면서 촉촉하게 젖는다.
‘아흔 아홉’
백팔배를 하려는 모양이다.
그랬다.
그녀는 기어이 백여덟이라는 숫자가 끝나고서야 멈추었다.
휘청!
비틀거리자 채호가 다가섰다.
“어르신!”
슥!
다가오지 말라고 손을 내밀어 막는다.
“우후.”
천천히 숨을 고르는 수미.
주르륵!
치마가 무릎에서 떨어지며 피가 정강이를 타고 흘러내린다.
“이걸로 좀 닦으시죠.”
채호는 재빨리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건넸다.
“고마워. 이대표”
수미는 채호가 건네주는 손수건으로 흐르는 땀방울을 닦았다.
“세탁을 해야 할텐데.”
남의 손수건을 물에 적신 듯 푹 젖게 하며 미안한 모양이다.
“피도 닦으셔야죠.”
“놔두면 멈추는 게 피 아니던가.”
수미는 잠시 땀에 젖은 손수건을 쥐고 작렬하는 태양을 올려다보더니 걸음을 옮겼다.
‘(구경연민은) 장생해도 끊임없이 연민하신 크신은혜
(진겁불능궁소분)한평생을 다하여도 소분에도 못미치니
(시고아금공경례)그러므로 제가 이제 공경예배 하옵니다’
스님의 독경 소리가 더욱 크게 울려 퍼졌다.
“무엇을 소원하셨습니까?”
슬쩍 물으면서 무릎 아래 다리를 보았다.
아닌게 아니라 피는 멈췄지만 말라붙은 핏자국은 그대로 있었다.
“무엇을 빌었냐고? 글쎄.”
수미는 잎사귀 우거진 벚나무 아래서 걸음을 멈췄다.
“내가 뭘 빌었지. 아아.”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고 점점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모영배 그 놈 모가지 잘라다가 석희 묘 앞에 걸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네.”
“우훕!”
채호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부처님께 복수하게 해달라는 기도.
“아주 천천히, 자근자근 밟아 죽일 수 있도록 말이야.”
그러면서 저만치 앞서 걸어갔다.
* * *
콰앙.
김민수가 케이지에 부딪혔다.
태건은 자세를 잡고 끊임없이 공격을 퍼부었다.
경기는 예상과는 달리 철저한 아웃파이팅이었다.
타격에 정통한 두 사람이다 보니 수싸움은 끝을 모르고 이어졌고 그 결과 화끈한 경기가 아닌 철저한 아웃파이팅 싸움으로 진행되었다.
김민수는 다시 자세를 잡고 조심스럽게 태건을 압박해갔다.
‘확실히 거리는 저쪽이 길고, 습관적으로 잽을 길게 밀어넣는데.’
김민수의 눈에 어느정도 태건의 패턴이 눈에 익기 시작한다.
둘다 워낙 파워있는 타격가이기 때문에 자칫 한 방에 끝날 수 있다.
당연히 수싸움이 치열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둘 모두 이 경기 오래 안간다는 걸 직감적으로 느꼈다.
슉!
태건의 긴 잽이다.
‘한번, 딱 한번에 박아 넣어야한다.’
김민수는 깊게 더킹하여 펀치를 찔러넣었다.
그러나 그의 펀치는 멈췄고 태건의 손은 박수를 치듯 어중간한 위치에 놓여져 있었다.
식겁한 표정으로 황급히 거리를 벌리는 김민수를 보며 사람들은 의아해했다.
“왜 저래?”
“김민수가 그냥 뻗었으면 꽂혔을 것 같은데?”
예수 역시 관객들의 반응과 비슷했다.
“왜 물러난 거죠? 좋은 공격 같았는데.”
두호는 팔짱을 끼며 눈을 좁혔다.
“패턴 자체가 페이크였던 겁니다.”
예수는 깜짝 놀랐다는 표정으로 두호를 돌아보았다.
두호는 태건의 움직임에 크게 놀랐다.
‘그대로 들어갔으면 바로 누웠겠지.’
격투기에서는 이런 말이 있다.
링 위에서는 사기꾼이 되어라.
한가지 패턴을 계속해서 보여주며 상대의 뇌에 각인시킨다.
그리고 한두 번씩 자신의 속임수를 파훼 당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상대는 생각한다.
나의 파훼법이 정확히 먹혀든다는 확신과 함께 안심하게 된다.
그리고 안일한 마음으로 반격을 할 때 다시 큰 공격을 들어가는 것이다.
태건의 수 싸움이 얼마나 깊은지를 알게 하는 순간이었다.
“역시 태건 선수네요.”
예수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태건이 자세를 약간 풀며 허리에 손을 올렸다.
갑작스러운 태건의 행동에 김민수는 눈을 좁혔다.
하지 않던 동작이 나오면 설혹 그것이 단순한 도발이거나 이쪽의 감정을 자극하기 위한 쇼라고 해도 경계할 수밖에 없다.
‘뭐하자는 거야.’
태건이 스텝도 밟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온다.
김민수는 긴장을 풀지 않았다.
‘킥? 아니면 더블잽으로 밀고 들어올려나? 아니면 다시 잽 길게?’
태건과의 주고 받은 주먹을 떠올리며 대비를 갖췄다.
‘와라. 뭐든지 받아쳐주마.’
태건의 몸이 흔들린다.
스으으!
그리고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져 버렸다.
김민수는 피하지 않고 카운터 펀치를 치기 위해 몸을 낮추고 깊게 뒷손을 찔러넣었다.
그러나 주먹에 닿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바로 그때 자신의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글러브의 촉감.
‘어?’
어느새 태건이 자신의 뒤통수를 잡아챈 것이다.
그리고 깔끔하게 꽂히는 니킥.
-빠악.
정통으로 맞았다.
모든 것이 몸속을 빠져나간다.
끝내 자신이 태건의 수에 걸려든 것이다.
김민수가 쓰러졌고 태건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파운딩을 꽂는다.
처음에는 팔을 들어 몇 번은 막아내나 싶었지만 이내 팔이 툭하고 떨어졌다.
저항이 없다.
심판이 김민수를 덮듯 몸을 날려 손을 휘저었다.
태건은 일어섰고 시원하게 종소리가 세 번 울린다.
-땡땡땡
“그럼 그렇지.”
“역시 돌부처야.”
팬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외친다.
조태건의 KO였다!
“플라잉 니킥!”
“아름답다.”
일부 관중들은 넋을 놓아버렸다.
“부처 부처 돌부처.”
“태건아 살살해라! 다른 애들 기죽는다!”
관중들의 환호에도 태건은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링을 벗어났다.
인터뷰를 위해 케이지 안으로 들어가려던 미주는 벗어나는 태건을 재빨리 쫓아갔다.
“잠깐만요. 조태건선수.”
하지만 멈추기는커녕 더 빨리 걸어가 버린다.
미주가 계속 쫓아갈지 뒤에 있는 송대일 PD를 쳐다보자 피식 웃는다.
그리고 놔두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조명은 걸어가는 태건을 끝까지 따라가고 있었고 관중들은 손 한 번 들어주지 않은 태건이지만 악을 쓰며 좋아했다.
덜컹!
마침내 문을 열고 태건이 사라졌다.
문을 열고 나오는데 한 사내가 가로막듯 서 있었다.
태건은 물끄러미 사내를 바라보았다.
처음 본 사내다.
“할 말있습니까?”
“형님!”
사내가 울부짖듯 말했는데 목소리가 떨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