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4 화 : 당장 내게 싸움을 걸어라.
지금 두호와 함께 거론되는 인물은 한 명 밖에 없다.
정일준.
자신들이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그림은 하나였다.
두호가 일준을 분노에 찬 표정으로 콜업(call up) 하는 것.
그러나 그런 그녀의 의도를 읽었는지 두호가 고개를 저었다.
“없습니다.”
그의 대답과 함께 실망에 찬 관중들.
사실 두호와 일준의 매치업은 언론사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원하는 경기이기도 하다.
미주 역시 실망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런 반응을 예상했단 듯 두호는 씨익 미소지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경기장 옆 조그만한 무대 위에 단상이 하나 보였다.
무대 위에는 조각상 하나가 걸려있었는데 그 조각상 팔에는 이번 PRIDE-K의 챔피언 벨트가 걸려있었다.
두호가 그 벨트를 슬쩍 보더니 마이크를 잡았다.
“어차피 2경기 뒤엔 제 것이니까. 누구든 상관 없단 겁니다.”
그리고는 훽하니 몸을 돌려 가버렸다.
순간 미주는 감탄한 듯 소리 없이 입을 벌렸다.
방송국의 의도와는 다르지만 사람들이 원하는 대답을 해주었다.
관객들은 드디어 두호의 입에서 만족스런 대답을 들었다는 듯 열광의 도가니였다.
“그렇치!”
“이래야 코리안 몬스터지!”
어차피 저 벨트의 주인공은 자신이다.
그 과정중 누군가를 만나는 것은 의미가 없다.
PRIDE-K 왕좌의 가장 근접한 사내의 선언이었다.
그러나 그 사내의 얼굴은 케이지를 벗어나자 어두워졌다.
채수가 전화를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기 스케줄을 담담하는 유철종 과장이다.
이번 경기가 끝나고 이어서 있을 경기 시간을 각 선수들에게 통보를 마쳤다는 보고였다.
바쁘게 움직이는 직원들이 통로를 걸어오는 채수를 발견하고 꾸벅 인사를 한다.
“노 대리는?”
“옆에서 저의 업무를 지원 했습니다.”
“그럼 오늘 벌어질 경기 스케줄을 노대리도 알고 있다는 얘기 아닙니까?”
“물론이죠.”
채수는 몇 마디 더 물었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복도를 지나 바깥으로 나갔다.
노대리는 유철종 과장과 선수들에게 경기시간을 포함해 몇 가지 주의 사항을 전달했다.
“과장님 식사 좀 하고 가겠습니다. 아침을 못 먹었거든요.”
노대리가 웃었다.
“아직까지 안 먹었다고? 이 사람, 배고프겠네. 얼른 가서 먹어.”
“금방 먹고 가겠습니다.”
노대리는 몸을 돌려 식당이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 * *
모든 대회에서 결승전이 가장 흥미로울 것이지만 이번 8강전은 조금 다르다.
대진표가 묘하게 지명도 있는 선수와 이름 없는 무명선수끼리 맞춰진 것이다.
겉으로는 보나마나 한 경기 같지만 문제는 무명이라도 이미 검증된 선수들이라는 것이었다.
이른바 반란이 일어날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
그건 엄청난 흥미이며 관심사다.
이럴 때 가장 호황을 누리는 곳이 도박판이다.
8강전 대진표가 알려진다면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들이 베팅될 것이 뻔했다.
실력이 비슷할 때 판은 커진다.
하지만 이번 PRIDE-K는 검증이 됐다고 해서 세계적인 선수도 아니고 무명이라고 하여 운 좋게 올라온 선수는 없다.
이보다 더 확실한 판은 없다.
승자가 보이면서도 함부로 베팅할 수 없는 상황.
노대리 스스로도 잔뜩 흥분했다.
바깥으로 나온 노대리는 조용한 벤치에 앉아 수첩을 꺼냈다.
이어 핸드폰 번호를 누르다 말고 멈칫했다.
“노대리님!”
들려오는 소리에 소스라치며 고개를 들었다.
채수가 눈이 부신 듯 선글라스를 쓰고 다가오고 있었다.
“여기서 뭐 하십니까? 유과장님은요?”
“사무실에.”
채수가 노대리 손에 쥐어진 수첩을 흘긋 내려다본다.
털썩!
채수가 옆에 앉았다.
“노대리님 올해 나이가 몇이죠?”
“서...서른 하나.”
“아이가 아프다고 했던가요?”
“예! 디죠지 증후군.”
디죠지증후군은 초기 태아 발생 시 22번 염색체의 부분 결손으로 생기는 복합 질환으로 심장 이상, 흉선 발육 부전, 구개열, 저칼슘혈증 등의 증상을 보인다.
채수는 아무 말도 않고 앞을 바라보았다.
“아시죠. 대리님 때문에 8강전 대진표가 다시 추첨됐다는 것?”
부르르!
노대리가 몸을 떤다.
“아직 대표님께도 보고가 안된 대진표를 또 바깥으로 보내십니까?”
“그게 아니고.”
채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채수님! 사실은.”
채수는 이번 대회 경기진행 위원장이란 직함을 갖고 있다.
노명환의 얼굴은 창백했다.
뒷짐을 지고 먼 바다를 바라보는 채수의 뒷모습이 온 몸을 짓누른다.
침묵이 칼보다 무섭다는 말이 지금을 두고 하는 듯했다.
“아들에게 맹세할 수 있어요?”
채호가 돌아섰다.
선글라스에 가려 채수의 눈빛을 볼 수는 없지만 몸이 얼어 붙는 것 같았다.
“아픈 아이에게 말입니다.”
노대리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차라리 아이 치료비를 위해 이러신다면 이해의 폭도 넓죠. 이게 뭡니까. 도박 빚에 쫓겨 이래서야.”
노대리는 한숨을 쉬었다.
막다른 골목이다.
달려들어 봤자 자신은 절대 고양이를 이길 수 없다.
“경찰에 알리면 퇴사는 물론이고 필린에서 청구하는 손해배상까지도 각오 하셔야겠지요.”
노명환은 눈앞이 아찔한 듯 몸을 떨었다.
도박의 끝은 죽음이라는 말이 괜한 소리가 아니다.
여기서 무너지면 아내는 물론 아들과도 끝이다.
허황된 욕심과 그로 인해 잘못된 선택이 너무나 감당하기 힘든 현실을 불러왔다.
“죄...죄송합니다.”
변명은 구차하다.
처분에 맡기는 것 말고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이미 포기한 듯 노대리는 고개를 떨어트렸다.
처억!
채수가 다시 옆으로 앉았다.
“노대리만 희생할 수는 없잖습니까?”
홱!
노대리의 고개가 돌아갔다.
채호의 말속에는 어떤 희망의 빛이 담겨 있었다.
“앙갚음 해야죠. 싫습니까?”
“아닙니다.”
노대리는 오아시스를 발견한 사람처럼 소릴 질렀다.
* * *
두호는 야구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를 했다.
또한 링 사이드가 아닌 관중석 빈 자리에 앉아 경기를 보기로 했다.
고개를 두리번 거리다 다행히 빈자리 하나를 발견하고 앉았다.
관중들은 흥분해 있었다.
“김사장, 너무 재밌지 않아?”
“죽여!”
고개를 돌린다.
마흔 초반 정도 되어보이는 두 사내가 흥분했다.
관중들의 반응이 그 경기의 흥행이다.
그런면에서 이 대화가 얼마만큼 폭풍을 몰고 왔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에이 씨발. 그걸 못 피해서 처 맞고 있냐.”
이번에는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서른 초반 가량 된 사내가 일어나 고개를 낮추는 시늉을 했다.
“앉읍시다. 좀!”
뒷좌석 사람이 보이지 않자 버럭 화를 낸다.
“걸핏하면 일어나서 지랄이야. 그렇게 싸우고 싶으면 직접 참가하던가.”
“지랄!”
빼애앵!
라운드 종료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고 기다렸다는 듯 사람들은 떠들기 시작했다.
“아 미치겠네.”
“아주 잘하고 있어.”
자신이 응원하는 사내가 이긴 쪽은 기뻐 날뛰었고, 반면 진쪽은 침울해지며 머리를 감싸쥐었다.
“아이고 서영아. 조금만 더 버티지 그랬냐.”
이번에도 TKO로 승부가 가려졌다.
패한 선수를 응원하는 관중들은 욕을 뱉으며 실내를 빠져나갔다.
‘채호.’
두호는 채호를 떠올린다.
놀라운 장사꾼이다.
이렇게 진심으로 좋아하는 팬들이 있다면 한국 격투기는 급속도로 발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짝짝작!
두호는 미소를 지으며 박수를 쳤다.
유서영이라는 선수를 때려 눕힌 상대는 구열이었다.
특유의 맷집으로 버티면서 파고 들어가는 무자비한 공격전술이 통했다.
얼굴에 피칠갑을 한 체 자신의 승리를 기뻐하는 구열을 보며 두호는 침을 삼킨다.
‘진짜 복서지.’
그런데 환한 표정으로 케이지를 바라보던 두호의 눈이 찌푸려진다.
낯익은 필린 직원들이 바쁘게 움직인다.
직원 한 명이 일어나 무언가를 지시하기 시작했고 몇몇이 빠르게 경기장 밖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두호가 눈을 좁히며 자세하게 바라보았다.
채호 역시 누군가에게 전화를 받고 있었는데 표정은 굳어있었다.
그러더니 전화를 끊고 재빨리 윗도리를 들고 경기장을 빠져나간다.
자신이 만든 대회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단 말인가.
“여러분 이제 마지막 경기입니다. 김민수 선수 그리고 조태건 선수의 4강 진출을 위한 혈투. 지금 시작합니다!”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울렸고 채호는 사라졌다.
두호는 이마를 찡그렸다.
채호를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굳은 얼굴로 급히 나가는 그의 얼굴이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그때 태건이 입장하고 있었다.
뜨거운 기름일수록 김이 나지 않는다고 했던가.
기자회견장에서도 유일하게 입을 다문 조태건에 대한 관중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난 말 많은 새끼는 딱 질색이야.”
“남자의 주먹은 모든 것을 말한다. 돌부처 파이팅.”
난리를 치는데도 눈길 한번 돌리지 않는다.
돌부처라는 이름에 걸맞게 표정변화도 없었다.
“내가 돌부처를 사랑할 줄이야.”
“어쩌면 저렇게 멋있냐?”
태건은 속으로 실소를 지었다.
‘멋있다.’
인생사 새옹지마라지만 힘없는 상인들 물건 훔쳐먹던 굴다리 꼬맹이가 멋있다는 취급을 받는다.
태건은 묵묵히 케이지 아래에서 준비를 마치고 입장했다.
긴장한 표정으로 태건을 바라보는 상대는 김민수다.
8강에 올라온 선수들에 대한 필린측 평가에 의하면 가장 의외의 선수로 김민수를 꼽았다.
기본 바탕을 알고는 있었으나 예상치를 두 단계 더 웃도는 실력이라고 상향 조정했다.
어느 스포츠든 혜성처럼 누군가 나타날 때 그 종목은 더욱 대중의 지지를 받는다.
하나같이 대회 흥행을 이끄는 나름대로 역할들을 하고 있지만 김민수는 확실한 돌발스타였다.
다만 상대가 돌부처 조태건이라는 것에 일부 팬들은 안타까워했다.
일부 전문가들은 조태건을 이번 대회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라고 했다.
김민수가 그런 조태건을 만남으로 동정의 응원이 더욱 뜨겁게 타올랐다.
“우쌰! 우쌰!”
“민수아 가즈아아아아!”
민수는 조태건을 살핀다.
조태건에게 밀리지 않는 타격가라고 자부하지만 객관적인 시선들은 자신이 밀릴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진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
언더독(스포츠에서 우승이나 이길 확률이 적은 팀이나 선수를 일컫는 말이다)의 반란을 보여주면 된다.
‘난 잃을게 없다.’
지면 당연한 것이고, 이기면 이번 대회 최고의 스타로 인정받을 것이다.
‘후우우!
김민수는 숨을 크게 내쉬었다.
두호는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주로 조태건에게서 멈춰 있었다.
‘제대로 보겠군.’
그동안 태건의 경기를 보며 느꼈던 감정이 하나 있었다.
그는 과연 본능적인 사람일까.
아니면 철저히 계산하고 거기에 맞춰 움직이는 사람일까.
주먹은 차분하고 혹독한데 경기 내용을 좀 더 깊이 들여다 보면 무언가에 이끌려 싸우는 사람처럼 보인다.
육식동물이 덤벼드는 것은 공격이고, 초식동물의 도망은 최고의 방어이다.
두 종은 그렇게 처음부터 정해져 있다.
태건이 그러했다.
일단 싸움이 시작되면 상대를 죽여야 한다는 신념 말고는 다른 의지나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기계처럼, 오로지 상대를 잡아 먹어야겠다는 본능으로 치고 들어간다.
“여기서도 잘 보이는군요.”
두호가 고개를 돌리더니 눈이 커졌다.
예수였다.
“안녕하세요.”
“예수씨?”
예수는 빙긋 웃으며 자리에 앉더니 매고 있던 가방을 무릎 위로 올린다.
“대회 당일에 비서팀은 할 일이 없어요. 대표님도 바쁘신지 어디가셨고.”
그러더니 인상을 찡그리며 가방 안에 손을 찔러넣었다.
그리고 뽑혀져 나오는 맥주 한 캔.
맥주를 발견하자 두호는 헛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드셔도 됩니까?”
아무리 상사가 자리에 없다지만 맥주까지 먹어도 되냐는 뜻이다.
별것 아니라는 듯 여유로운 표정으로 가방에 다시 손을 넣는다.
“뭐 어때요. 지금은 관계자가 아니라 관객이잖아요.”
그리고 캔 하나가 더 뽑아져 나온다.
자신의 맥주를 꺼내나 생각해서 좋게 거절하려 했지만 나온 것은 전혀 달랐다.
검정색 제로 칼로리 탄산음료.
“두호씨는 이거!”
말없이 받아든 두호는 이내 미소 지었다.
“감사합니다.”
살짝 미소 지으며 예수는 맥주캔을 거침없이 딴다.
한입 들이킨 예수.
“역시 퇴근에는 맥주죠. 두호씨 시작하나봐요!”
기분좋게 입을 닦은 뒤 케이지를 가르켰다.
두호 역시 미소를 지었다가 케이지 안을 바라보았다.
종소리와 함께 시작된 1라운드.
두호는 경기를 집중해서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