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3화 : 당장 내게 싸움을 걸어라.
약한 펀치는 맞고 큰 펀치는 흘린다.
거리를 잡기 위해 주먹을 던지면 미리 끊어서 거리감을 잡지 못하게 한다.
나오와의 스파링에서 배운 소득중 하나다.
‘타격의 완성은 무기의 가짓수 입니다. 상대의 무기보다 내가 가진 무기가 더 많아야 하는것이죠’
무식하게 싸우는 것이 아니다.
상대와의 거리감, 그리고 펀치와 습관과 리듬.
먼저 파악하고 나의 것은 감춘다.
쉿!
상대의 공격 틈 사이를 귀신같이 주먹을 찔러넣는다.
준훈은 공격 사이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두호의 반격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물론 준훈의 공격리듬을 흐트러놓기 위한 주먹이지 강한 타격을 목적으로 뻗어낸 건 아니다.
그야말로 쉴 사이가 없는 주먹이다.
부웅!
붕!
한 방이라도 걸렸다간 그대로 뻗어야 할 정도로 크게 휘두르는 준훈이었다.
꿈틀!
두호의 눈썹이 모아졌다.
‘정말 지독하구만.’
지쳐야 한다.
그러나 준훈은 전혀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이 정도면 사람이랑 싸우는 기분이 아닌데.’
1라운드의 중반이 흘러간 지금 이 만큼 주먹을 뻗어 냈으면 호흡이라도 가빠질만 하지만 전혀 이상이 없었다.
준훈의 인상이 조금씩 험악해졌다.
휘둘러도 닿지 않는 펀치.
쉴사이 없이 몰아붙이고 있지만 정확한 정타가 없었다.
하지만 준훈을 더욱 흥분시키는 것은 간격이었다.
두호는 한 번 맞았던 주먹에 다시 맞는 일은 없었다.
앞서 펀치가 살짝 닿아 다시 한 번 뻗으면 거리에 미치지 못한다.
한 번은 어찌 맞지만 두 번은 허탕인 주먹.
두호는 준훈의 자세에 따라 주먹이 달라진다는 것을 간파한 것이다.
준훈이 흥분했다.
공격하는 자신이 점수를 앞서가는 것 같지만 아니다.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다.
화악!
준훈은 급작스럽게 손을 뻗어 두호를 껴안고 온 힘을 다해 벽으로 밀었다.
쿵!
퍼어억!
두 사람은 케이지에서 몸을 맞대고서 격렬한 힘 싸움을 했다.
준훈의 관자노리 핏줄이 터질 듯 올라왔다.
준훈은 이런 식으로 끌려간다면 자신이 불리하다는 걸 간파했다.
유효타 숫자를 생각한다면 서둘러 끝내야했다.
3라운드쯤부터는 분명 두호의 주먹을 피하지 못할 것이니까.
“힘 좀 내봐. 두호씨.”
두호는 씨익 웃는다.
“어디 보약이 이렇게 효과가 좋을까.”
대놓고 약물 사용을 의심하는 두호의 말에 준훈이 뜨끔했다.
깜짝 놀란 준훈의 눈이 커졌다.
“이 새끼가...”
곧 상체를 붙잡던 팔을 놓으며 다리로 옮겨갔다.
과거 아시안게임 레슬링 은메달 리스트였던 탁현의 공격을 방어해 낸 두호였다.
콱!
준훈의 목을 누르고 자신의 다리를 움직이며 방어해낸다.
틈이 보이자마자 준훈의 겨드랑이로 팔을 집어넣으며 무게 중심을 흔든다.
해설위원이 감탄하듯 소리쳤다.
“백두호 선수. 엄청난 케이지 레슬링(일반적인 레슬링과 달리 케이지에 붙은 체 방어와 공격을 하는 MMA의 특유의 레슬링)입니다!”
학학!
허헉!
두 사람의 호흡소리가 달아오른다.
두호는 잠깐의 틈을 빌려 남은 시간을 보았다.
시간을 확인한 두호가 슬그머니 준훈의 목을 누르던 손과 다리의 힘을 풀었다.
준훈은 두호의 체력이 빠진 줄 알고 쾌재를 부르며 두호를 번쩍 들어버렸다.
케이지의 등을 기대고 방어하는 사람은 훨씬 적은 힘으로도 버티기가 수월하다.
즉 준훈은 더 이상 두호가 케이지를 이용하지 못하도록 번쩍 들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거의 같은 순간 두호는 준훈의 드는 힘을 이용하여 점프했다.
왜 쉽게 들렸는지 알아차렸지만 늦었다.
두호는 한 마리의 뱀처럼 순식간에 준훈의 목을 낚아챘다.
‘어?’
플라잉 길로틴 (flying guillotine : 일반적인 길로틴과 달리 점프를 하여 상대에게 메달리듯이 목을 낚아채는 기술)이다.
그리고는 아예 목을 따버리겠단 듯 준훈의 허리에 자신의 다리를 감았다.
그 어떤 생물도 잡아 먹어버릴 듯한 아나콘다 같다.
복서 출신인 두호가 그라운드로 끌고 가려고 한다.
준훈은 앞으로 넘어지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고 버텨냈다.
‘끌려 들어가면 끝이다.’
지금 준훈의 눈에 케이지의 바닥은 늪으로 보인다.
아무리 빠져나오려 발버둥 쳐도 더욱 빠져드는 늪.
천천히 숨통을 조여간다.
반응이 오기 시작한 듯 붉어진 준훈의 얼굴.
두호는 경기를 끝내기 위해 더욱 팔을 조였다.
빼애앵!
하지만 아쉽게도 이내 1라운드의 끝을 알리는 벨소리가 흘러나왔다.
심판은 두 사람을 떼어놓기 위해 달려들었고 두호는 무심하게 그립을 풀었다.
“아, 아깝다.”
“백두호에게 제대로 걸렸는데.”
관중들이 안타까운 비명을 터뜨렸다.
코너를 향하는 두호와 달리 준훈은 거친 숨을 내쉬었다.
‘큰일 날뻔 했어.’
준훈은 가볍게 목을 한 번 돌렸다.
“시간이 조금만 더 남았으면 골로 갔는데.”
“지랄한다!”
준훈을 응원하는 관중이 벌떡 일어나 상대를 노려봤다.
“지랄이라고 했냐?”
“오냐 개 지랄, 좆 지랄.”
준훈의 팬이 약을 올린다.
“으어아아! 저 시발놈!”
두호를 응원하는 사내가 달려들자 재빨리 사내들이 막았다.
“점잖지 못하게 왜 이러십니까? 자자! 진정하시고.”
이어 준훈을 응원하는 사내에게 말했다.
“그쪽도 차분하게, 얌전히 경기관람 하시는게.”
양쪽 모두가 좀 더 노려보더니 못이긴 체 자리에 앉았다.
준훈의 세컨들이 바쁘다.
“준훈아 전술 변경이다. 스트라이킹(타격)으로 승부 보자. 아무래도 저쪽도 타격을 더 선호하니까 너가 유도만 잘하면 될 것 같아.”
준훈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몇 초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어느새 꽤 안정을 되찾은 준훈을 보며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코치였다.
“그런데 백두호 저 새끼 빠따 맞을만해?”
코치의 말에 준훈은 씨익 미소 지었다.
“봤잖아요. 간지럽더만.”
준훈은 기다렸다는 듯 반응을 하여 홀가분한 표정을 했다.
코치가 일부러 준훈의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질문한 것이다.
“난전을 계속 걸어서 장기전으로 끌고 가자. 카디오 (cardio. 심장운동능력. 격투기에서는 심폐능력과 체력을 뜻한다) 싸움은 너가 무조건 유리하니까. 그리고 3라운드 되면 바로 KO노리는거야.”
준훈은 묵묵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카디오가 압도적으로 유리한 이유는 코치진들과 준훈만이 안다.
열심히 코칭을 하는 준훈쪽과 달리 두호쪽은 지나치게 평온했다.
이번 본선 8강 토너먼트 중 두호의 코치는 탁현이었다.
얼굴에 바셀린을 천천히 발라주며 탁현이 물었다.
“어때요?”
“괜찮습니다.”
두호의 대답은 항시 이런 식이다.
너무 간결하다.
말이 길어야 상대가 버겁지는 않은지 몸 상태의 이상은 없는지 질문도 하고 어떤 지시를 내리는데 두호는 최대한 할 말만 한다.
그래도 탁현은 미소를 지었다.
“우리 게임 플랜 기억하죠?”
기억한다는 듯 두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곧 심판이 세컨들의 아웃을 명령했다.
세컨들이 선수가 앉던 의자와 짐들을 챙긴 체 서둘러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탁현은 두호의 어깨를 툭툭 치고 돌아나갔다.
‘게임 플랜이라.’
두호가 중얼거릴 때 2 라운드 시작을 알리는 벨소리가 들려왔다.
-배애앵
‘두호씨. 우리의 게임플랜 간단합니다. 화끈하게 이긴다.’
경기전 탁현이 했던 말이다.
두호는 웃으며 게임플랜 한 번 간단해서 좋다는 생각을 했었다.
준훈의 자세가 1라운드와 달라졌다.
준훈이 타격으로 승부를 보려는 듯 아까와는 달리 완벽한 복싱 자세였다.
두호 역시 자연스럽게 복싱자세로 맞이했다.
그러면서도 마음속으로 생각한다.
8강에 출전한 선수들 치고 백두호의 주특기가 복싱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다.
워낙 꼼수와 변칙이 판을 치다보니 모든 건 의심의 눈으로 봐야 했다.
츅!
츄츄!
준훈이 이를 악물며 펀치를 던진다.
1라운드에서 보여줬던 힘은 장난이었다는 듯 더 무자비했다.
두호는 1라운드와 비슷한 전술을 구사했는데 피할 것은 피하고 맞아줄 것은 맞아주었다.
그러다 빈틈이 보이면 찔러넣는다.
몇 대 펀치를 허용한 준훈이 비웃듯이 말했다.
“펀치가 왜 이렇게 힘이 없어. 빠따 싸움이 자신이 없나봐?”
이제는 대놓고 도발했다.
“어이 백두호, 들어와봐”
두호의 표정은 변함이 없다.
자극하고 모욕적인 도발에도 두호는 자신의 페이스를 유지했다.
스윽!
그러나 준훈은 두호의 스텝을 보며 눈을 빛냈다.
두호의 앞발에 실린 무게를 보아 완벽히 인파이팅을 준비하고 있었다.
사삭!
빠르다.
어느새 들어와 주먹을 날렸고 피하지 못했다.
준훈은 이를 물었다.
‘정타만 아니면 된다. 나오는 펀치로 같이 카운터 날리면 돼.’
두호는 완전한 복서가 되었고 거리를 좁혀왔다.
준훈은 이 정도 거리면 자신의 주먹 또한 두호의 몸에 닿는다는 걸 계산한다.
후와!
준훈이 온 힘을 다해 펀치를 날린다.
글러브가 다르다 보니 복싱과 다르게 한 방이면 정리되는 것이 케이지 안의 경기다.
케이지 안에서 역전승이 많이 나오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뻗어라!”
그 순간 두호의 신형이 흐릿했다.
간발의 차이로 준훈의 크로스 카운터는 허공을 가른다.
워낙 야심차게 휘둘렀기 때문에 주먹은 더욱 허전했다.
‘도대체 어떻게?’
피할 수 있는 거리가 아니다.
파악!
두호의 왼손이 꽂히는 원(1).
그리고 순식간에 붙어 나오는 뒷손 주먹 투(2).
준훈의 왼쪽 뺨과 턱에 꽂히며 들리는 파열음 소리가 경기장을 울린다.
쾅!
준훈의 턱이 들리며 눈이 풀렸다.
비틀거리는 준훈을 보며 두호의 허리가 다시 한 번 뒤틀린다.
그리고 마치 팽이가 돌아가듯 꽂히는 라이트 훅.
뻐어억!
큰 나무가 쓰러지듯 준훈은 그대로 엎어졌다.
꽈당!
심판은 기겁을 한 표정으로 달려들었고 이내 파운딩을 치려는 두호가 멈췄다.
“고생했습니다.”
준훈의 얼굴을 보며 속삭이듯 말했다.
와아아아!
관중들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소리쳤다.
-경기 끝! 백두호 선수의 TKO 승리입니다!
쓰러진 준훈을 내려다보는 두호.
의료팀이 달라붙어 그의 상태를 지켜보지만 다행히도 큰 이상은 없는 듯 했다.
그러나 두호는 메몰차게 고개를 돌렸다.
자신은 꿈을 좇는 인간과 싸운 것이 아니다.
그저 유혹을 이겨내지 못한 짐승과 싸운 것일뿐.
미주가 미소를 지으며 케이지 안으로 들어왔다.
“PRIDE-K 본선 토너먼트의 첫 승리를 해내신 코리안 몬스터 백두호 선수에게 큰 박수와 환호 부탁드립니다!”
사람들은 승리자인 두호에게 아낌없는 응원을 보냈다.
미주는 성큼성큼 걸어와 두호의 옆에 붙어섰다.
링 중앙에서 시작한 승자 인터뷰.
“백두호 선수! 오늘도 어김없이 KO로 승리하셨습니다. 지금 기분이 어떠신가요?”
두호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허리에 손을 얹었다.
카메라 뒤로 보이는 수 많은 관중들.
처음 입장할 때는 느끼지 못했지만 경기장 안에 관중들은 얼핏봐도 10만 명은 넘어 보였다.
두호는 고개를 돌려 탁현을 슬쩍 일별했다.
“준훈 선수의 타격이 예상보다 훨씬 대단했습니다. 다행히 게임플랜에 그래플링도 준비되어있어 잘 풀린 것 같습니다. 세컨에게 감사를 전하겠습니다.”
탁현이 팔짱을 낀 채 재밌다는듯 웃고 있었다.
그 어떤 게임플랜도 제시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자신을 치켜올리니 탁현 역시 우스운 것이다.
미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두호에게 물었다.
“네. 그럼 다음 경기는 누구와 붙게 될까요? 원하시는 상대가 있으십니까?”
씨익 미소를 짓는 미주.
원하는 그림이 있다는 의도가 다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