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2화 : 당장 내게 싸움을 걸어라.
“혹시 응급 환자나 시신 한 구 들어온 것 없습니까?”
직원은 섬뜩한 질문에 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이 질문을 던진 경수 역시 긴장하긴 매한가지이다.
“잠시만요. 바, 바로 확인해보겠습니다.”
직원은 더듬으며 급하게 사무용 전화기를 집어들어 여기저기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수첩에 무엇인가를 적기 시작했다.
“네, 네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전화기에서 귀를 뗀 직원이 조심스럽게 경수에게 말했다.
“신원미상 시신 한 구 들어왔다고 합니다.”
경수가 눈을 질끈 감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확인 가능합니까?”
직원은 고개를 끄덕였고 부하들을 돌아보았다.
“다 올 것 없고, 여기서 대기해. 준모씨 가시죠.”
준모는 고개를 끄덕이고 경수와 함께 보안요원을 따라갔다.
태어나 이렇게 가슴 뛰어보긴 처음이다.
보안요원은 이미 영안실로 들어갔다.
하지만 경수와 준모는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마른 침만 삼키며 서 있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두 사람이 들어오지 않자 보안요원이 얼굴을 내밀었다.
“알았습니다.”
준모가 앞장서 들어갔다.
그 뒤를 경수가 따랐는데 잔뜩 긴장한 얼굴이다.
살아 있는 사람은 들어오지 않는 곳인줄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은 무슨 조화란 말인가.
으스름한 형광등 불빛 아래 시신을 보관하는 냉동관이 헬스장 라커처럼 붙어있다.
보안요원은 망설임 없이 손잡이를 당겼고 관이 끌려 나오고 시신을 덮고 있는 흰색의 천을 벗겼다.
얼굴을 확인한 그 들.
준모는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아나갔고 경수는 우두커니 서 있었다.
준모는 품 안의 핸드폰을 집어든 체 영안실 밖으로 나갔다.
한 사내가 누워 있다.
싸움 중 쓰러져 정신을 차리면 언제나 마지막까지 서 있던 사내.
동생들 먹이느라 결코 자신의 주머니를 채울 여유가 없었던 사내.
너희가 배부르니 이 또한 나의 기쁨 아니겠냐며 호탕하게 웃던 사내가 형체를 알아 볼 수 없는 얼굴을 하고 누워 있다.
“형님.”
천안에서 친하게 지내던 친구 몇 명과 무작정 서울로 상경했다.
이 바닥에서 이름 한번 날려보자는 마음으로 싸움이란 싸움은 다 하고 다녔다.
없는 싸움도 만들어 할 만큼 성공에 대한 열망이 가득했었다.
그러다 결국은 건드리지 말아야 할 사람까지 건드리게 된 것이다.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의 친구들은 모두 싸늘한 주검이 되어있었다.
한 사내가 칼을 들어 자신을 끊으려 할 때 폐공장 철문이 열렸다.
천천히 걸어오는 한 사람.
황석희였다.
“그 사람 좀 빌립시다.”
그 모습을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자신은 쓰러졌었다.
눈을 떠보니 수미의 지하실 숙소였다.
“괜찮냐?”
화들짝 놀라며 주위를 살피자 황석희가 빙긋 웃었다.
“천안에서 올라온 배경수. 제법 실력도 있는 것 같고.”
황석희는 팔짱을 끼며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나랑 같이 일 할 생각없냐? 그래도 양아치처럼 사는 것 보다야 훨씬 낫다.”
그것이 황석희를 따르게 된 첫날이었다.
황석희의 시신 앞에서 경수는 고개를 떨어트렸다.
주르르륵!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지금 생각지도 않는 눈물이 흘러내린다.
“그러다 몸 상하신다고.”
그것도 한두 방울이 아니라 빗물처럼 뺨을 타고 쏟아진다.
황석희의 손을 잡았다.
가슴 시리게 차가웠다.
“형님!”
경수는 황석희의 손을 잡은 체 무너졌다.
준모는 밖으로 나왔다.
무거운 표정으로 잠시 왔다갔다 하더니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인다.
“네. 형님. 접니다.”
아무 말이 없다.
평소 같으면 그래 어떻게 됐냐고 추궁하듯 물을 텐데 입을 다문다.
이미 예견한 것인가.
준모는 한숨을 내쉬며 영안실이라고 써진 건물 간판을 올려다보았다.
“황석희 부사장 사망했습니다.”
여전히 말이 없다.
* * *
두호는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랬구나. 그래서 그렇게 연락이 안된 것이구나.”
두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부고는 돌렸냐? 연락해라.”
-예! 오늘 경기 잘하십시오.”
두호는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전쟁터에서 본 죽음이 어디 한둘인가.
사연 없고, 의미 없는 죽음은 없다.
말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모두가 저마다 크고 작은 인생을 담고 있는 것이다.
‘황석희.’
드문 사내다.
가끔은 차 한 잔 하고 싶어지는 그런 사내였다.
과묵하지만 결코 딱딱하지 않았고, 잘 웃지 않아도 차갑지 않았다.
‘조금 일찍 만났더라면 좋은 벗이 될 수 있었을텐데.
드르륵!
답답한 마음에 창문을 열었다.
반달 하나가 서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흐음!’
착잡한 한숨을 내 쉴 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두호는 돌아섰다.
문이 열리고 누군가 방 안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헤드셋을 목에 걸친 채 손에 말아 쥔 큐카드 하나.
두호를 보며 빙그레 미소를 짓는다.
“백두호 선수 입장 준비하십시오.”
“네.”
두호는 착잡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생했습니다. 황 부사장.”
두호는 짧은 혼잣말을 내뱉었다.
굳은 표정으로 방문을 열자 복도 안에는 카메라와 직원들이 가득했다.
방송 화면으로 두호에 대한 소개가 울려펴진다.
“여러분이 기다리고 기다리시던 PRIDE-K의 대망의 첫 경기입니다. 코리안 몬스터 백두호 선수 입니다!”
카메라맨 과 VJ들이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백두호씨 입장하겠습니다! 3.2.1”
카메라의 노란불이 빨간불로 들어왔다.
그리고 직원들의 사인과 함께 천천히 케이지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두호는 결연한 표정으로 그들과 발맞춰 케이지로 향했다.
미주가 계속 목소리를 높였고 카메라들이 두호의 걸음에 맞춰 뒤로 물러난다.
“이번 대회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로 평가되는 백두호선수.”
어쩌면 지금쯤 경기장 전광판에는 자신의 과거 영상이 보여지고 있을 것이다.
“빠르고 경쾌한 풋워크, 그리고 복서출신이지만 그래플링 기술까지 능수능란하게 구사합니다. 가난을 딛고 일어선 청춘의 위대한 도전!”
저벅저벅!
두호는 입을 꾸욱 다물고 걸음을 옮겨갔다.
“백두호씨 입장하고 있습니다!”
링 위에 선 미주의 날카로운 음성이 들리며 덜컹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강렬한 조명이 들어선 두호의 전신을 비춘다.
와아아아!
관중석은 이미 가득 찼고 백두호를 응원하는 함성이 울려 퍼졌다.
주위로 필린의 직원들이 에워 쌓았고 카메라맨들이 계속 움직이며 찍어댄다.
“백두호 선수에게 더욱 큰 환호와 응원 부탁드립니다!”
“코리안 몬스터!”
“야 오늘따라 멋있다. 기대한다!”
안전요원들이 행여나 난입하는 관객들을 막아서기 위해 완전히 둘러쌓는다.
케이지 바로 앞의 앉아있는 해설위원과 캐스터는 두호에 대한 소개를 이어갔다.
“여기까지 올라오는 동안 있었던 경기와 험준한 과정을 압도적으로 돌파한 백두호 선수입니다!”
“네 맞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한국 격투기의 미래를 보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카메라가 두호의 앞가슴에 찍힌 스폰서 이름을 클로즈업한다.
전광판에 한빛 제빵이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나타났다.
매일은행과 한대모터스를 거부하고 맺은 스폰십이 겨우 한빛제빵이라는 언론 기사에 팬들은 얼굴을 찌푸렸다.
이건 또 무슨 잔머리냐.
곱게 보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가난한 복서의 재도전이라는 두호의 이미지와 잘 맞아떨어지며 이름값은 더욱 상승곡선을 그렸다.
척!
심판 앞에 섰다.
이제는 제법 익숙하게 바셀린을 바르고 마지막 점검을 마쳤다.
계단 앞에 멈춰선 두호.
가볍게 어깨를 한 바퀴 돌린다.
우두커니 서서 하늘을 보며 묵념을 하고 가슴팍을 두 번 때렸다.
잠시 정적으로 고요해진 경기장.
그리고 두호는 거칠게 기합을 지른다.
“하!”
거침없이 계단을 걸어올라가는 두호였다.
그리고 관객들은 그의 기합에 대답이라도 하듯이 천둥같은 관중들의 환호가 터진다.
-와아아!
링 위에서는 먼저 입장한 준훈이 부지런히 몸을 풀고 있다.
코너에 붙어 서 있는 두호가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봤다.
‘그때 그 느낌.’
그러했다.
용병시절 작전에 투입되기 전 약간 설레이면서 긴장하는 그런 기분이었다.
슬쩍!
준훈쪽을 한 번 바라본다.
준훈은 묵묵히 몸을 풀 뿐이다.
두호는 천천히 케이지를 왔다갔다 했다.
준훈처럼 요란하지 않았고 뭔가 생각에 잠긴 사람의 얼굴로 묵묵히 걷는다.
심판이 신호를 보냈다.
두 사람이 가운데로 모여 마주서자 심판은 두 사람을 점검하며 간단하게 룰 소개를 했다.
씨익!
눈이 마주치자 준훈이 웃는다.
“코리안 몬스터라.”
준훈이 굳은 표정으로 비아냥 대듯 뱉는다.
“허명이라는걸 제가 증명하겠습니다.”
심판이 코너로 돌아가도록 지시했다.
코너로 돌아간 두호는 준훈을 바라보았는데 시선이 상하로 움직인다.
준훈의 몸은 예전과 달랐다.
하체의 뚜렷한 데피니션과 팔뚝에 힘줄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드러난 신체를 보면 굉장한 훈련을 했음이다.
그런데 꼭 존경스럽지만은 않는 느낌, 부자연스러움이 보인다.
‘혹시!’
두호의 눈이 좁혀졌고 다시 한 번 준훈의 몸을 살폈다.
‘일단 붙어보면 알게 되겠지’
그때 심판이 거칠게 손을 내렸다.
“파이트!”
경기장을 가득 메운 함성을 들으며 두 사람은 서로에게 거침없이 달려들었다.
케이지 중앙으로 나온 두호는 자세를 잡고 준훈을 살펴보았다.
업라이트 스탠스(허리를 꼿곳이 세운 타격 자세)와 쇼토칸 가라테 자세(통통 튀는 스텝의 옆을 보고 선 자세로 태권도 자세와 유사하다).
두호는 눈이 좁혀졌다.
‘가라테 스타일로 시작하겠다는 건가.’
옆으로 비스듬히 서 있는 자세는 공격을 빠르게 치고 빠지기에는 좋지만 그래플링 방어는 취약하다.
두 사람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탐색한다.
슉!
슈슈슈!
앞 손이 서로의 손을 건들 듯 말 듯 아슬아슬한 분위기가 계속되었다.
금방이라도 펀치가 나올 것 같았다.
숨 막히는 대치상황을 깬 것은 준훈이었다.
츄욱!
빠르게 찔러 들어오는 왼손 잽.
두호는 준훈의 잽을 팔로 걷어내듯 막아냈다.
그리고 곧바로 준훈의 앞 발을 노리는 로우킥.
준훈은 살짝 무릎을 들어 체크(상대의 로우킥이 날라올 때 무릎을 튕기듯이 들어 막아내는 킥복싱 방어기술)해냈다.
완벽히 방어하지는 못했지만 충격은 없을 듯 했다.
순식간에 주고 받는 짧은 공방.
팽팽한 대치 속 기습하듯 서로 주고받는 전광석화와 같은 공격에 관객들의 감탄이 터져나왔다.
“살벌하게 빠르네 둘다.”
“아후, 장난 아닌데!”
두호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뭔가 불만스런 얼굴이었는데 옆을 보고선 자세가 주먹을 던지면 당연히 앞발의 무게가 과중된다.
과중된 발은 무게를 옮기기 전까지 본능적으로 들어올릴 수가 없다.
그래서 주먹을 걷어냄과 동시에 로우킥을 찬 것인데 그 앞발의 무게를 이겨내고 다리를 들어 올린 것이다.
‘흐흐흠.’
두호의 눈이 더욱 매서워지면서 어금니를 물었는데 뭔가 확신하는 표정이었다.
‘어려운 동작을 어렵지 않게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 뿐이지.’
약물의 무서움이란 이런 것이다.
인간적인 격투기술에서 불가능한 자세를 가능케 하는 것.
더군다나 지금의 반응속도.
파괴력은 속도에서 나온다.
두호가 그렇다.
그런 두호의 빠른 공격을 완벽히 방어하진 못했지만 자신감 넘치는 자세로 반응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두호는 자신의 글러브로 얼굴을 몇 번 문지른다.
‘시작하자.’
두호는 제자리에서 가볍게 툭툭 털더니 한 걸음에 달려들었다.
인앤아웃.
쉴 새 없이 변하는 무게중심과 몸의 흐름을 이용하여 상대의 거리감을 갉아먹기 시작한다.
가라데의 주먹 특성상 중거리의 거리감이 무너지기 시작하면 다시 거리감을 잡기가 쉽지 않다.
두호의 예상은 적중했다.
4번째 펀치 시도에서 준훈의 얼굴에 정타가 꽂혔다.
쾅!
턱이 들릴 정도에 강펀치에 준훈이 물러났다.
누군가 준훈의 표정을 본다면 아파한다라고 느끼겠지만 아니다.
입가의 묻어있는 미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꺾더니 다시 다가왔다.
“코리안 몬스터라더니. 별 것 없잖아?”
일부 관중들이 두호의 주먹에 실망한다.
준훈은 견적이 다 나왔다는 듯 씨익 미소 짓는다.
후욱!
준훈은 성큼성큼 걸어오며 광폭한 펀치를 날렸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빠르고 강한 주먹인데 두호는 빛나는 눈으로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