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1화 : 당장 내게 싸움을 걸어라.
잠시 몇 마디를 더 듣던 조상무가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거의 의식을 잃은 채 누워 있는 황석희를 내려다 보았다.
벅찬 사냥감이었다.
아니 자신이 잡기에는 과분하다는 표현이 조금 더 솔직할지 모른다.
어쨌든 잡았고 꿈만 같다.
라이트를 켠 차 한 대가 수원의 폐공장 단지 안으로 들어섰다.
무언가를 찾는 듯 차는 천천히 단지 안을 돌아다녔다.
한참을 그렇게 다니던 차가 멈추고 차에서 준모가 내렸다.
-탁
“분명히 여기 어디쯤인 것 같은데. 흠.”
준모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너무 조용한 것이 수상했다.
조용한 곳이 아닌 조용해져 버린 곳 같았다.
다시 한 번 안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문자의 내용을 확인했다.
명동 사채업계에서 일하는 지인에게 전달받은 장소는 이곳이 분명했다.
‘글쎄 자세한 건 잘모르겠고 멧돼지 사냥 운운하면서 후배들 이십 명 정도가 급히 차출되어 갔어. 수원에 있는 태창화학공장이던가 태광이던가 아무튼 비슷해’
아직 기계가 돌아가는 공장이 몇 개 있는 탓에 간간히 골목을 비추는 가로등이 있었으나 몹시 어두침침했다.
준모는 눈을 빛내며 여기저기 사람의 흔적을 찾아 움직였다.
“이상하네. 뭔 일이 벌어졌어도 진작 벌어졌을텐데.”
딸칵!
답답한 마음에 담배를 한 개비를 피워 물었다.
자신의 바닥 생활로 미루어 보았을 때 황석희 같은 위치의 사람이 보고도 없이 사라지는 것은 딱 한 가지를 의미한다.
계획했던 일이 틀어졌을 때.
더구나 지금 수미와 모영배는 무자비한 공수(攻守)를 주고 받고 있었다.
수미는 채호와 더불어 PREID-K 대회를 이끌어가고 있고 모영배를 기어이 무너뜨리려고 한다.
빛내려는 측과 뭉개려는 쪽의 피 튀기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황석희는 지키려는 쪽의 현장 책임자다.
전쟁에서 이기려면 현장 지휘관부터 잡는 것이 순서다.
가로등 불빛이 미치지 못한 곳은 핸드폰 라이트를 이용해 살피며 어떤 흔적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멈칫!
준모의 눈이 빛난다.
뭔가 발견한 것이다.
길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검정색 클러치 백.
가방을 주운 준모는 흙을 털어 낸 뒤 내용물 확인을 위해 지퍼를 열어보았다.
가방 안에는 오만원권 지폐를 포함한 약간의 현금과 접혀진 경마예상지, 볼펜과 일수놀이 수첩같은 작은 공책이 있었다.
누구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신원을 확인할 만한 그 무엇도 들어있지 않았지만 뭔가 본능적으로 느낌이 온다.
재빨리 골목을 지나가던 준모의 고개가 오른쪽으로 돌아갔다.
“음.”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쪽을 바라본다.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준모의 눈이 좁아졌다.
불이 훤하게 켜진 공장 하나.
준모는 무엇인가가 느껴진 듯 황급히 그곳을 향해 달려갔다.
“시발. 무슨 일 있는 건 아니겠지?”
서둘러 달려가 불이 켜진 공장 외벽에 바싹 붙어섰다.
조심스레 공장 안을 깨진 창문 틈으로 들여다봤다.
사내 몇 명이 물을 부으며 바닥을 치우는 듯 했다.
“야야. 물 좀 더 퍼와라.”
“대충 밀어. 여기 어차피 곧 허문단다.”
준모는 내부의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피를 잔뜩 흘리며 쓰러져있는 사내 한 명이 보인다.
“어...저 사람은?”
과거 수미의 지하실에서 본 적이 있는 사내였다.
아무래도 이곳에서 일이 벌어졌고 사내들이 이 일의 주범인 듯 싶었다.
일은 이미 마무리가 되었고 정리를 위해 남아있는 듯 했다.
상황보고를 위해 핸드폰을 집어든 준모.
조용히 수화기를 입으로 가려 전화를 하는 중 눅눅한 밤바람에 피비린내가 실려온다.
몇 명의 사내들이 공장 바닥에 널브러진 사내들을 봉고차에 옮겨 싣고 있었다.
“태웠으면 앞차 먼저 출발해.”
누군가 소릴 질렀고 봉고차 한 대가 라이트를 켠채 공장을 빠져 나갔다.
휘익!
준모는 재빨리 담장을 넘어 안으로 들어섰다.
“얘는 갔네.”
사내 한 명이 핸드폰 불빛을 이용해 땅바닥을 비추었다.
한 사내가 피투성이가 되어 하늘을 보고 누워 있는데 미동도 하지 않는다.
파팟!
녹슨 지게차 뒤에 숨어 살피던 준모의 눈이 커졌다.
‘천수.’
몇 번 스치듯 만난 것 말고는 아는 건 없다.
하지만 함께한 부하가 죽었다는 건 한 가지를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황석희가 좋지 않다.’
쾅!
마지막으로 천수를 싣고 봉고차는 공장을 떠났다.
재빨리 담장을 넘어 밖으로 나온 준모는 차가 있는 곳을 향해 달렸다.
곧바로 차에 올라 시동을 걸고 멀리 불을 켜고 달리는 봉고차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 * *
모영배가 들어섰다.
지하실은 대낮처럼 불이 켜져 있었으며 두 명의 건장한 사내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아래있다고?”
저벅저벅!
모영배는 천천히 걸어가 걸음을 멈췄다.
헉헉!
한 사내가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한 손으로 배를 움켜 쥐고서 등을 벽에 기대고 있었는데 흰색의 셔츠가 피로 물들어 있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터지고 깨진 몰골이지만 황석희는 다가오는 모영배를 바라보았다.
척!
적당한 거리를 두고 모영배가 멈춰섰다.
학학학!
황석희의 상체가 흔들거렸으나 쓰러지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문다.
“오랜만일세.”
황석희는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물끄러미 올려다보기만 했다.
척!
조상무가 의자 하나를 놓고 모영배가 앉았다.
스으으!
황석희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바닥을 흥건히 적신다.
스윽!
모영배가 주머니에서 담배갑을 꺼내더니 황석희에게 내밀었다.
황석희는 잠시 담배를 바라보더니 손을 내밀어 잡았고 모영배가 불을 붙여 준다.
딸칵!
깊게 한 모금 빨아들인 황석희.
후우!
담배연기를 길게 뿜어낸다.
모영배 자신도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는데 담배 때문인지 황석희 표정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내가 조수미 그 여자한테 부러운게 딱 한 개 있었지.”
모영배는 담배를 물고 상체를 바로 세웠다.
“바로 자네일세. 그 여자의 능력도 대단하지만 부하들의 절대적인 신망을 받는 황석희라는 사람이 마음에 들었어.”
전국구라고 할 만큼 규모가 큰 조직들 사이에서 황석희는 무척 단아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황석희는 힘의 충돌이 수시로 일어나는 어디를 가도 대접이 융숭했다.
“본래의 수미같이 안정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야생마 같은 자네가 마음껏 뜻을 펼치지 못하는 법이야. 안그래?”
그때 모영배의 손에 들린 장초가 바닥에 떨어졌다.
담배는 차가운 바닥에서 희미하게 타고 있었다. 모영배는 담배를 비벼끄지 않고 무심히 바라보았다.
그 담배를 비벼 끌 수도, 새로 불을 붙일 수도 있다는 듯이.
대답 없이 그 담배를 바라보던 황석희가 고개를 저었다.
모영배는 자리에서 일어나 지하실을 거닐었다.
“이대로 떠나려는가?”
걸음을 세우고 황석희를 바라본다.
“한 번뿐인 인생이라는데 좀 더 늦게 떠나도 되지 않겠나? 뭘 그리 서둘러 가려고 그러나?”
황석희는 조용히 담배만 피우고 있었다.
“나 혼자 잘살고 잘 먹으면 그게 무슨 재미인가?”
나와 손을 잡자.
내 밑으로 들어오면 잘 살 것이고 잘 먹게 될 것이다.
황석희의 목숨은 이미 자신의 지배를 벗어나 있었다.
모영배가 통제하고 있는 것이다.
툭!
필터까지 타들어 간 황석희의 담배가 떨어졌다.
모영배가 다가와 새 담배 한 개비를 물려준다.
딸칵!
쭈그리고 앉아 불을 붙여주고 빤히 바라본다.
“흡연을 통해 영혼의 혼미함을 씻고 평정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그럼 또 하나의 세상이 있음을 알게 될 걸세.”
첫 담배는 영혼을 씻지 못했다면 이번 두 번째 담배에서는 반드시 마음을 씻고 모영배라는 사람을 정확히 바라보라는 뜻이다.
알고 보면 나도 조수미 못지 않다.
충분히 그만한 대접 해줄테니 구원(舊怨)을 씻고 새로운 출발을 하자는 부탁이었다.
“알고 보면 자네와 난 매우 닮았어. 자넨 그런 생각 해본적 없나?”
황석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입에 물린 담배만 빨았다 연기를 뱉어내길 반복할 뿐이었다.
* * *
한 통의 전화가 사람들을 깨웠다.
‘황 부사장님의 행방을 알아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경수는 절규를 토해냈다.
그건 황석희가 절대절명의 위험에 빠졌다는 걸 설명하고 있었다.
전화를 받은 사람들은 앞 다투어 밤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 * *
어둠 속에서 한 쌍의 눈동자가 유난히 반짝 거린다.
준모였다.
공장에서 보았던 봉고차가 모로해피캐피탈 건물 앞에 주차되어 있었다.
틀림없이 건물 어디엔가 황석희가 있을 것이다.
준모는 몇 번 이를 악물었다 풀기를 반복했다.
“젠장...”
마음 같아서는 당장 달려가고 싶다.
하지만 한두 명이라면 모를까 숫적으로도 불리하고 더구나 하나같이 모로해피캐피탈의 에이스들일 것이다.
사람 목숨 하나 더 갖다 바치는 것 말고는 판세에 어떤 영향도 주지 못한다.
하지만 기다리는 사람들은 오지 않고 마음은 급하다.
‘에이 씨발. 들어가 죽자.’
크게 심호흡을 뱉고 스트레칭을 위해 허리를 숙일 때 강력한 라이트가 비췄다.
고개를 돌리는 순간 엄청난 속도로 승용차들이 몰려왔다.
끼이익!
끽!
준모의 코 앞에서 거칠게 차가 멈췄다.
수미의 부하들이었다.
준모는 이보다 더 반가워 할 수 없는 표정으로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여기요!”
차에서 쏟아지듯 내리는 부하들.
이미 싸움을 각오하고 온 듯 표정들은 싸늘했다.
준모가 건물 주차장을 가리켰다.
우두머리 경수가 곧바로 정장 상의를 벗어던지며 달려갔다.
“보이는 놈은 무조건 주저앉혀!”
사내들이 일제히 회칼을 뽑아들고 주차장으로 달려갔다.
주차장은 지하 1,2층이다.
사내들은 1층부터 뒤지기 시작했다.
밤이 깊은 시간이어서 차량들은 그다지 많지 않았고 구석구석을 살피지만 어디에서도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없어?”
“절반은 더 훑고 나머지는 날 따라와.”
경수는 비상구라고 쓰인 문을 향해 달려간다.
준모는 2층으로 먼저 내려갔다.
희미한 불빛 아래 주차장은 조용했다.
대충 훑었지만 사람이 있다는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다.
‘보일러실’
보일러실 입구에는 종이 한 장이 붙어있었다.
조심스레 손을 뻗어 그 종이의 내용을 확인해보는 준모.
곧 사색이 된 표정으로 크게 소리쳤다.
“여...여기! 여기입니다!”
준모의 목소리를 듣고 부하들이 부리나케 뛰어왔다.
뒤늦게 다가온 경수가 부하들을 비집고 준모의 앞에 섰다.
준모는 들고 있던 종이를 건네주었다.
“우웁!”
경수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고 온 몸이 부르르 떨었는데 옆에 있던 사내들이 슬쩍 내용을 보며 버럭 소릴 지른다.
“아아아!”
사내들이 모여들며 경수 손에 들린 내용을 읽고 모두가 놀란다.
‘청일병원에 잘 모셨습니다’
경수는 종이를 쥐고 말했다.
“청일병원으로 간다.”
다다다닥!
사내들은 다시 뛰어가기 시작했다
청일병원 야간 응급실로 수미의 부하들이 들이닥쳤다.
응급실 입구 의자에 앉아 졸고 있던 보안요원이 화들짝 놀라며 일어섰다.
보안요원이지만 수미 부하들에게서 풍기는 기세에 안색이 굳어졌다.
경수가 한 발 다가서자 보안요원은 저도 모르게 주춤 물러났다.
“말 좀 물읍시다.”
경수의 표정이 싸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