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9화 : 당장 내게 싸움을 걸어라.
“아.”
방지턱을 잘 못 넘어간 듯 차가 크게 흔들렸다.
운전석의 사내가 조수석을 돌아보며 죄송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형님.”
기자회견을 시청하던 황석희의 핸드폰이 조금전 차체의 흔들림으로 인해 떨어졌기 때문이다.
발 밑으로 떨어진 핸드폰을 주워든 황석희는 개의치 말라는 듯 손짓했다.
“괜찮다. 근데 태건이 이 새끼는 한 마디를 안하네.”
“그러게요. 다른 사람들은 말을 못해서 안달인데.”
“답답한 자식, 말하다 벼락 맞은 조상이 있나. 이럴 때는 한 마디해야 하는데.”
황석희는 핸드폰을 다시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운전하는 부하는 생각만 해도 신기한 듯 흥분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그래도 태건 형님 대단하십니다. 8강까지 올라가시고. 저 아는 사람이 티비에 나오는 것 처음입니다.”
황석희는 어이가 없단 듯 사내를 흘겨보았다.
“아는 사람? 평소엔 태건이한테 인사도 안하던 놈이?”
부하는 억울하단 듯 황석희를 슬쩍 돌아보았다.
“솔직히. 태건 형님 무섭잖습니까. 가끔씩 밤에 뵈면 머리털이 주뼛 선다니까요. 저승사자도 아니고.”
“그렇지만 그게 또 그놈 매력아니겠냐.”
편하게 농담을 주고 받지만 사실 황석희는 태건이 너무 소극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있다.
황석희가 담배를 피워물며 유리문을 조금 내렸다.
‘이렇게 큰 대회라면 악다구니라도 써서 관심을 좀 받아야 하는데’
프로는 실력이 우선이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쇼맨십도 필요하다.
대중을 자극하고, 흥분시켜 경기장으로 불러들이는 것 또한 선수의 몫이다.
그 순간 손 하나가 두 사람 사이로 비집고 나온다.
“여기서 우회전입니다...”
“이쪽!”
손의 주인공은 얼마전 호텔 앞에서 잡았던 두 명의 약 판매상중 한 명이었다.
곧바로 겁을 주고 목에 밧줄까지 걸어 매달아 버리겠다고 하자 모든 걸 털어 놓았다.
지금 그가 뱉어 낸 약 유통책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차는 수원의 폐공장단지로 들어섰다.
팔구십 년대 우리 수출에 큰 몫을 차지했던 이곳 수원 화학 공단은 그때의 영화는 찾을 수 없고 잡초만 무성했다.
굳게 잠겨진 녹슨 철문과 무슨 무슨 회사라고 써붙인 담벼락의 페인트 글씨도 벗겨져 보이지 않는다.
차는 공단 끄트머리에서 멈췄다.
“차 세워봐.”
“네.”
이내 차는 완전히 멈췄고 황석희는 뒤를 돌아보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사내를 쳐다보았다.
“잘할 수 있지?”
황석희의 눈이 좁혀졌다.
“무...물론입니다.”
사내가 긴장한다.
덜컹!
봉고차 문이 열리며 사내는 묵직한 가방 한 개를 들고 차에서 내렸다.
멀어지는 사내를 보며 황석희가 부하들에게 말했다.
“아까 말한 대로 둘은 뒤쪽으로 돌고 나와 천수는 앞으로 간다. 알았지?”
뒷좌석에 앉은 두 명의 부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긴장들 해.”
이 일만 잘 마무리 된다면 모영배가 준비한 계획의 절반이 날아가는 것이다.
‘그 영감 곱게 살다 죽을 일이지.’
황석희는 히죽 웃었다.
부하 두 명이 사내와 시간 차를 두고 차에서 내렸다.
황석희는 운전석 사내 천수에게 지시했다.
“우리도 가자.”
두 사람도 차에서 내렸다.
먼저 내린 두 사내는 오른쪽으로 사라졌고 황석희와 천수는 곧장 올라갔다.
차는 올라갈 수 없는 좁은 골목이다.
잡초가 길인지 풀밭인지 구분을 할 수 없을 만큼 수북했다.
커다랗게 자란 풀을 헤치고 나아가자 조그만 공터가 나타났다.
티익!
핸드폰이 울려 재빨리 확인했는데 뒷좌석에서 내렸던 두 부하 역시 공터 맞은편에 잘 도착했다는 내용이다.
파팟!
황석희 눈이 빛난다.
잡초사이로 처음 보는 사내가 나타났다.
조금전 혼자 내린 사내와 가벼운 악수를 주고 받았는데 판매책이다.
놈을 잡아야 모영배가 작당한 모든 일이 드러난다.
두 사람은 간단한 확인 절차를 거치더니 서로가 들고 있던 가방을 교환했다.
가방을 전달받은 차에서 내린 사내는 뒤를 돌아 잡초 사이로 사라져 버렸고 약 가방을 받은 사내는 지퍼를 열어 그 안에 든 물건을 다시 한 번 확인하더니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어이.”
황석희와 천수가 다가갔다.
사내는 놀라는 표정을 하더니 재빨리 몸을 돌려 도주하려고 했다.
하지만 유령처럼 웃고 서 있는 등 뒤의 두 사내를 발견하고 소스라친다.
“뭘 그렇게 놀래. 그 가방 좀 보자고.”
천수가 한 걸음 다가간다.
그러면서 슬쩍 상의 옷자락을 들었는데 그 안으로 칼이 보였다.
판매책은 고민하는 듯 하다 이내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더니 동시에 고개를 끄덕인다.
그 순간 가방을 내던진 사내가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공터 오른쪽으로 달려 순식간에 공단으로 이어지는 골목으로 사라져 버린다.
“이 새끼!”
천수와 나머지 두 부하가 뒤를 쫓았다.
* * *
부하들이 가져다준 노트북으로 기자회견을 지켜보던 수미.
“쯧쯧. 결국은 못 참고 저렇게 저질러버렸구만.”
노트북을 치우라는 듯 손짓하는 수미.
한 부하가 달려나와 노트북을 덮었다.
“태건이 놈이 한마디도 안해서 부사장은 섭섭하겠구만.”
“네. 아마 그럴겁니다.”
수미는 자리 뒤쪽 선반에서 책 하나를 집어들었다.
목에 걸린 안경을 쓰며 부하에게 물었다.
“부 사장은 어디갔나?”
“네. 잠시 자리를 비운 것 같습니다.”
노트북을 들고 일어나려는 부하가 실수로 수미의 찻잔을 툭 쳐버렸다.
잔은 책상 아래로 떨어지며 산산조각이 났다.
부하는 질색한 표정으로 곧바로 떨어진 찻잔을 주웠다.
수미가 가장 아끼는 컵이니 불호령이 떨어질 것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의외로 수미는 아무 말이 없었다.
“흠.”
마치 무엇인가 안 좋은 기운을 느낀 듯 표정이 가라앉았을 뿐이었다.
전화기를 집어 든 수미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 * *
다다닥!
“거기 서, 안서!”
구불구불 이어지는 골목길을 따라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벌어졌다.
사냥감과 사냥꾼.
쫓기는 쪽과 쫓는 쪽 모두 필사적으로 달렸다.
퍼억!
막다른 골목에 도망치던 판매책이 당황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더니 담장을 타고 넘어 공장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알아서 들어가네.”
천수가 흡족한 얼굴을 했다.
휙!
휘이익!
황석희 일행도 망설이지 않고 담장을 넘어 공장으로 뛰어들었다.
이윽고 판매책과 사내가 한 공장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들과 가장 가까이 있던 부하 한 명이 몸을 던져 판매책과 부딪혔다.
“어이차!”
거친 숨을 내쉬며 그를 제압하는 부하.
발버둥을 치지만 무릎아래에 깔려 옴짝달싹을 못하는 사내였다.
곧바로 황석희 일행들이 뒤따라 공장 안으로 들어왔다.
“잘했다.”
“쬐깐한 놈이 잘 뛰네요.”
판매책의 뒷목을 잡고 거칠게 일으켜 세운 황석희.
그러나 잡힌 사람치고는 표정이 밝았다.
황석희는 무엇인가 잘못 되었음을 느꼈다.
불현듯 황석희에 머릿속을 스치는 불길한 생각.
그리고 그 생각은 현실이 되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발소리와 쇠붙이끼리 부딪히는 소리.
이십여 명의 사내들이 야구방망이와 쇠파이프, 회칼 따위를 들고서 웃고 있었다.
‘이런!’
황석희는 자신이 사냥꾼이 아니라 사냥감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선두에 낯익은 사내가 있다.
모영배 밑에서 온갖 더러운 청소를 하는 조상무라는 사내다.
황석희는 숨을 헐떡이며 조상무 옆에 서 있는 판매책을 바라보았는데 자신과 눈길이 마주치자 씨익 웃는다.
마치 자신을 병신하며 놀리는 것 같다.
완벽하게 당했다.
도망가는 판매책을 누가 쫓지 않겠는가.
그리고 막다른 골목에 이르자 담장을 넘는 사냥감을 보며 어느 사냥꾼이 같이 따라 넘지 않을까.
‘그렇군’
황석희는 앞뒤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호텔에서부터 의도적으로 자신들에게 정체를 노출 시킨 것이다.
즉 자신을 오늘 이 자리로 불러내기 위해 저들의 시나리오는 그때부터 쓰여진 것이다.
“이름만 들었지 이렇게 얼굴 마주한 건 처음인 듯 싶습니다.”
조상무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정식으로 인사드리죠. 조상현입니다.”
나이는 황석희가 한참 어리다.
그러나 조상무는 함부로 말을 내뱉지 않았다.
‘판매책까지 정확히 스물한 명.’
황석희는 상대의 숫자를 세었다.
그런데 이쪽은 자신을 포함해 모두 네 명이다.
“흐흠”
황석희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흘긋!
서쪽으로 기울어가는 태양을 바라보며 어금니를 물었다.
어쩌면 생애 최악의 순간이 될 수도 있다.
‘저 대문을 걸어서 나갈 수 있을지 모르겠군’
황석희는 쇠사슬로 결박하듯 잠가 놓은 녹슨 대문을 바라보았다.
“천수!”
“예 부사장님!”
“태현이 성철이 너희들까지 여기 있을 것 없다.”
도망치라는 뜻이다.
셋이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에 도망을 치라는 얘기에 천수가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섭섭하게 하십니까.”
“어차피 두 당 넷 다섯만 넘기면 되는 일 아닙니까?”
이태현이 차고 있던 회칼을 뽑아 들며 웃었다.
슥!
정성철 역시 상의를 벗어던지며 칼을 뽑아들었다.
“조져!”
조상무의 명령이 떨어졌다.
“죽여도 좋으니까.”
마치 밤안개가 밀려오듯 사내들이 다가온다.
황석희는 결연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살아만 있어라. 알았나?”
황석희는 부하들을 격려하며 역시 회칼을 뽑아 들었다.
“와라!”
“죽자아아아!”
이태현과 정성철이 소릴 지르며 마주 달려갔다.
* * *
두호는 자신의 숙소로 돌아왔다.
중요한 경기를 앞둔 사람에게 더 이상 육체훈련은 중요하지 않다.
차분하게 자신을 가라앉히고 냉정해지는 멘탈이 중요한 것이다.
두호는 의자에 앉아 창 밖에 보이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의 다 왔다.’
약간 호흡이 거칠어지긴 했으나 단순히 일준의 도발로 인한 흥분은 아니었다.
과거 두호가 느꼈던 감정의 연장선, 그리고 격투기 선수답게 끓어오르는 본능적인 승부욕인 것이다.
차분하게 가라앉혀야 한다.
케이지든 일상에서든 흥분은 무조건 득(得)보다는 실(失)을 가져온다.
두호는 조심히 몸을 일으켜 얼마 전 나오와의 일전을 복기했다.
그의 펀치와 기세.
발 하나의 스텝부터 시선까지.
자신이 볼 수 있는 스포츠로써의 가장 완벽한 움직임이었다.
슉!
스스슥!
주먹을 뻗고 옆으로 이동하는 스텝.
당시 나오와 대결 때보다 지금 다시 한다면 더 나아진 모습을 보여줄 것 같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지잉
두호는 책상 위에 있는 핸드폰을 확인했다.
화면에 수미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
“네. 접니다.”
-오늘 기자회견 잘 봤네.
두호는 옅은 미소를 띄웠다.
“감사합니다. 이모님 덕분입니다.”
수미는 기분 나쁘지 않는 듯 목소리가 맑았다.
두호는 의자에 앉았다.
흘끗!
벽에 걸린 시계를 보는데 밤 아홉 시다.
이번 대회 시작하고 한 번도 직접 전화를 걸어온 적은 없었다.
그것도 아홉 시면 운동선수에게는 깊은 시간이다.
두호는 수미가 단순히 근황이나 묻자고 전화를 건 것은 아니라는 걸 간파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혹시 오늘 황 부사장 만났나?
“며칠 전에는 스치듯 봤습니다만 오늘은 전혀.”
-그래?
수미 역시 목소리가 차분해졌다.
-연락이 안 되는군.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는데.
두호의 눈빛이 일순 날카로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