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쟁의 신이 케이지 안으로-78화 (78/204)

제 78화 : 당장 나에게 싸움을 걸어라.

채수는 노명환이 떨어트린 핸드폰을 주워들었다.

꿀꺽!

노명환이 마른침을 삼킨다.

심장소리가 북소리처럼 커지고 온 몸의 세포가 발끈 일어선다.

잠시 켜져 있는 핸드폰을 무표정하게 바라본 채수는 싱긋 웃으며 핸드폰을 돌려주었다.

“조심하셔야죠. 여기 있습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 젼혀 다른 반응에 노명환은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노명환은 채수가 건넨 핸드폰을 받아드는데 손끝이 미세하게 떨린다.

“감사합니다.”

“끊어진 것 같은데요.”

“괜찮습니다. 나중에 다시 하면 되니까요.”

“수고해요.”

채수가 돌아가려다 뭔가 생각 난 듯 돌아섰다.

“아, 그리고 이번에 노 대리님 저희 진행팀 소속으로 바뀌었는데 들으셨어요?”

“제가요?”

처음 듣는 소리에 노명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진행팀.

대회 전체의 진행과 선수들 일정의 종합적인 관리를 맡는다.

흔히 말하는 승진에 도움 될 만큼 일한 티가 나는 자리였다.

좋은 일이다.

승진이라는 표현까지는 할 수 없지만 분명 만족스러운 일인데 가슴은 이상하리만치 답답하다.

‘왜 지금이지.’

대진표 정보를 넘겨주는 과정에서 실수가 발생했다.

그래서 부랴부랴 내용 수정에 대해 보고를 하려는 타이밍에 갑작스런 인사조치다.

툭!

채수는 노명환의 어깨를 툭 쳤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기자회견 끝나고 팀원 전체 모이니까 소회의실로 오시고요.”

“네. 알겠습니다.”

채수는 느린 걸음으로 노명환을 지나쳐 걸어갔다.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노명환이 눈을 좁혔다.

“으흠!”

갑자기 목덜미가 서늘하다.

올가미에 걸린 것처럼 꺼림칙해 노명환은 이마를 찌푸리며 사라지는 채수를 바라보았다.

* * *

미주는 잠시 카메라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찾아주신 귀빈 여러분께 안내말씀 드리겠습니다. PRIDE-K 페이스오프에 앞서 잠시 필린의 입장 발표가 있습니다. ”

관객들과 선수들 역시 모두 의아한 눈빛으로 미주를 바라보았다.

중요한 8강전을 앞두고 입장발표라니 평범한 얘기는 아닐 것이다.

선수도 관객도 모두 숨을 죽인다.

미주는 마이크에서 잠시 고개를 돌려 목을 가다듬고 들고 있던 서류 한 장을 펼치더니 읽기 시작했다.

“필린은 이번 승부 조작과 스포츠도박 사이트의 대한 여러 의혹들을 해결하기 위해 이번 8강에서는 1라운드 때와 같은 추첨을 이용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현재 인터넷에 유포되어 있는 대진표와는 전혀 무관한 새로운 대진이 나올 것이니 PRIED-K를 사랑해주시는 많은 분들 이 점을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미주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사람들은 술렁였다.

갑작스러운 대진표 변경 선언.

“뭐야. 대진표를 바꿔?”

“에이, 조태건이랑 김준훈 경기 진짜 기대했는데...”

관객들이 술렁거렸고 기자들은 기다렸다는 듯 미주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미주는 기자들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건 회사의 입장을 발표하는 위치에 있을 뿐 속사정은 알지 못한다는 뜻이다.

단상의 선수들은 덤덤한 표정들이다.

별 상관치 않는 듯 했다.

사실 얼마 전부터 자신들도 공지 받지 못한 대진표가 인터넷 사이트에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도박사이트가 후끈 달아올랐다.

천문학적인 거액이 굴러다니며 판이 커지자 경찰에서 관여하기 시작했고 정부에서도 필린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는 공문을 보내기까지 했다.

더욱 심각한 건 도박판이 커지면서 승부 조작설이 돌았고 몇몇 선수의 이름들이 오르내린 것이다.

신문에까지 A선수, B선수 하는 식으로 대여섯 명의 익명이 실렸다.

‘뭐야 짜고 치는 고스톱이야’

‘승자를 정해놓고 판을 벌인다는 건가.’

아니라고 해명 자료를 냈지만 도무지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오늘 이렇게 자리를 마련해 다시 한 번 분명한 필린의 의지를 밝힌 것이다.

진행요원 한 명이 커다란 상자 한 개를 들고 올라와 한쪽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저 안에는 8개의 탁구공이 있습니다. 동일한 번호를 뽑은 사람과 대결을 벌일 것입니다. 선수들 한 분씩 나오셔셔 손을 넣어 직접 뽑아 주세요.”

선수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명씩 나와 상자속에 손을 집어 넣고 안에 들어 있는 탁구공을 뽑기 시작했다.

“뽑은 공은 저쪽에 있는 진행요원에게 전달하시면 됩니다.”

공을 뽑은 선수들의 반대편에 앉아있는 또 다른 진행요원에게 공을 가져다주었다.

진행요원은 탁구공을 전달받고 번호 확인을 한 뒤 컴퓨터에 입력했다.

그런 식으로 추첨은 빠르게 이어졌다.

스윽!

마지막 순서로 두호가 공을 뽑아들어 가져다주고 제자리에 돌아가 앉았다.

다다닥!

선수들은 모두 곧 대진표가 올라올 전광판을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만만한 선수를 만나길 기대하는 눈빛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사실 8강전 진출자라면 거기서 거기다.

약자는 결코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래도 혹시나 하는 얼굴들이었다.

진행요원이 노트북 자판을 빠르게 치더니 엔터를 쳤다.

탁!

동시에 전면 전광판에 대진표가 나왔다.

사실 8강전 진출자라면 거기서 거기다.

약자는 결코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래도 혹시나 하는 얼굴들이었다.

진행요원이 노트북 자판을 빠르게 치더니 엔터를 쳤다.

탁!

동시에 전면 전광판에 대진표가 나왔다.

일준의 얼굴에 미소가 나타났다. 그러더니 앉은 자리에서 주먹을 뻗는 시늉을 했다.

두호 역시 고개를 들어 대진표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이름 옆에 적힌 상대는 2번의 김준훈.

준훈의 눈이 찡그러졌다.

하지만 표정은 이내 다시 평온해지며 결의에 가득 찬 눈빛을 보였다.

‘달라질 건 없어. 어차피 넘어야 될 산이야.’

곧 추첨을 마친 미주는 자신의 큐 카드를 집어들고는 진행을 이어갔다.

“네. 이제부터 기자분들의 질문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이 기자회견의 메인이벤트다.

순식간에 여러 기자들이 손을 들었고 미주가 한 사람을 지목했다.

기자가 마이크를 건네받고 빙긋 웃었다.

“네. 데일리 스포츠 김조은 기자입니다. 백두호씨에게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내 한 직원이 빠르게 뛰쳐나와 두호에게 마이크를 전해주었다.

두호는 마이크를 쥐고 기자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단 한 번의 패배와 위기도 없이 여기까지 오셨는데 기분이 어떠십니까.”

“백두호! 백두호!”

두호의 팬들이 함성을 질렀다.

“어떤 기분을 의미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선을 다했으니 후련합니다.”

“도경욱 선수와 경기 때 이곳을 접수하러 나오셨다고 했는데. 그럼 남은 선수들을 모두 만만하게 생각하신다는 것으로 받아들여도 좋을까요?”

기자의 질문을 듣고는 두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걸 본 팬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저 기자 말꼬리 잡고 늘어지는 것 좀 보소. 접수하러 나왔다는 말이 어떻게 출전 선수들을 만만히 본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가 있냐고? 기레기 아니랄까봐.”

“데일리 스포츠 신문은 백두호 선수에게 악감정있냐? 말 똑바로 못해?”

아 다르고 어 다르다.

두호의 발언을 꼬아 선수들간의 감정싸움을 유도하는 질문이었는데 팬들이 흥분한 것이다.

“여러분 잠시만요. 진정해 주세요.”

미주가 두호 팬들을 조용히 시켰다.

“여러분들의 기분 알지만 오늘은 선수들의 각오와 생각을 듣는 중요한 페이스 오프입니다. 원활한 진행을 위해 자제해 주시죠.”

미주가 차분하게 장내를 정리했다.

“두호씨 답변 들어볼까요?”

두호는 잠시 고민하는 듯 했다.

“8강까지 올라온 분들인데 누구도 만만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미주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진다.

두호는 누가 뭐래도 이번 대회의 아이콘이다.

흥행의 중심에 있는 사람 입에서 너무 뻔한 말이 나온다는 건 바람직 하지 않다.

프로는 경기에서 이겨야 하지만 뱉어내는 말 한마디가 인기를 좌우한다.

하지만 실망하기엔 너무 일렀다.

“그렇다고 딱히 위협을 느끼지도 않습니다.”

와아아!

두호의 팬들은 열광했다.

“그럼 그렇지! 괴물을 누가 상대하냐고, 언 놈이든 붙어!”

“하하하 쟤들이 되겠어? 되겠냐고!”

그제서야 미주도 살짝 웃는다.

질문을 던진 김조은 기자도 흡족한 얼굴이다.

선수들에게 다양한 질문이 쏟아졌다.

질문에 대한 선수들의 대답도 가지각색이었다.

“난 이기기 위해 왔다.”

“모두 개소리들이다. 진정한 챔피언은 나다.”

“필린을 향해 한 마디 하겠다. 상금과 승용차 우리 집 앞으로 옮겨다 줄 것을 정중히 요청한다.”

자신이 한국 최고라고 소리치는 선수가 있었고, 몇몇 실명을 거명하면서 도저히 실력이 안 되는데 어떻게 여기까지 올라온 건지 필린과의 뒷거래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겸손한 태도로 일관하는 선수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자신이 최고라고 했다.

유일하게 태건만이 기자들의 질문을 거절했다.

“서울스포츠 백미영 기자입니다. 정일준씨에게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그 순간이었다.

일준이 의자 등받이에 등을 붙이며 책상 위에 다리를 올렸다.

턱!

다리를 꼰 체 마이크를 집어든 일준.

미주는 놀라고 당황했지만 아래서 지켜보는 채호의 표정은 밝아졌다.

‘어쩌니저쩌니 해도. 스타성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구만.’

일준은 진행요원이 건네준 마이크를 집었다.

“하슈.”

기자의 안색이 잠깐 굳어졌다가 이내 질문을 이어나갔다.

“이번 대회에서 우승후보로 거론되는 세 사람이 있습니다. 백두호, 조태건, 정일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일준이 씨익 웃는다.

“순서가 틀렸어. 정일준. 내 이름이 제일 앞에 나와야지. 왜? 내 말이 잘못된 건가?”

예의가 없고 거칠기까지 한 말투.

스포츠 스타가 아닌 뒷골목 건달을 보는 듯 했다.

일순 기자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너무 강하게 치고 나온다.

그러나 관중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정일준! 정일준!”

“아 진짜 마음에 들어. 매운맛 좋다!”

기자는 방금 전과는 다르게 말을 더듬었다.

“그러면 본인이 생각하기엔 어떤 분이 제일 위협으로 느껴지십니까?”

“위협이라...”

일준은 재밌다는 듯 큰 소리로 웃었다.

“어이 기자양반. 사자가 사슴한테 위기의식을 느낄 수가 있나?”

두호와 태건을 먹잇감으로밖에 생각하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일준은 선글라스를 벗어 책상에 툭 던졌다.

“난 코치보다 더 먼저 변호사를 고용했어. 언제 누구를 죽일지 모르니까. 뭔 뜻인지 알지?”

팡!

파라락!

일준의 거침없는 발언에 카메라의 셔터는 불이 난 듯 눌렸다.

기자들이 올린 기사는 금세 인터넷 채팅창에 거센 불길이 타올랐다.

‘뭐 저런 놈이 있냐? 미친놈.’

‘우리나라 선수 입에서도 이런 말도 나오고. 시대가 많이 변했네.’

‘저 새끼 싸가지없게 생긴 것부터 알아봤다.’

기자의 질문이 이어졌다.

“과거 아시안게임 국가대표 결승전에서 두호씨와 승부를 내셨습니다. 그때의 있었던 이슈에 대해서 한 마디 해주실 수 있습니까?”

자신이 가장 숨기고자 하는 아킬레스건인데도 일준은 당당했다.

“그거는 나중에 기자님이 저한테 데이트 신청하시면 알려드리죠.”

그러면서 일준은 미니스커트 차림의 여기자를 쓰윽 훑는다.

관객들은 재밌다며 박장대소했고 기자는 불쾌한 듯 고개를 저으며 마이크를 내려놓았다.

“데이트는 싫다? 그럼 어쩔 수 없지 뭐.”

일순은 오른쪽으로 다가온 진행요원에게 마이크를 던져준다.

그리고 멈칫했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한 사내의 시선과 마주친 것이다.

두호였다.

우연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둘의 시선이 부딪친 것이다.

“3년전 일 끝맺음을 지어야지. 얼른 올라와라. 그날 모두가 보는 앞에서 볼썽사납게 죽여줄테니까 씨발 새끼야.”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한 번 두호를 바라보더니 기자회견장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사람들은 광기에 휩싸였다.

어떤 사람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성을 질렀고 누군가는 자신이 들고 있던 물병을 집어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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