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6화: 당장 나에게 싸움을 걸어라.
미래라는 말에 두호의 눈이 좁혀진다.
그걸 보며 조달환 과장은 빙긋 웃는다.
“뭐. 두호씨 계획에 확신을 더하는 정도겠지만요.”
계획의 확신을 더한다.
누구나 계획은 가지고 있다.
하지만 시대와 상황 그리고 운에 따라서 그 계획은 무너지기도 하며 예상외로 더욱 크게 이루어질 수도 있다.
사람이 세운 계획을 확신으로 만들어준다는 것.
어떤 분야의 종사하는 사람이든 갖고 싶은 안정감이다.
조달환은 어깨를 으쓱했다.
“얼마 전 저희 킹 챔피언쉽이 중국의 대기업 팔리바바와 함께하게 된 것 들으셨나요?”
두호도 뉴스에서 얼핏 본 기억이 있다.
전자상거래 업체와 스포츠 기업의 콜라보는 유례없는 일이라며 떠들어댔으니까.
전문가들의 분석에는 필린 PRIDE-K의 대항마를 만들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라는 말이 있었다.
두호는 조달환의 말을 그저 듣고만 있었다.
“두호씨. 한국이 왜 아직도 격투기 산업의 불모지인 줄 아십니까?”
두호의 목소리는 가라앉았다.
“뭡니까.”
“한국 스포츠는 이제 구조적으로 큰 그림을 그릴 수가 없습니다.”
“구조적?”
조달환은 헛웃음을 지으며 이유를 말해주었다.
두호는 조달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눈을 찡그렸다.
“한국에는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에 열린 사람들이 많습니다. 특히 젊은 층이요. 세련되고 화끈한 마케팅이면 언제든 직관을 하러 올 사람들이 많다는 겁니다.”
조달환은 자신의 얘기에 몰입한 듯 표정이 더욱 진지해졌다.
“단순히 경기 수준이 낮아서 인기가 없는 것이다? 아니죠. 필리핀 농구 보십시오. 세계대회에서 먹히진 않지만 국민적 관심은 엄청나지 않습니까.”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은 조금 다르다.
축구 하나를 놓고 볼 때 국가대표팀 경기가 아니면 현장을 찾아가는 팬은 대폭 줄어든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
단순히 재미가 없어서만은 아닐 것이다.
조달환은 씁슬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대다수 종목의 협회, 대회, 단체, 후원사들이 하나로 흘러가지 못한데서 오는 절망의 모습들을 팬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지 않습니다. 스포츠 마케팅처럼 무궁무진하게 변화를 줄 수 있는 분야는 없습니다. 하지만 한국 스포츠는 한결같이 공존공영이 아니라 나만 살자는 부조리한 이기심이 만연해 있죠.”
두호는 딱히 반박하지 않았다.
고이면 썩는다.
특히 유별나게 하나의 단체가 독과점을 하는 한국 스포츠의 특성상 이런 일이 비일비재 하다.
“그런 부정적인 이미지에 기업들은 진출을 머뭇거리고 격투기 단체들 역시 소극적인 운영으로 갈 수밖에 없으니 갈수록 시장은 퇴보했던 것입니다.”
조달환의 말이 틀리진 않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고개를 끄덕여 줄 수는 없었다.
일부 맞지만 일부는 틀리기도 했다.
그리고 더욱 결정적인 건 접근 방식이다.
조달환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KFA 정혁? 그 다음은 누굽니까. 설령 그런 인재가 나온다 하더라도 과연 이런 시스템에서 그 선수를 세계시장으로 배출할 수 있을까요?”
조달환의 말에 두호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것은 두호의 생각과 동일했다.
필린의 이번 대회가 없었다면 참가자들은 이런 관심을 절대로 받지 못했을 것이다.
멀리 보지 않아도 두호의 과거가 그러한 일들의 피해자였다.
“필린이야 구기 종목에서는 인정할만한 에이전시인 것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격투기 분야에서는 신생 주자죠.”
그리고는 곧 조금 전 웃음과는 다른 의미에 웃음으로 바뀌었다.
자신의 가방에서 서류 하나를 꺼내 벤치에 올려놓았다.
두호를 향해 스윽 밀어넣는다.
-킹 챔피언쉽 선수 계약서.
“이런 시스템 속에서 과연 필린이 한국 격투기 산업에 미래가 되어줄 수 있을까요?”
두호는 그의 말에 옅은 미소를 띠었다.
자신의 설득과 주장이 먹힌 것이라고 생각한 조달환은 밝은 미소를 지었다.
“저희 킹 챔피언쉽은 보여줄 수 있습니다. 두호씨가 세계 무대에서 활약하며 대한민국 격투기 유망주들에게 진짜 희망이 되어보는 겁니다.”
자신들과 함께하면 할 수 있다라는 자신감이었다.
두호는 조달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조 과장님.”
“네.”
두호는 서류를 다시 조달환 쪽으로 밀었다.
“PRIDE-K의 중요한 가치가 뭔지 아십니까?”
조달환은 역시 알고 있다.
하지만 두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더욱 깊은 이야기인 것 같았다.
“청춘과 도전입니다.”
두호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청춘은 언제나 서툴고 실수하죠. 모든 것에 어설프며 참담한 결과에 괴로워합니다.”
이번엔 조달환이 두호가 한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두호는 빙긋 웃었다.
“대한민국에 이 산업도 언젠간 건강하게 자리 잡을 겁니다.”
언제나 첫 걸음은 어렵다.
수많은 시행착오와 함께 후회와 실수가 반복되기 마련이다.
두호는 지금 이 순간이 한국 격투기 산업의 과도기라 말하는 것이다.
조달환은 답답한 표정이었다.
“두호씨 하지만...”
두호가 그만 말하라는 듯 손을 들었다.
“지금 대한민국에 필요한 것은 격투기 스타가 아니라. 유망주들이 마음껏 뛰며 걱정 없이 운동할 무대 입니다.”
필린의 PRIDE-K가 격투기 유망주들의 새로운 희망이 될 것이며 자신 역시 그 무대를 통해 성장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래야 더욱 의미가 있는 것이니까.
두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저는 이만...”
두호는 짤막한 인사와 함께 호텔로 발걸음을 옮겼다.
조달환은 멍한 표정으로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자신 역시 젊었던 시절 저런 치기 어린 말들을 뱉었었다.
하지만 누구나 그렇듯 현실을 살다보면 점점 이상은 줄어들고 차가운 이성이 가득 채운다.
두호가 한 말은 만약 자신의 부하직원이 했다면 한 마디 쏘아 붙였을 꿈 같은 말들이었다.
하지만 기분이 묘했다.
마치 어느 역사의 시작점을 두호가 보여준 듯한 느낌.
그리고 정말 두호가 말한 것이 실현될 것 같았다.
“참...”
조달환은 서류를 다시 가방에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호텔의 출구 방향으로 천천히 걸어가는 그였다.
두호는 생각에 잠겼다.
자신이 말한대로 지금 대한민국에 필요한 건 사람이 아니다.
인프라다.
자신이 그 일에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음을 다시 생각한다.
하지만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심상치가 않다.
과연 잘 마칠 수 있을 것인지 고민하는 두호였다.
“에휴.”
가벼운 한숨과 함께 호텔로 걸어가는 중 누군가를 발견했다.
어두운 복장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실루엣이 익숙했다.
두호는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따라붙었다.
한 사내가 객실 문을 열고 고개를 빼꼼 내민다.
하지만 무척이나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내 아무도 없음을 안 사내들은 안심하는 표정을 지은 채 밖으로 빠져 나왔다.
작은 목소리로 대화하는 두 사람.
“낄낄. 처음엔 그렇게 망설이는 척하더니.”
“그러게 말이야. 인간 다 똑같다.”
그들이 처음 호텔로 왔을 때 손에 든 가방은 이미 없어졌다.
아무래도 한 선수에게 넘긴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근데 저 약 어딘가 본 적 있지 않냐?”
“글쎄. 난 다른걸 본 적이 없어서.”
한 사내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의아해했다.
“주사기야 똑같은 게 몇 백개인데.”
“그건 그래. 야 얼른 서울 가서 삼겹살에 소주 한잔 어때?”
사내는 손 모양으로 소주잔을 만들어 마시는 시늉을 하였다.
그 모습을 본 다른 사내 역시 기분이 좋아진 듯 했다.
“어우. 좋지. 얼른 가자.”
사내들은 호텔 정문이 아닌 호텔 소모품이 들어오는 문으로 빠져나왔다.
주위를 조심히 살피며 걸어내려가 자신들이 주차해놓은 차 근처에 도착했다.
자신의 차 키를 꺼내들고 차 문을 연 그 순간.
어디선가 튀어나온 사람이 뒤통수를 부여잡고 차 창문에 박았다.
-쨍그랑.
사내는 차 창문에 수건처럼 널려 정신을 잃었다.
다른 사내는 당황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뭐야?”
그러자 또 한 명의 사람이 벼락처럼 튀어나와 돌아본 사내의 목을 휘어감았다.
괴로운 듯 몸을 이리저리 흔들어 보였지만 이내 힘이 툭하고 풀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뒷목을 감은 사내가 마스크를 벗었다.
황석희였다.
“차 안 확인해봐.”
차 창문을 깨트린 사람은 수미의 부하 동철이었다.
“네. 형님.”
동철이 차 안으로 들어가 무엇인가를 찾는 듯했다.
이내 원하는 것을 발견한 듯 고개를 들었다.
“찾았습니다.”
황석희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순간 누군가가 황석희를 불렀다.
“황 부사장님.”
황석희는 당황해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두호였다.
다른 목격자가 아님을 다행이라고 생각한 그는 이내 밝은 표정으로 두호를 반겼다.
두호를 향해 정중하게 고개 숙이는 황석희.
“두호씨. 안녕하십니까.”
두호 역시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네.”
두호는 널부러진 두 사내를 바라보고는 황석희를 다시 쳐다보았다.
무슨 상황인지 설명을 바라는 눈빛이었다.
황석희는 머쓱한 듯 미소를 지어보이며 박태준이라는 사내에게 받은 정보를 말해주었다.
그러나 설명을 들은 두호의 인상이 찌푸러졌다.
그 모습을 본 황석희가 의아해했다.
“무슨 안좋은 일이라도...?”
“음.”
두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을 정리하는 듯 했다.
“황 부사장님이라면. 저한테 과연 약을 팔겠습니까?”
“네?”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듯 황석희가 되물었다.
두호는 차분한 목소리로 다시 설명했다.
“이미 대회에서 우승후보라고 주목을 받는 저. 저한테 약물을 파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요?”
그러자 황석희 역시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다.
맞는 말이다.
우승 후보쯤으로 불리는 사람은 마음을 비우고 그 시간에 준비를 철저히 하면 된다.
이미 우승후보라고 언급이 된 순간부터 그는 타 선수들과 달리 엄청난 몸값 상승의 효과가 있으니까.
필린에게 집중 관리를 받을 두호에게 위험부담까지 안으면서 접근한 이유가 무엇일까.
그걸 모르는 모영배가 아닐 것이다.
“그건 그렇네요. 굳이 두호씨한테 접근할 필요는 없었는데.”
“아무래도 다른 의도가 있음이 확실합니다. 일처리 방식으로 보아 꽤 주도면밀한 사람 같은데 이렇게 삼류 같은 실수를 하다니.”
두호는 주차장 옆 한 가로등을 바라보았다.
가로등 밑은 밝았지만 그 뒷편은 더욱 어두워 보였다.
그 어둠속을 바라보아야 한다.
‘뭘 감추고 싶은거지.’
두호는 그 어둠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 * *
모영배는 기보를 보면서 혼자 바둑을 두고 있었다.
딱!
진지했다.
때로는 눈살을 찌푸리기도 하고, 어떤 때는 자신의 수가 매우 적절한 것에 흐뭇해 한다.
“저는 사실 아직까지. 정일준 그 친구를 못 믿겠습니다.”
조상무가 팔에 깁스를 한 채 입을 열었는데 자리에서 일어나 모영배쪽으로 걸어온다.
슥!
모영배는 담배를 물었다.
“왜?”
딸칵!
라이터로 불을 붙였는데 시선은 다시 기보에 고정된다.
“못 믿을 이유가 있을 것 아닌가?”
조상무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무엇인가 걸렸다.
느낌이었다.
증거는 없지만 이 느낌이 때로는 더 분명하고 정확할 때가 있다.
“글쎄요.”
“지금으로서는 증거를 갖고서 누군가를 평가하고 말해야 돼.”
일이 너무 깊숙하게 들어왔기 때문에 의심만으로 방향을 전환한다든가 작전을 변경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그렇긴 합니다만.”
“끊임없이 의심하는 건 나쁜 것이 아니지.”
슬쩍 다운될 수도 있는 조상무의 마음을 어루만져 준다.
“인간이 가장 독해지는 순간이 언젠 줄 알아?”
“돈이죠.”
모영배가 고개를 들었다.
“목표가 눈앞에 있을 때야.”
조상무는 이마를 찡그린다.
모영배 말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다.
모영배는 물었던 담배를 손에 쥐고 재떨이에 재를 털었다.
“목표가 몇 단계 위에 있으면 사람은 쉽게 포기하고 말아. 그런데 그 목표가 눈에 보여. 그때는 저거 거머쥘 수 있겠다. 저 자식 충분히 쓰러뜨리겠는데 하는 승부욕이 타오르지.”
화악!
이해가 된 듯 조상무의 눈이 커졌다.
일준에게 지금 목표가 눈 앞에 보인다.
결코 딴 짓을 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뜻이다.
지이잉!
조상무가 주머니에 손을 넣어 핸드폰을 꺼내 통화 버튼을 터치했다.
“그래! 오케이 알았어.”
전화를 끊는다.
“입질이 온 모양입니다.”
모영배가 들고 있던 기보를 탁자 위에 놓고 허리를 반듯하게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