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5화 : 당장 내게 싸움을 걸어라.
늦은 저녁.
처음으로 호텔 대회의장에 이번 PRIDE-K 모든 선수들이 모였다.
최종 생존자들이라 지나간 시간에 대해 가벼운 얘기라도 오고 갈 법 했지만 그런 일은 일절 없었다.
이제는 모두가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것이다.
모두 경쟁자일 뿐이다.
굳이 자신의 적이 될 수도 있는 사내와 친해질 이유가 있는 것인가.
다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음을 티 내는 사람은 없었다.
“하암.”
일준이었다.
그는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다.
“에이 씨발. 불러놓고 뭐 하자는 거야.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거친 발언에 참가자들은 일준을 슬쩍 일별했지만 이내 시선을 거뒀다.
일준처럼 거칠게 말할 생각은 없었어도 그들 역시 모두 같은 생각이었다.
여기에 앉아 대기한지 장장 한 시간이 다 되어간다.
상황을 설명해 줄 관리자급 간부들은 아무도 없었고 그저 직원 몇 명이 멀뚱히 서 있을 뿐이었다.
일분일초가 중요한 이 시점에 자신들을 모아놓은 이유가 무엇일까.
“아 정말 필린이라고 뭐 별 것 없구만.”
일준은 계속해서 불만 섞인 푸념을 쏟아내었다.
순간 구열이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일준을 바라보았다.
“조용히 좀 합시다. 여기 혼자 있는거 아니잖습니까.”
대회 본선 토너먼트를 앞뒀으니 누가 예민하지 않겠는가.
구열의 반응에 일준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하 참. 이젠 별게 다 말을 거네. 예예. 미안합니다 챔피언님.”
일준이 거수 경례하듯 이마에 손을 올렸다.
사과가 아닌 비아냥이다.
구열은 지그시 어금니를 물고 참아낸다.
축구선수는 발로 말하고, 격투기 선수는 주먹으로 얘기하면 된다.
한편 일준은 자리에 있는 선수들을 돌아보았다.
생각없이 떠든 것이 아니다.
성격에서 그 사람의 실력을 엿볼 수 있다.
필린을 향해 투덜거리지만 실은 자신의 상대가 될 수도 있는 이 자리 선수들의 비위를 건드려 본 것이다.
떠든 자신을 바라보는 사내들이 많았고 그들과 눈이 마주친다.
움찔 놀라는 사내도 있고 시선을 피하기도 하며, 어떤이는 노려본다.
일준은 웃는다.
모두가 깜이 아니다.
그러다 준훈에게 시선이 멈춘다.
‘저건 좀 치는 것 같지만 뭐 내 상대까지는 아닌 것 같고.’
이번엔 준훈의 옆자리에 앉아있는 태건에게 시선이 멈춘다.
멈칫!
일준의 눈이 빛난다.
‘여전히 애매한 놈이야.’
태건의 경기를 지켜 봤지만 타격 부분을 제외하고는 큰 위험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도 자꾸 신경이 쓰인다.
어쨌든 여기까지 올라왔다면 평범하지 않은 건 사실이고 또한 회심의 일격을 아껴두고 있을지도 모른다.
뚝!
번개가 일어나듯 일준의 눈에서 불꽃이 튄다.
두호였다.
피가 끓기 시작한다.
‘넌 내 손으로 꼭 죽일거다. 백두호.’
언제부터인가 두호에 대한 감정이 주체가 안되기 시작했다.
단순히 라이벌이라 그런 것은 아니다.
지나온 과거와 현재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미래까지 모두 그가 엮여있기 때문일 것이다.
일준과 달리 두호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반대편 창문의 풍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이제 제법 날이 더워져 나무들이 완전한 초록색을 띈다.
그 순간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이 있음을 느낀 두호는 고개를 돌렸다.
일준과 눈이 마주친다.
두 사람의 반응은 상반되었다.
일준이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한 들개의 표정이라면 두호는 덤덤했다.
두호의 눈에서 어떤 감정을 읽기란 어려웠다.
두 사람이 그렇게 소리없는 신경전을 펼치는 그 순간 문을 열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어온다.
채호를 필두로 예수와 필린의 간부들이었다.
같이 걸어오는 동안 예수는 채호에게 서류 하나를 건넸고 채호는 그것을 받아들었다.
채호는 허리를 숙였다.
“오래 기다리셨죠. 급한 일이 있어 죄송합니다.”
“이렇게 중요할 때 불러놓고 한 시간이나 기다리게 하는 건 뭡니까?”
일준의 말에 예수의 눈이 찌푸려졌다.
아무리 출전선수 중 상당한 무게를 지닌 일준이라고 하지만 엄연히 이 대회의 개최자인 채호이다.
“미안합니다. 회의가 길어져서 하하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늘은 전달사항이 좀 있습니다.”
일준의 날선 발언에도 채호는 미소를 띄우며 대답했다.
“나눠들 주시죠.”
필린 직원들이 A4용지로 된 서류를 나눠주기 시작했다.
-샤악
종이 펄럭이는 소리가 회의장 안에 가득했다.
두호 역시 받은 종이를 궁금해하며 펼쳐보았다.
“일단 내일 기자들을 모두 불러모아 공식적인 페이스오프 기자회견을 열 것입니다.”
기자회견이라는 말에 선수들 고개가 들린다.
채호는 말을 이었는데 경기 전 선수들의 각오나 선수들의 준비 상태에 대한 기자회견이란다.
사실 이런 기자회견에서 기자들은 자극적인 기사를 만들기 위해 선수들 입장에서 기분 나빠할 만한 질문들을 서슴지 않고 던진다.
확실한 대결구도와 마케팅 그리고 관중들의 몰입도를 높이기 위한 작업이며 어떤 경우에는 주최측과 질문 조율까지도 한다.
격투기 산업에서는 기자회견과 계체량 그리고 시합을 중요한 이벤트로 여긴다.
“곧 프로모션 영상도 업로드 될테니까요. 다들 각자의 생각을 잘 정리해주시길 바랍니다.”
나눠준 종이는 앞으로 벌어질 취재에 응하는 기술적 요령이 적혀 있었다.
기자들이 피곤할 만큼 찾아오고 취재하려 들테니 당당하고 자신있게 대처하라는 것이었다.
격투 스포츠에서 겸손은 결코 덕이 아니다.
최대한 자신을 내세울수록 대중은 흥분하고 열광한다는 내용은 기자들 질문에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를 암시하고 있었다.
‘다른 선수들에게 미안하지만 이번 대회 챔피언은 나다.’
‘누구든 내 상대는 격투기를 시작한 것을 후회하게 해주겠다.’
‘내가 혹시 케이지 위에서 누굴 죽일수도 있으니 미리 사과하겠다.’
그런 오락적이고 다소 섬뜩하기도 한 대답일수록 대중에게 더 강렬하게 각인된다는 예까지 들어놨다.
“그리고 지금 이번 PRIDE-K를 둘러싸고 여러 얘기가 흘러 다니고 있는 것을 아실 겁니다.”
선수들은 채호를 바라보았다.
-스포츠 도박.-
-승부 조작의 가능성.-
-불법 약물.-
“다들 아실테지만. 지금은 단순 음모론 정도로 치부될 일이지만 언제 이것이 판 자체를 뒤흔드는 일로 바뀔지는 아무도 예상할 수 없습니다.”
채호의 표정이 싸늘해진다.
“노파심에서 말씀드립니다만 무슨 짓이든 하지 말란 건 하지 마십시오. 알겠습니까?”
채호의 눈이 이글거린다.
몇몇 선수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선수들은 이런 채호의 표정을 처음 본다.
언제나 긍정적인 에너지를 내뿜는 채호에게서 이런 분위기가 나오다니.
언급된 문제들의 관련자는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여러분에게는 지금부터가. 시작일 것입니다. 준비 잘하여 좋은 성적 거두길 기대합니다. 아, 그리고 나눠드린 종이 맨 뒷장에 각 선수에게 스폰십을 맺자고 한 기업들 명단이 있습니다.”
팔랑!
싸라락!
시큰둥하게 보던 사내들까지 번개처럼 종이를 넘긴다.
“내일까지 스폰쉽 계약할 기업 선정하시고. 기자회견 전 가볍게 미팅할 겁니다. 그럼 이만.”
채호는 설명을 마치더니 곧바로 나갔다.
그 뒤를 간부들이 따른다.
“이제 그만 돌아가셔도 됩니다.”
안내 요원들이 말했다.
두호는 종이를 챙겨 일어났다.
회의장을 나서는 도중 일준과 다시 눈이 마주쳤다.
두호는 여전히 표정 없는 얼굴이다.
멀어지는 두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주먹을 말아쥔 일준.
손이 분노로 인해 부들부들 떨린다.
“죽일새끼, 끝까지 날 무시한다 이거지.”
거칠게 한 마디 씹어 뱉은 일준은 주머니에 전화기를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 * *
경기도 덕양의 폐공장.
모자를 눌러쓴 두 명의 사내가 서 있었다.
두 사내는 담배를 입에 물고 주머니에 손을 꽂은 체 히히덕거리고 있었다.
공장의 뒷편에서 한 사내가 나타났다.
사내는 손에 작은 가방 하나를 들었는데 희희덕 거리고 있는 두 사내를 향해 다가갔다.
“어이.”
자신들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더니 이내 마주 걸어간다.
“오셨군요.”
사내는 가방을 건넸다.
“알지? 하던대로. 과하게 넘기지는 마.”
“걱정 마세요.”
장사 한두 번 하느냐는 듯 자신있는 웃음을 짓는다.
두 사내는 가방을 들고 돌아서서 자신들의 차가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검정색 벤츠에 오른 두 사내가 떠나갈 때 공장 대문 뒤에서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내의 한 손에는 카메라가 들려져 있었고 곧 핸드폰으로 어딘가에 전화하기 시작했다.
수미의 부하였다.
“지금 출발했습니다. 서울 135마 15XX입니다.”
-그래. 알겠다.
“네. 고생하십시오.”
공장에서 제법 떨어진 한적한 길가에 승용차 한 대가 고장이 난 듯 보닛을 열어 놓고 있었다.
보닛을 들여다 보던 사내가 전화를 내리더니 뒷좌석으로 걸어갔다.
뒷좌석에는 황석희가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출발했다고 합니다. 차량 넘버는 서울 135마 15XX.”
황석희는 담배를 마저 피우고 사내는 다시 보닛 앞으로 걸어가 살핀다.
그때 멀리서 조금전 폐공장을 빠져나온 벤츠가 오고 있었다.
부우웅!
벤츠가 지나가자 사내는 재빨리 보닛을 닫고 운전석에 올랐다.
차는 곧장 출발하여 멀리 달리는 벤츠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 * *
불 꺼진 밤에 두호는 호텔 산책로를 걷고 있었다.
산책로는 호텔의 주변을 따라 잘 가꿔져 있었는데 곳곳에 많은 야생화들이 피어 있었다.
더군다나 늦은 시간이라 호텔 외부에는 사람이 없어 간단히 산책하기에 더할 나위 없었다.
항상 대중의 시선을 부담스럽게 느끼는 두호에게 유일한 쉬는 시간이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묵묵히 걷는 두호.
척!
걸음을 멈추더니 왼쪽을 돌아본다.
20여 미터 떨어진 곳에 벤치가 있고 음료수 자판기가 놓여 있다.
“용건 있습니까?”
주위는 조용했다.
두호는 곧 한 곳을 빤히 응시했다.
음료수 자판기 뒤에서 한 사내가 걸어나온다.
짙은 회색 정장이다.
체구가 왜소했는데 들킨 것이 민망한 듯 쓴 웃음을 지었다.
“과연 눈썰미가 보통이 아니시군요.”
사내는 곧장 명함 지갑을 꺼내 한 장을 내밀었다.
-킹 챔피언십 조달환 과장-
꿈틀!
예상 밖의 인물이라는 듯 두호의 눈이 커졌다.
조달환 과장은 방긋 웃으며 벤치쪽으로 손을 뻗었다.
“백두호 선수. 잠시 얘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두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명에서 조금 벗어난 벤치에 앉은 두 사람이었다.
조달환은 다시 정중하게 두호를 향해 자신을 소개했다.
“킹 챔피언쉽에서 아시아지부 에이전트로 일하고 있는 조달환 과장입니다.”
두호는 소개를 듣고는 직감했다.
‘템퍼링이구나.’
템퍼링(Tampering. 정해진 시점 이전에 선수에게 접근하여 설득하거나 회유하는 일).
용병 업계에서도 흔히 있는 일이다.
어느 분야든 자신의 기술로 먹고 사는 사람의 명성이 드높아지면 그를 영입하려 든다.
지금 킹 챔피언십에서는 두호를 노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일이라면 낮에 와도 될텐데.”
“필린에서 타 에이전트들 접촉을 너무 막아서 본의 아니게 따라 붙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두호는 늦은 밤에도 훤히 보이는 구름을 바라보았다.
“저희 부 사장님이신 조나단 왕께서 두호씨와 미래를 꿈꾸길 원하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