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4화 : 물이 되게 친구여
뒷짐을 진 채 수미는 묶여있는 사내를 바라본다,
하지만 시선에 어떠한 감정이랄 것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사물을 바라보듯 건조한 그 시선에 사내는 침을 꿀꺽 삼켰다.
차라리 황석희가 나았다.
그는 적어도 감정을 드러냈으니까.
그러나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수미 같은 사람들이 무서운 이유가 있다.
그들이 생각하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알 수가 없단 것.
만약 그 선을 넘는다면 자신은 필히 죽을 것이다.
수미의 표정이 미소로 바뀌었다.
부하들을 돌아보며 바닥에 손짓 했다.
부하 중 한 명이 아차하는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의자 하나를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신속하게 달려와 수미의 옆에 의자를 놓았다.
수미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부하를 바라보았다.
“고맙네.”
의자에 천천히 앉는 수미는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사내를 바라보았다.
가볍게 헛기침을 한 수미.
“자네와 나. 지금 우리 둘은. 뭐 때문에 마주보고 있을까.”
사내는 그 질문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자신도 정말 모르겠다.
약을 팔다 잡혀서?
그건 이유가 되지 못한다.
그저 욕지꺼리 몇 마디 듣고 서로 갈 길가면 되는 것 아닌가.
하지만 그 두호는 자신을 제압한 것도 모자라 이런 흉악스러운 곳에 던져 넣었다.
뭘까.
자신 역시 궁금했다.
수미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무언가를 빼들었다.
사내는 혹시나 흉기일까 싶어 잔뜩 목을 움츠렸다.
그 모습을 본 수미는 여유있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수미가 빼든 것은 사내의 지갑이었다.
지갑에서 사내의 신분증을 빼내 살펴보았다.
“박태준이...”
신원을 확인하듯 수미가 태준을 바라보았다.
태준은 침을 꿀꺽 삼켰다.
혹시나 다른 협박을 하지 않을까 머릿속에서는 온갖 상상이 떠올랐다.
행여나 자신의 가족을 가지고 협박한다면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태준은 긴장감에 거친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수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엉뚱했다.
“태어나보니 집이 변변치 않았을게야.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이런 쪽으로 눈이 떴겠지. 나이를 먹어도 미래가 안보였고.”
박태준은 지그시 입술을 물었다.
이런 음지 생활을 시작하는 이유는 대체로 비슷하다.
가난하고 배운 것이 없으면 그냥 짜증이 난다.
갈 길이 정해져 있는 것이다.
그 길은 죽었다 깨어나도 화려한 인생을 만들어 줄 수 없는 비포장 산길이다.
“하지만 평생 이렇게 살아서 쓰겠나.”
선심쓰듯 수미가 말했다.
태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수미는 사내를 무덤덤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내가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가 있네. 자네가 그 이야기를 해준다면 참 좋을 듯 싶어.”
사내는 수미의 말에 고민을 하는 듯 시선이 땅에 떨어졌다.
그리고 수미는 몸을 돌려 황석희를 바라보았다.
“지금 경기 끝났나.”
황석희가 수미의 말에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무엇인가를 검색하는 듯 눈을 좁힌 체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네. 조금 전 끝났습니다. 베어스가 8:5로 이겼습니다.”
“좋군.”
오늘 진행된 국내 프로야구 이야기이다.
태준을 붙잡아 둔 체 전혀 엉뚱한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수미와 황석희.
시간을 주고 있다.
두 번은 없으니 잘 결정하라는 의미다.
머릿속에서는 이미 계산기를 수만 번 두드리고 있었다.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란 뻔하다.
이 일의 시작이 어디서부터인지, 그리고 일의 배후가 누구인지, 자신이 아는대로 말만하면 될 것이다.
수미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자리의 앉아 있었다.
수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편히 말하란 뜻이다
“공급자에게 약을 받고 PRIDE-K 선수들에게 접촉해 약을 파는 일입니다.”
수미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공급자?”
혼잣말인지 질문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이해를 못 하겠다는 듯 수미는 황석희를 돌아보았다.
황석희가 뚜벅뚜벅 걸어와 태준 앞에 선다.
태준은 눈이 휘둥그레지며 기겁했다.
“으힉.”
황석희가 품으로 손을 집어넣는다.
이내 큼지막한 회칼이 나온다.
‘이 새끼들도 똑같구만. 젠장.’
태준은 공포심에 못 이겨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황석희는 태준의 뒤로 걸어들어가 묶여있던 팔의 테이프를 잘라주었다.
양 손이 자유로워진 태준.
자신의 팔을 들어보며 얼빠진 듯 바라본다.
그리고는 황석희가 담배 한 가치를 건넨다.
태준은 조심스럽게 담배 한 가치를 받았고 황석희가 이어 라이터를 꺼냈다.
라이터의 불을 켜 붙여준다.
태준는 조심스럽게 담배를 빨아들이며 멀리 연기를 내뿜는다.
이제 사내의 고민과 망설임은 사라졌다.
각오가 선 듯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수미를 바라보았다.
수미는 천천히 말하라는 듯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보인다.
“공급책은 경기도 덕양에 한 공장에서 직접 만납니다. 제가 만나는 선수 외에도 다른 선수들도 있으니 저 같은 사람이 몇 더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의 정체는 저도 모릅니다.”
수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영배를 떠올린다.
생각과는 다르게 주도면밀한 사람이다.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모르게 하여 만약 자신이 들켰어도 다른 사람들을 못 불게 하려는 것일테다.
하지만 두호가 자신들과 직접적으로 연결 되어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수미가 미소를 짓는다.
황석희에게 손짓하니 수미 옆에 서서 허리를 낮춘다.
작은 목소리로 몇 가지를 지시한 황석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수미는 태준을 보며 싱긋 웃어보이더니 자리를 벗어났다.
수미가 나가자 사내들이 모두 꾸벅 인사를 하였고 몇 사람이 따라나간다.
황석희가 수미가 앉던 의자를 툭 들어 태준 앞에 놓았다.
수미가 부드럽다면 황석희는 냉혹함 그 자체.
태준은 긴장한듯한 표정으로 황석희를 바라보았다.
황석희는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태준에게 말했다.
“몇 가지 좀 도와줘야겠다.”
황석희의 몇 마디 말에 태준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담배를 든 손이 저도 모르게 부들부들 떨린다.
* * *
구열이 풀업바에 메달린 채 복근 운동을 하고 있다.
이미 한계치는 훌쩍 넘긴 듯 다리가 올라가는 속도가 굉장히 더뎠다.
몸이 부르르 떨리며 땀 몇 방울이 바닥에 툭 하고 떨어졌다.
그 순간 누가 훈련실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자신의 훈련 장비를 챙겨온 두호였다.
두호는 멀리서 운동하고 있는 구열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구열은 힘겹게 한 개를 더 시도했지만 결국 풀업바에서 떨어지듯 내려왔다.
땅으로 내려온 그는 아쉬운 듯 잠시 풀업바를 바라보았다.
이내 인기척에 몸을 돌리니 두호가 서 있음을 발견했다.
구열은 황급히 두호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셨어요? 말씀을 하시죠.”
두호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열심히 하시길래.”
두호는 천천히 구열에게 다가갔다.
구열의 장비를 바라보았다.
낡은 글러브와 보호대 몇 개가 전부였다.
과거 복서시절의 두호가 떠오르는 듯 두호는 희미하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
“진짜 헝그리 복서시네요.”
두호가 자신의 장비를 발견했음을 눈치챈 구열은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제가 따로 멋내는 법을 모르다보니...하하.”
“멋집니다.”
두호는 가방을 툭 내려놓았다.
“뭘 도와드릴까요.”
구열은 고민했다.
어떻게 말해야 할까.
단순히 기술의 도움을 청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아니면 운동론이나 훈련 방법을 물어봐야 할까.
무엇을 물어보든 자신이 하는 방식보다 훨씬 나은 방법을 제시할 두호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을 것 같아서 잠시 구열은 말이 없어졌다.
편하게 얘기하라는 듯 두호는 싱긋 웃어 보였다.
그러자 구열은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어떻게 하면 잘 할 수 있을까요.”
꽤 긴 시간 고민한 것 치고는 질문이 너무 엉성했다.
어떻게 하면 잘 할 수 있냐니.
현재의 상태를 알지 못하는 두호에게 이런 뜬구름 잡는 질문을 한 것이 이내 민망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두호의 표정은 전혀 웃질 않았다.
오히려 그 질문에 담긴 무게를 아는 듯이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장비 착용하시죠.”
두호는 자신의 가방에서 글러브를 꺼내 손에 착용했다.
구열은 당황한 표정으로 황급히 자신의 글러브를 집어들었다.
“아. 네!”
글러브 착용을 마친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가볍게 몸 한 번 섞죠.”
스파링을 하자는 뜻이었다.
백문이불여일견(百聞而不如一見)
말보다 직접 보여주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는 판단을 내린 두호였다.
구열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자세를 잡았다.
단단해 보이는 구열과 달리 두호의 자세는 부드러웠다.
두 사람의 스타일이 엿보이는 듯했다.
“시작하죠.”
두호의 말과 동시에 구열의 표정은 심각해졌다.
두호와 자신의 격차를 확인해야 한다.
말로는 가볍게라고 했지만 구열은 그럴 마음이 없었다.
처음부터 전력을 다해도 상관없을 상대니까.
경쾌한 뒷 손 스트레이트로 시작하는 구열.
두호는 가볍게 거리를 벌리며 구열의 공격을 피해냈다.
하지만 구열의 스텝은 멈추지 않았다.
끝까지 따라갈 생각인 듯 더욱 매섭게 파고들었다.
쉼 없이 주먹을 던지는 구열.
그러나 두호에게 실질적으로 닿는 펀치는 없었다.
오히려 큰 정타를 집어넣으려 팔을 크게 벌리면 그 틈을 귀신같이 두호의 펀치가 찔러들어온다.
보기엔 구열이 유리해 보이지만 실제 유효타는 두호가 압도적이었다.
도저히 닿질 않는다.
구열은 이 스파링에 더욱더 실망하기 시작했다.
마치 자신을 놀리는듯한 저 움직임이 마치 벽처럼 느껴졌다.
그 순간.
두호가 구석에 몰렸다.
이곳은 운동장이 아니다.
결국 아무리 도망쳐도 벽에 닿는 법.
본능적으로 구열은 느꼈다.
지금이 승부처이다.
이를 꽉 깨물고 펀치를 던지기 시작하는 구열.
두호는 가드를 단단히 올리며 방어를 시작했다.
어찌 된 일인지 두호는 반격하지 않았다.
마치 몸으로 미트를 대주듯 구열의 주먹을 그저 받아줄 뿐이었다.
구열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쏟아내었다.
그리고 잠시 후.
-삐잉
벨소리가 울리며 구열의 손이 멈췄다.
거의 1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무아지경에 이르렀다.
구열이 느끼는 감정은 후련했다.
그 어떤 훈련을 마칠 때보다 시원한 감정이 느껴졌다.
자신이 원하는 그림.
그 그림대로 경기를 풀어나간 것이 얼마만 인가.
무릎에 팔을 올린 채 거친 숨을 내쉬지만 그의 표정은 밝았다.
그 모습을 본 두호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재능있네.’
두호는 글러브를 벗어 툭 땅에 내려놓았다.
“잘하는 것과 잘 먹히는 것에 진짜 의미가 뭔 줄 아십니까?”
구열은 아직 거친 숨을 내쉬지만 허리를 일으켜 세워 두호를 보았다.
잘하는 것과 잘 먹히는 것.
상반된 두 단어가 격투기에서 가지는 진짜 의미.
구열은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잘 와닿지 않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두호는 천천히 걸어왔다.
“나의 장점. 상대의 단점.”
구열은 탄식에 가까운 소리를 내뱉었다.
“아.”
한 방 얻어맞은 듯한 그의 표정.
두호는 말을 이어나갔다.
“자신이 잘하는 것을 갈고 닦아. 상대의 빈틈을 노리는 것이 이 격투기의 본질입니다.”
구열은 생각에 잠긴 듯 자신의 양 손을 바라보았다.
누가 보기엔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이다.
스포츠 자체가 상대의 약점을 철저히 물어뜯는 것이니까.
그러나 두호의 말은 조금 달랐다.
“이미 잘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구열씨가 잘하는 것 역시 상대에겐 없는 거죠. 내 장점으로 상대의 단점을 노리는 전략.”
아무말이 없어진 구열.
그러나 그의 표정은 처음 자신에게 찾아왔을 때랑은 전혀 달랐다.
무엇인가 작은 빛이 보인 듯했다.
처음엔 단순한 자신의 스타일이 원망스러웠다.
남들이 던지는 7~8번의 펀치를 견뎌내야 겨우 상대를 때릴 수 있는 거리에 들어왔다.
그제서야 상대와 동등한 위치에서 경기를 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바꿔 말하면 자신은 7~8방의 펀치를 몇 번이나 허용하고서도 상대에게 파고들 다리가 있었다.
자신이 잘하는 것과 원하는 것을 철저히 분리해야 한다.
나의 장점으로 상대의 단점을 정확히 공략해야한다.
생각에 잠긴 듯 멍하니 서 있는 구열을 보고 두호는 걸어갔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자신의 주특기는 남의 움직임에서 찾을 수가 없는 법입니다.”
스쳐지나가며 구열의 어깨를 툭 친 두호는 자신의 가방을 챙겨 훈련실을 빠져나갔다.
구열은 꽤 오랜 시간 멍하니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