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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신이 케이지 안으로-73화 (73/204)

제 73화 : 물이 되게 친구여

“이쪽으로 와 앉으세요.”

“감사합니다.”

준훈은 회의실 구조가 신기한 듯 이곳저곳 둘러보며 천천히 채호에게 걸어갔다.

그 모습을 채호가 미소를 지으며 바라본다.

“대회 기간 중에 불편한 것 있으십니까?”

“아니요. 없습니다.”

준훈은 의자를 뒤로 빼 채호의 맞은편에 앉았다.

“훈련량이 엄청나다고 들었어요. 준훈씨만 보면 다들 격투기 미래가 밝다고 합니다.”

채호가 가만 웃는다.

준훈은 미소를 지었다.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필린은 대회 초반부터 준훈에 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이번 대회에서 어느 정도 성적만 올린다면 프로 계약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채호는 몸 상태에 대해 좀 더 깊숙한 질문을 했고 준훈도 성의껏 대답을 해주었다.

적이 아닌 이상 숨기거나 감출 이유는 없었다.

“어제 펠바토르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펠바토르 미국에서 2번째로 큰 MMA 단체이다.

XFC의 뒤를 쫓아 더욱 큰 단체로 도약할 준비를 해나가는 곳.

그곳에서 필린에게 직접적으로 연락이 왔다.

연락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바보가 아닌 이상 알 수 있다.

준훈은 긴장한 얼굴로 채호를 바라보았다.

무슨 얘기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준훈씨와 미팅을 주선해달라는 겁니다.”

“나와 말입니까?”

“준훈씨에게서 충분히 상품성이 있다고 느끼는 모양이에요. 기분 어떻습니까?”

채호는 부드러운 웃음을 지었다.

“좋긴한데 아직은 실감을 못 하겠습니다.”

사실 당황스럽다.

다만 시간이 흐르면서 준훈의 눈썹이 조금씩 찌푸려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번 PRIDE-K대회는 예상을 뛰어넘는 흥행을 이어가고 있었다.

해외언론에서가지 이번 대회를 보도하기 시작했고 지금 채호가 말하는 것처럼 유명 에이전트들이 참가 선수들과 접촉을 시도하고 있었다.

즉 PRIDE-K라는 판을 깐 필린의 대표라면 지금쯤 찾아오고 만나야 할 손님이 줄서서 대기하고 있다.

자신에게 희망을 주고 승부욕을 자극할 목적이라면 이런 건 전화로 해도 충분하다.

여러 가지 주위 여건이 긍정적으로 흘러가고 있으니 더욱 노력하라는 말은 전화나 이렇게 만나 전달받는 것과 큰 차이는 없다.

오히려 직접 부른다는 건 선수에게 부담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준훈씨의 미래는 보장되어있어요. 다만 그것이 장밋빛인지 흙빛인지 결정하는 몫은 온전히 준훈씨의 것이고.”

무엇인가를 알고 말하는 듯 하지만 확실하지가 않았다.

준훈은 채호를 무덤덤하게 바라보았다.

“소식 들었나 모르겠습니다.”

“무슨?”

“하긴 이런 곳에 쳐박혀 우승을 향해 달리기만 하는 준훈씨라면 전혀 모를 수도 있죠. 대회가 커지면서 신경쓸 일이 한둘이 아닙니다. 특히 스포츠 도박이니 약물이니 하는 단어가 언론에 오르내리기 시작하고 있어요. 우리 입장에서는 그저 선수들을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죠?”

준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슴속은 벌렁거린다.

이거구나.

자신을 부른 이유가 밝혀진다.

“준훈씨는 영리하신 분이니까 무슨 말인지 알 것이라 믿습니다. 자신의 꿈으로 집에 도움이 되고 싶단 말 아직 저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인터뷰에서 말한 적 있다.

돈을 벌기 위해 뛰어들었고 기필코 경제적 부를 얻어 낼 것이다.

“훈련 바쁘실텐데.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나중에 또 보죠.”

준훈은 채호가 내민 손을 잡아 악수를 했다.

준훈은 채호의 배웅을 받으며 방을 나섰다.

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준훈은 걸음을 세웠다.

몸을 돌려 자신이 있었던 채호의 사무실을 바라보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세상에 약물과 담을 쌓고서 최고를 걷는 이가 몇이나 될까.’

준훈은 어금니를 물며 걸어갔다.

* * *

식사를 마친 두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채수는 아직 식사가 덜 끝난 듯 수저를 든 채 두호를 올려다보았다.

“벌써 다 드셨어요? 감량 아직 여유 있으신데.”

얼마 먹지 않은 두호의 식판을 보며 채수가 걱정스러운 듯 표정을 지었다.

두호가 빙긋 웃었다.

“괜찮습니다. 너무 먹으면 훈련이 힘들어서요. 이따 저녁에 많이 먹겠습니다.”

몸을 돌려 걸어가는 두호를 채수가 급하게 불러세웠다.

“두호씨!”

“네?”

채수가 휴지 한 장을 뽑으며 입을 닦았다.

“저녁에 훈련 한 시간 정도 빼놓으셔야 할 것 같아요. 방송국에서 최종 프로모션 촬영한다고 하네요?”

격투기는 경기 전 흥행을 위하여 광고 촬영을 한다.

이 경기의 서사와 캐릭터를 만드는 작업으로 경기 자체에 몰입도를 높이기 위한 작업이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이따가 훈련장에서 봬요!”

두호는 퇴식구에 식판을 올려 놓고 천천히 걸어나왔다.

나오의 도움으로 이미 훈련의 많은 부담은 덜어진 상태였다.

차분하게 몸을 돌보며 컨디션을 높이기 위한 작업만이 남은 상태.

식당에서 걸어나와 복도를 걷던 두호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슬쩍 어깨 너머로 뒤를 돌아보는데 사내 한 명이 움찔하며 몸을 튼다.

‘뭐지?’

사내는 자신을 따라오고 있었다.

우연히 방향이 같아 따라오는 꼴이 된 것이 아니다.

미행과 우연을 구분 못 할 만큼 두호의 감각이 무딘 것도 아니다.

두호는 다시 몸을 돌려 걸었다.

적당한 거리를 허용하며 따라오는 상대를 편하게 만들어 준다.

이어 코너를 돌 때는 최대한 크게 돌아 자신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정확하게 보여주었다.

그렇게 엘리베이터 앞에 두호가 도착했다.

이윽고 엘리베이터 한 칸을 건너 뛰어 사내가 섰다.

두 사람의 엘리베이터가 동시에 도착했다.

두 사람 모두 각자의 엘리베이터 안으로 사라진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두호 혼자다.

옆 옆 칸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있는 사내에게 신경이 쓰인다.

쨍!

엘리베이터가 멈추며 내리던 두호는 한 칸 건너 사내가 탔던 엘리베이터 역시도 멈췄다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모른 체 걸어갔다.

복도를 걸어 숙소에 도착했다.

카드키를 대고 문으로 들어간 두호가 문을 닫으려는 그 순간 누군가 문고리를 덥석 잡았다.

두호는 곧바로 주먹을 말아쥐며 공격할 태세를 갖췄다.

사내 한 명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두호를 바라보았다.

“백두호 선수. 잠시 이야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두호의 눈이 좁혀졌다.

잠시 망설이던 두호는 문을 놔두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드르륵!

두호는 한쪽 창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나서 의자에 털썩 앉아 방안을 두리번거리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두호는 채근 대지 않았다.

자신을 뒤쫓아 올 정도면 평범한 사내는 아닐 것이고 목적 또한 대충은 없을 것이다.

두호는 사내가 먼저 입을 열기 전에는 결코 묻지 않았다.

사내 역시 두호의 침묵에 조금은 당황한 듯 눈을 깜빡 거리더니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탁!

사내는 품에서 뭔가를 꺼냈는데 은단을 담는 정도의 작은 은색 케이스였다.

“이런 격투기 스포츠라는 것이 실력으로 순위가 결정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전부는 아니지만 일부는 그렇다.

우승을 향해 가는데 가장 많은 장애는 부상이다.

손에 낀 글러브의 무게가 낮아 웬만한 주먹에 스쳐 맞아도 피부가 찢어진다.

“토너먼트라는 대진운보다 부상운이 좋아야 합니다. 내 말이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두호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사내는 자신이 가지고 온 물건을 꺼내들었다.

철제 케이스였다.

“이건 검출도 안되고. 또...”

사내의 말은 점차 빨라졌다.

효과와 사후관리 방법에 대해서까지 신나서 얘기를 했는데 두호는 그저 듣기만 했다.

“근데. 이런 게 얼마나 더 있습니까? 대회 끝날 때까지 받으려면 쉽지 않을 것 같은데.”

말이 없던 두호가 입을 열자 사내는 용기를 얻은 듯 입술에 침을 바르고 말했다.

“물량은 걱정 마시고. 자체 생산이 되니까요.”

“혹시 투자를 해도 괜찮습니까? 당신 말대로 세계 대회 나가서까지도 받으려면 차라리 주기적으로 공급을 받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사내가 멈칫했다.

투자라는 말에 놀란 것이다.

두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사내에게 다가가 손을 뻗어 갖고 있는 은색 케이스를 자연스럽게 거머쥐었다.

톡!

은색케이스를 열자 안에 작은 주사기 한 개가 들어있다.

슬쩍 꺼내들어 살펴본 두호는 뚜껑을 닫고 책상에 올려놓았다.

“조금 전 투자에 대해 질문하셨는데.”

사내는 헛기침을 하며 애써 표정을 관리했다.

“그건 제가 윗분과 의논해보고 다시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두호의 입에 미소가 씨익 지어졌다.

두호는 천천히 자세를 고쳐앉았다.

“저한테도 접근하는 걸로 보아. 이미 다른 선수들도 여럿 만났다는 거고. 자체 생산이 가능할 정도면 배후도 작지 않겠죠?”

사내는 두호의 말을 듣고는 어리둥절했다.

지금까지와는 이야기의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그때 두호가 소파 틈 사이에서 핸드폰 하나를 꺼냈다.

대화를 시작하기 직전 두호가 핸드폰을 끼워 넣은 것이다.

슥!

핸드폰 녹음 기능을 터치하자 조금전까지 자신과 나눈 얘기가 그대로 흘러나왔다.

“약장사 치고는 영업 방법이 조금은 서툰 것 같습니다.”

사내는 당황한 표정으로 이를 문다.

잠시 공간에는 삭막한 정적이 흘렀다.

사내는 생각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할까.

답은 하나이다.

저 폰을 뺏고 줄행랑을 치는 것.

복잡한 생각은 행동을 망설이게 한다.

사내가 번개처럼 손을 뻗어 핸드폰을 낚아채려 했지만 두호가 더 빠르다.

부웅!

사내의 손은 허공을 갈랐고 두호의 왼손이 번개처럼 뻗어나오더니 사내의 멱살을 거머쥐었다.

두호는 멱살을 잡고 당겼는데 사내는 힘없이 끌려온다.

빙글!

두호는 재빠르게 사내의 뒤로 돌아갔다.

양 팔로 목을 단단히 쥐었다.

백초크.

상대의 목을 양팔로 단단히 조이자 사내는 이내 격렬하게 발버둥했다.

얼굴이 후드 안에 덮여 표정을 볼 수가 없지만 이미 손등부터 시뻘개져 있었다.

이내 힘이 툭 하고 풀리며 바닥으로 엎어졌다.

두호는 그 사내를 말없이 내려다보더니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잠깐 오시죠.”

두호는 전화를 끊고는 사내를 들춰 엎고 침대에 눕혔다.

양손을 수건으로 단단히 결박한 체 한참을 바라보았다.

“활개치기 시작했군.”

두호는 희미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컴컴해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았다.

더군다나 양손은 단단히 묵힌 체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입에는 무엇인가가 둘러져 있어 겨우 코로 숨만 쉴 수 있을 정도였다.

주위에서 누군가 담배를 피우는지 담배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삭막한 목소리로 누군가가 말했다.

“얼굴 벗겨.”

얼굴 벗기라는 말이 너무 잔인하게 들리는 것은 단순히 상황 때문일까.

이내 사내들이 달려들어 자신을 붙잡기 시작했다.

“사...상여우십시오!”

최선을 다해 소리를 질렀지만 입이 가로막혀 큰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다행히 아무 일 없이 자신의 얼굴을 가리는 복면만 벗겨졌다.

밝은 빛이 훅 들어온다.

눈이 부셔 앞을 제대로 못보고 있었다.

그러다 불이 툭 꺼진다.

이내 황석희의 얼굴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섬뜩한 미소를 짓고 있는 황석희.

“정신 좀 들어?”

곧이어 황석희 뒤쪽에 있던 문이 활짝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왔다.

들어올 사람이 이미 누군지 아는 듯 사내들은 좌우로 도열해서 멀리 비켜섰다.

작은 체구의 여인.

그러나 눈빛의 깊이는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사람이란 것을 말해준다.

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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