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쟁의 신이 케이지 안으로-72화 (72/204)

제 72화 : 물이 되게 친구여

두호는 의아한 표정으로 구열을 바라보았다.

이번 대회에서 가장 인상에 남는 사람중 한 명을 뽑으라면 주저 않고 구열을 지목할 것이다.

이겨야 한다는 절박한 눈빛, 일어날 수 없는 몸인데도 기어이 몸을 세워 달려드는 투기(鬪氣)는 질릴 정도였다

땀으로 푹 젖은 옷을 보아 잔혹할 만큼의 훈련을 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저렇게까지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이 무엇을 도와달라는 것일까.

“뭘 도와 달라는 겁니까?”

구열은 힘 빠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길이 안 보입니다.”

두호는 그의 대답을 이해 못한 듯 눈을 찡그렸다.

구열은 마른 미소를 지었다.

“열심히 하면 된다. 그 말 한마디를 믿고 노력해왔습니다. 그리고 분명히 노력하면 이뤄지는 것들도 있더군요.”

무엇인가 분한 듯 그는 주먹을 연신 쥐었다 폈다 했다.

하지만 이내 다시 의기소침 해진듯한 구열의 모습.

그 감정 변화를 두호는 말없이 지켜보았다.

“하지만 죽어라 노력해도 결국 다가설 수 없는 사람들이 있더군요. 두호씨 같은 사람들 말이죠.”

처음 두호와 붙었던 그 날을 기억한다.

태어나 처음으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압도당한 그 날.

도무지 방법이 없었다.

싸워 이겨 보겠다는 생각보다는 너무 질릴 정도로 두호는 높은 영역에 있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 닿지 않을 것 같아 괴로웠다.

구열은 정중하게 고개 숙였다.

“부탁드립니다. 서로에게 중요한 시간임을 알지만 이렇게라도 해야 하는 절 용서해주십시오.”

두호는 무덤덤하게 구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얼마나 샌드백을 때렸는지 주먹 상아가 다 상해 둥그러졌다.

형편조차 여의치가 않는지 훈련복의 목 부분은 다 늘어나 있었다.

“하필 왜 저입니까? 저보다 더욱 도움 될 코치님들이 계시는데요.”

“외람된 얘기지만 그 코치들도 두호 씨가 보고 있는 세상은 모를 테니까요.”

두호의 눈이 빛났다.

부자를 만나면 점심을 사라.

부자를 만나기는 쉽지 않고 만약 만나게 되면 돈을 지불 하고서라도 그가 어떤 세상에 사는지 들어보라는 것.

두호는 미소지었다.

상대와 자신의 격차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겨우 두 세수 앞을 내다보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더욱 중요한 것은 고개를 들고 있는지다.

고개를 들고 자신이 어디까지 가야하는지.

또 어디까지 왔는지를 확인할 수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구열은 아무런 대답이 없는 두호를 보며 씁슬한 표정을 지었다.

하긴 누가 자신의 영업비밀을 공개하면서까지 경쟁자를 도와주겠는가.

뻔뻔한 부탁이라는 걸 알고서도 왔다.

하지만 두호의 얼굴을 보니 자신이 지나쳤음을 느낀다.

두호가 다가왔다.

툭!

어깨에 손을 얹는다.

“몇 시간 정도는 내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따가 훈련실로 찾아가겠습니다.”

그리고 구열을 지나쳐 간다.

파르르!

구열은 몸을 떨었다.

도와주겠다는 뜻을 분명하게 밝혔다.

“감사합니다!”

구열은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두호는 싱긋 웃으며 문을 닫고 사라졌다.

* * *

일준의 주먹이 사납게 뻗어나간다.

샌드백을 때리는 소리가 포탄 터지는 소리처럼 들려왔다.

-펑

-펑

그 모습을 지켜보는 코치들은 입을 벌리며 놀라했다.

“와. 저거 맞고 서 있을 수가 있나?”

“힘이 엄청나네...훈련량을 늘려서 그런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버렸어.”

파워도 파워지만 전혀 다른 것이 있다.

20여분을 쉬지 않고 내리 때려 대지만 전혀 지친 기색이 없는 체력.

더군다나 일준이 입고 있는 저 땀복.

한 장만 입어도 탈진할 것 같은 땀복을 무려 두 장이나 겹쳐 입고 있었다.

일반인적인 사람이었다면 채 몇 라운드를 버티지 못하고 진작에 탈진했을 것이다.

가끔씩 인상이 찌뿌려지는 걸 보면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는 듯 보였으나 주먹은 가차 없이 뻗어 나온다.

쾅.

샌드백이 자지러진다.

일준의 얼굴에 미소가 차올랐다.

‘됐다.’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 본다.

쏟아지는 조명을 노려보는지 아니면 눈이 부셔 좁혀 뜨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표정은 여유가 있다.

훈련에 대한 성취감으로만 느껴지지는 않았다.

일준은 훈련이 끝난 듯 핸드랩을 풀고 땀복을 벗었다.

땀복 지퍼를 열자 마치 행주에서 물을 짜내듯 우수수 땀이 떨어졌다.

필린 직원 중 한 명이 일준에게 말했다.

“일준씨 훈련 끝난 건가요?”

일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직원은 훈련 일정을 체크하는 서류에 무언가를 썼다.

“네. 고생하셨습니다!”

직원들은 곧바로 몸을 돌려 나갔고 일준은 샌드백에 머리를 기대고 한참을 멈춰섰다.

방금 전의 감각을 계속 기억하려는 듯 그는 끝없이 복기 중이었다.

이내 다시 만족스러운 웃음과 함께 자신의 짐을 챙겨 훈련실을 빠져나갔다.

곧 직원이 일준을 향해 다가왔다.

“식사하러 가시는 건가요?”

일준은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제가 몸이 조금 피곤해서 오후 훈련은 좀 쉬고 저녁에 다시 오겠습니다.”

직원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토너먼트가 이제 코 앞이다.

“네. 알겠습니다. 몸 관리 잘하시고 저녁에 뵙겠습니다.”

일준은 가방을 들춰 메고 걸어갔다.

쨍 하는 소리가 들리며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일준은 자신의 방을 향해 걸어갔다.

방문 앞에 도착한 일준은 주변을 빠르게 살핀 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입고 있던 운동복을 벗자 그의 몸이 드러난다.

흉측하게까지 느껴지는 그의 데피니션.

핏줄이라기 보다는 긴 밧줄같이 보였다.

일준은 소파로 걸어가 털썩 앉는다.

바로 앞 책상에 놓여져있는 호텔 전화기로 번호 몇 개를 누른다.

몇 번의 신호음이 들리고 곧 밝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네. 반갑습니다, 웨스턴호텔 프론트입니다.

일준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치킨그릴 바베큐. 하나 부탁드립니다.”

“네. 알겠습니다!”

일준은 전화를 끊고 음식이 오는 동안 소파에 눈을 감은 체 가만히 앉아 있었다.

1분.

10분.

30분이 되어가도록 눈을 감고 있다.

그 순간 벨소리가 들려왔다.

-띵동

반응이 느리자 다시 한 번 벨이 울리고 방 문을 살짝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일준이 걸어가 문을 열자 음식을 담은 카트를 밀고 직원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직원은 방긋 웃으며 일준이 방금전까지 앉아 있던 의자 옆에 카트를 세워두었다.

“네 여기 올려놓겠습니다.”

닭 한 마리를 통째로 구워 만든 음식인 그릴 바비큐.

웨스턴코리아에서 가장 인기있는 메뉴중에 하나이다.

마지막 식기까지 전부 올려놓은 그는 밝게 미소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편안한 시간 되십시오.”

“네.”

일준은 직원이 나갔음을 확인하고 곧바로 문을 걸어 잠궜다.

식기류를 수건에 포장한 곳에는 닭을 먹을 때 사용하는 비닐장갑 두 개가 놓여져 있었다.

곧바로 비닐 장갑을 끼고는 꼬아져 있는 다리를 붙잡더니 양 옆으로 벌렸다.

삼계탕처럼 닭 안으로 손을 집어넣은 그는 곧 무엇인가를 빼냈다.

의료용 비닐팩으로 감싸져 조그만 물건 하나가 나온다.

그 비닐을 꺼내 확인하더니 이내 음식엔 시선 한번 주지 않고 한켠으로 치워버렸다.

돌돌 말려져 있는 비닐팩을 조금씩 펼쳐 무엇인가를 꺼냈다.

한 뼘 만한 주사기와 작은 약병 하나가 나왔다.

일준은 곧바로 의자를 조금 뒤로 빼고 상의를 걷었다.

주사기로 약병의 내용물을 뽑아낸다.

어깨부분을 손바닥으로 찰싹 소리가 날 만큼 몇 대 때리고는 망설임 없이 주사기를 아랫배에 꽂아 넣는다.

“후우.”

약물 주사기를 책상 위에 툭 던지며 거친 숨을 내쉬는 일준.

적응하는 것이 상당히 고통스러워 보이지만 그는 과거와 달리 신음소리 한번을 내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해야 할 상대가 있다.

그를 넘지 않고서는 어떤 꿈도 이룰 수 없다.

남들은 재벌의 아들이 사서 고생한다고 하지만 그건 사는 것에 대해 생각 없는 사람들이 뱉어낸 한심한 소리들이다.

내가 살고 싶은 인생을 찾아가는 것이 사는 것 아니던가.

그런데 내가 가고 싶은 길을 가로막는 한 사내가 있다.

사실 아직도 그를 보면 숨이 막힌다.

“으으음!”

그를 떠올리며 약기운이 퍼지면서 만들어내는 고통을 참는다.

“넌. 내 손으로 꼭 죽인다.”

어금니를 물며 눈을 감는다.

* * *

노팀장과 채호가 호텔 회의실에서 마주 앉아 있었다.

노팀장이 서류 하나를 건네주었다.

“아시다시피 저번 대형조직 검거 이후 한국으로 들어오는 마약 유통량은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세관에서의 노력도 있지만 밀수 배는 해군경비정의 레이더에 안 걸릴 수가 없거든요.”

거기다 대한민국 인천 세관은 밀수와 불법물품 적발이 아시아에서 최고로 꼽힌다,

더군다나 밀수 배를 의식해 각 항구마다 단속 공무원들이 수시로 들락거린다.

“그런데. 저번 주 부터인가 약물이 다시 유통이 되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우린 두 가지 측면에서 바라봅니다.”

채호는 묵묵히 듣는다.

“하나는 경찰쪽에서 입수하지 못한 남은 마약류를 털어내고 있던가. 다른 하나는 기술자가 한국에서 자체 생산을 하는 것.”

스윽!

채호는 팔짱을 끼며 생각에 잠긴듯한 표정을 지었다.

노 팀장이 말했다.

“원래 도둑이 들면 그 동네 열쇠쟁이들부터 먼저 조사하는거 아시죠? 마약 생산 전과가 있는 사람부터 제조 가능한 사람까지 다 뒤져보고 있지만 딱히 표나는 사람이 없긴 합니다.”

보통 징조라는 것이 있다.

하나의 사건이 일어나기에 발맞춰 이상징후처럼 나타나는 것.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마치 누군가가 딱 맞춰 생산하는 것처럼.

“증거는 없지만 짐작하는 용의자는 있습니다.”

파팟!

노팀장의 눈이 커졌다.

“용의자를 아신다는 게?”

“아마 경찰 뱃지 달고 접근하기엔 시원치 않을 듯 합니다.”

노팀장은 채호를 바라보았다.

채호가 아까부터 가지고 있던 서류 하나를 노팀장 앞에 놓는다.

채호의 눈치를 살피듯 흘긋 한 번 본 노팀장이 봉투속 서류를 꺼내 살핀다.

“모로...해피캐피탈? 여기 금융업체 아닙니까?”

채호는 빙그레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모영배가 개과천선한 사람처럼 언론에 오르내리지만 사람이 어디 변하나요?”

노팀장도 모영배는 알고 있다.

마주 친 일은 없지만 낮과 밤 어디서든 거물이다.

“모영배씨가 용의자라는 것입니까?”

말이 용의자라고 했지 채호의 표정은 범인으로 딱 집어 말하고 있었다.

“이번 PRIDE-K의 가장 큰 스폰서인 한 어르신과 모영배 사이에 문제가 있습니다.”

채호는 간단하게 수미와 모영배 사이의 일을 말해 주었다.

얘기를 듣고 난 노팀장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스포츠도박과 약물.

여러 정황이 이번 PRIDE-K를 겨냥하고 있다.

더구나 그 중심에 모영배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조사를 해봐야 알겠지만 모영배는 마음대로 뒤를 캐고 쫓아갈 수 있는 잡어가 아니다.

노팀장은 다시 한 번 서류를 보았는데 표정은 더욱 어두워진다.

법이라는 단단한 철조망이 있다.

웬만한 사람들은 그 철조망을 빠져나가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그 철조망을 너무도 쉽게 뚫고 넘어다니는 부류들이 있다.

“저희가 사람과 증거 다 찾고. 이쁘게 포장까지 해서 노 팀장님한테 넘겨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몸을 살짝 노팀장쪽으로 가까이 다가간 채호는 작게 목소리를 이었다.

노 팀장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다 이내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저희 쪽에서도 준비하도록 하죠.”

채호는 일어서는 노팀장과 악수를 나누었다.

노팀장이 문을 여는데 때맞춰 누군가 문밖에 서 있었다.

떡 벌어진 어깨와 굵은 목.

진한 눈썹과 얼굴에 자잘한 흉터가 있었다.

노 팀장은 PRIDE-K 선수라고 생각해 가볍게 목례를 하였고 그 역시 가볍게 목례로 받았다.

기세가 상당했다.

노 팀장은 회의실 안으로 들어가는 그를 슬쩍 돌아보며 작게 감탄했다.

“이야. 저런 사람들이 운동하는구나.”

노팀장과 마주쳤던 그 사내가 두리번거리며 회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채호는 이미 면식이 있는 듯 손을 흔들었다.

“아 준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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