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1화 : 물이 되게 친구여
호텔의 유리문을 열고 채호와 예수가 걸어나왔다.
입구에는 미리 예수가 전화한 대로 준모가 대기하고 있었다.
준모 역시 채호를 확인하자 곧바로 차 뒷 문을 열었다.
채호는 싱긋 웃으며 빠른 걸음으로 차 앞에 도착했다.
탑승을 하려 차에 손을 얹고는 잠시 멈칫한다.
생각에 잠긴 듯 잠시 눈을 찡그리다 이내 뒤에 서 있는 예수를 돌아봤다.
“예수씨, 노 팀장한테 오늘 저녁에 시간 되면 보자고 좀 해주십시오. 그리고...”
뭔가 생각하는 듯 잠시 망설이더니 다시 말했다.
“그렇게만 전해 주세요.”
“예!”
예수가 대답했고 채호는 차에 올랐다.
준모가 재빨리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 때 채호가 말했다.
“준모씨. 백평산으로 갑시다.”
“알겠습니다!”
차는 속도를 높였다.
채호는 핸드폰을 열어 찍힌 메시지들을 살피더니 그다지 중요한 내용은 없는 듯 주머니에 넣고 등을 뒤로 붙였다.
눈을 감았는데 이마를 찡그리고 있다.
머릿속이 복잡한 모양이었다.
* * *
파전집 지하실 문이 열리며 채호와 준모가 들어섰다.
직원 두 명과 이야기를 하고 있던 황석희가 계단을 내려오는 두 사람을 발견했다.
“어서 오십시오 대표님.”
황석희는 미소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채호 역시 인사를 건네며 두리번 거렸다.
“반갑습니다. 혹시 어르신은 어디 계십니까?”
채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길세. 이대표.”
한쪽 벽면에서 책을 한아름 안은 채 수미가 천천히 걸어나왔다.
수미를 발견한 채호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책상에 도착한 수미는 자신의 자리를 가르키며 오라는 듯 손짓했다.
수미는 책상에 책을 턱하니 놓고 허리를 두들겼다.
수미는 채호의 뒤편에 멀뚱이 서 있는 준모를 보며 고갯짓했다.
“너는 왜 또 죽상이야. 뺀질이.”
“아이 정말. 기분도 안 좋아 죽겠는데.”
준모의 반응에 재밌다는 듯 수미는 빙그레 웃었다.
채호가 자리에 앉자마자 서류를 건넸다.
서류를 받아든 수미는 목에 걸어둔 안경을 천천히 펼쳐 썼다.
채호는 책상을 훑어보았다.
평소와 달리 취미처럼 즐기는 뜨개질 도구들이 보이질 않았다.
“요새 뜨개질은 안 하세요?”
서류를 찬찬히 살펴보며 수미는 별것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맘에 드는 게 없어. 잠시 쉬는 중 일세.”
아마도 두호가 선물해준 실을 다 쓴듯 싶었다.
대회가 시작된지 2개월이 다 되가니 수미 역시 두호를 못 본지 꽤 되었다는 뜻이었다.
수미는 서류를 다 살펴본 듯 안경을 벗어 다시 목에 걸었다.
“아무래도 움직이기 시작한 모양이구만.”
“네.”
수미는 채호를 보며 빙긋 웃었다.
“모영배 이 사람도 안 하던 짓을 하는 것 보니 죽을 때가 됐나 보군.”
“어떻게 보십니까?”
내부에서 단속은 실패했다.
그리고 이럴땐 과감하게 일 처리를 해야한다.
수미는 손을 들어 황석희를 불렀다.
“자네 나 좀 보지.”
황석희가 부하들에게 고갯짓을 하고 수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네.”
“모로해피캐피탈 방계 업체가 몇 곳이나 되지?”
모로해피캐피탈은 3금융권이긴 하지만 엄연히 정식 금융권.
험한 일을 하는 부하들의 정체를 공식적으로 드러낼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각 지역에 개인 대부업체를 설립하게 하여 부하들이 영업을 뛰게한다.
그리고 그 자본은 모영배가 직접 대는 형태이다.
“40곳 정도 될 겁니다.”
수미는 서류를 건넸다.
“대조해서 엮인 놈 있나 알아봐.”
“네.”
황석희는 서류를 받아들고 자리를 떠났다.
채호는 감탄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수미의 의도를 확인한 것이다.
필린 같이 유망한 회사에서 실직을 각오하면서까지 배신을 할 이유가 뭐가 있을까.
그러나 채무관계라면 다르다.
자신의 빚을 탕감해주는 조건이라면 무슨 짓을 못하겠는가.
채호가 눈을 빛냈다.
“그럼 이 핑계로 쳐내실 겁니까?”
모영배를 이제 처리할 심산이냐는 질문이었다.
수미는 아직이라는 듯 냉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기껏해야 팔 하나 잘라낼 정도면 안돼. 단번에 목을 베어낼 건수가 있어야지.”
수미는 목에 걸린 안경을 닦으며 말했다.
더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는 듯 직원에게 차를 내오라는 손짓을 했다.
“들리는 것에 의하면 이 바닥에 약 장사가 다시 시작된 모양이야.”
“네. 알고 있습니다.”
채호 역시 노팀장에게 들었다.
큰 조직이 검거되어 장기간 공백을 예상했지만, 역시 자연은 진공을 허용하지 않는다.
결국 새로운 물이 들어와 그 자리를 메운 것이다.
시기적으로 어느 정도 예상한 바이기도 했다.
“투숙객을 받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었어. 미꾸라지가 물 흐리기가 딱 좋지 않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호텔이나 스폰서들을 생각하면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이해를 한다는 듯 수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호텔 내부를 돌아다니니 거수자를 구별해내기 쉽지 않아졌다.
그 투숙객 중에 사람 몇 명 섞여 들어오는 것은 일도 아니다.
직원들이야 관리 감독이 가능한 부분이지만 호텔 투숙객들의 방을 뒤질 수도 없는 문제 아닌가.
하지만 채호는 미소를 지었다.
“찾아가기보단 불러들이는 게 낫죠.”
“자신 있나?”
채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믿는 구석이 있는 듯 했다.
직원 중 한 명이 차를 내왔다.
책상에 올려진 주전자를 들어 채호의 잔과 자신의 잔을 번갈아가며 따랐다.
차를 모두 따른 다음 자신의 찻잔을 들어 향을 음미하는 수미.
“그 아이들은 잘하고 있고?”
두호와 태건을 뜻하는 말이다.
채호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해주었다.
아마 수미의 질문을 예상했는지 곧바로 답이 나왔다.
“대단합니다. 이미 일반적인 프로 수준은 넘어섰다고 합니다.”
“신문으로 확인했네. 자네가 보기엔 어때?”
두 사람의 실력의 우열을 물어보는 것이다.
채호는 고개를 저었다.
“하루가 달라지게 성장하는 두 사람이라 딱히 의미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당일의 컨디션이 중요하겠죠.”
“중요한 때야. 우리에게나 그 놈들에게나.”
수미는 찻 잔을 들어 향을 음미했다.
* * *
-때앵
라운드를 마치는 종이 울리고 두 사람은 올렸던 팔을 내렸다.
두호와 나오는 서로 포옹을 하며 긴 시간의 훈련은 비로소 끝이 났다.
두 사람의 얼굴은 엉망진창이었다.
피로 얼룩진 두 사람.
크고 작은 상처들에서 피가 쉼 없이 흘러나와 이미 굳어버린 피도 있었다.
그러나 표정은 밝았다.
피투성이 얼굴이 밝아봤자 거기서 거기겠지만 생각만큼은 불편하지는 않아 보였다.
“수고하셨습니다. 두호군.”
“감사합니다. 나오.”
경기를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도 박수를 쳤는데 그 속에 채수도 들어 있었다.
중량급 입식 챔피언.
단순히 이겼다는 것만으로 이런 분위기를 만들 수는 없다.
훈련 초반,
두호는 분명하게 밀렸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공식적인 전적만 100전에 육박하는 나오였다.
비공식적인 스파링과 훈련까지 포함한다면 얼마나 많은 경험치가 녹아있을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자신이 본 두호의 경기 중 최초로 밀리기 시작했다.
모든 타격 교환에서 손해가 나기 시작하며, 그 손해는 결국 운영의 실패로 이어졌다.
나오는 두호의 계산된 움직임을 완벽히 파악해냈다.
채수 역시 두호가 아직은 나오에게 멀었다 생각했다.
하지만 놀라운 일은 시간이 지나며 벌어졌다.
조금씩 타격을 허용하는 숫자가 줄기 시작하며 그 공백은 두호의 타격으로 채워졌다.
그리고 6회차 2라운드에는 결국 두호의 앞 손이 나오의 얼굴에 닿았다.
그 이후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두호는 변화되어갔다.
돌발적인 움직임과 유연한 대처 그리고 배짱있는 맞불.
결국 마지막 라운드부터는 우열을 가릴 수 없었다.
“믿을 수가 없네. 나오랑 저 정도로 치고 받다니...”
채수는 두호를 경이로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오에게 시선이 옮겨졌다.
나오는 사람들과 일일이 손을 잡고 포옹을 했는데 밝은 얼굴이었다.
자존심이 상할 법도 하지만 그의 표정은 밝았다.
자신 역시 어떠한 깨달음을 얻은 듯 하다.
고수들은 승패보다 무엇을 얻었는지가 더욱 중요하다.
처음 이번 훈련에 회의적이던 매니저 역시 밝은 표정으로 두호에게 다가왔다.
“두호씨 정말 대단합니다.”
나오의 매니저가 다가왔다.
스윽!
품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두호의 장비 위에 살짝 올려놓으며 말했다.
“언제든지 소통하고 같이 뛰어 봅시다.”
“예!”
각자의 코너로 돌아가서 잠시 안정을 취하기로 한 두 사람.
곧 세컨들이 달려들어 부상을 당한 두 사람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매니저가 나오의 어깨를 주물렀다.
“나오 고생했어. 이렇게까지 치고 받게 될 줄은 몰랐는데.”
나오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저 멀리 앉아있는 두호에게 고정되어있었다.
매니저의 시선 역시 두호에게로 향했다.
“마지막에는 봐준거지? 왜. 옛날 시절 생각나서?”
“봐준 것 아니야.”
매니저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나오를 바라보았다.
“뭐?”
나오의 얼굴은 침착했다.
“몇 라운드 더 했으면 아마 내가 누워있었을 거야.”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크다.
명목상으로 지금 아시아에서 넘버 원 입식 타격가는 나오이다.
그런 그가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은 아직도 두호는 더 성장할 가능성이 있음을 내포한다.
두호를 바라보며 씨익 미소짓는 나오.
“말로만 괴물인 줄 알았는데.”
치료를 어느정도 마친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마지막 인사를 하였다.
이마에 헝겊과 밴드로 잔뜩 도배되어 있는 두 사람의 얼굴은 진심으로 아쉬운 듯 보였다.
서로가 서로에게 더욱 도움이 될 수 있었을 텐데.
아쉽지만 나오의 일정은 두호와 달리 녹록치가 못하다.
“두호씨. 꼭 우승하시길 바라겠습니다. 결승전 진출하면 한국으로 다시 올게요.”
“그럼 미리 자리 하나 맡아놓겠습니다.”
두호의 배짱있는 농담에 기분 좋게 웃는 나오.
매니저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밝게 웃었다.
스포츠의 매력이란 이런 것이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고 몇 마디 대화도 없었지만 어느새 둘은 서로에게 유대감이 생겼다.
“하하. 그럼 그때 뵙겠습니다. 건투를 빕니다.”
“조심히 가세요. 나오”
두 사람은 악수를 나눴다.
세컨들끼리도 인사를 나누고 나오의 일행은 몸을 돌려 밖으로 빠져나갔다.
“자 모두 고생했습니다. 잠시 멈추고 밥 먹고 하시죠!”
나오 일행이 모두 빠져나가자 채수는 박수를 치며 주위에 시선을 모았다.
장장 6시간 동안 밥은 고사하고 화장실도 눈치보며 다녀온 직원들이었다.
채수의 사실상 종료 선언에 직원들 역시 한숨을 내쉬며 안도를 하였다.
두호가 손을 들자 채수가 말하라는 듯 손짓했다.
“전 장비 정비만 마치고 가겠습니다. 먼저 출발하시죠.”
“아. 네 그럼 알겠습니다. 자 다른 분들은 가시죠!”
채수가 직원들을 인솔하여 방을 빠져 나갔다.
두호는 짐을 정리했다.
자신이 사용한 장비들을 탁탁 털어 의자에 하나씩 널어놓았고 비뚤어진 의자는 바로 놓는다.
그러는 가운데 나오의 매니저가 놓고 간 명함이 자연스럽게 가방 속으로 떨어졌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되자 목에 수건을 걸고 훈련장을 나오는데 누군가 부른다.
“두호씨!”
문을 열고 나와 복도를 걸어가던 두호가 돌아보았다.
구열이 다가오고 있었다.
약간 긴장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구열이 입을 열어 말했다.
“도와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