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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신이 케이지 안으로-70화 (70/204)

제 70화 : 물이 되게 친구여

필린의 간부 회의가 열렸다.

스무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 있지만 숨 소리하나 들리지 않는다.

살 얼음판을 걷는 듯한 분위기.

간부들은 그저 눈치만 살필 뿐이었다.

팔랑!

서류 넘어가는 종이 소리만 들릴 뿐 사람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채호는 계속 굳은 표정으로 자료를 훑어보고 있었다.

앉아 있는 직원들 시선은 모두 채호에게 몰려 있었다.

탁!

채호가 보고 있던 서류를 한쪽으로 치운다.

부욱!

서류 내용에 두통이 생기는 듯 양손으로 관자놀이를 주무른다.

어젯밤 스포츠 도박 사이트에서 PRIDE-K 종목이 새로 개설되었음이 확인되었다.

대한민국에는 합법 도박 사이트 로토가 존재한다.

회 당 배팅액의 상한선이 정해져 있고 미성년자의 참여가 금지된 합법 스포츠 도박 사이트.

그러나 불법 스포츠 도박 사이트는 배당률이 높고 구매 금액, 참여연령 등의 제한이 없어 중독으로 빠지기 쉬웠다.

채호는 길게 숨을 내쉰다.

“하아...”

다시 한 번 서류를 끌어다 종이를 빠르게 넘기며 살핀다.

답답한 모양이다.

격투기가 산업으로 발전한 미국은 이런 형태의 도박사이트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난무하고 심지어 경기가 벌어지는 현장에서까지 뭉칫돈을 놓고 내기를 한다.

국내에서도 비록 단속을 하지만 불법 도박 사이트는 그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다.

서류 내용이 별것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채호가 불편한 얼굴을 한 이유는 따로 있다.

이틀 전에 완성되어 아직 언론에 공개조차 하지 않은 16강 대진표가 사이트에 버젓이 올라와 있는 것이다.

지금은 비록 대진표가 끝이지만 누군가가 다른 정보를 악의적으로 이용한다?

이번 대회에 뛰어든 스폰서들에게 큰 부담이 생길 건 자명하고 흥행에까지 타격이 올 수 있다.

턱 밑까지 들어왔다.

툭!

채호는 신경질적으로 목의 셔츠 단추를 툭 풀었다.

기분이 태도가 되어서는 안 됨을 아는 채호이지만 이번일 만큼은 그 역시 감정을 숨기기가 힘든 듯 했다.

“16강 대진표 정보에 접근 가능한 직원들이 몇이나 됩니까?”

“130명 정도 됩니다.”

“130명이라.”

동원된 직원들과 내부 스폰서 담당 직원까지 합치면 300명이 조금 안된다.

반 가까이 되는 직원들을 헤집어 찾는다는 것은 말이 되질 않는다.

상황이 쉽지 않다.

예수에게 눈을 돌리니 예수가 눈치챈 듯 빠르게 말을 잇는다.

“대표님. 지능범죄수사팀에게 연락 넣어 IP추적을 해봤습니다.”

예수를 보는 채호의 눈이 반짝인다.

“뭐라고 합니까?”

“중국쪽이라고 합니다.”

전형적인 불법 도박 사이트의 수법이다.

추적해도 쉽지 않다는 뜻이다.

채수는 신음을 흘리듯 한숨을 내쉰다.

“흠.”

대진표는 아직 선수들에게도 공개하지 않았다.

하나하나가 컨텐츠고 돈이 될 수 있는 상황이다 보니 최대한 공개를 절제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모든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

“피곤하네 정말.”

채호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았다.

한참을 그렇게 있더니 상체를 바로 세웠다.

“그만 나가들 보세요. 채수와 예수씨는 잠깐 남고.”

직원들은 재빠르게 각자의 짐을 챙겨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마지막 인원이 자리를 빠져나가고 문이 닫히자 회의장 안에는 예수와 채수 그리고 채호만이 남게 되었다.

“예수씨. 준모씨한테 말해서 차 좀 준비시켜요.”

“네.”

예수는 전화기를 집어들고 한쪽으로 비켜 서 있었다.

채호는 채수에게 가까이 오라는 듯 손짓했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채수는 목소리를 낮췄다.

“네가 쥐약 좀 놔야겠다.”

“어떻게?”

“방법은...”

채수가 조용히 말하는 동안 채수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채호는 굳은 표정으로 채수를 바라보았다.

“잘해. 쉽지 않겠지만.”

채수는 의아한 눈빛으로 채호를 바라보았다.

“정말 이런다고 잡힐까?”

“된다.”

채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았어. 해볼게.”

채호는 의자를 빙 돌려 회의실 밖을 바라보았다.

완전하게 녹음으로 우거진 이곳은 가끔 신비롭게까지 느껴진다.

채호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당하고만 있는 건 내 스타일이 아냐.”

* * *

한 사내가 양손에 모래주머니를 찬 채 쉐도잉을 하고 있었다.

날렵한 몸놀림과 뻗치듯 뿜어나오는 눈빛이 매섭다.

얼핏 보면 절박하게까지 느껴지는 그의 훈련은 보는 사람의 숨도 턱 막힐 정도였다.

사내의 이름은 김준훈.

가라테 전 국가대표 출신이자 필린에서도 눈여겨 보고 있는 사내이다.

사실 두호가 아니었다면 이번 PRIDE-K 에서 필린이 탐낼 매력적인 인재들이 많았다.

안타까운 사연과 뛰어난 실력.

심지어 대체적으로 참가자들 외모조차 훌륭했다.

준훈 역시 그들 중 하나였다.

부상으로 인하여 잠시 운동을 그만 둔 준훈은 아버지 중국집에서 배달부로 일하게 됐다.

차가운 현실을 살아가며 한참을 잊고 지내던 꿈.

이번 PRIDE-K를 발견하고 그는 다시 꿈을 이룰 생각에 가슴 뜨거워졌다.

슈슉!

땀이 비오듯 쏟아지지만 훈련을 계속해서 이어나간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훈련 중 그의 귀에 라운드를 마치는 종이 들렸다.

-땡.

실전감각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실제 경기 시간과 같은 타이머를 맞춰 놓는다.

걸어놓은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한쪽에 있는 의자에 걸터앉았다.

모래주머니를 툭 하니 풀자 땅으로 떨어지면서 큰 소리가 났다.

-퉁

-퉁

물 한 병을 휙 하고 따 벌컥벌컥 물을 마신 그는 거친 숨을 내쉬었다.

“으어.”

그 순간 누군가가 연습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야구모자를 눌러쓴 사내는 연습실을 스윽 훑더니 다가왔다.

삐익!

사내는 오른손 손가락 두 개를 입속에 넣고 휘파람을 불었다.

준훈은 휘파람 소리에 고개를 돌렸는데 야구모자를 쓴 사내가 빙긋 웃는 얼굴로 다가온다.

처음엔 직원인 줄 알았으나 아니다.

의아한 눈빛으로 사내를 바라보니 사내가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김준훈씨! 팬입니다.”

PRIDE-K에 쏟아지는 관심은 감사할 일이다.

하지만 필린은 그 인기의 본질 자체인 선수들의 훈련 방해가 생길 것을 염려했다.

호텔 투숙객과 이번 대회 참가자들의 활동 범위를 제한했다.

동선이 겹치지 않도록 전용 엘리베이터부터 시작해서 개인 훈련실까지 만들어두었다.

그렇지만 대회가 너무 인기를 끄는 바람에 모든 것이 무너졌다.

결국 호텔측에서는 참가자들을 방해하지 않고 상호간의 예의를 갖출 것을 부탁하고 있었다.

하지만 투숙객은 대회 참관이 공짜이다.

비싼 숙박료를 지불하고 온 팬들이 쉽게 절제할 리 없고 수시로 사인지를 내밀거나 팬이라면서 선물을 보내오는 통에 모두가 골머리를 썩인다.

준훈은 눈앞의 사내도 그런 팬이라고 생각했다.

“네. 감사합니다. 근데 여기 들어오시면 안되는데...”

사내는 준훈의 말을 듣는 시늉도 않고 개인 연습실을 구경했다.

그 모습에 준훈은 살짝 발끈했다.

“아저씨. 여기 들어오시면 안 된다구요.”

“에이. 벌써부터 챔피언 되신 것 마냥 행동하시면 안 되죠.”

꿈틀!

준훈의 이마에 주름이 생긴다.

단순 팬이 아니다.

‘도대체 이런 사람들이 들어올 때까지 필린의 직원들이 뭐하는 거야.’

사내는 놀라는 투로 말했다.

“임시 가설이라지만 잘 만들어 놨네.”

사내는 연습실에 감탄했다.

“아저씨 나가주시죠.”

척!

가까이 다가오더니 의자 한 개를 끌어다 앉는다.

“꼭 팬의 목적만 갖고 온 건 아니라는 걸 눈치 채셨을테고.”

김준훈이란 선수를 좋아하긴 하지만 다른 뜻도 있다는 얘기다.

“내가 돕는다면 이 좁은 땅 덩어리에서 왕 노릇은 우습게 할 것입니다.”

무슨 개소리냐는 듯 준훈은 눈을 좁혔다.

사내는 준훈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는데 입가에 미소를 문다.

준훈은 보통 사내가 아님을 본능적으로 느낀다.

“XFC 전 챔피언 콜 맥시 선수 아시죠?”

모를 리가 없다.

콜 맥시.

XFC에서 전설적인 선수로 불리운다.

일용직 건설현장직원으로 시작해서 XFC 챔피언까지 된 선수.

그의 업적은 배고픈 격투기 선수들의 희망이다.

“그래서요.”

“그 선수도 이게 없었다면 그저 맷집 조금 뛰어난 선수에 불과했겠죠.”

품 안에 손을 넣은 그가 케이스 하나를 꺼내 흔들었다.

아무런 장식 없는 손바닥만한 은색 케이스.

“전 인재를 알아보는 눈이 탁월합니다. 준훈씨 정도면 한국이 아니라 세계에서 싸워야하는 선수가 되어야죠.”

그 말을 들은 준훈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아버지가 연이어 쭉 쒀버렸더군요.”

아버지 중국집 얘기다.

겨우 다시 일어서나 했는데 얼마 전 다시 휘청거리면서 위태위태하다.

자신 역시 이 대회의 상금이 필요한 이유가 이것이다.

아버지가 평생을 바쳐온 가게를 지켜내는 것.

준훈은 뭐라고 한마디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돈 넘쳐나는 놈들이 이런 무자비한 경기에 목숨을 걸 리 없다.

사내의 얘기를 좀 더 들어보기로 했다.

“저기 물 좀 마셔도 되겠습니까?”

생수병 십여 개가 놓여 있다.

사내는 대답도 듣지 않고 한 개의 마개를 따더니 반쯤 마셨다.

“이거 한 방이면 뭐 훈련할 때 힘 넘치고 체력 남아돌고 끝장난다니까? 신약이라 성분 검출될 방법이 없어요. 그리고 정 불안하면 우리가 이뇨제도 몇 방 더 드릴게.”

이뇨제는 주로 불법 약물을 배출하는데 쓰이는 은폐제로 쓰인다.

“으음!”

준훈은 몇 달 전 보았던 텔레비전 뉴스를 떠올렸다.

그건 한 명의 야구 선수에 관한 것이었다

메이저리그에서 약물의 전성시대가 있었다.

새미소사, 맥과이어와 함께 메이저리그 홈런 시대를 이끌어가던 배리본즈의 금지약물 복용에 관한 소식이었는데 아무도 이루지 못한 전인미답의 신기록들을 달성했지만 약물로 인해 모든 것이 무너졌다고 했다.

그러면서 마지막 기자의 멘트가 떠올랐다.

‘그는 1등이기 때문에 엄격한 씻김을 당했지만 2등 3등의 약물 투여자들은 배리본즈에 가려 자신들의 기록을 당당하게 노력의 댓가로 인정 받고 있다.’

벌컥벌컥!

준훈은 목이 타는 사람처럼 물을 마셨다.

그리고 갑자기 질문 하나가 떠오른다.

‘내가 정정당당한 실력으로 이 대회를 우승할 확률이 얼마나 될 것인가.’

16강에 오르면서 며칠 전 신문에 난 자신의 기사를 보았다.

그야말로 이제 막 대중으로부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우승이면 좋다.

최악의 경우라도 4강에는 올라야 한다.

하지만 8강의 면면들이야 말로 소름이 끼친다.

준훈이 잠시 고민하는 사이에 철제 케이스를 툭 던졌다.

“고민하시는 것 압니다.”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의 전화기는 항상 오픈되어 있죠.”

그리고 걸어나간다.

탁!

사내가 문을 닫고 사라지고 준훈은 꼼짝 않고 있었다.

멈칫!

고개를 돌리던 준훈이 놀란다.

사내가 앉았던 자리에 명함 한 장이 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준훈은 명함이 놓인 의자를 향해 걸어갔다.

의자 앞으로 걸어온 준훈은 걸음을 세우고 내려다본다.

그리고 허리를 구부려 명함을 주워 들었는데 명함은 매우 단촐했다.

‘닥터 K’

그리고 전화번호 한 개가 적혀 있었다.

한참 동안을 바라보던 준훈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명함을 주머니에 넣고 있었다.

그리고 준훈은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자신의 손을 살펴보았다.

훈련과 겨울철 배달로 인하여 항상 손은 부르텄다.

이 험한 손은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다시 철제 가방을 들 것인가.

아니면 벨트를 한번 들어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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