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6화 : 물이 되게 친구여.
내심 놀란다.
아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재벌 집 아들로 금자동아 은자동아 곱게 자란 도련님일텐데.
그런데 싸움은 오늘만 사는 놈들처럼 한다.
어디서 생긴 독기일까.
싸아악!
조상무가 칼을 종으로 그었다.
일준이 재빨리 옆으로 빠져나가며 깊게 칼을 찍었다.
조상무가 깐 속임수다.
칼잡이들에게는 허수(虛數), 또는 허초(虛招)라고 부른다.
지나갔던 칼이 순식간에 되돌아오며 일준의 어깨로 향한다.
‘잡았다!’
칼이 어깨를 파고들려는 순간 일준은 재빨리 몸을 뒤틀었다.
휘익!
잽싸게 한쪽 팔을 들어 조상무가 내지르는 칼을 반대쪽 어깨로 받는다.
이대로 공격이 이뤄진다면 조상무의 칼은 일준의 왼쪽 어깨를 뚫을 것이다.
하지만 그 역시 일준의 푸주칼에 관자놀이가 찍힌다.
무거운 칼이니 단단한 관자놀이라고 해도 부서질 가능성이 높다.
조상무는 아차했지만 이미 들어가는 칼을 회수하기에는 늦었다.
‘젠장.’
자신은 기껏해야 팔뚝이나 가져가겠지만 일준에게 무엇을 줘야할지 뻔하다.
조상무의 칼이 일준의 어깨 죽지를 파고들었다.
푸욱!
뻑!
조상무 칼이 어깨를 파고들자 동시에 일준의 도끼가 관자놀이를 찍었다.
정타는 아니었지만 피가 튄다.
일준의 칼은 그대로 끝내지 않았다.
탄력 좋게 관자놀이에서 내려오더니 조상무의 허벅지를 다시 찍었다.
“으욱!”
조상무가 휘청했다.
슈아악!
조상무의 눈이 커졌다.
눈이 부셔 제대로 바라볼 수 없을 만큼 강렬한 은광을 내 뿜으며 파고드는 푸줏칼이다.
‘피식!’
차라리 웃음이 나온다.
죽었다 깨어나도 피할 수 없다.
이대로 들어오면 자신의 목을 정확히 자를 것이다.
아주 잠깐이지만 파노라마처럼 자신의 삶이 스쳐지나간다.
짧고 굵게 살겠다는 다짐을 해왔는데 놀랍게도 굵을지는 몰라도 마흔 초반이니 짧은 생이다.
팟!
목을 파고들었는데 아직 살았다.
부르르!
조상무는 몸을 떨었다.
왼쪽 귀밑 아래에 일준의 칼이 닿을락 말락 붙어 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목을 자를 수 있다.
조상무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잘못 쉬었다가 살갗이 칼에 닿기라도 하면 그대로 그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스르륵!
일준이 칼을 내렸다.
그러더니 한쪽에 나뒹굴고 있는 의자를 바로 세워 앉는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피워 문다.
딸칵!
라이터로 불을 붙인 일준이 길게 연기를 내 뿜었다.
일준이 고갯짓을 한다.
조상무가 당황하며 품을 뒤지기 시작했다.
조상무가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접니다!”
조상무는 떨리는 눈으로 일준을 올려다보았다.
“이...일이 좀 잘못된 듯 합니다.”
상대의 대답을 듣는 듯 하더니 말했다.
“그게 아니라.”
탁!
그때 일준이 다가와 조상무의 핸드폰을 낚아챈다.
* * *
조용한 주택가에 차 한 대가 멈춰섰다.
운전석과 조수석 문이 동시에 열리며 두 사람이 내렸다.
조상무와 일준이었는데 피범벅이 된 차림새 그대로였다.
조상무는 붉은 벽돌담장이 휘어져 돌아가는 저택의 대문 앞에 섰다.
딸칵!
안에서 문이 열리고 정장을 한 두 사내가 문을 열어준다.
조 상무가 차 앞을 지나 일준의 옆에 섰다.
“가시죠.”
일준이 조상무를 느긋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담배 하나 피웁시다.”
어차피 만나게 될 사람 급할 필요 없지 않느냐는 뜻이다.
일준은 품에서 천천히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불을 붙인 후 천천히 내뿜으며 고개를 들었다.
자신의 앞에 있는 집을 올려다보았다.
그야말로 호랑이 굴 속이다.
전화속의 모영배는 밝은 음성으로 바쁘지 않으면 술 한 잔 어떠냐는 제의를 해왔다.
가느냐 마느냐.
자칫 들어갔다가 나오지 못할 수도 있다.
이미 판은 벌어졌다.
여기서 머뭇거리거나 더듬어 버리면 모양새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추해진다.
걸어 나오지 못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원래 싸움의 기세란 그런 것이다.
쾅!
일준이 들어가자는 듯 고갯짓을 하자 조상무가 앞장 서 걷는다.
일준 역시 그 뒤를 천천히 따라 걸어갔다.
일준이 안으로 들어서자 대문이 닫혔다.
조상무는 마당을 가로질러 현관으로 걸어갔고 안으로부터 다시 문이 열린다.
모영배가 나타났다.
피 범벅이 된 조상무를 발견하고 멈칫한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조상무의 몰골이 그 이상이라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이어 마당을 걸어오는 일준을 바라본다.
일준도 조상무와 별반 차이 없는 누더기로 변한 옷을 걸치고 있다.
특히 왼 손바닥을 헝겊으로 묶은 걸 보면 상처가 깊은 듯 했다.
“음!”
모영배의 눈이 빛난다.
오라 한다고 진짜 왔다.
아무도 데려오지 않고 혼자의 몸으로 망설임 없이 걸어오는 일준을 보며 모영배는 중얼거렸다.
‘대청 제약 정 회장이 아주 든든 하겠구만.’
모영배는 미소를 머금었다.
“어서 오게.”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모영배는 순간적으로 눈을 좁혔다.
죽음의 함정이 될 수도 있는데 초대라고 태연하게 말한다.
“그건 내가 할 소리지. 초대에 흔쾌히 응해주어 고맙네. 들어가지.”
모영배의 안내를 받으며 일준은 거실로 들어섰다.
“이쪽으로!”
모영배는 일준을 소파로 안내했다.
그리고 자신은 주방쪽으로 걸어가더니 냉장고 문을 열어 얼음을 꺼내 손잡이가 달린 투명한 플라스틱 통에 담았다.
이어 두 개의 언더락스 잔을 챙겨 소파 탁자 위에 놓더니 벽장에 진열된 술병하나를 꺼내왔다.
모영배는 일준의 잔에 얼음을 채우고 자신의 잔에도 담는다.
딱!
모영배는 마개를 돌리며 말했다.
“공준표라고 소싯적 친구가 있지. 얼마 전 생일 선물이라면서 보내 왔는데 술 이름이 뭐라더라.”
졸졸졸!
얼음이 든 잔에 술을 붓는다.
“루이 뭐라고 했는데.”
이어 자신의 잔에도 술을 채우고 병을 놓는다.
“들지!”
두 사람은 잔을 부딪치며 잔을 비웠다.
일준은 단숨에 잔을 비웠다.
따악!
술잔을 내려놓더니 안주머니에 손이 들어갔다.
퍽!
묵직한 소리에 잔을 입에서 뗀 모영배가 탁자를 내려다보았다.
흠칫!
모영배가 깜짝 놀란다.
푸주칼이었다.
말라붙은 핏자국으로 칼은 오랜 세월 땅속에 묻혔다 나온 듯 울퉁불퉁 했다.
모영배는 잔을 내리고 일준을 바라보았다.
그야말로 엉망이다.
옷인지 걸레조각인지 속살이 훤히 드러났다.
몇몇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곳에서는 아직도 핏물이 흘러내렸으나 일준은 표정 하나 찌푸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상황 속에서도 자신을 압박하려 한다.
곧 죽어도 자신은 늑대로서 죽겠다는 듯.
우두머리로서 각오를 한 것임이 보였다.
“핫핫핫!”
모영배가 상체를 세우며 큰 소리로 웃었다.
“그 부드러운 정 회장 아들이 이렇게 사나이인 줄은 몰랐군.”
“원하시는 것이 뭡니까?”
콸콸!
모영배는 다시 잔에 술을 채운다.
“맞춰보게. 내가 뭘 얻고자 이 고생을 한다고 보는가.”
일준이 그 속을 분명하게 들여다볼 수는 없다.
물론 짐작이 전혀 가지 않는 건 아니지만 이런 좌석에서 섣부른 대답은 자제하는 것이 좋다.
“분명한 사실은 내가 마음만 먹으면 자네의 발목을 부러뜨릴 수도. 자네에게 날개를 달아줄 수도 있다는 거지.”
기분 나쁘지 않게 들린다.
그러나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는 듯한 협박이었다.
일준의 눈이 좁아진다.
“조상무!”
멀리 떨어져 있던 조상무가 다가왔다.
“2층에 가서 약 좀 가져와.”
“예!”
조상무가 재빨리 2층 계단을 올라갔다.
“마시자고!”
모영배의 기분은 그다지 나쁘지 않은 듯 했다.
술을 반쯤 비우고 잔을 내리더니 담배를 꺼내 일준에게 권한다.
슥!
일준이 꺼내물자 라이터를 켜준다.
자신도 한 개비를 물고 불을 붙일 때 2층을 올라갔던 조상무가 원목으로 된 둥근 통을 가지고 내려와 뚜껑을 열었다.
통은 머그컵 크기 정도 되었는데 하얀 가루가 들어 있었다.
“그 손 좀 이리주게.”
헝겊에 말려 있는 왼손을 가리켰다.
그때 조상무가 부엌에서 사용하는 가위를 가져와 일준의 손을 감고 있는 헝겊을 잘랐다.
싹뚝!
손바닥을 가로지른 핏줄 하나, 그건 회칼을 잡을 때 생긴 상처였는데 금방이라도 다시 피가 흘러나올 것 같았다.
사라락!
가루약을 상처에 수북하게 뿌리고 거즈붕대로 손을 몇 번 감더니 반창고로 풀리지 않게 붙여준다.
일준은 아무 말도 않고 모영배가 하는대로 내버려 두었다.
“저와 접점이 없습니다.”
공장 일에 대해 묻고 있는 것이다.
서로의 영역이 다른데 어찌하여 이런 일을 벌였는가를 말이다.
모영배는 아무런 말 없이 명함 한 장을 꺼내 놓는다.
‘모로 해피캐피탈 모영배’
란 이름이 선명하게 박혔다.
“나와 일 하나 같이 해보겠는가?”
“자네가 원하는 게 돈이든 명예든 내가 만들어줄 수 있을 것이야.”
대청제약 회장 아들에게 돈과 명예 운운한다.
“부친께서는 자네에게 돈을 채워 줄 수 있겠으나 명예는 선물하지 못할 걸세.”
자신은 명예까지 안겨줄 자신이 있다는 뜻이다.
“부친은 워낙 양지에 있기 때문에 이런 일에 손을 대기에는 부담스러울 테지만 우리는 다르지. 자네가 어디를 목표로 가든 등대가 되어 주겠다는 것이네.”
등대는 밤 바다를 항해하는 선박들의 앞 길을 비춰주는 태양이다.
일준이 어이가 없단 듯 웃음을 지었다.
“내가 뭘 하려는지 알고 있다는 말씀인 듯 한데?”
“자네가 만들고 영업은 우리가 하면 어떻겠나?”
합작을 제의한다.
일준은 탁자 위에 올려진 모영배의 담배에서 한 개비를 꺼내 피워 물었다.
후우우!
일준은 담배 연기를 뱉었다.
“자네가 데려온 기술자들이 만든 약을 우리가 팔지. 대신 자네를 이번 대회 우승자로 만들어 주겠네. 알지 않나? 러닝선수 옆에는 훌륭한 페이스메이커가 있단걸.”
국내를 넘어 아시아, 그리고 미국 시장에서까지 지켜보고 있는 이번 대회에서 자신을 우승 시키겠다고 너무나 당당하게 말한다.
“기술자들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대청제약 해외 인력망을 이용해 자신이 힘들게 데려왔는데 모영배가 폐공장에서 데려가 버렸다.
“호텔에 모셔놨으니 걱정말게. 최선을 다한 서비스가 이뤄지고 있으니 말이야. 아 그리고 자네 친구들에게도 섭섭치 않게 위로금도 전하지.”
쭈욱!
일준은 남은 술을 마저 비우더니 자신의 손으로 직접 따라 채운다.
탁!
일준은 잔에 술을 채우고 병을 소리나게 놓았다.
생각에 잠긴 듯 아무런 말이 없었다.
공장에서 본 동하의 얼굴이 떠오른다.
지금 당장이라도 이들을 갈아 마셔 버리고 싶지만 그런 감정적 결정으로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더 싸워봤자 서로에게 이득이 없다.
최선의 선택.
모영배는 자신이 가야하는 길에 필요한 사람임을 인정했다.
일준은 채워진 술을 단숨에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본의 아니게 피를 좀 봤습니다. 미안합니다.”
“돈 한 푼 투자하지 않고 천군만마를 얻었으니 나야말로 민망하군.”
일준은 그렇게 모영배의 배웅을 받으며 저택을 나섰다.
마당을 걸어가는데 뒤에 따라오던 모영배가 소리쳤다.
“아 생각났네. 13, 루이 13이었어.”
마셨던 술이름이다.
일준은 그렇게 모영배의 배웅을 받으며 저택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