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5화 : 물이 되게 친구여
택시기사는 야밤중에 잡힌 장거리 운행에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덕양까지의 거리는 여기서 못해도 8만원은 나온다.
오늘따라 태우면 기본이 이만 원을 넘기는 먼 거리 손님인데 8만 원짜리로 하루의 정점을 찍는다.
손님을 태워다 주고 미련없이 집으로 갈 것이다.
더군다나 취객도 아닌 듯 싶어 그의 기분은 하늘을 찌른다.
그런데 한참을 달리던 택시기사의 표정에서 조금씩 웃음이 사라진다.
출발한지 20여 분이 지났지만 뒷 좌석 손님은 말 한마디 없다.
갑자기 등골이 서늘하다.
그런데 바로 그때 뒷좌석에서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려온다.
-틱
-틱
창문을 무엇인가로 두드리는 것 같아 기사가 룸미러로 일준을 보았다.
“손님 그거 기스라도 나면...헉!”
택시기사는 비명을 삼켰다.
일준이 팔뚝만한 푸주칼로 창문을 톡톡 치고 있었다.
꾸울꺽!
기사는 완전히 얼어 붙었다.
허억!
갑자기 딸꾹질이 나온다.
8만 원짜리 장거리 손님으로 오늘 하루를 마감하게 해준 예수님께 기도까지 바쳤다.
‘그러고 보니.’
덕양은 산속이다.
이 밤에 푸주칼을 들고 깊은 산속으로 간다는 사람이 강도가 아니고 무엇이겠나.
주르륵!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차분해야 한다. 호랑이에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안죽는다고 했다’
기사는 재빨리 자신이 할 수 있는 행동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급브레이크를 밟아 몸이 흔들리는 틈을 타 재빨리 차에서 내려 도망친다.
조수석 쪽을 이용해 길가의 가로수를 들이받는 사고를 일으키고 도주한다.
그냥 달리는 택시에서 문을 열고 뛰어 내린다.
핸드폰을 이용해 112에 신고를 한다.
여러 가지 방안을 모색했지만 썩 마음에 드는 건 없다.
살아오면서 그다지 나쁜 일을 해온 기억은 없다.
불행을 남의 일로만 여겼는데 자신에게 닥칠줄이야.
“왜 이렇게 차가 흔들립니까?”
핸들을 쥔 손이 떨리다 보니 차가 출렁거린 것이다.
“조용히 갑시다. 별 일 없을테니까.”
“예예...”
불상사는 없다고 했지만 그 말을 믿을 수는 없다.
택시기사는 눈을 부릅뜨고 운전을 했다.
만약 오늘 무사히 지나간다면 앞으로는 절대 새벽 기도를 빠지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인적없는 산 아래 택시가 멈췄다.
“수고했습니다.”
일준이 오만원권 두 장을 건네주자 기사는 금방이라도 울어 버릴 듯 했다.
“잔돈은 됐습니다.”
살려준 것만도 감사한데 잔돈 27,000원을 받지 않겠단다.
“감사합니다.”
기사는 재빨리 차를 돌려 왔던 길을 내달렸다.
우당탕탕!
급하게 서두르다 길가 바위를 쳤지만 택시는 멈추지 않고 그대로 사라졌다.
차에서 내린 일준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불빛 한 점 없는 어둠이 무겁게 내려앉아 있다.
서쪽 하늘에 여인의 눈썹을 닮은 달빛이 걸려있다.
일준은 공장으로 들어가는 흙길을 걸어올라갔다.
공장 내부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이 아직 상황이 정리된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이곳은 자신과 동하가 같이 알아봐 둔 공장이었다.
일준은 한숨을 크게 들이 쉬었는데 콧속으로 피 비릿내가 밀려 들어온다.
공장 문 앞에 선 일준은 주위를 한 번 훑어보고 닫힌 문을 힘껏 열었다.
덜컹!
문을 열자 역한 피비린내가 훅 끼친다.
난장판이다.
공장 한쪽에는 피를 뒤집어쓴 사내들이 신음을 흘리며 구석에 모여있었다.
하지만 하나 같이 낯이 익었다.
멈칫!
한 곳에 시선이 멎었는데 동하의 얼굴이다.
몹시 고통스러운 듯 이마를 찡그린 채 꼼짝하지 않는다.
일준은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동하를 바라보았다.
“누구야?”
조상무 부하들이 노려본다.
“뭐냐고?”
담배를 문 사내 한 명이 일준에게 다가온다.
촤악!
일준의 오른손에 들린 푸주칼이 대각선을 그으며 떨어졌다.
사내는 벼락을 맞은 듯 움찔했는데 목에서 핏물이 흘러나오며 뒤로 넘어졌다.
“이 새끼!”
사내들이 달려왔다.
일준의 푸주칼이 선두에서 오는 사내의 쇄골을 찍어버렸다.
-퍼억.
단단하게 박힌듯한 그 칼에 사내는 비명을 지르며 일준의 손을 움켜잡았다.
사내의 행동은 마치 일준이 사내를 단단히 붙잡고 있는 것처럼 되어 버렸다.
푹!
푸푹!
일준은 사내의 팔을 잡고 가슴을 찍었다.
일준은 사내를 뒤로 확 밀어 버렸다.
동료가 날아오듯 밀려오자 사내들이 재빨리 피한 틈을 타고 일준은 달려 들어갔다.
촤아아!
일준의 손에 들린 칼이 허공을 그었다.
“억!”
작달막한 사내가 왼팔을 감싸쥐는데 팔꿈치 아래가 덜렁거리고 있었다.
부웅!
사내 한 명이 자신 옆에 있던 의자를 던졌다.
고개를 숙여 날아오는 의자를 고개 숙여 피한 일준이 빠르게 다가간다.
사내가 들고 있던 칼을 뻗기도 전에 일준이 다가와 가슴을 그었다.
촥!
사내의 앞가슴 옷자락이 잘려나가며 왼쪽어깨부터 오른쪽 복부까지 커다란 자상이 만들어졌다.
주르르!
담벼락을 흘러내리는 빗물처럼 피가 쏟아진다.
“죽엇!”
야구방망이가 떨어진다.
일반인의 손 속도는 절대 복서의 손보다 빠를 수는 없다.
일준은 어느새 옆으로 반걸음 움직여 방망이를 피하고 관성에 의해 숙여진 사내의 어깨를 찍었다.
뻐억!
움찔하는 틈을 놓치지 않고 이번에는 복부에 한 번 더 칼을 박았다.
사내는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한 채 무릎을 꿇었다.
남은 사내들 얼굴에 공포가 어른거린다.
두려움을 숨기지 못하며 주춤하더니 길이 없다고 판단한 듯 사내 한 명이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달려든다.
“개새끼야.”
콱!
사내가 다가오기 전에 일준이 먼저 들어가 이마를 찍어 버린다.
뚝!
사내의 눈이 커졌다.
씨익!
일준이 사내의 복부에 칼을 박아넣었다.
뻐엉!
발로 복부를 걷어차고 사내는 뒤로 넘어졌는데 칼이 뽑히면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 나온다.
“씨이이발!”
전등이 켜져 있지만 그다지 훤한 편은 아닌 실내인데 은빛 광채가 번들 거린다.
사내의 손에 한 자루 회칼이 들렸다.
일반 회칼보다 약간 길고 칼날이 좁았는데 번뜩이는 도신에 글씨 하나가 보인다
‘야나기바보초(柳刃包丁)’
칼날이 버드나무 잎처럼 가늘어 야나기(柳)라는 말이 붙었으며, 얇아서 회, 그중에서도 종잇장처럼 얇게 써는 복어 회를 뜨는데 사용된다.
슉!
사내의 칼이 번쩍하는가 싶더니 일준의 오른쪽을 파고든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동작은 노련한 칼잡이라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싸악!
전광석화와 같이 들어가던 칼이 멈췄다.
사내가 놀란다.
일준이 맨손으로 자신의 칼을 쥐어버린 것이다.
일준은 사내의 칼이 너무 빨라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냥 손으로 잡아 버린 것이다.
무모하지만 때로는 가장 완벽한 수비동작이다.
주르륵!
칼날을 타고 피가 흐른다.
사내는 칼의 손잡이를 틀어 일준의 손을 아작내려고 했다.
하지만 상대를 너무 모르는 행동이다.
일반 사람들 같았다면 칼날에 의해 손이 회쳐져 버렸겠지만 일준은 달랐다.
칼을 쥐는 순간 오른손에 들린 푸주칼이 사내의 면상을 찍어 버렸다.
사내는 쾌재만 부를 줄 알았지 오른손의 푸주칼이 날아오리란 생각은 미처 못한 것이다.
칼을 쥔 맨손의 고통은 상상을 초월한다.
대부분의 사람이라면 지금 상황에서는 일단 왼손의 고통부터 어떻게 해결하려 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왼손의 아픔을 해결하기 위해 어떤 동작을 취하거나 반응을 한다는 건 상대의 페이스에 더욱 말려들게 된다.
칼을 쥔 왼손은 그대로 가야 한다.
놓으면 더 위험하고 끝까지 쥐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일준은 왼손으로 일단 사내의 칼을 막아 쥐고 오른손 푸주칼로 승부를 결정해 버린 것이다.
스륵!
사내의 손이 손잡이에서 떨어졌다.
휙!
칼날을 쥐고 있던 일준의 왼손이 재빨리 손잡이를 쥐었다.
푸우욱!
자루째 깊이 박혔고 얼굴에 꽂힌 칼을 뽑아 한 번 더 찍으며 밀어 버린다.
꽈당!
사내는 뒤로 넘어졌는데 눈만 멀뚱히 뜬 채 숨을 헐떡 거렸다.
일준은 왼손 바닥을 보았다.
다행히 손바닥을 베이기만 했을 뿐 큰 상처는 없었다.
만약 자신의 역공이 조금만 늦었더라도 상대는 칼의 손잡이를 돌렸을 것이고 그렇게 되었다면 손바닥은 걸레조각이 되었을 것이다.
“죽자아아!”
사내가 공포를 떨쳐내기 위해 악을 쓰며 달려들었다.
휘리릭!
오른손에 신체 일부처럼 들려 있던 푸주칼이 날아갔다.
날아간 칼은 달려드는 사내의 왼쪽 가슴에 정확히 박혔다.
푸우욱!
“으아아!”
사내는 박힌 칼을 뽑아 버리고 양손으로 가슴을 감쌌다.
감싼 손가락 사이로 핏물이 흘러내리고 일준은 떨어진 칼을 주워 재빠르게 사내의 무릎을 찍는다.
신음소리가 전부다.
살려달라는 소리, 너무 아픈 나머지 숨만 헐떡이는 사람, 덜렁거리는 자신의 팔을 보며 넋을 놓아버린 이도 있었다.
일준이 쓰러진 사내들을 스윽 훑어볼 때 문이 열리며 조상무가 전화를 받으며 들어섰다.
“물론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누굽니까.”
환한 웃음으로 전화를 받던 조상무의 눈이 커졌다.
조금전 전화를 받기 위해 나가기 전까지만 해도 별일 없던 실내였다.
뚝!
뚜욱!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쓰러진 부하들 사이에서 피칠갑을 한 채 우두커니 서 있는 일준.
조상무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회장님.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주머니에 핸드폰을 넣었다.
조상무는 바닥을 뒹구는 부하들을 훑어보았는데 얼굴이 돌덩이가 되었다.
“의외로군.”
일준이 나타난 것에 다소 당황한다.
이렇게 갑자기, 그것도 단신으로 이곳에 나타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생각했던 것 보다. 많이 터프한데.”
툭!
외투 단추를 풀더니 벗어 옆으로 툭 던졌다.
상체를 숙여 정강이에 감춰놓은 칼 집에서 칼을 빼내든다.
스으으!
손목을 풀며 천천히 일준에게 다가갔다.
후우우!
일준 역시 모자를 벗어 옆에다 툭 던졌다.
조상무는 길게 숨을 내뱉었다.
척!
적당한 거리를 두고 걸음을 세운 조상무는 일준을 바라보았다.
운동선수라 그런가 서 있는 자세가 흔들림이 없다.
“모로해피캐피탈 조상현 상무라고 합니다.”
씨익!
일준의 표정은 전혀 달라진 것이 없었다.
입으로 건넨 자신의 명함을 짓밟듯 무시하자 조상무의 눈이 가늘어졌다.
슉!
조상무가 기습적으로 찔러 들어왔다.
목이다.
그건 이 싸움이 승패가 아닌 생사를 결정하는 것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
일준이 고개를 옆으로 크게 숙여 피해냈다.
슛!
일준도 칼을 뻗었지만 조금전과는 다르다.
동작이 짧고 작았다.
푸주칼은 자체의 무게로 단단한 뼈를 부수는 데 사용한다.
일방적인 사냥을 할 때는 위력적이지만 팽팽한 상대와 겨룰 땐 불리하다.
움직임을 짧고 작게 가져가는 것이 좋다.
그렇게 해도 무게 때문에 상대에게 입히는 상처나 고통은 일반 칼과는 다르다.
목을 파고드는 시퍼런 푸주칼을 보며 조상무는 허리를 뒤로 젖혀 피했다.
한 번씩의 공격.
어느 쪽이 우세하다거나 앞선다는 판단은 내릴 수 없다.
분명한 건 둘 모두 여유있게 상대의 공격을 피한 건 아니라는 것이었다.
스으으!
조 상무의 칼끝이 뱀 대가리처럼 좌우로 움직인다.
틈을 노리는 것이다.
그러나 일준은 칼을 단단히 움켜쥐고 있다.
깔끔하게 끝낼 수 없는 싸움이다.
어느 쪽이 이겨도 상당한 부상은 각오해야 할 싸움이라면 순간의 선택이 생사를 결정한다.
일준이 한 발 앞으로 다가갔다.
미끄러지는 운동화 발자국 소리가 사아악 하고 들린다.
주르륵!
상처에서 흘러내리는 피와 땀방울이 얼굴을 덮었다.
핏물이 눈을 파고들지만 일준은 조상무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조상무는 생각했다.
‘기어이 내 목을 따겠다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