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4화 : 물이 되게 친구여.
케이지 벽면에 기대어 두호는 준모가 건네준 수건으로 이마를 닦고 있었다.
“형님 고생하셨습니다.”
두호는 거친 숨을 내쉬었지만 빙긋 미소를 지어보였다.
주물럭!
주물럭!
준모가 두호의 어깨를 주무를 때 미주가 다가온다.
미주가 두호에게 밀착했다.
“정말 군룬의 도경욱을 꺾었습니다. 두호씨! 지금 기분이 어떠신가요?”
미주는 마이크를 내밀었다.
터질 듯 달아오른 이 분위기를 이어갈 멋진 말 한마디 뱉어주기를 바라는 표정이었다.
그런 미주의 표정을 묵묵히 보던 두호는 심사위원석의 채호에게 눈길이 옮겨갔다.
채호의 표정 역시 무언가를 기대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팬 서비스 한번 해주시죠.’
채호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두호는 헛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잠시 아무 말 없이 땅을 쳐다보던 두호가 결심을 굳힌 듯했다.
그렇다.
이 판을 이제 더욱 뜨겁게 달구는 것은 철저히 자신의 몫인 것이 분명해졌다.
기호지세.
흥행이라는 말 등에 올라 탔으니, 내려 올 수는 없다.
“자료가 많아 준비하기 용이 했습니다. 멋진 승부를 보여준 도경욱 선수는 사실 제게 벅찬 상대였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두호의 말마따나 도경욱은 프로다.
관중들 시선이 두호의 입에 고정된다.
판에 박은 그런 멘트 말고 좀 더 확실한 무언가 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스타는 그에 어울리는 퍼포먼스를 보여주어야 한다.
“과거 인터뷰 때 했던 말을 정정하겠습니다. 전 이곳에 도전하러 나온 것이 아닙니다.”
두호는 자신을 비추는 카메라를 뚫어지게 응시하더니 분명하게 말했다.
“전 PRIDE-K를 접수하러 나왔습니다. 이상입니다.”
사람들의 표정은 곧 환희로 가득찼다.
와아아아!
사람들은 다시 소리쳤다.
난 PRIDE-K를 접수하러 나왔다.
도전이 아닌 정복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준모가 건네준 수건을 목에 걸고 케이지를 내려가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진짜다! 진짜가 나타났다!”
“드디어 한국에도 저런 성질이 나오는구나!”
“그래! 선비 새끼들 다 짓밟고 왕이 되보자!”
카메라는 백두호를 연호하며 날뛰는 관중들을 잡아가고 있었다.
미주 역시 관중들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분명해졌다.
이번 프로그램 무조건 대박친다.
“지금까지 웨스턴 코리아에서 열린 PRIDE-K 2라운드 입니다. 뒤이어 컨벤션 제2실에서 필린의 이채호 대표의 기자회견이 있을 예정이오니 취재진들은 안전에 유의하여 이동해주시기 바랍니다.”
기자들이 우르르 자리에서 일어나 이동하기 시작했다.
미주는 두호가 나간 출구를 바라보았다.
‘백두호...’
* * *
경기도 근처 이름 모를 야산에 폐공장.
과거에는 술 제조장으로 쓰였지만 지금은 버려진 지 한참 된 공장이었다.
그 앞에 봉고차 한 대가 멈춰섰다.
이윽고 문을 열고 내린 사내들중 동하가 보였다.
“공기 죽인다.”
장시간 이동했는지 다들 몸을 풀며 차에서 내렸고 일부는 하품을 해댔다.
뒤이어 밀항해 들어온 사내들까지 내렸다.
폐공장은 이번 일준과 동하가 마련한 곳이었다.
동하는 기지개를 피며 큰 철문 앞으로 다가섰다.
움찔!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진다.
산속인데다 폐공장이라는 것 때문일 것이다.
스윽!
문은 쉽게 열렸다.
멈칫!
안으로 들어선 동하가 깜짝 놀랐는데 자신들보다 먼저 한 무리의 사내들이 와 있었다.
“야 이 자식들아, 어른들이 기다리잖아. 빨리빨리 다니지 못하겠어.”
벼락같은 호통이 터져나왔다.
맨 앞에 앉아 비릿한 미소를 짓고 있는 사람은 다름아닌 조상무였다.
동하의 눈이 좁혀졌다.
처음보는 면면이다.
어떻게 자신들의 집결지를 선점하고 있는 것일까.
동하는 길게 숨을 내쉬며 한 발 다가갔다.
“당신들 뭐야?”
의자에 앉아 있던 조상무는 싱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로해피캐피탈에서 나왔습니다. 뒤에 두 사람 좀 빌립시다.”
조상무는 동하의 등 뒤에 서 있는 두 사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꿀꺽!
동하는 침을 삼켰다.
안 될 일이다.
이대로 두 사내를 내준다면 일준이 계획한 일은 모두 무너지게 된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동하의 일행들이 한 발씩 더 다가오자 조상무는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결국 권주를 마다하겠다? 그럼 어쩔 수 없지. 얘들아.”
조상무의 부하들이 달려든다.
“싹 다 죽여!”
그들은 야구방망이와 쇠파이프, 회칼을 쥐고 있었지만 동하쪽은 빈손이다.
이런 일을 전혀 예상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다급히 폐공장 바닥에 널브러진 각목과 쇠붙이들을 주워들었다.
양쪽 모두 모두 비슷한 숫자이지만 한쪽은 준비를 했고 한쪽은 그렇지 못했다.
빠악!
퍽!
양쪽이 뒤엉켰다.
야구방망이와 쇠파이프가 떨어지고 시퍼런 회칼이 벼락처럼 파고든다.
푹!
푸프푸!
주저함이나 망설임은 찾아볼 수 없다.
처음은 비등해 보였다.
하지만 준비한 사람들을 상대로 준비하지 않은 쪽이 이길 수는 없었다.
조금씩 동하의 무리들이 밀린다.
머리가 깨지고 비명이 울린다.
여기저기 바닥을 뒹구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었으나 도망을 치거나 물러서지는 않는다.
허벅지에 칼이 박히고 야구방망이에 어깨가 부서져도 동하와 친구들은 덤벼들었다.
피가 철철 흐르지만 넘어진 상태에서도 상대를 붙잡은 체 놓지 않았다.
사내의 칼이 동하의 옆구리를 노리며 들어왔다.
쉭!
동하는 간신히 그 칼을 피하며 녹슨 철근토막으로 달려든 사내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컥!”
사내는 비명을 흘렸는데 얼굴로 피가 쏟아져 내린다.
동하의 마음이 급해졌다.
들려오는 비명소리들이 귀에 익다.
자신들 같은 당구장 꼬맹이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런 싸움에 이골이 난 듯 사내들은 체계적으로 움직였고 서둘지 않았다.
쓰러진 상대에게도 확인 사살을 하듯 분명한 공격을 먹인다.
파팟!
동하의 눈이 빛났다.
친구 민철의 등 뒤로 한 사내가 칼을 찔러넣는다.
민철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손을 뻗지만 애먼 허공만 휘저을 뿐 그의 손에 잡히는 것은 없다.
민철은 그대로 피를 토하며 앞으로 쓰러졌다.
“민철아!”
동하는 벼락처럼 달려간다.
민철에게 칼을 준 사내의 뒤통수를 인정사정없이 후려쳤다.
꽈직!
사내는 휘청하더니 돌아섰다.
“개새끼!”
동하는 검도하듯 이번에는 이마를 향해 철근 토막을 내리쳤다.
하지만 동하의 손에 들린 철근토막이 갑자기 축 늘어지며 힘이 빠졌다.
푸우욱!
뜨거운 열기가 허리를 파고들었다.
시뻘겋게 달궈진 쇳덩이 하나가 몸속으로 들어오는 것 같은 느낌에 동하는 순간적으로 칼을 맞았다는 걸 직감했다.
돌아서는 동하 앞에 칼을 쥔 사내가 씨익 웃는다.
“우...웃어 이런 씨발놈이.”
동하는 손에 쥐어진 철근토막을 들어 올렸지만 너무 느렸다.
푸푹!
이번에는 복부에 칼이 들어왔다.
동하는 핏물을 머금은 체 상대를 붙잡았다.
“이 새끼...”
얽히고 설킨 싸움판에서 한 사람이 튀어나왔다.
기어가듯 벽으로 걸어나가는 동하.
동하는 피가 흐르는 목을 붙잡으며 한쪽 벽에 겨우 기댄다.
울컥거리면서 나오는 피를 손으로 겨우 막아보지만 의식은 조금씩 멀어졌다.
하나둘씩 쓰러지는 친구들의 모습에 동하는 원통하기까지 한다.
있는 힘을 다해 안 주머니로 손을 뻗는다.
턱 끝까지 차오르는 핏물에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꺽.”
겨우 품 안에 핸드폰을 꺼냈다.
실날같이 좁게 보이는 핸드폰에 한 손으로 메시지를 찍는다.
그리고 이내 핸드폰을 떨어트리며 그대로 쓰러졌다.
핸드폰에는 문자가 발송되었음을 알리는 알림이 하나가 올라왔다.
* * *
일준은 샤워를 마치고 노트북을 켜 놓고 있었다.
화면엔 두호와 도경욱의 경기가 재생되고 있었다.
벌써 세 번째 보는 것이다.
강한 사람이 이기는 단순한 승부가 아니다.
어떤 습관이 있으며 약점이 무엇인지.
두호의 장점을 상쇄시킬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찾아내야 한다.
과거 두호와의 싸움을 기억한다.
자신의 신체적인 능력만을 믿고 덤벼드는 그저그런 선수가 아니었다.
그 능력을 완벽하게 이용해내는 냉철한 머리가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도경욱과의 경기에서도 그 부분은 여지없이 나온다.
마지막 스피닝 백 피스트를 제외하고는 모든 부분이 계산속에서 나온 움직임이었다.
단 하나의 행동도 의미없이 던져지는 것이 없었다.
마치 과거의 그 시합 때처럼 지금 당장은 분석해보아도 나올 것이 없었다.
그러나 찾을 것이다.
반드시 찾아내야 한다.
어딘가 약점은 있다.
지이잉!
순간 핸드폰으로 문자 알림이 떠올랐다.
일준은 머리를 쓸어넘기며 핸드폰을 잡아 쥐었다.
문자의 내용을 확인한 순간 일준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는다.
-이ㄹ 준아 공장에 몰ㅗ해ㅍㅊ탈-
엉망으로 보내진 메시지.
메시지에 아주 절박함이 담겨 있다.
메시지를 한참 바라보았는데 알아보기 힘든 내용이지만 어떤 일치점이 있을 것이다.
-이ㄹ 준아 공장에 몰ㅗ해ㅍㅊ탈-
계속해서 문자를 중얼거리던 일준의 눈이 커졌다.
집히는 곳이 있다.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일준은 입고 있던 츄리닝 위로 검정색 점퍼 하나를 걸치고 입소할 때 쓰고 온 야구모자를 깊숙이 눌러썼다.
굳은 표정으로 복도를 걷던 그를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 직원이 발견했다.
직원은 밝게 미소지으며 일준을 향해 물었다.
“어디 가시나요?”
“외출되죠?”
2라운드 승리자에겐 자율적인 외출이 허가된다.
일준의 표정이 심상치 않게 느껴진 직원이 일준에게 물어보았다.
“네. 가능합니다. 혹시 무슨 일 있으신...”
일준은 대답을 듣자마자 훽하니 몸을 돌려 엘리베이터의 탑승했다.
탁!
일준은 문을 닫고 사라졌다.
일준은 호텔 정문으로 나왔다.
밤이어서인지 택시 승강장에 손님을 기다리는 빈 택시가 한 대도 보이지 않는다.
결국 큰 길까지 걸어나가야 한다.
일준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걸음이 빠르다.
급기야는 뛰다시피 했고 가까운 호텔길을 벗어나 대로변에 도착했다.
길가에서 빈택시를 기다렸지만 좀체 오지 않는다.
급한 마음에 왔다갔다 서성거리던 일준의 시선이 오른쪽으로 돌아갔는데 멀리 ‘통 바베큐’ 라고 적힌 가게가 보인다.
일준은 빠른 걸음으로 바베큐집을 향해 걸어갔다.
가게 밖 화덕 앞에서 쭈그리고 앉아 고기를 굽는 사장이 보였다.
초벌이 된 고기는 토막을 내어 재벌 해야한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칼을 다듬는 사장.
푸줏칼을 적당한 높이로 처들자 누군가 팔목을 턱 하니 잡는다.
깜짝 놀란 사장은 칼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짤그랑.
자신의 팔목을 잡은 사람을 올려다보니 일준이었다.
“이거 좀 빌립시다.”
사장은 일준을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예?”
사장보다 한 발 먼저 떨어진 칼을 주워든 일준.
그의 표정을 본 사장은 잠시 당황하여 말을 잃었다.
사람이 저렇게 삭막한 표정을 지을 수 있는 것인가.
일준은 칼에 손잡이를 꽉 쥐었다 폈다를 반복한다.
사장은 일준의 행동에 알 수 없는 께름칙함을 느끼며 뒷걸음질을 쳤다.
“왜...왜그러세요.”
일준은 대답없이 몸을 훽 하니 돌렸다.
정말 자신의 칼을 들고 가버리는 일준을 보며 사장은 소리쳤다.
“저 사람 뭐야! 아저씨!”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 버리는 일준을 쫓아 뛰어가는 사장.
그러나 일준은 이미 시야에서 사라진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