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3화 : 물이 되게 친구여.
준모는 재빠르게 케이지 안으로 들어와 두호의 상태를 살폈다.
목에 건 수건으로 두호 얼굴에 땀을 닦아주었다.
“형님. 정말 감동에 벅차 말을 잇질 못하겠습니다.”
두호는 싱긋 웃으며 입에 물을 머금었다.
몇 번 가글을 하는 듯 하더니 곧 다시 뱉어낸다.
준모를 밀어내고 필린의 한 직원이 도경욱처럼 팔에 조금 덜어온 바셀린을 다시 펴 바른다.
“근데. 왜 연습하신 전략을 그렇게 빠르게 쓰신겁니까.”
“진짜 선물은 따로 있어. 관객 반응 식을 때 콜 한번 줘.”
준모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네? 콜이요?”
준모는 두호의 말뜻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가 도경욱쪽 코너를 바라보았다.
‘그 자식 눈빛 한 번 더럽구만.’
하필 그때 도경욱은 거친 숨을 내쉬며 두호를 살기 넘치는 시선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준모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버렸다.
‘임마 그러니까 그런 말을 왜 해. 우리 형님에게 그런 말 했다가 안 쳐맞은 놈 못 봤다니까.’
‘그놈 만나거든 좀 전해주쇼. 관 하나 맞춰 놓으라고.’
준모는 속으로 한 마디 더했다.
‘도경욱 여기 잠들다.’
본인이 한 말이 자기가 생각해도 재밌는 듯 혼자 낄낄 거리는 준모였다.
준모는 불끈 주먹을 쥐었다.
“형님! 적당히 하십시오. 자칫 죽기라도 하면 경기중 일어난 사고니 법적 책임은 없겠지만 미안하잖아요.”
두호는 실소하듯 웃었다.
이윽고 차분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땡
쉬는 시간이 끝나는 종이 울렸다.
선수를 제외한 모두가 빠르게 케이지를 빠져나갔고 두 사람은 다시 천천히 중앙으로 걸어들어왔다.
심판이 경기 시작을 알리고 두 사람은 1라운드와 다르게 터치글러브는 없었다.
도경욱은 흥분이 가시지 않은 듯 먼저 펀치를 날렸다.
두호는 뒤로 물러나며 도경욱의 주먹을 피해냈다.
하지만 도경욱의 공세는 끝나지 않았다.
툭!
투투툭!
뚜벅뚜벅 두호에게 걸어가며 던지는 뒷손 쉬프팅(스텝이 아닌 걸음을 옮겨가며 펀치를 던지는 기술)을 했다.
두호를 중앙에서 밀어내겠다는 의도였다.
두호는 어느새 케이지까지 몰린다.
탁!
등이 닿는다.
도경욱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머리를 숙이며 깊게 던지는 뒷손 스트레이트가 경이로운 속도로 날아갔다.
두호는 한쪽 손을 머리 앞으로 내밀며 짧은 더킹.
그리고 오히려 도경욱의 품을 파고들며 클린치를 시도했다.
케이지에 붙은 채 잠시 두 사람은 잡고 뿌리치는 동작을 반복하며 치열하게 엉켰다.
큰 기술이나 격렬한 타격은 없었지만 한치도 물러서지 않는 몸 싸움에 관중들은 숨을 죽인다.
1라운드와는 달리 두호가 조금 밀리는 형국이다.
필린쪽 관계자들 표정이 경기 내용으로 인하여 약간 어두워진다.
지금 상태는 무척 두호에게 좋지 않다.
충분히 빠져나올 수 있었을 듯 한데 핀치에 몰린 것이다.
“각도가 있었는데.”
채수가 중얼거렸는데 빠져나올 구멍이 있었다는 뜻이다.
잡히면 위험하고, 떨어지면 무조건 두호가 이긴다는 것이 오늘 경기에 대한 필린의 예측이었다.
슥!
홱!
갑자기 필린 직원들 고개가 한곳으로 돌아갔다.
케이지 바로 아래 목에 수건을 두르고 서 있는 준모를 바라본 것이다.
준모는 두호의 복심이다.
그의 얼굴을 보면 두호의 심리상태를 포함한 모든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준모씨가 전혀 불안해하지 않는데.”
“그렇네. 마음에 안 든다면 소릴 지르고 난동을 피울텐데 묵묵하게 보고만 있잖아.”
준모의 눈은 매섭게 빛난다.
갑자기 준모가 버럭 소릴 질렀다.
“형님 뜸 다 들었어요. 그만 꺼내 드셔야죠.”
준모가 생각하기엔 지금이 두호가 준비했다는 전략을 사용할 시점이었다.
준모의 목소리에 필린의 직원들 시선이 두호로 옮겨졌다.
두호 역시 준모의 말이 들린 듯 얼굴에 미소가 띄워진다.
‘이제 시작해야지.’
“형님!”
준모가 거듭 독촉하듯 외쳤다.
두호는 호흡을 잘게 가져갔는데 체력 보호에 좋은 호흡법이다.
단순히 이기는 것만으로는 안된다.
경기 내용까지 흥미로워야 한다.
필린이 만들어준 무대.
연출은 자신의 몫이다.
팟!
두호의 눈이 반짝였다.
도경욱은 클린치 상황 중 한 팔을 빼냈다.
빼낸 팔로 거침없이 두호에게 날리는 엘보우.
그 순간 자신의 하체를 향해 한 번 더 숙여지는 두호의 고개였다.
도끼에 찍히듯 맞아야 하는데 피해버리자 경욱은 1라운드의 상황이 떠올랐다.
‘이 자식이. 진짜.’
욱하며 치밀어 모른다.
1라운드의 상황에서 굴욕적인 상황을 보여줬지만 그래도 자신은 주짓수 브라운벨트(주짓수 승급 체계. 화이트,블루,퍼플,브라운,블랙 밸트 순이다)다.
그건 자신의 그래플링 정도는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오냐, 그래 한번 해봐라.’
도경욱의 팔이 모두 밑으로 내려가며 스프롤(하체로 향하는 태클 기술을 팔을 뻗어 방어하는 것)자세로 바뀌었다.
유려하게 내려가는 디펜스.
내려가는 두호의 겨드랑이의 팔을 끼워 넣어 일으켜 세우겠다는 의도였다.
경욱이 씨익 미소지었다.
‘한 번 당한 기술에 또 당할 것 같냐.’
확실히 다년간의 프로 생활로 경욱의 경험치는 대단했다.
두호가 준비해온 전략은 이제 의미가 없어졌다.
두호의 눈이 빛난다.
곧바로 유연하게 계획을 수정한다.
마치 물처럼.
어떤 그릇에 담기든 새로운 모양을 만들어내는 물처럼.
“어엇!”
도경욱이 놀란다.
자신의 어깨의 팔을 걸어 눕힐 줄 알았는데 두호 손이 순식간에 밀고 올라온다.
-빠악!
턱에 꽂히는 묵직한 어퍼컷.
도경욱의 고개가 뒤로 젖혀질 만큼 어마어마한 펀치력이었다.
시선이 흔들린다.
충격에 어지러움이 나타난 것인데 도경욱은 황급히 목의 힘을 주어 흐트러지는 정신을 다잡았다.
두호는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경쾌하게 원투를 꽂아 넣었다.
-팡팡
연거푸 큰 공격을 허용한 도경욱의 몸이 급속히 흔들린다.
휘청!
뒤로 쓰러지는 듯 싶었지만 발버둥에 가까운 스텝으로 겨우 살아남았다.
잠시 시간을 벌어야겠다 싶어 롱가드(팔 한쪽을 모두 뻗어 얼굴을 감듯이 막는 가드)와 함께 두호를 밀어내며 겨우 빠져나왔다.
하마터면 스탠딩 상태에서 KO를 당할 아찔한 상황이었다.
시야가 아까와 달리 굉장히 좁아짐을 느꼈다.
뇌에 충격이 가해지면 평소의 시야보다 흐려지고 좁아진다.
탈출엔 성공했지만 아직 충격이 회복되지 않은 듯 도경욱의 숨은 거칠었다.
‘이런 개 같은.’
2라운드는 작정하고 두호를 분석하며 싸웠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것인지 1라운드때 보다 더 강해졌다.
마치 이 순간에도 성장하는 괴물처럼.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진다.
케이지 아래서 그런 도경욱을 바라보는 탁현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압도란 이런 것이다.
두호는 지금 프로인 도경욱에게 기술적인 교환에서도 전혀 밀리지 않고 있었다.
특히 아마추어가 갖고 있는 약점인 체력 안배 또한 매우 영리하게 조절하고 있다.
거기에 도경욱의 심리적인 측면까지 정확히 분석해서 들어갔다.
감정상태에 따라 공격 수법이 달라진다는 놀라운 부분까지 읽어 낸 것이다.
그리고 결정타는 마지막 준모의 콜 사인이었다.
‘상대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드는 셋업. 그리고 정확한 콜 사인에 실행하는 전략. 그 전략을 유려하게 전환할 수 있는 신체 능력.’
탁현은 고개를 저으며 헛웃음을 지었다.
‘제일 싫어하는 말이지만 저런걸 보고 천재라고 하는 거겠지.’
자신도 운동을 했기에 천재라는 부류들을 제일 싫어했다.
천재는 절대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신하지만 전설로 남은 선수들의 면면을 보면 천재라는 말과 정말 잘 어울리는 사람들이었다.
두호도 자신이 보기엔 가장 완벽한 신체적 능력과 임기응변이 좋은 두뇌를 지녔다.
도경욱의 시야가 점차 돌아왔다.
전혀 달라진 것이 없는 두호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간과했다.
프로 역시 아마추어에서 시작했고 그 시작이 남다른 사람들이 있다는 걸 말이다.
지금 자신을 언제든지 잡아먹겠다고 바라보고 있는 저 사내 역시 남다르다.
꾸욱!
어금니를 문다.
그렇다고 여기서 무너지면 안된다.
앞으로 지금보다 더 절박한 상황에 노출될 때가 허다할 것이다.
그때마다 주저앉는다면 결코 케이지를 사냥터로 삼아 살아갈 수 없다.
두호가 다가온다.
두 눈에 푸른빛을 담고 낮게 상체를 내리며 온다.
슈욱!
예비 동작 없이 날아오는 두호의 주먹.
도경욱은 두호가 지금의 한방으로 경기를 끝내려 한다는 걸 직감했다.
스윙이 크면 정확성이 떨어진다.
타자가 홈런을 치겠다고 맘먹고 휘둘러 맞추는 일은 거의 없다.
지금 두호의 주먹도 홈런타자의 심리다.
강하지만 자신이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상황은 충분히 달라질 수 있다는 걸 도경욱은 간파한 것이다.
척!
도경욱은 온 힘을 끌어모아 단단하게 자신의 밸런스를 잡았다.
뒷발에서 허리.
허리에서 어깨.
어깨를 넘어 손으로 무게가 전달되는 완벽한 펀치.
슈우욱!
자신의 커리어에서 손꼽을 만한 타격 자세와 완벽한 타이밍이다.
스스로 뻗어 놓고서도 만족스러웠다.
“엇!”
두호가 빙글 돌았다.
뻗어오던 주먹이 사라지고 새하얀 시선이 도경욱의 얼굴을 훑으며 지나간다.
두호가 몸을 돌리며 앞손이었던 왼손이 풍차처럼 돌아간다.
도경욱의 주먹을 벗겨내며 날아든 스피닝 백 피스트(몸을 360도 회전하여, 그 힘을 최대한 활용해서 손등이나 팔꿈치로 가격하는 기술)가 정확히 관자놀이에 찍혔다.
-쾅
멈췄다.
관중들의 함성도 들려오지 않고 옆에 있는 심판도 보이지 않는다.
천장이 하얀 백색으로 변하면서 짙은 안개 속으로 빠져드는 느낌이다.
-털썩
뒷머리가 강하게 케이지 바닥을 찍으면서 순간적으로 시야가 만들어졌다.
두호가 보인다.
‘왜 공격을 안 하지? 난 아직...’
그때, 심판이 다가와 도경욱을 몸으로 덮었다.
몸 상태를 체크할 생각도 없이 급하게 손을 저었다.
경기가 끝났다.
장내가 조용해졌다.
예상치 못한 사태에 두호의 팬도 도경욱을 응원하는 사람들도 숨을 삼킨다.
사람들은 눈을 깜빡거렸고, 마른 침을 삼켰으며, 주위를 둘러보며 내가 보고 있는 것이 지금 현실인지 확인한다.
경기장은 찬물을 뿌린 듯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도경욱이 KO 당했다!
누군가 전쟁터의 포성 같이 외쳐 말했다.
-이게 말이 되는거냐!
와아아아!
짝짝짝!
박수가 터졌고 사람들이 흥분한다.
괜한 메인 경기가 아니다.
하루 종일 기다린 보람이 있다.
이런 경기라면 며칠을 기다려도 피곤하지 않고 짜증내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백두호! 백두호!
-괴물이야! 진짜 괴물이 나왔다고!
심사위원석도 요란했다.
채수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는 듯 박수를 치며 고개를 휘저었다.
탁현은 옅은 미소를 띄며 박수를 쳤고, 김태훈은 이 경이로운 경기에 넋을 잃었다.
정혁은 아까부터 아무런 말이 없다.
‘이것이 MMA다.’
누군가 자신에게 종합격투기에 정수가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자신은 망설임 없이 이 경기를 소개할 것이다.
신체적 능력과 치열한 두뇌싸움.
그리고 열광하는 관객들의 반응.
MMA의 정수였다.
채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케이지 안으로 달려가는 의료진들을 바라보았다.
간단한 체크가 끝나고 경욱은 들것에 실려 케이지를 빠져 나간다.
그때 미주가 마이크를 들고 다가오는데 그녀 역시 흥분한 듯 얼굴이 상기 되어 있었다.
“정말 믿을 수 없는 경기가 이곳 웨스턴 코리아 PRIDE-K에서 벌어졌습니다!”
미주의 멘트는 관중들을 더욱 자극했다.
“이런 경기는 처음입니다. 평생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 전쟁이었습니다. 여러분 백두호 선수에게 다시 한 번 박수를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또다시 장내가 흔들린다.
일부 관중은 흥분을 주체 못하고 자신의 티셔츠를 던지기까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