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2화 : 물이 되게 친구여.
미주는 관중석의 분위기를 둘러본다.
살짝 웃는다.
수많은 스포츠 경기를 지켜봤지만 이런 반응을 보이는 대회는 그녀 역시 처음 겪는다.
미주는 케이지 안으로 들어갔다.
멀리서 PD가 시작하라는 사인을 보냈고 미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이크를 집어들었다.
“믿을 수 없는 일들이 연거푸 일어나고 있는 이곳은 PRIDE-K입니다. 어느덧 마지막 한 경기를 남겨두고 있습니다.”
미주는 한 손을 내밀며 목소리에 더욱 힘을 주었다.
“예선전 가장 뜨거운 매치를 보여주었던 두 사람이 다시 맞붙게 되었습니다. 백두호대 도경욱, 도경욱대 백두호! 양 선수 소개가 있겠습니다.”
정장을 한 장내 아나운서가 거친 목소리로 호명했다.
“홍코너. 183cm 몸무게 78kg! 백두호!”
두호는 관중들이 자신의 이름을 연호하며 박수를 쳤지만 무덤덤한 얼굴로 서 있었다.
“전 아시안게임 복싱 준우승이자. 이번 PRIDE-K 다크호스. 예선전에서 도경욱을 압도한 사나이!”
소개 멘트 역시 노골적이었다.
관중을 더욱 달아오르게 만들면서 스토리텔링을 부여하는 것이다.
필린의 예상이 적중한 듯 관중석이 쑥덕거렸다.
“팬 놈 또 패는 게 진짜 재미 아니겠냐 두호야!”
“도경욱 저거 한 번 크게 당할 줄 알았다니까. 하하!”
다시 한 번 장내의 아나운서가 크게 소리쳤다.
“청코너. 184cm 79kg. 현재 군룬에서 활동하는 웰터급 잠정 챔피언입니다. 도경욱!”
도경욱 역시 두호처럼 그 어떠한 행동 없이 묵묵히 걸어나왔다.
장내 아나운서의 입에서 다시 도경욱을 자극하는듯한 멘트가 나왔다.
“오늘 경기가 도경욱 선수의 커리어에 오점이 될지. 아니면 성장이 되는 방점일지!”
하지만 도경욱은 아랑곳하지 않고 두호에게만 시선이 고정되어있었다.
“라인업!”
양측 코너에 서 있던 두 선수가 링 중앙에 모였다.
심판은 두 사람을 보며 간단한 룰 설명을 하였다.
두 사람은 서로를 묵묵히 바라보는데 침묵을 먼저 깬 것은 도경욱이었다.
“오랜만입니다.”
“네.”
도경욱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경기 잘 해봅시다.”
“잘 부탁드립니다.”
심판은 각자의 코너로 돌아갈 것을 지시했다.
두 사람은 마지막 자신을 정비하며 심판의 콜을 기다렸다.
심판이 프론트와 눈을 마주쳤고 프론트에 앉아있는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하라는 신호다.
심판은 케이지의 양 끝에 붙어있는 선수를 가르키며 확인했다.
“오케이?”
도경욱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두호를 바라보며 물었다.
“오케이?”
두호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심판이 경쾌하게 손을 아래로 내지르며 선언했다,
“파이트!”
땡!
경기의 시작을 알리는 종 소리가 들렸다.
양 선수는 천천히 중앙으로 걸어오며 서로 앞 손을 내밀었다.
터치 글러브.
존중으로 시작하는 두 사람의 경기.
그러나 차분하게 경기가 진행될 것이라는 모두의 예상은 깨졌다.
터치 글러브 직후 곧바로 날아가는 두 사람의 뒷손.
-쾅
-쾅
양 쪽 다 큰 한 방을 주고 받았다.
한 발자국씩 뒤로 물러난 두 사람.
탐색전은 사치인냥 곧바로 밀려난 만큼 다시 다가간다.
빡!
빠아악!
전략 전술 따위가 낄 틈이 없는 무자비한 난타전이 시작 되었다.
복싱 글러브로 싸웠던 예선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더욱 빨라졌고 더욱 날카로워졌다.
조금이라도 빈틈이 보이는 방어는 속절없이 쪼개지고 부서진다.
-쾅
-쾅
두꺼운 복싱 글러브가 아닌 오픈핑거 글러브라 터지는 소리가 아닌 도끼로 나무를 찍는 소리가 들려온다.
두 사람 다 기세 싸움에서 한치도 물러나기 싫다는 듯 서로의 앞발은 맞붙어있었다.
관객들 반응은 광기에 휩싸였다.
“이야! 그래 이게 진짜 남자의 싸움이지!”
“스위트룸 안 아깝다 임마!”
관중석에서는 흥분한 듯 수건과 페트병이 붕붕 거린다.
둘의 싸움 모습을 지켜본 탁현은 인상을 찡그렸다.
“뭐지...?”
채호가 탁현에게 물었다.
“왜?”
“준비한 전략이랑은 전혀 다른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화력전.
격투기에선 은어로 빠따 싸움이라고 한다.
그러나 두호나 도경욱 둘 모두 이런 거친 싸움을 선호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전혀 다른 두 사람을 보는 듯한 느낌.
도경욱이 두호에게 이런 화력전을 시도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자신이 가진 무기 중 그 어떤 것도 두호를 압도하지 못했었다.
프로로써 아마추어를 못 이긴 것은 둘째치고 경기 내용까지 완전히 밀린 것이다.
그날 이후로 자신이 백두호라는 이름 앞에 상당히 위축되어 있다는 걸 느꼈다.
‘오늘 내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
복싱은 복싱대로, 그래플링은 그래플링대로 치면 같이 치고 붙잡으면 같이 붙잡는다.
무엇을 하든 밀리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슈슉!
경쾌하게 날아가는 도경욱의 잽.
왼쪽으로 더킹하면서 바디를 찔러넣는 두호.
그 더킹을 예상이라도 한 듯 도경욱은 뒷발을 왼쪽으로 옮기며 스트레이트를 뻗어낸다.
두호 역시 오른발을 왼쪽으로 돌리며 커트.
종합격투기가 아니라 타격 시합을 보는 듯 두 사람의 기술들이 쏟아져나왔다.
“와아아아!”
“한국에서 이런 시합을 보다니, 감동이다 진짜!”
사람들의 환호 소리가 점점 커진다.
두 사람의 난타전을 보며 심사위원들의 표정은 모두 제각각이었다.
누군가는 웃고 어떤 이는 굳어진다.
웃는 사람은 두 선수의 실력에 감탄했고 물러나지 않는 저돌성에 사로 잡힌다.
굳어진 이들의 속 마음은 충격과 두려움이다.
그중 정혁과 김태훈이 가장 숨을 삼킨다.
프로인 까닭에 도경욱은 알고 있지만 두호의 경기를 보는 것은 처음인 정혁.
체급이 올라갈수록 기술의 완숙도는 떨어지기 마련이다.
두호의 체급은 준 80.
그런 체급에서 저 정도의 기술을 뿜어내는 사람은 단언컨대 한국에선 없을 것이다.
앞으로 저 사람이 만약 KFA에 남는다면.
자신과도 싸워야 할 수도 있다.
‘식은땀 나네.’
채수와 탁현은 희미한 웃음을 보이며 이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채호는 채수에게 슬며시 물어봤다.
“누가 유리한 거야?”
채수는 날카로운 눈으로 케이지를 바라보았다.
“5대5.”
정확히 박빙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채수의 다음 말이 이상했다.
“하지만, 실제론 8 대 2”
채호는 깜짝 놀라며 채수를 잠시 쳐다보았다.
누가 8이냐는 의미였다.
“두호씨 움직임 봐봐.”
하필 그때 도경욱은 깔끔하게 원투를 두호의 얼굴에 욱여넣고 있었다.
그런데 안면을 내줬으면서도 두호는 옹골차게 바디킥으로 찍는다.
퍼퍼퍼!
슈욱!
모든 공방의 끝은 두호의 타격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채수는 바닥을 이동하는지 미끄러지는지 알 수 없는 두호의 두 다리를 가리킨다.
“저거야. 두호씨의 장점이.”
채호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채수를 재촉했다.
“말해봐 빨리.”
“잘 봐. 두호씨 양 발은 끝없이 거리조절을 위해 움직이는데. 경욱이 앞 발 박혔잖아.”
채수는 눈을 좁혀 경기를 바라보았다.
“아마도 도경욱의 목표는 KO로 이기는 것이겠지. 타격으로 압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거니까. 근데 두호씨는 안면을 공격하는 척 하면서 결국 제대로 들어가는 정타는 바디와 로우킥이야. 저러면 도경욱의 발이 죽거든.”
발이 죽는다.
복부의 데미지가 쌓이면 스텝과 체력에 문제가 생긴다.
피곤과 근육 혹사로 인하여 복부는 계속해서 움츠려든다.
그리고 움츠러든 복부로 인하여 호흡이 불안정하기 때문에 체력이 빨리 소모된다.
결국 정타 한 방 크게 노리려는 도경욱은 두호에 빈 틈이 보일때마다 펀치를 날려야 한다.
그렇게 되면 체력과 집중력은 조금씩 떨어져간다.
하지만 두호는 다음 라운드까지 염두에 둔 것이다.
채수는 히죽 웃었다.
“잘 봐. 두호씨 앞 발은 끝없이 거리조절을 위해 움직이는데. 도경욱의 앞발은 벌써부터 막히고 있잖아.”
채호는 눈을 부릅뜨고 둘의 발을 본다.
채수의 말 대로였다.
얼핏보면 두 선수 모두 정타를 주고받은 횟수는 비슷비슷하다.
그러나 결과에서 차이가 났다.
아직도 활발히 움직이는 두호의 풋워크.
그러나 도경욱의 발은 어느새 움직임이 멈췄다.
다리의 쌓인 데미지를 신경쓰고 복부의 쌓인 데미지까지 관리하려니 체력이 평소보다 두 배로 든다.
결국은 어느 순간부터 두호의 정타수가 도경욱의 타수를 압도하기 시작한다.
그때 1라운드가 끝나려면 20여 초 정도 남았을 때였다.
표정 없던 두호의 입가에 미소 하나가 나타났다.
꿈틀!
갑작스런 미소에 도경욱은 어금니를 물었다.
‘뭐지. 어디서부터 말린거지.’
어떻게 하다보니 여기까지 와버렸다.
그렇다고 이 시점에서 전략을 급하게 트는 것도 무리다.
이왕 찔렀으니 어쩔 수 없이 계속 찔러야 한다.
퍼퍼!
쾅!
마지막 불꽃을 태우는 도경욱의 공격이 다시 시작되었다.
전에 펀치들도 상당히 힘을 쓴 듯 소리가 거칠었지만 지금과는 아예 비교가 불가능했다.
그렇게 가득 힘을 담은 뒷손을 던지는 그때.
두호의 상체가 숙여진다.
순간 도경욱은 당황했다.
‘뭐야.’
나오는 펀치를 피하며 잡아낸 앞 다리.
그리고 몸을 바짝 붙이고 도경욱의 중심을 틀었다.
탁현과의 싸움 때처럼 순식간에 한쪽 팔을 경욱의 어깨에 걸었다.
-콰당!
등을 붙이며 크게 테이크 다운을 허용한 도경욱.
두호는 상위포지션을 점유한 체 곧바로 파운딩을 치기 위하여 팔을 높게 들었다.
그 순간 울리는 1라운드 종료 벨 소리.
저번과 똑같다.
예선전에서 보였던 모습 그대로였다.
도경욱의 이마에 핏줄이 솟아난다.
“이 새끼가...”
그러나 두호는 웃는다.
재빨리 심판이 두 사람에게 달려들어 떼어놓았다.
각자의 코너로 돌아가는 두 선수의 얼굴이 극명하게 엇갈린다.
두호는 웃고 도경욱의 표정은 분노로 잔뜩 구겨졌다.
방금 전 두호가 보여준 퍼포먼스는 다분히 고의적이다.
자극하고 건드려 경욱을 흔들려는 도발이다.
코너에 도착해 의자에 앉으니 도경욱의 세컨들이 모두 달려들었다.
“야. 임마. 왜 이렇게 흥분하는 거야.”
세컨들 역시 의아한 표정이었다.
도경욱이 데뷔 이후 이렇게 흥분한 경기는 처음본다.
세컨은 자신의 손등에 발라 놓은 바셀린을 다시 도경욱의 눈에 펴 바른다.
“우리 원래 하던대로 하자. 스탠딩에서 땅으로 끌고 들어가면 너가 무조건 이길 수 있어. 왜 서서 지랄을 해.”
주특기인 그래플링을 활용하자는 의견들이다.
“아 씨발!”
도경욱은 이를 갈았다.
이제와서 갑자기 그래플링 전략을 꺼내면 자신은 정말 타격에서 진 것임을 인정하는 꼴이 된다.
많이 이긴 자는 프로가 된다.
그 프로는 자신의 커리어에 자존감을 느낀다.
그리고 그 자존감은 고된 훈련을 견디게 하는 원동력이다.
눈에 새파란 광기를 담는 도경욱은 세컨들의 말을 들을 마음이 없는 듯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