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1화 : 물이 되게 친구여.
물리적인 반동, 즉 큰 힘을 사용한 뒤 생기는 관성은 정말 찰나의 순간이다.
일준은 슬램으로 인하여 최종욱의 목이 잠깐 떨어진 것을 낚아챈 믿을 수 없는 반사신경을 보여주었다.
그야말로 번갯불에 콩 볶을 능력이었다.
길로틴 초크에 당하면 호흡과 혈류 이동에 지장이 생긴다.
최종욱의 얼굴은 점점 붉어졌다.
“우우!”
괴성을 토해낸다.
난 프로다.
이따위 아마추어에게 압도 당한다는 건 말도 안된다.
길로틴 그립이 깊게 잡힌다면 10초를 버티는 것도 경이로운 수준이다.
일반인이라면 수 초를 못 버티고 탭을 치거나 기절했을 상황.
하지만 최종욱은 20초가 넘게 안간힘을 쓰며 어떻게든 목을 빼내려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자신의 길로틴을 버텨내는 그를 보며 일준이 씨익 미소짓는다.
최종욱이 몸을 살짝 들자 일준이 꿈틀거렸다.
그의 상체를 감싸던 다리가 일순 풀렸다.
왼발로 최종욱을 밀고 오른발은 그의 어깨로 향한다.
그림 같은 연계로 이어진 오모플라타(기무라와 비슷한 원리로 상대의 팔을 자신의 가랑이로 집어넣고 견갑골을 압박하여 꺾는 기술.).
한쪽 팔이 완전히 봉쇄당했다.
이 자세는 고개가 땅에 박히기 때문에 힘을 쓸 수가 없다.
어깨가 통째로 뜯겨나가는 통증 최종욱은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다.
타타탁!
결국 그는 땅을 치며 탭을 선언했다.
심판이 벼락같이 달려들어 두 사람을 떼어놓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일준은 양주먹을 쥐고 관중들을 향해 악다구니를 질렀다.
“크아아아!”
그 모습에 관중들은 더욱 열광 했다.
“또 프로를 이기네! 일준아 너가 다 해먹어라!”
“정일준! 정일준!”
일준은 그런 환호에 보답하듯 멋진 덤블링을 선보였다.
두호의 눈이 가라앉는다.
모니터를 이용해 일준의 경기를 지켜본 것이다.
일준은 자신의 예상을 웃도는 실력을 보여주었다.
복싱으로 다져진 단단한 타격기와 그라운드에서 빛을 발하는 사고의 유연함.
그리고 타격에 이은 전광석화와 같이 기술을 연계하는 능력은 분명 돋보인다.
지금 대진표를 봐서는 알 수 없으나 서로가 계속 이긴다면 반드시 어느 한순간 만난다.
그때를 대비해 좀 더 진지한 연구와 분석이 필요할 것 같았다.
딸칵!
그때 밖으로 나간 준모가 돌아왔는데 손에 포카칩 두 봉지를 끌어 안고 있다.
“형님 그 새끼 경기 봤어요. 정일준.”
철퍼덕!
방바닥에 주저 앉더니 포카칩을 뜯어 과자를 입속으로 밀어 넣기 시작했다.
“호텔 편의점에서 봤는데 저 놈 장난 아니던데요.”
프로를 압도하는 일준의 경기에 준모는 매우 놀라는 얼굴이었다.
더욱이 두호와 일준 사이에 있었던 일을 알기에 긴장한다.
준모는 일준을 박살 낸 묘책이라면서 부지런히 떠들었고 두호는 조용히 눈을 감고 듣기만 했다.
“딱 턱 돌리고 옆으로 샥 빠져서...느낌 아시죠? 형님.”
준모의 말을 듣는 건지 아니면 다른 생각에 잠긴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4번째로 프로를 이겨낸 사람이 등장했다.
* * *
당일 오전.
호텔 프론트는 갑자기 밀어닥친 투숙객들로 인해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싱글룸과 더블룸은 예약이 끝났습니다. 패밀리 룸이 조금 남았고 나머지는 스위트 룸입니다.”
“에이! 몰라 패밀리룸 주세요!”
혼자와서 일인용 침대 두 개가 있는 2인실 트윈룸을 예약한다.
허나 진풍경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이미 어플과 인터넷으로 예약할 수 있는 방은 진작에 마감되었다.
순식간에 트윈룸에 이어 패밀리 룸까지 동났다.
그런데 방이 동났다는 말에 스위트룸까지 거침없이 예약하는 사람들이 폭주했다.
호텔마다 차이는 있지만 하룻밤 숙박료가 비수기에도 최소 백만원을 넘어간다.
“도대체 PRIDE-K가 뭐길래.”
필린이 임대하였지만 이채호는 호텔과 협의 후 투숙객을 허용했다.
정규방송이 시작되기 전 PRIDE-K의 직접적인 열기를 맛보기로 보여주겠단 의도였다.
표를 판매하지는 않는다.
대신 호텔 숙박 손님은 공짜로 경기를 관전할 수 있다.
아무리 격투기를 즐긴다고 세계적인 선수들의 경기도 아닌 단순한 오디션 형태의 대회에 이토록 열광하는 걸까.
호텔측은 정식 오픈 전 깜짝 호황에 들떠있었다.
* * *
저녁은 준모가 준비해온 전복죽으로 해결했다.
상당수 선수들이 경기전 제대로 음식을 섭취하지만 두호는 가볍게 허기만 채웠다.
“형님 그만 가시죠.”
준모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모자도 쓰고.”
입고 있는 검정색 땀복 모자를 씌운다.
두호는 그저 눈만 끔뻑거리고 있었다.
“눈이 보이지 않게 좀 푹 눌러 써야 상대가 쫄거든요.”
깊숙이 모자를 눌러 씌운 준모가 앞장을 섰다.
엘리베이터를 눌렀다.
문이 열리고 들어선 안으로 들어간 두 사람은 대기실이 있는 지하1층을 눌렀다.
그런데 엘리베이터가 4층에서 멈추며 두 명의 손님이 오르려 하자 준모가 막았다.
“죄송합니다. 다음 차례를 이용해 주시죠.”
두 사람을 타지 못하게 막고 닫힘을 눌러 버린다.
왜 그러냐는 듯 두호가 바라보자 준모는 야무진 표정으로 말했다.
“세상일 모릅니다. 형님을 노린 테러범일수도 있고.”
두호의 의외라는 듯 놀란 표정이었다.
준모는 누구도 태워주지 않겠다는 듯 문 앞에 떡 하니 버티고 섰다.
진심이다.
준모는 지금 최선을 다해 자신을 보호하고 있다.
그 모습을 본 두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쨍!
엘리베이터가 지하1층에 멈추고 문이 열렸다.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를 나와 대기실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출전 한 시간 전에 반드시 대기실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 이번 대회 규정이다.
대기실에는 두 명의 필린 직원이 있었다.
그들은 의료진들로 출전 선수의 몸 상태를 마지막으로 듣고 살피기 위해 있다.
간단히 혈압을 재고 경기에 지장을 줄 만한 이상 징후는 혹시 없는지 질문 몇 가지를 던졌다.
두호는 대기실 한쪽 벽에 걸린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상체를 흔들며 거울속에 비치는 자신을 돌아보고 있었다.
“안됩니다!”
답답한 듯 두호가 후드를 벗으려 하자 준모가 막았다.
“경기전까지는 눌러써야 합니다. 이것의 효과를 무시하시면 안됩니다.”
두호는 한숨을 내쉬며 준모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대기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왼손에 클립보드를 든 필린 직원이 두호를 호명했다.
“백두호 선수.”
“예!”
직원은 한쪽에 책상을 놓고 앉아 있는 의료진을 돌아보았다.
이상 없냐는 질문이다.
“정상입니다.”
“가시죠. 케이지 입장하겠습니다.”
두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준모 역시 흰 수건을 목에 두르며 힘차게 대답했다.
오늘 두호의 세컨은 준모다.
“가시죠! 형님!”
두호는 한쪽 어깨를 반대로 끌어당기며 천천히 어깨를 풀었다.
문이 닫히고 두호의 모습이 대기실에서 사라졌다.
“다르지?”
의료진 두 명이 고개를 갸웃했다.
“와. 저분 누구에요?”
“백두호씨. 저분 포스가 장난 아닌데.”
두 사람은 매우 놀란 표정으로 두호가 빠져나간 문을 바라보았다.
경기장의 문이 열리고 두호와 준모가 들어섰다.
그러자 강렬한 조명이 두 사람을 찍어 누르듯 쏟아진다.
마침내 전쟁의 신이 케이지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관중들이 백두호를 외친다.
그들은 예고편에서 공개된 두호의 실력을 보았다.
잠정 챔피언이라 취급받는 도경욱을 꺾은 사나이.
와아아아!
엄청난 함성을 들으며 두호는 케이지 앞에서 멈췄다.
앞에는 이번 경기를 진행하는 심판이 서 있는데 두호의 글러브를 검사하더니 눈가에 무언가를 발라주기 시작했다.
바셀린.
MMA 글러브로는 눈 주위가 찢어지는 부상이 많다.
그 부상을 예방하고자 눈 주위에 조금 펴서 바른다.
하지만 라운드가 끝나고 나면 땀으로 인해 지워지기에 라운드 쉬는 시간마다 발라주어야 한다.
바셀린을 다 바른 두호는 곧 케이지의 계단을 터벅터벅 올라갔다.
계단을 모두 오르고 난 뒤 케이지 입구에서 잠시 멈춰선 두호.
두호는 조용히 눈을 감은 채 가슴팍을 두 번 때렸다.
그리고 하늘을 보며 무엇을 중얼거리더니 곧 케이지 안으로 거침없이 입장했다.
의미 모를 행동이지만 그의 동작에 관중들을 더욱 흥분하게 만들었다.
“멋있다. 벌써 저 선수는 자기 루틴이 있나봐.”
“기대한다 백두호!”
그러나 열광하는 관중들과 달리 채호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불현 듯 옛기억이 떠오른다.
‘형님.’
차에서 내린 채호가 자신의 탄알집에 총알을 끼워 넣으며 도혁을 불렀다.
‘그게 뭡니까?’
‘뭐가?’
‘항상 임무 들어갈 때 차에서 내리기 전 하시는거 있잖아요 가슴 때리고 묵상하는거? 왜 하는 겁니까?’
‘기억하려고.’
‘기억이요?’
‘임무 수행 중 잃었던 동료와 지켜야 할 동료, 지나온 시간과 경험. 그리고 내가 해야 할 오늘의 작전까지. 전부 다.’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던 그 행동을 본 순간 채호의 눈시울이 조금 붉어졌다.
저 행동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자신을 제외하고 모두 죽었다.
평생 혼자 추억할 줄만 알았던 그 순간을 다시 확인함에 그는 잠시 멍하니 위를 올려다보았다.
‘언젠가 만나면. 오늘 일을 꼭 얘기해주마.’
도혁은 이 일을 임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임무를 실패한 적이 없다.
슥!
타다닥!
케이지 바닥에는 피가 낭자했다.
얼룩이 굳어져 딱딱해질 정도에 싸움이 계속되니 자국은 지워지지도 않는다.
마지막 경기를 위해 필린 직원들이 케이지 정리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채호가 고개를 돌렸다.
경기가 끝난지 오래인데도 일준은 떠나지 않고 미주와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겸사겸사 두호의 경기까지 보려는 속셈이다.
이곳에서 일준과 두호의 사연을 아는 사람은 채호와 준모밖에 없었다.
채호는 일준에 대해 생각했다.
‘준수한 그래플링 능력과 선출다운 타격 수 싸움, 그리고 착실하게 키운 피지컬까지.’
아마 자신이 두호를 알지 못했다면 자신은 일준을 스카웃 했을 것이다.
일준은 타고난 브롤러(brawler: 싸움꾼. 격투기에서는 마치 길거리의 싸움을 하듯 거친 파이팅을 하는 사람을 그렇게 부른다)였다.
엘리트 선수 출신에게서 볼 수 없던 야수적인 싸움 방식.
일반적인 격투기 선수들과의 폼을 비교한다면 난잡해 보이는 자세이지만 제대로 된 프로라면 단번에 알아본다.
저런 자세는 상대의 흥분을 유도한다.
주먹 또한 정제되지 않고 금방이라도 반칙수를 뿌려댈 것 같은 섬뜩한 느낌을 준다.
그로인해 상대는 자신이 준비해온 전략이 아닌 상대 페이스에 끌려다니고 걸려드는 것이다.
스포츠가 아니라 순수한 동물의 싸움으로 보이는 것만큼 더 분명하게 관객들에게 어필하는 것은 없다.
그야말로 완벽한 상품성을 갖추었다.
“으흠!”
오늘은 그때와 다르다.
아마추어 국가대표 선발전이 아니다.
명예보다는 돈을 위한 싸움판인 프로 시합이다.
이긴 놈은 살고 패한 놈은 떠나야 한다.
“대표님!”
직원 한 명이 다가와 귓가에 대고 속삭이는데 턱으로 뒤를 가리킨다.
고개를 돌린 채호의 눈이 커졌다.
빈 좌석이 없다.
“이 경기를 보기 위해 스위트룸을 예약한 손님도 있다고 합니다.”
채호 입가에 미소가 나타났다.
경기를 끝낸 승자와 패자 모두 떠나지 않고 있다.
그들 역시 마지막 경기가 갖는 의미를 알기 때문인데 2,000개의 좌석이 완전히 들어찼다.
2라운드 메인 게임이다.
그건 필린측에서 두호를 가장 유력한 우승 후보로 점 찍는다는 뜻이다.
상대 또한 국내에 많이 알려진 군룬의 랭커 파이터 도경욱이다.
꿀꺽!
꼬올깍!
지켜보는 관중들이 더 긴장되는 듯 침을 삼킨다.
“여러분 지금 도경욱 선수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장내 아나운서가 도경욱의 출전을 알렸다.
관중들 고개가 일제히 입구로 돌아간다.
붉은 조명을 받으며 도경욱이 나타났다.
크와아아!
역시 관중들 함성은 하늘을 찔렀고 몇몇 광적인 도경욱 팬들은 한 방에 백두호를 죽여 버리라고 소리친다.
“애송이 너무 괴롭히면 안된다! 경욱아!”
“프로의 벽이 높다는 걸 보여줘!”
척!
멈춰선다.
도경욱 또한 차분히 눈을 감은 채 심판이 바셀린을 모두 바르기를 기다렸다.
심판으로부터 입장 사인이 나오자 링 안으로 천천히 입장했다.
꾸와아!
도경욱! 도경우우욱!
케이지에 들어서자 도경욱을 응원하는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