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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신이 케이지 안으로-60화 (60/204)

제 60화 : 물이 되게 친구여,

동하의 보고를 들은 일준은 주위를 슬쩍 살폈다.

자신에게 관심이 쏠리진 않았지만 만사불여튼튼이다.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고 나간 일준은 곧장 복도 끝으로 걸어갔다.

다시 한 번 주위를 살핀 뒤 핸드폰을 귀에 댔다.

“그래. 픽업했다고?”

-어떡할까?

일준은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잠시 눈을 감았다.

예상보다 한국에 빨리 들어온 것은 분명 좋은 일이다.

그러나 계획을 서두를 필요는 없다.

서두르다 보면 착오가 생기고 그건 곧 몰락을 재촉하는 길이다.

잠시 생각하는 듯하던 일준이 팟 하고 눈을 떴다.

“일단은 공장에 박아놔. 생산은?”

잠시 수화기 너머로 동하와 사내들의 대화가 엿들린다.

-말만 해주면 바로 만들 수 있다고 하네. 근데 당장은 없이도 괜찮겠어? 우선 사용할 양은 있다는데.

일준은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풀었다.

“무슨 대단한 상대와 붙는다고, 아직은.”

무슨 대단한 상대라고.

그건 2라운드에서 자신과 겨룰 프로 선수를 의미하는 것이 분명했다.

일준의 표정엔 자신감이 넘쳤다.

외부의 어떤 도움 없이 자신의 실력가지고서도 충분히 꺾을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 것이다.

저벅저벅!

발자국 소리에 고개를 돌렸는데 필린 직원 두 명이 걸어온다.

“혹시 정일준 선수 되시나요!?”

통화중이었기 때문에 그렇다는 듯 손을 들어보였다.

직원은 일준을 보며 정중하게 말했다.

“곧 경기 입장 준비하겠습니다. 선수 대기실로 이동해주셔야 합니다.”

일준은 알겠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돌아선 직원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일준의 얼굴은 서늘하게 변했다.

“내 말 알아 들었지. 일단은 계획대로 갈거야. 특이사항 생기면 보고해.”

-오케이!

드르륵!

일준은 복도 창문을 열었다.

어떻게 이런 곳에 이런 특급 리조트 호텔을 세울 생각을 했을까.

한강과 서해 바다를 동시에 조망하고, 날씨 좋을 때는 북한 땅도 보인다고 했다.

처억!

창틀에 양팔을 얹고 상체를 숙인다.

“경치 좋네.”

일준은 창문을 닫고 돌아섰다.

* * *

필린 직원 노명환은 전화 한 통을 받고 있었다.

“예!”

“예!”

무슨 전화인지 굳은 얼굴로 계속 예예하며 대답만 해댄다.

팟!

통화를 하던 노명환이 눈을 빛냈다.

“대진표를요?”

이어 또다시 묻는 말 없이 한참을 듣고 있더니 알았다면서 핸드폰을 내렸다.

“후우우우!”

노명환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등을 벽에 기대더니 천장을 올려다보는데 표정이 잔뜩 굳어 있었다.

‘내가 돌았지.’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다고 했다.

모든건 순식간이었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거액의 사채를 끌어다 쓰고 난 뒤였다.

인터넷 도박.

호기심 반, 재미 반 곁들여 들어갔다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감당하기 힘든 상황이 되어 버렸다.

빚쟁이가 돈 갚으란다.

지금 당장 갚지 않으면 자식이고 와이프고 다 갖다 팔아버리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빠져나갈 길을 하나 가르쳐 주었다.

‘앞으로 진행 중인 PRIDE-K의 미션의 대진표와 결과를 그리고 세부내용을 알려주면 채무 관계를 백지로 돌려드리죠.’

어려울 일은 아니다.

노명환은 곧장 자신의 사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대진표 사진을 찍어 카톡으로 보내 버리면 끝이다.

“보나마나 도박을 하려는 것이겠지.”

외국에서는 복싱이나 격투기 경기에 엄청난 판돈이 걸린다.

물론 그들은 합법이지만 한국에서 이런 경기에 돈을 거는 건 불법이다.

노명환은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그렇고 그런 뒷골목 놈들끼리 한판 벌여 보려는 것이 틀림없다.

노명환이 지고 있는 빚은 오천만 원이다.

자신이 하던 일 경과만 알려주면 앓던 이가 뽑히는데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 * *

모영배는 종이 신문을 보며 혀를 찰 뿐이었다.

“쯧쯧. 죄다 PRIDE-K 얘기밖에 없구만.”

그 역시 지금 국내 모든 언론과 대중의 관심이 PRIDE-K로 쏟아짐을 인식하고 있었다.

조상무는 그런 모영배를 보며 싱긋 웃었다.

“너무 뜨거우면 삼킬 때 데일 수도 있으니 조금 식혀야죠.”

그 말의 의미를 아는 모영배는 껄껄 웃었다.

자신들의 계획은 PRIDE-K로 돈을 번 다음 폐기 처분하는 것이다.

너무 뜨거우면 삼킬 때 데일 수 있으니 식혀야 한다는 건 한참 흥행에 대박을 터뜨리고 있는 이번 대회에 찬물을 끼얹겠다는 뜻이다.

툭!

모영배는 신문을 반으로 접어 책상에 던져놓았다.

이윽고 조상무를 바라보았다.

“잘 되고 있지? 섭외된 빨대는 누구야?”

“필린 노명환 대리랍니다. 접촉 성공했고 정보도 넘겨 받는 걸로 마무리 지었습니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영배.

그는 자신의 책상 위에 쌓인 돈 다발 하나를 집어든다.

잠시 깊은 눈으로 돈다발을 바라본다.

“돈이 정말 무서운 이유가 뭔지 알아?”

가끔이지만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모영배였다.

조상무는 모르겠다는 듯 아무런 말 없이 모영배를 쳐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돈다발을 쥔 채 바라만 보고 있었다.

“모든 일의 이유가 돼.”

조상무 눈이 가볍게 찌푸려진다.

모영배의 말은 알 듯 모를 듯 했다.

“그 어떤 범죄라 해도 동기로 충분하거든. 질투, 집착, 분노, 원한 이딴거는 아무리 갖다 붙여도 사람들은 이해를 잘 못하지. 근데.”

모영배는 자신이 들고 있던 돈다발을 조상무에게 툭 던져주었다.

손을 뻗어 날아온 돈다발을 잡은 조상무.

잠시 모영배처럼 받은 돈다발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이거를 동기로 붙이는 순간 다 이해를 한다. 이 말이야.”

조상무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이 시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다 돈으로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모영배는 담배 하나를 꺼내 물었다.

“오늘 일 성사시킨 그놈 보너스다. 자네가 갖다 줘.”

“네. 알겠습니다.”

조상무는 돈다발을 품 안에 잘 갈무리해 넣었다.

“그리고 일사천리 말입니다.”

던지듯 놓았던 신문지를 다시 펴든 모영배가 고개를 들었다.

“일사천리? 아, 명동 그 잡스러운 놈들.”

수미에게 붙여놨는데 실패하고 본진까지 완전 박살 나버렸다.

“수미라는 여자가 그냥 넘어갈 리는 없고.”

“물론이야. 어쨌든 이왕 피할 수 없는 전쟁이 되었으니 이겨야지.”

준비 잘하란 말이다.

“곧 우리 쪽으로 밀고 들어올 것이 뻔해 서둘러 지방 쪽 아이들을 불러올렸습니다.”

모영배는 들었던 신문을 다시 놓고 등을 소파에 기댔다.

“조상무.”

“네.”

“지킬게 있는 놈들은 먼저 행동하지 않아.”

조상무 눈이 커졌다.

그렇다.

지금 수미에게는 자신들보다 PRIDE-K가 더욱 중요할 것이다.

PRIDE-K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언제나 선공은 자신들이 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조수미가 어떤 계집이라고 당하고 참을 여자인 줄 알아. 내 피 흘리면 기어이 상대 피도 흐르게 만든다고, 그런데 아직까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네.”

“아...알겠습니다.”

“일사천리 일은 경고지. 뭐 별 감흥은 없지만.”

모영배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언제나 우리가 먼저 공격할 수 있는 좋은 싸움 구도야. 자네는 그저 철저하게 계획대로만 하면 돼.”

모영배는 길게 연기를 뿜었다.

“네. 알겠습니다.”

조상무는 허리를 구부렸다.

* * *

고막이 아플 만큼 관중들이 소릴 질렀다.

강력한 조명을 받으며 일준이 들어서고 있는 것이었다.

“정일준! 정일준!”

“일준아 시원하게 턱 한번 돌려라!”

일준이 과거 국가대표 출신의 복서라는 걸 아는 팬들이 흥분하고 있었다.

일준이 케이지 안으로 들어서자 응원의 함성은 천둥이 되어 체육관을 흔들었다.

“볼 만 하겠는데.”

케이지 아래 카메라를 고정하고 있던 기자들이 쑥덕거린다.

“그때 약물 어쩌고 하면서 말이 좀 있었지?”

“그건 잘 모르겠고, 발 빠른 것 하나는 알아줘야 할 친구였어.”

그때 일준의 상대가 될 프로선수 최종욱이 케이지 안으로 막 들어섰다.

멈칫!

최종욱은 왔다갔다 하면서 일준을 바라보았는데 눈살을 찌푸렸다.

일준이 자신을 보고 피식했다.

아마추어가 프로인 자신을 보고 비웃듯이 웃는다.

아무리 기선을 제압하기 위한 전략이라고 해도 최소한의 예의도 없는 듯 하다.

‘저 새끼 봐라.’

최종욱의 표정이 굳어진다.

세컨들이 모두 나가고 심판이 두 선수를 케이지 중앙으로 불러들여 간단한 주의를 준다.

그런데 일준은 계속 이죽거리듯 웃는다.

“파이트!”

마침내 심판이 경기 시작을 알렸고 최종욱은 벼락처럼 일준을 향해 달려들었다.

일준이 복서답게 뒤로 물러서며 잽을 날렸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최종욱은 그대로 달려들어 일준을 구석으로 몰았다.

몇 대 맞으면서도 무자비하게 달려드는 최종욱은 흥분해 있었다.

퍼억!

순식간에 일준을 케이지로 밀어 붙이는데 성공했다.

경기 시작한지 10초도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최종욱의 저돌적인 공세로 둘은 곧장 달아올랐다.

등을 기댄 채 두 사람의 눈은 불타고 있었다.

일준은 단단히 벽에 등을 기대고 반격의 틈을 엿보고 있었다.

천천히 자세를 잡으며 조여오는 최종욱.

그는 레슬링 상비군 출신의 프로파이터다.

그레코로만형(상,하체 기술이 모두 허용되는 자유형과는 달리 상체 기술만 사용 가능한 레슬링)선수 특유의 상체 힘으로 클린치 상황에선 여지없이 일준을 몰아붙였다.

더군다나 레슬링 선수의 상징인 두꺼운 목으로 인하여 일준의 펀치는 우습게 견뎌낸다.

최종욱은 펀치 몇 대를 맞더라도 케이지 벽에 밀어붙이는 것만 생각했다.

레슬링을 주무기로 사용하는 파이터에게 가장 유리한 장소.

이런 상황이라면 일반적으로 케이지의 벽에 기대어 방어하는 쪽 머리는 복잡해진다.

타격으로 받아쳐야 하는지.

아니면 테이크다운 디펜스를 해야하는지.

그러나 시종일관 일준의 표정은 여유로웠다.

“어이, 덩어리 뭐해.”

최종욱은 케이지 벽에 붙은 일준의 다리를 붙잡고 놔주지 않았다.

일준은 자신을 압박하는 그의 머리를 톡 하니 때리며 웃는다.

“밥 안 먹고 왔어?”

이정도로는 날 넘어뜨릴 수 없다는 빈정거림이다.

최종욱은 일준의 말에 발끈했다.

경기 중 상대 선수에게 말을 걸지 않는 것은 암묵적인 룰이다.

이렇게 도발성이 짙은 말이라면 더더욱.

단지 주심이 모른 체 넘어가는 건 정식으로 프로의 커리어를 걸고하는 게임이 아닌 오디션이기 때문이다.

흥행을 위해 이 정도 문제는 심판 재량으로 넘어간다.

흥분한 최종욱은 팔을 일준의 어깨에 걸쳐 어떻게든 넘어뜨리려 했다.

팔로 어깨를 걸어 바닥으로 넘어뜨리려 하자 일준은 기다렸다는 듯 그 팔을 잡아챘다.

‘우웃.’

그대로 최종욱의 등으로 팔을 넘기며 기무라(두 팔을 이용해 상대편의 한 팔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상대편의 손목을 아래로 꺾는 기술) 그립을 완성 시켰다.

최종욱은 더욱 흥분했다.

감히 레슬링 선출인 자신에게, 그것도 스탠딩 상태에서 그래플링 싸움으로 몰고 간다.

박살을 내주겠다는 듯 그가 기합을 내뱉었다.

“으아!”

기무라 그립을 힘으로 버텨내며 일준에게 몸을 바짝 붙였다.

이윽고 자신의 팔을 빼낸 뒤 일준의 허리를 휘감고 힘으로 뽑아들었다.

-쾅

굉음과 함께 케이지 바닥으로 떨어뜨린 강한 슬램이었다.

일준을 내려다보는 상위 포지션으로 들어온 최종욱.

그러나 일준의 몸이 번개같이 움직여 순식간에 그의 목을 낚아챘다.

교과서 같이 들어간 일준의 길로틴 초크(상대편의 머리를 겨드랑이 사이에 끼운 상태에서 위팔로 상대편의 목을 감아 조르는 공격 기술).

길로틴에 걸린 최종욱은 당황한 눈치였다.

‘이 자세에서 이걸 낚아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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