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9화 : 물이 되게. 친구여.
땡!
누구도 우세를 잡지 못한 채 1라운드 종료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곧바로 케이지 안으로 세컨들이 의자와 의료용품을 들고 뛰어 들어왔다.
세컨이라고 해봤자 프로선수는 자신의 체육관 인물이지만 참가자는 필린 직원들이다.
양측 코너로 흩어져 의자에 앉은 두 사람.
태건은 무덤덤했지만 김치호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자리에 앉은 김치호에게 코치가 수건으로 땀을 닦아주며 잔뜩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 좋아. 지금처럼 차분하게 타격 교환하고 핀치에 몰리면 그라운드로 잠시 시간 버는 것도 좋을 듯해. 서둘지 말고.”
작전 지시를 하던 중 코치는 김치호의 그늘진 표정을 발견하고 물었다.
“뭐야 왜?”
어딘가를 슬쩍 쳐다보는 김치호였다.
그의 시선이 멈춘 곳을 바라보는 코치.
뒤이어 김치호의 벌겋게 부어있는 다리를 발견했다.
코치는 당황한 표정이었다.
‘그 짧은 시간에 데미지가 이렇게 쌓였다고?’
비슷한 듯 했지만 승부는 가려지고 있었다.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긴박한 난전중에서도 태건은 김치호의 정해진 허벅지만을 틈틈이 가격했다.
태건은 콤비네이션의 끝을 항상 로우킥으로 채워 넣으며 김치호를 흔들어 놓았다.
안면과는 다르게 하체는 부상을 입으면 경기력에 즉각 반영이 된다.
당황한 코치는 태건 쪽의 코너를 돌아보았다.
태건은 김치호와 달리 무덤덤한 표정으로 차분히 휴식을 취하고 있는 가운데 코치로 나선 필린 직원이 뭔가 설명한다.
태건은 간간이 고개를 끄덕인다.
불끈!
김치호의 코치가 주먹을 쥐었다.
태건의 전략에 보기 좋게 걸려 버린 것이다.
‘애초에 난전을 받아준게 로우킥을 욱여 넣으려고 한 것이구나.’
모든 격투기의 기본은 하체다.
그 하체가 무너지면 운영의 시작과 끝이 사라지기 마련.
단, 1라운드였지만 상대의 킥 게임은 프로의 하체도 엉망으로 만들어 놓을만큼 위협적이란 뜻이다.
주심이 세컨 아웃을 외쳤다.
그러자 태건측 코치는 빠르게 의자와 의료용품들을 수거해 케이지를 나갔다.
하지만 김치호의 코치는 망설였다.
지금이야말로 코치의 전술이 절대적으로 필요할 때이다.
져서는 안 된다.
앞으로 프로선수로 몸값을 높이고 해외진출까지 꿈꾸고 있는데 여기서 무너지면 끝장이다.
진다면...
그렇다면 핑계를 대고 여기서 경기를 포기하는 것이 더 낫다.
일단 한 라운드만 더 지켜보기로 하고 재빨리 밖으로 짐을 들고 나갔다.
“파이트!”
1라운드의 긴장이 풀리며 다리에 누적된 고통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최대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애쓰는 김치호였다.
태건은 그의 자세를 천천히 살펴보았다.
앞 다리보다 뒷다리로 많이 넘어가 있는 무게 중심.
그의 하체가 무너졌음을 파악했다.
돌부처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태건이 아주 살짝 웃는다.
슉!
작전에 큰 변화는 없다.
1라운드처럼 사냥을 하듯 천천히 김치호를 궁지로 몰아가는 공격 패턴이었다.
퍼퍼!
계속해서 안면을 공략하듯 큰 펀치로 유인해낸 다음 여지없이 차버리는 로우킥.
마침내 김치호가 뒷걸음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조금씩 밀리던 김치호의 등에 케이지가 닿았다.
어느덧 코너까지 밀린 상황.
그러나 태건은 거리를 둔 채 킥을 낼 뿐이었다.
서둘지도 않는다.
조금씩 관중들이 흥분하기 시작했다.
“태건, 태건!”
약자에게 마음이 가는 건 인지상정이다.
팬들 역시 아마추어가 프로를 몰아붙이자 흥에 겨워 난리다.
‘이런 젠장!’
코치는 책상을 내려쳤다.
기권을 했으면 차라리 욕을 먹을지언정 훗날을 도모할 수가 있었다.
‘젠장. 그냥 기권을 던졌어야 했는데!’
태건은 마무리할 때가 되었음을 인식한 듯 로우킥을 차기 위해 다리를 들었다.
그런데 계속되는 데미지 누적에 김치호는 프로로서 하지 말아야 할 동작을 보였다.
다리를 들어 태건의 킥 방어를 하는 것이 아닌 팔을 내려 막아버린 것이다.
태건의 눈이 빛났다.
슈-우웃!
하체로 내려칠 것 같은 그의 발의 궤적이 기묘하게 바뀐다.
무릎의 각도가 벌어지면서 궤적이 하이킥으로 바뀐 것이다.
브라질리언 킥.
뻑!
관자놀이에 엄청난 파열음이 터지며 김치호가 옆으로 쓰러졌다.
-털썩.
확실한 마무리를 위해 태건이 파운딩을 꽂으려 하자 심판이 달려들어 쓰러진 김치호를 덮었다.
심판은 급하게 손을 양옆으로 휘저으며 경기가 끝났음을 선언했다.
와아아아!
관중들의 함성에 체육관이 무너질 듯 들썩거린다.
“최고다! 조태건! 진짜 프로를 이겨버렸네!”
“미쳤어! 돌부처! 돌부처!”
엄청난 환호가 쏟아졌지만 태건의 표정은 전혀 변하질 않았다.
이내 자신을 비추는 카메라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가 보는 것은 카메라 렌즈가 아니라 그 너머의 누군가를 보는 듯 했다.
* * *
스포츠 일간지 데일리런의 기자들이 호텔 옆 흡연장에 모여있었다.
이번 PRIDE-K의 취재를 위하여 꾸려진 특별팀이었다.
“선배. 이 정도의 이벤트 본 적 있어요?”
“당연히 없지. 한국에서 유례 없던 일인데.”
그들의 대화 주제는 단연 PRDIE-K였다.
흔한 오디션 열풍에 편승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이슈와 흥행은 둘째치더라도 대회의 짜임새부터가 이미 타 프로그램과 궤를 달리했다.
엘리트 스포츠의 정교함.
프로 스포츠의 버라이어티함.
그 둘의 절묘한 조화는 비슷한 예능에 지친 시청자들의 갈증을 해소해주었다.
단순히 스폰서로 끌어가는 이야기가 아닌 문화 자체를 이끌어가는 힘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것이 PRIDE-K를 바라보는 언론인들의 시각이다.
“수준도 엄청 난데요.”
“적어도 근래의 아시아권에서는 이런 경기들을 본 적이 없어.”
PRIDE-K의 경기는 수준마저 완벽했다.
몇몇을 제외하고는 참가자들 대부분에게 프로는 벅찬 상대들이었다.
하지만 프로에게 지지 않는 것이 있었는데 그건 그들의 눈빛이었다.
화면을 통해서 보는데도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집념과 독기가 넘쳐 흘렀다.
심판이 정지를 시키지 않아서 그렇지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황에도 기어이 일어나는 의지는 어떤 의미인가.
경기 영상이 일부 공개되자 시청자들은 궁금했다.
도대체 어떤 사연이 있기에 죽을 듯 보이는데도 일어서는가.
때리는 사람들도 다르지 않았다.
미친 사람처럼 싸운다.
그냥 서 있기만 할 뿐 저항할 체력이나 상태가 아닌데도 인정사정 없이 가해지는 프로들의 공격은 저들이 사람인가 싶다.
그래서 더욱 사람들은 흥분한다.
이것이다.
이것이 동물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참모습이다.
동물이 살아남는 방법은 싸워 승리하는 것이다.
“무조건 대박이야.”
“경기 끝나고 이채호 대표가 중대 발표 할거라는데?”
“다시 말하지만 준비한 팀 단위로 분명하게 움직이라고, 이런건 속도가 생명이야. 일분 일초라도 앞서가는 쪽이 이겨.”
데일리런 기자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싸움은 링 밖에서도 벌어지고 있었다.
* * *
군산항.
꽃게 철이다.
곧 금어기가 다가오기 때문에 어민들은 그 전에 한 마리라도 더 잡기 위해 밤잠을 설치며 조업에 나서고 있었다.
하지만 들어오는 뱃사람들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이제 여기도 지구 온난화란 날벼락을 피해 갈 수 없다는 것을 모두가 절감하고 있었다.
가뜩이나 어획량이 줄었는데 중국 어선들의 무분별한 싹쓸이 조업까지 겹치면서 어민들이 입는 타격은 이만 저만이 아니다.
부둣가로 배 한 척이 들어온다.
배가 정박하자 선장으로 보이는 인물이 투덜대며 내린다.
부둣가에서 대기하고 있던 각지에서 올라온 꽃게 도매상들 표정이 변한다.
“김 선장!”
“살다살다 이런 날은 처음입니다. 꽃게 얼굴 보기가 하늘의 별따기입니다. 에이 씨발.”
김선장이라는 사내는 한쪽으로 가래침을 뱉었다.
“더이상 만선이란 말은 듣기가 어려울 듯 보입니다.”
뭘 미련을 두고 그렇게 서 있냐.
그만 빈손으로 돌아가라는 뜻이다.
좋은 물건을 받아가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도매상들 표정이 하나 둘 바뀌며 한숨들을 쏟아낸다.
각지에서 몰려온 도매상들이 하나 둘 흩어진다.
군산항 최고의 꽃게잡이 어선 칠성호 선장 김석호가 달랑 잡어 상자 두 개를 싣고 들어온 걸 보면 올 봄 꽃게는 끝났다.
도매상들이 투덜거리며 흩어지는 그때 배에서 선원들이 내리기 시작했다.
멈칫!
부둣가 한쪽에서 쭈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던 어민 중 한 명인 전철중이 눈살을 찌푸렸다.
칠성호 선원은 여섯 명이다.
그런데 지금 배에서 내리는 인원은 여덟 명이었다.
모든 배들이 한 푼이라도 아끼기 위해 선원들을 줄이고 있는 마당에 두 명이 늘어난 것이다.
‘선원 늘렸다는 소린 못들었는데.’
전철중은 중얼거리며 낯선 두 사내에게 시선을 꽂았다.
맨 뒤에 올라오는 두 사내.
다른 선원들과 같이 진녹색 우의를 입고 있었지만 한 가지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야구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있었다.
햇빛을 가리기 위해 모자를 쓰는 건 어부들에게는 일상이다.
그런데 유난히 챙 쪽을 눌러 써 얼굴 확인이 어렵다.
얼굴을 확인할 수가 없으니 나이가 몇인지는 더욱 파악하기 어려웠다.
잠시 걸어가는 두 사내를 바라보던 전철중은 다시 담배를 피우는데 열중했다.
“거기!”
앞장서 가던 북두칠성호 선장 김석호가 두 사내를 불렀다.
두 사람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멈췄는데 김석호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물 안 튀기게 해요.”
자신에게 피해가 오지 않게 잘하라는 말이었다.
순간 오른쪽 사내가 씨익 웃는다.
“그럴 일 없습니다.”
김석호는 다시 한 번 깊은 시선으로 두 사내를 바라보더니 돌아섰다.
자주는 아니지만 아주 가끔씩 있는 일이다.
더군다나 요즘처럼 빈 배로 돌아오기 일쑤인 시절에는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배들도 한두 번씩 삐딱 선을 탄다.
경찰에 쫓겨 물 밖으로 나가고 싶은 사람, 들어오긴 해야겠는데 정상적인 통로 이용이 어려운 사람들을 실어다 주고 받는 돈이 상당한 보탬이 된다.
군산항에 도착해서도 모자를 벗지 않고 걸어가던 두 사람은 어느 허름한 버스정류장에 멈춰섰다.
멀리서 검정 봉고차 한 대가 다가온다.
검정 봉고차가 천천히 속도를 줄여 두 사람이 서 있는 버스 정류장 앞에 멈춰 섰다.
앞문을 벌컥 열고 내린 사람은 다름 아닌 당구장에서 일준과 당구를 치던 동하였다.
동하 역시 모자를 깊게 눌러쓴 채 두 사내에게 다가갔다.
품에 손을 넣어 봉투 하나를 꺼내 보여주었다.
주위를 살피며 봉투의 내용물을 보이자 밀항한 사내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곧 봉고차의 뒷문이 활짝 열리고 모두들 조심스레 주위를 살피며 차에 탑승했다.
동하는 조수석에 탑승하여 문을 쾅 하고 닫았다.
“출발해.”
차는 빠른 속도로 군산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동하는 등 뒤를 힐끔 훔치듯 보며 말했다.
두 사람은 차 안에서도 머리에 뒤집어 쓴 모자를 벗지 않았다.
비린내가 풍기는 듯 코를 살짝 비빈 동하는 인상을 찡그린 채 말했다.
“창문 조금만 열어.”
차가 시내를 벗어나자 동하는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연결음이 들리고 나서 무뚝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준이었다.
“어. 픽업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