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쟁의 신이 케이지 안으로-58화 (58/204)

제 58화 : 물이 되게. 친구여.

참가선수들은 자신의 대진과 매칭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벽에 붙은 상대와 대진 시간을 확인하는 그들의 표정은 각기 달랐다.

모든 선수가 처음 자신과 스파링을 했던 상대를 만나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프로라고 해도 처음 듣는 이름에는 어느 정도 안심을 하는 듯 보였고, 가끔은 텔레비전을 통해서 경기 모습을 봤던 이름을 만난 참가자는 불편한 얼굴을 숨기지 않았다.

대진 운이라는 건 있다.

준모도 사람들 속에 있었다.

필린 직원이면서도 준모의 머릿속에는 오직 두호뿐이었다.

직원으로서 역할 하랴 두호를 도우랴 정신이 없다.

그런데 표정이 환해 보이지 않는 것이 뭔가 잘못됐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아 진짜 뭐야!”

짜증스럽게 중얼거리며 두호가 서있는 옆으로 돌아왔다.

“왜?”

대번에 준모의 표정이 밝지 못함을 알아차린다.

“아니 무슨 경기를 저녁 11시에 합니까? 아예 한숨 자고 새벽에 하지.”

“11시?”

“그렇다니까요. 그 시간이면 모두 잠자리에 들어갑니다. 외국에 가면 시차 적응이라는 것이 왜 있는 것입니까? 낮과 밤이 다르기 때문에 그러는 것 아닙니까. 11시면 모두가 잠잘 때이고 우리 몸은 거기에 길들여져 있죠.”

자야 할 시간에 경기를 한다는 건 두호에게 매우 불리하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두호는 씨익 웃었다.

격투기는 프로 스포츠로 분류가 되지만 쇼 비즈니스의 성격이 매우 강하다.

결국 단체는 티켓과 마케팅으로써 먹고 사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가장 흥행요소가 높고 상징성이 있는 매치가 마지막에 배정 되어야한다.

채호가 자신의 경기를 클라이맥스에 배치한 이유가 이것이고 그러다 보니 밤 11시가 된 것이다.

티켓파워 (Ticket Power).

이 한 선수를 보기 위해서라도 티켓을 구매하게 하는 힘이다.

모든 집중과 기대가 한 곳에 걸렸을 때 백두호라는 선수의 가치는 더욱 크게 증명되는 것이다.

그때 설치된 모니터로 미주의 경기 시작 선언이 나왔다.

- 제 1경기 바로 만나보겠습니다!

미주의 말이 끝나며 화면이 경기장 입구로 바뀐다.

조태건이 필린 직원들과 나란히 서 있다.

“입장합니다.”

태건이 계단을 내려온다.

복도를 지나치며 만나는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응원을 보낸다.

“화이팅!”

“프로가 별거야. 조태건, 조태건!”

누군가 조태건의 이름을 소리 높여 외쳤다.

태건은 아무런 반응 없이 묵묵히 걸어 복도로 들어섰다.

그 어떤 감정의 동요도 없던 태건의 표정.

그러나 지금 이순간만큼은 그의 눈빛에 약간 생기가 돌았다.

복도를 지나치며 마주치게 된 세 사람.

두호, 준모와 경기 입장을 위해 걸어가는 태건이었다.

태건을 바라보는 준모의 눈이 빛난다.

태건은 준모도 익히 잘 알고 있다.

처음 두호를 만나고 수미를 찾아갈 때 파전집 지하에서 봤었는데 지금도 당시의 인상이 지워지지 않는다.

수미의 다른 부하들과 달리 말이 없었고 특히 두호가 들어설 때부터 계속 노려보기 시작했다.

마치 무슨 원한이 있는 사람처럼 이글거리는 눈으로 바라보자 준모는 참지 못하고 다가갔다.

“어이 형씨, 우리 형님을 왜 그렇게 노려봐. 뭐 할 말 있으면 나한테 해봐.”

태건은 무표정한 얼굴로 준모를 바라보며 내뱉었다.

“죽고싶냐.”

그 한마디에 준모는 얼어붙었다.

조직에 있으면서 일반인이든 아니면 경쟁 조직원이든 그들을 향해 가장 많이 쓰는 단어가 죽고 싶냐 였다.

죽고싶냐...

그 흔하고 흔한 단어가 태건의 입에서 나오자 정말로 죽을 것 같았다.

준모는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

준모는 훽하니 몸을 돌려 두호에게 걸어갔다.

태건은 케이지 입장을 위해 발걸음을 서둘렀다.

“저 자식 어떻게 봅니까?”

준모가 멀어져가는 태건에 시선을 둔 채 물었다.

두호로부터 아무런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고개를 돌렸다.

두호는 그저 묵묵히 자신의 대기실로 발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 * *

태건은 케이지 안에서 가볍게 제자리 뛰기를 하며 몸을 풀고 있었다.

그때 화면이 태건에게서 사라지고 다른 곳으로 옮겨 갔는데 채호가 지금 막 들어서고 있었다.

채호는 가장 먼저 중계를 준비하는 캐스터와 해설자들에게 웃으며 악수를 건넸다.

이어 심사위원석으로 다가갔다.

자리에 앉아 있던 심사 위원들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채호는 그들과 일일이 악수를 했다.

그 이외에 아시안게임 레슬링 은메달리스트 탁현.

입식 단체 J-2 리그 챔피언 이채수.

주짓수 코치이자 대한민국 최초 블랙벨트 소유자인 김태훈.

그리고 KFA 미들급 챔피언 정혁.

모두 한국 격투계의 한 획을 그은 인물이자 거목들이었다.

탁현과 채수와 달리 김태훈과 정혁은 채호 역시 대회 시작 이후 처음 보는 인물들이다.

채호가 방긋 웃으며 태훈에게 악수를 내밀었다.

“바쁘실텐데 PRIDE-K에 힘을 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태훈 역시 밝은 표정으로 악수를 받았다.

“별 말씀을요. 대표님께서 한국 격투기 발전에 이렇게 힘쓰시는데 노는 손이라도 보태야죠.”

채호는 한 발걸음 옆으로 옮기며 이번엔 정혁에게 손을 내밀었다.

“고맙습니다. 정혁 선수. 훈련하시느라 바쁘실텐데.”

“전혀요. 이렇게라도 필린과 협업할 수 있다는 게 참 좋습니다.”

그렇게 인사를 마치고 채호는 심사위원석 가운데 자리에 착석했다.

채호 역시 이번에 심사위원으로서 자리에 함께하는 것이다.

자리에 앉자 곧바로 조명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선수가 입장하는 왼쪽 문으로 한 줄기에 빛이 쏘아진다.

한 사내가 조명을 받으며 걸어 내려온다.

오늘 태건과 경기를 할 선수다.

안내하는 필린 직원 둘이 사내의 좌우에 섰는데 상당히 다부졌다.

사내는 케이지 안으로 들어왔고 가볍게 뛰기 시작했다.

장내 아나운서 미주는 거칠고 힘 있는 목소리로 두 선수를 소개했다.

“홍코너 조태건. 키 184센티미터 78킬로그램.”

태건의 이름을 들은 채호의 눈이 빛났다.

그의 주먹이 심상찮다는 말은 들었지만 아직까지 단 한 번도 구경해보지 못했다.

드디어 오늘 처음으로 태건의 실력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수미의 오른팔인 황석희와 비슷한 실력이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 매우 놀랐다.

황석희의 실력은 수미의 오른팔다웠다.

그런데 그만한 사람이 한 명 더 있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았다.

과연 길거리가 아닌 케이지 안에서 태건의 실력은 어떨까.

채호는 옆에 앉은 채수에게 조용히 물어보았다.

“청 코너는?”

태건이 상대할 선수의 정보를 묻는 것이다.

채수는 대진표를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손으로 입을 가렸다.

“김치호 선수. 킥복싱 프로 출신인데, 스탠딩에서 타격 교환으로 이득을 보는 게 주특기인 선수야. 예선전에서는 태건한테 확실한 우위를 보여주지는 못했어.”

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예선전부터 프로를 크게 흔들어 놓은 참가자 몇 명이 있긴 했다.

그렇다고 그것이 프로들이 가진 실력의 전부라고 할 수는 없었다.

프로는 감출 때는 감추고 드러낼 때 드러낼 줄 아는 선수들이다.

흔한 말로 닭 잡는데 소 잡는 칼을 사용할 일이 없는 것이다.

아무튼 필린은 그들과 팽팽하게 경기를 벌인 몇몇을 사실상 이번 대회 우승후보들로 생각하여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었다.

“맞서 싸우게 될 청코너 김치호 선수입니다. 신장 182센티미터, 몸무게 80킬로그램...”

78킬로와 80킬로의 몸무게라면 체급 차이가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즉, 둘의 피지컬 차이는 없고 승패는 결국 순수한 실력이 될 것 같았다.

심판이 케이지의 중앙으로 두 선수를 불렀다.

심판은 두 사람에게 간단한 룰 설명을 하였다.

“사점 니킥(손과 발이 모두 땅에 붙어있을 때 날리는 니킥), 로블로(낭심부위를 공격하는 것), 써밍(손가락으로 눈을 찌르는 행위), 버팅(머리로 상대를 들이받는 행위), 깨물기 안됩니다. 특수 상황에서는 심판이 개입할 것이니 통제 잘 따라주세요.”

알아들었음을 끄덕임으로 표현한 두 사람에게 코너로 돌아갈 것을 명령했다.

심사위원석과 전광판을 번갈아 확인한 그는 양 코너의 대기중인 선수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레디?”

두 선수는 모두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심판은 곧 손을 힘차게 내려치며 경기 시작을 선언했다.

“파이트!”

양쪽 모두 가벼운 스텝으로 걸어나와 글러브 터치를 하였다.

툭!

이어 거리를 벌리며 신중히 탐색을 시작했다.

김치호의 눈은 진지했다.

예선전에서 태건에게 시달린 것이 아직도 화가 난다.

이제야말로 프로의 본때를 보여줘야 할 시간.

그러나 예선때 지나치게 방심한 것도 있었지만 태건의 주먹은 우습게 볼 수준이 결코 아님을 알고 있다.

사삭!

치호는 평소와 달리 두 다리의 폭을 극단적으로 좁게 만들어 섰다.

보폭을 좁게 서면 태클과 그래플링 싸움에 취약해지는 약점이 있다.

하지만 앞 발의 자유도와 킥 방어가 간편해지기 때문에 타격적인 측면에서는 유리하다.

이미 태건이 타격으로 승부를 보려고 할 것임을 예상한 것이었다.

김치호의 예상을 증명이라도 해 주듯 태건 역시 예선 때와 차이가 없는 자세를 보인다.

사삭!

초반이라고 해도 양측 누구도 섣불리 선공을 취하지 못했다.

다가서면 그만큼 물러나고, 오른쪽으로 돌면 따라 그만큼 도는 거리 싸움이 계속된다.

지켜보는 사람들도 긴장이 되는 듯 눈을 빛내며 침을 삼킨다.

츗!

태건의 앞발이 움찔할 때마다 김치호는 거리를 벌리며 멀어졌다.

태건에게 절대 거리를 주지 않겠다는 의도였다.

슉!

태건의 주먹이 뻗어나갔다.

기세 좋은 더블 잽 과 뒷손 스트레이트.

정석적인 타격 진출 셋업(전략상의 중요 공격을 하기 위해 미리 깔아놓은 공격)이었다.

코앞까지 들어온 공격이었지만 치호는 당황하지 않고 깊게 스웨이(다리는 고정시키고 상체를 뒤로 젖혀 피해내는 복싱 기술)하며 피해냈다.

태건은 자신의 펀치 공격이 무위로 돌아갔지만 얼굴에서 어떤 변화라는 건 찾아볼 수 없었다.

-퍽!

번개처럼 이어지는 강한 로우킥.

조금 전 셋업은 허벅지를 강하게 내리꽂는 로우킥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음이 드러났다.

그러나 김치호 역시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슉!

경기장 전체를 울리는 강한 킥이었지만 당황하지 않고 곧바로 뒷손 스트레이트를 날렸다.

태건에 모든 공격이 끝난 후 미처 자세를 잡지 못한 순간을 공략하는 카운터.

상대의 공격이 나올 때가 반격하기에도 좋은 순간이다.

들어오는 상대를 받아치는 주먹은 훨씬 강한 충격을 전달하는 원리를 잘 이해하고 있는 김치호의 영리한 반격이었다.

하체를 내줬지만 안면 정타의 교환을 성공한 모습.

짧은 공방이었지만 캐스터가 감탄한 듯 크게 소리쳤다.

“하체를 내줬지만 다시 정확한 펀치로 타격 교환에 성공합니다!”

둘 모두 타격이다.

나머지 다른 기술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주 무기는 주먹이고 발이다.

퍼퍼!

꽈앙!

불꽃이 튄다.

서로가 무서운 화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뒷손과 앞 손이 눈이 쫓기 힘들 정도의 공방을 이어나갔고 빈틈이 생길 때마다 파고드는 다리는 칼처럼 섬뜩했다.

주먹이 쏟아지고 나면 킥이 빗발친다.

MMA 경기에서 보기 힘든 정통파 스트라이킹(타격) 싸움이었다.

케이지의 중앙을 점유하기 위해 싸우는 두 사람.

케이지의 중앙을 차지하면 적은 체력으로도 쉽게 상대의 압박이 가능해진다.

그 자존심 싸움에서 누구도 양보하기 싫은 듯 격렬한 싸움이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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