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7화 : 물이 되게. 친구여.
두호는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흔히들 스포츠를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한다.
특히 격투 스포츠는 그야말로 누구의 도움 없이 홀로 싸워야 한다.
세컨이 있으나 그건 잠시 휴식 시간의 잔소리꾼 정도밖에는 되지 않는다.
‘계획은 단단하게 세우고. 실행은 유연하게 해내야지.’
과거 어린시절 훈련 중 황성태가 한 말이었다.
자신 또한 이 말에 진짜 의미를 서른이 넘어서야 깨달았다.
‘언제나 현실은 계획에 없던 일이 생긴다. 그 순간을 냉철하게 받아드릴 판단력과 유연한 사고방식이 없다면 시체 되는 것은 한순간이지. 계획은 계획일뿐이야. 그것에만 집착해서는 안된단다.’
도경욱은 프로다.
훗날 챔피언이 될 것이라는 평가까지 받는.
그래서 준모를 보낸 것이다.
“흐흠!”
준모 입에서 한숨이 나온다.
2라운드는 전혀 다르다.
프로들이다.
그들은 돈을 받고 자신의 주먹을 거래하는 전문가들이다.
심지어 자신들이 상대해야 할 대상이 아마추어인데도 훈련과정을 숨기고 있었다.
특히 준모가 지켜본 도경욱은 미쳐 날뛰는 멧돼지였다.
그런데 두호는 한가롭게 국민체조 같은 런지나 하고 있으니 그저 답답할 뿐이다.
툭!
두호가 밴드를 벗어던지고 매트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두호는 자세를 잡고 쉐도잉을 하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두호의 쉐도잉을 지켜보던 준모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동안 자주 봤기 때문에 미세한 자세 변화도 알아차리는데 오늘 못 보던 동작 하나가 나온다.
팔을 부자연스럽게 뻗어 휘감는 동작을 하고 있었다.
그때 아리송한 표정으로 서 있는 그의 옆으로 탁현이 조용히 다가왔다.
“쉿!”
코치님이라고 말하려는데 입술에 검지 손가락을 대며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낸다.
시간이 흐를수록 준모의 표정이 우그러지는데 비해 탁현의 얼굴에는 흥미로운 듯 미소가 나타나고 있었다.
“저게 뭐죠?”
끝내 못마땅한 표정으로 물었다.
탁현이 빙긋 웃는다.
“보여 드려요?”
뭘 보여주냐고 고개를 돌리려던 준모가 멈칫했다.
탁현이 두호의 뒤로 조심스럽게 접근했는데 자신의 존재를 알리지 않으려는 행동이었다.
‘뭘 하려는 거야 지금’
살금살금 다가간 탁현이 벼락같이 달려들었다.
두호의 겨드랑이를 파고드는 전형적인 레슬링식 클린치.
두호는 당황하지 않았다.
재빨리 허리를 숙이더니 파고드는 탁현의 하체를 노리고 카운터 태클을 했다.
빠아아!
한 호흡에 두 사람은 공수를 주고받았다.
아직은 누구도 재미를 보지 못했다.
처억!
탁현이 중심을 잡기 위해 상체를 두호에게 기댔다.
순간 탁현의 다리를 잡고 있는 두 손에서 한쪽 손을 빼낸다.
이어 재빨리 탁현의 어깨와 목 사이에 자신의 팔을 걸어 당겼다.
“합!”
두호의 기합과 함께 탁현이 중심을 잃고 옆으로 기우뚱 했다.
두호는 지금 싱글렉 태클의 연계동작을 분명하게 보여 주었다.
“아아아!”
지켜보던 준모가 입을 벌렸다.
이제 왜 두호의 쉐도잉에서 이상한 동작이 나왔는지 알아차린 것이다.
지금 그 기술을 가상의 상대를 놓고 펼치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상대는 탁현이었다.
아시안게임 레슬링 은메달리스트.
넘어지기 직전 곧바로 한 바퀴를 굴러 안전하게 탈출해 버렸다.
씨익!
탁현이 웃었다.
하지만 웃음은 충격을 감추기 위한 도구일 뿐이었다.
속으로는 기겁하고 있다.
‘기술은 완성되었다.’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대로 빨려들어갔을 것이다.
더욱이 두호의 동작에 담긴 의미를 알았기에 망정이지 모르고 덤볐다면 곤란해 졌을지도 모른다.
실제 경기 중 만약 누군가가 기습적으로 이 동작을 취했다면 그대로 상위포지션을 내준 채 불리한 그라운드 싸움에 말려들었을 것이다.
“좋은데요.”
진심에서 우러난 칭찬이다.
탁현은 두호의 기술이 거의 완성되었다고 봤다.
“경욱이 잔뜩 벼르고 있을 텐데.”
2라운드 경기가 볼만하겠다는 듯 웃는다.
두호가 상대와 스파링을 하지 않은 이유는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제대로 된 그래플링 고수에게 통할지가 의문이었다.
물론 실습을 해보고 싶었지만 잘못했다간 상대 세컨에게 자신의 전력만 노출될 위험이 컸기에 혼자서라도 집중 연마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때마침 탁현이 나타나 자신의 기술이 통한다는 걸 확인해 주었기에 웃는 것이다.
“감사합니다.”
두호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 다시 몸을 돌려 다시 연습에 들어간다.
“탁 코치님, 일반적으로 이런 대회에서는 자신의 주특기를 살리는 것이 더 효과적이지 않습니까?”
누가 뭐라고 해도 두호의 장기는 주먹이다.
그러므로 주먹을 더 가다듬는 것이 유리하지 않느냐는 얘기였다.
“맞아요. 틀린 얘기 아닙니다. 아마 두호씨도 역시 경기에 들어가면 최대한 주먹으로 끝내려고 할 것입니다.”
“그래야죠. 한 방 맞았다 하면 바로 병원에서 저염식 식단 시작인데요.”
준모가 주먹을 불끈 쥔다.
“그러나 사람 일은 모릅니다. 잡히고 싶지 않다고 해서 잡히지 않는 것도 아니고, 일단 그라운드에 들어 가버리면 끝장 아닙니까?”
“절대 형님은 잡히지 않아요. 얼마나 발이 빠른데.”
준모는 자신했다.
탁현은 무조건적인 준모의 믿음이 재밌는지 기분 좋게 미소지었다.
“아무튼 상대는 두호씨를 잡는 순간 넌 이제 죽었다. 하겠죠. 자신감이 지나치다 못해 방심할수도 있는 상대에게 기습적인 기술을 걸어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허허실실?”
“허허실실까지는 아니어도 MMA에서 방심은 경기 끝입니다.”
상대의 심리를 역으로 파고드는 전략이 쉽지는 않으나 성공하면 무조건 이긴다.
탁현은 두호가 다른 선수들과 가장 구별되는 능력이 있다면 아마 두뇌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뛰어난 선수는 머리도 영리하다.
탁현은 미소를 지으며 돌아서 나갔다.
* * *
누군가는 2002년을 끄집어 냈다고 했다.
광화문 거리를 가득 메우고 대한민국을 외치던 월드컵의 열기가 지금 또다시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건 필린이 주관하는 PRIDE-K대회였다.
1차와 달리 2차 티져 영상에서는 선수들의 예선전 경기 몇 개와 1라운드 미션이 공개되었다.
가히 사람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실시간 검색어와 스트리밍 사이트 조회수 순위는 상위권에서 내려올 기미가 없었다.
댓글은 기사 하나당 족히 만개가 넘었고 누리꾼들의 반응은 대체로 호평이 가득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2라운드 진출자들의 경기 영상이 해외에까지 나가면서 급기야 세계적인 스포츠 매니지먼트사와 슈퍼 에이전트들이 속속 국내에 들어왔다.
‘한국의 격투기는 해외와 다른 점이 있었다. 청춘들의 뜨거운 열정과 필린의 기획력. 우리는 격투기의 미래를 보고 있다.’
2라운드 경기를 보기 위해 인천공항을 찾은 아시아 최대 격투기 단체중 하나인 싱가포르 킹 챔피언십(KING Championship) 부사장 조나단 왕이 기자와 인터뷰에서 한마디 뱉은 것이 흥행에 기름을 부었다.
덕분에 한국에서는 유례없는 격투기 붐이 일었다.
탁!
채호가 서류를 툭 덮고 만족한 듯 웃어보였다.
예수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매일은행에서 상품 출시 예정 광고를 송출하자마자 대기자 수가 십만 명을 넘어갔습니다.”
PRIDE-K로 인한 마케팅 효과는 엄청났고 기업들은 앞다투어 자신들 역시 투자하기를 원했다.
“준비는 어때?”
채호가 채수를 향해 물었다.
“스탠바이 끝났습니다. 다들 의지가 상당합니다.”
“프로들한테 오늘 승리수당은 원래 주기로 한 액수에서 20% 더 올린다고 그래.”
“예옛!”
직원들 모두가 놀란다.
이렇게 되면 웬만한 경기의 파이트 머니보다 더 받는 선수도 생긴다.
그러나 채호가 이런 판단을 내린 이유가 있었다.
이번 경기는 프로들에게도 리스크가 큰 시합이다.
자신의 전략 전술은 모두 공유했지만 상대의 주특기를 알 수 없었다.
자칫 잘못하다간 아마추어한테도 패배할 수 있는 상황.
위험부담이 있는 대신 금전으로 간극을 메워 보겠다는 뜻이다.
“끝까지 가 봅시다!”
채호는 빙긋 웃었다.
* * *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쥐 죽은 듯 사람들은 누군가를 기다린다.
덜컹!
그때 케이지의 문이 열리며 누군가 걸어들어온다.
이번 PRIDE-K MC를 맡게 된 오미주였다.
미주는 당당한 걸음걸이로 케이지의 중앙에 도착했다.
그녀는 손에 쥔 큐 카드를 힐끔 보며 마지막으로 대본을 숙지했다.
차분하게 주위를 살피던 미주는 곧 마이크를 집어들었다.
-쿠쿵-.
케이지 정 중앙에 서 있는 미주에게 강한 조명이 떨어졌다.
“포유류는 언제나 최강이라는 단어에 집착해왔습니다. 강한자가 생존하며 모든 권리를 누리고 살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죠. 그렇기에 우리는 최강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자를 동경하고 경외해왔습니다.”
목소리에 힘이 있다.
정확한 발음이면서도 차가운 냉기가 약간 실린 미주의 목소리는 사람들을 은근히 긴장케 했다.
“10억과 T-90이 주어질 왕좌에는 누가 앉게 될까요! 대한민국 최초의 격투기 오디션 프로그램 2 라운드 미션 지금 시작합니다!”
와아아아!
어둠 속 관중들이 소릴 질렀고 펑펑하며 경기장 전체에 불이 켜졌다.
곧바로 PRIDE-K의 로고가 카메라에 담겼다.
“이번 미션은 참가자들이 예선 단계에서 붙었던 프로들과의 리벤지 전이 될 것입니다.”
미주는 전체 룰에 대한 설명을 빠르게 이어갔다.
한편 채수는 프로들 대기실 복도 한쪽 벽에 종이 한 장을 붙였다.
“대진표와 매칭 시간을 붙여놓은 타임 테이블 입니다. 적어도 한 시간 전에는 대기실에서 대기하고 있어야 합니다!”
바로 옆에 놓인 마이크를 들고 각 방에 전달한 채수는 잠시 말을 끊더니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채수는 길게 한 호흡 뱉어냈다.
“대표님께서는 이번 2라운드 승리 수당을 20% 인상하겠다고 했습니다.”
와당탕!
까우우!
여기저기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사실 1라운드가 끝나면서 초빙된 프로들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그중 일부는 돌아가겠다는 의사를 표시하기까지 했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자 참가자들의 수준이 생각보다 높았다.
자신들은 프로다.
만약 참가자들과 경기를 벌여 졌다거나 아니면 고전을 했다는 소문이 퍼지면 차후 파이트머니가 떨어질 건 자명했다.
거기에 아무리 프로지만 상대의 정보를 모른 상태로 경기에 임하는 것은 커다란 위험 부담이었다.
그런데 지금 채호가 선수들의 가라앉은 투기에 불을 지폈다.
승리 수당 20 퍼센트면 해볼만하다.
모든 방이 시끌벅적한데 오직 한 곳만 절간처럼 조용했다.
한 사내가 방바닥에 차분히 앉아있다.
도경욱이었다.
묘하다.
이런 기분 처음이다.
예선 경기에 큰 의미를 둘 필요는 없다.
그저 그런 놈이려니 했는데 생각보다 제법이었고 그래서 약간의 망신을 당했다.
마음먹고 붙으면 결코 상대가 안된다.
그런데 경기시간이 다가올수록 뛰는 이 가슴은 어떤 의미인가.
누구보다 시합 전에 냉정하다는 말을 듣는 자신이었다.
‘방법은.’
어금니를 깨물었다.
‘하나뿐이다. 널 두 번 다시 이 바닥에 얼씬도 못하게 만들어 주겠다.’
경욱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울앞에 우뚝 선 경욱의 입술이 벌려졌다.
“백두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