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쟁의 신이 케이지 안으로-56화 (56/204)

제 56화 : 물이 되게. 친구여.

그러나 조금 전 일준의 행동은 훈련에 깊이 빠져 미처 인지하지 못한 실수가 아니다.

“롤링중에 너무 긴장한 나머지 탭을 친 줄도 몰랐습니다.”

일준이 히죽 웃는다.

직원의 부축에 상대가 다리를 절며 일어났는데 일준을 무서운 눈으로 노려본다.

“아이고!”

그런 상대를 향해 일준이 싱긋 웃으며 손을 들어 보인다.

미안하다는 것인지 뭘 그 정도 갖고 그러냐는 것인지 모호한 얼굴이다.

“아아아!”

직원이 무릎을 살피자 사내는 비명을 질렀다.

“아무래도 메디컬룸에 가야할 것 같습니다.”

“빨리 데리고 가요.”

“저 개새끼가...”

사내는 일준을 노려본 뒤 다리를 절며 메디컬룸으로 이동했다.

멈칫!

메디컬 룸으로 걸어가는 사내를 바라보던 태훈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일준이 없다.

“뭐 저런...”

일준은 저만치 걸어가고 있었다.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서 있는 태훈에게 직원이 말했다.

“골 때리는 놈이 하나 있네요.”

사내도 일준을 바라본다.

“그런데 방금 움직임은...”

태훈은 입술을 질끈 물었다.

잠시지만 세계에서도 통할 움직임이었다.

물 흐르듯이 넘어가는 연계와 포지션에 얽매이지 않고 이용하는 지능까지.

‘이름이 뭐였더라.’

이름을 떠올리기 위해 이마를 찡그린다.

앞 발이 내려놓자마자 곧 바로 다시 올라온다.

-쩍

링 안을 가르는 엄청난 파열음.

가드 위를 채찍처럼 후려치는 하이킥이었다.

겨우 가드 해냈지만 킥에 담긴 무게가 상당한지 사내는 휘청거렸다.

이윽고 다시 정신을 차리며 거리를 벌렸다.

무표정한 얼굴로 사내를 바라보는 태건.

태건은 호흡을 천천히 고르며 다시 자세를 잡았다.

상대는 태건의 움직임이 까다로운지 섣불리 선공을 취하지 못했다.

그런 방어적인 상대를 유린하듯 갉아먹는 태건.

장난치듯 계속되는 스위칭(앞 발을 바꾸는 것을 말한다)이 계속 되었다.

상대는 답답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 이유는 하나였다.

타격거리가 계속해서 바뀐다.

퍼억!

이만하면 맞지 않겠다 싶어 살짝 들어갔는데 귀신같이 가드를 뚫고 주먹이 들어온다.

파아악!

그렇다고 조금 뒤로 물러나면 이번에는 예외 없는 로우킥이다.

상대는 처음으로 링이 좁다는 생각을 했다.

최소한 지금 상태에서 이 링 어디든 태건의 사정거리였다.

사사삭!

스스!

가끔씩 주먹을 주고 받긴 하지만 처음보다는 확실히 소강상태를 보인다.

둘 모두 어느정도 기술을 드러냈고 서로 경계하기 때문이다.

-슈웅

순식간에 뒷발이 앞으로 튀어나온다.

새총으로 쏜 듯 날아가는 딥(푸쉬 킥. 발 바닥 앞 축으로 밀어차는 킥).

-쾅

상대의 명치를 발의 앞축으로 걷어차 버렸다.

펀치와 로우킥만을 경계하던 그의 가드를 허망하게 뚫어버린 것이다.

“윽!”

상대는 숨쉬기가 불편한 듯한 신음소리와 함께 털썩하고 무너졌다.

꽈당!

태건은 쓰러진 상대를 공격하지 않고 일어나길 기다린다.

경기를 쭈욱 지켜보던 채수가 고개를 끄덕인다.

‘완벽한 운영과 피니쉬.’

만약 이 PRIDE-K가 킥복싱룰로 진행됐다면 태건이야말로 무조건 우승후보라고 불릴 실력이었다.

완숙한 거리조절과 함께 그림같은 연계.

그리고 남들에게 없는 것이 하나 있다.

창의성이다.

태건은 예상이 불가능할 정도로 자유로운 타격센스를 가지고 있었다.

사내가 일어났지만 이마를 찡그린다.

태건은 갑자기 글러브를 벗어 땅에다가 툭 하고 던져버렸다.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

훈련이지만 상대에 대한 예의를 차려야 한다.

“갑자기 피곤해 지는데.”

“두 발이 바닥에 붙어 있지를 않구만.”

지켜보던 다른 참가자들이 투덜 거렸다.

“수고 했어요.”

채수가 링을 내려오는 태건을 보며 가벼운 웃음을 지었다.

“두 분 모두 좋습니다. 약간의 주문이 필요하다면 킥복싱이면 몰라도 MMA는 긴 공격 호흡은 좋지 않다는 겁니다. 단타 위주의 짧은 압박이 좀 더 효과적일 겁니다.”

사내는 눈을 빛내며 들었지만 태건은 채수를 스치며 지나갔다.

마저 코칭을 끝낸 채수는 태건을 돌아보았다.

태건은 무표정하게 샌드백을 치고 있었다.

어떠한 반열에 오르면 움직임 너머에 보이는 것들이 있다.

평소 성격과 이 운동을 대하는 마음가짐과 태도 그리고 인생까지.

그러나 태건의 움직임에는 어떠한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공허할 뿐이었다.

채수는 태건이 샌드백을 치는 것을 꽤 오랜시간 지켜보았다.

사방에서 쿵쿵거린다.

필린이 오늘 2라운드를 대비해 초대해 온 프로선수들이 몸을 만들고 있는 공간이다.

각 출입문마다 프로선수의 이름이 붙었다.

‘도경욱...도경욱!’

왼손에 체크리스트를 든 준모가 도경욱을 중얼거리며 출입문들을 살피기 시작했는데 정장 대신 상하 검정색 흑복인 필린의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파팟!

준모의 눈이 빛난다.

‘도경욱’

마침내 찾았다.

‘많은 건 필요 없고 기분 상태만 보고와.’

두호의 말이었다.

도경욱이 혹시나 비장의 무기 같은 걸 숨기고 있지는 않는지 염탐해오라고 할 줄 알았는데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만 체크하라는 것이었다.

꿈틀!

도대체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어쩌면 이번 대회 가장 큰 고비가 될 수 있는 것이 2라운드 프로들과 대결이다.

그러나 고작 알아오라는 것이 기분과 상태라니 준모는 연신 고개를 갸웃 거렸다.

“흠!”

준모는 문 앞에 서서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다시 한 번 복장을 확인한다.

왼쪽 가슴에 로드매니저 양준모라는 명찰을 한 번 쓰다듬고 어금니를 문다.

‘형님을 위해서라면 사나이 한목숨 아깝지 않다!’

초빙되어온 프로들이라고 모두 몸값이 동일하지 않다.

얼핏 듣기에 2라운드 도전자를 꺾는 프로선수와 패배한 선수와의 파이트 머니가 크게 차이난다고 들었다.

그러므로 더욱 예민해져 있으며 외부인의 등장을 꺼려 할 것이 뻔했다.

‘아잣! 나는 백두호의 오른팔 양준모다.’

비장한 결의를 다지고 문을 열고 들어섰다.

덜컹!

문소리에 한 사내가 돌아보았다.

“누구야?”

코치 한 명이 다가왔다.

코치의 뒤쪽으로 한 사내가 야수처럼 거친 숨소리를 내며 샌드백을 두드리는데 바로 도경욱이었다.

“무슨 일이시죠?”

준모의 유니폼에 코치의 눈빛이 조금은 수그러들었다.

외부인이 아닌 필린 직원이라는 것에 다소 마음을 놓은 모양이다.

준모는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코치를 바라보았다.

“잠시 들렸습니다. 선수분은 좀 어떠세요?”

“공짜 없잖아요. 리벤지도 걸려있으니까.”

땀을 흘리며 연습하는 도경욱을 보며 웃었는데 한 푼의 파이트 머니라도 더 받고 싶으면 열심히 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준모는 슬쩍 서류를 들어올렸다.

“회사 차원에서 온 겁니다. 준비는 잘 되가는지, 어떤 고충은 없는지.”

“아직 그런 건 없습니다. 음...”

코치는 말없이 준모를 바라보았다.

필린 사람이라고 해도 얼른 내보내고 싶은 모양이다.

“음! 이 방이 도경욱씨 맞죠?”

그러면서 손에 들린 체크리스트를 살핀다.

“맞네 도경욱!”

그리고 코치가 말릴 틈도 없이 훈련하고 있는 도경욱 근처로 다가간다.

“아니 잠깐만요.”

준모는 코치를 무시하고 도경욱을 가까이서 본다.

“회사에서 이런식의 점검이 있다는 말은 없었는데요.”

“시키는 일만 할 줄 아는 직원, 시키는 일 말고도 스스로 일을 찾아내서 하는 직원, 회사 대표라면 누구와 회사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을까요. 전자? 후자?”

내 출세길을 당신이 이런 식으로 막으면 되겠느냐는 은근한 타박이다.

퍼퍼퍽!

왼손 스트레이트에 이어 오른손 바디를 칼 같이 후벼넣는 도경욱의 주먹에 샌드백이 터질 것 같았다.

준모는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프로는 역시 다르구나.’

도경욱은 이번 예선전에서 두호와의 타격전을 복기했다.

킥복싱부터는 엇비슷해 보였을지는 몰라도 복싱 상황에서는 굴욕의 가까운 경기 내용을 보였다.

자신의 단점을 보완해서 싸우는 것 역시 중요하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복싱에 대한 감을 새롭게 끌어올리는 중이었다.

그 결과 그는 더욱 날카롭고 정확한 주먹을 장착하게 된 것이다.

“좋습니다.”

직원의 칭찬이라는 것 때문인가.

코치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주먹이 가벼운 걸 보니 도경욱씨 기분이 좋아 보입니다?”

“좋지는 않을거에요. 몸 상태는 최고입니다만.”

코치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 역시 지금 도경욱의 몸 상태가 절정임을 느끼고 있었다.

“누군데?”

훈련을 하던 도경욱이 한쪽 벽에 걸린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물어왔다.

물 한 모금을 입만 적실정도로 마신 그는 다시 샌드백을 때리기 시작했다.

“필린 직원이래. 뭐 점검차 나왔다는데?”

여전히 빠른 속도의 움직임을 보여주는 도경욱이었다.

“걔 이름이 뭐였지? 예선에서 너랑 붙은 놈 말이야?”

도경욱은 대답 없이 묵묵하게 샌드백을 치고 있었다.

코치가 씨익 웃어보이며 말했다.

“그놈 만나거든 좀 전해주쇼. 관 하나 맞춰 놓으라고.”

두호의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자 도경욱의 눈빛이 빛난다.

-쾅

거친 숨소리와 함께 도경욱이 훈련을 멈췄다.

천천히 몸을 돌려 섬뜩한 눈빛으로 준모를 돌아본다.

절치부심.

독기를 품은 눈빛이 이 네 글자를 말해주고 있었다.

준모는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매만졌다.

“하하. 정말 큰일났네요. 제가 그분한테 잘 숨어다니라고 전해드리겠습니다.”

황급히 옆에 두었던 서류를 챙겨 든 준모였다.

“그럼 준비 잘 하시고. 전 이만.”

빠른 속도로 방을 빠져나가는 그를 코치는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준모는 방을 빠져나오며 도경욱의 훈련장을 힐끔 쳐다보았다.

쓰고 있던 모자를 훽하니 벗어버리고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 자식 눈빛 진짜 살벌하네.”

하지만 이내 준모는 히죽 웃었다.

“관 하나 맞춰 놓으라고? 그런 말 하고 형님한테 안 얻어터진 놈을 못 봤다 새끼야.”

카악!

준모는 침을 뱉고 돌아섰다.

이번 대회를 위해 초빙된 프로들은 개인 훈련장을 제공해 줬지만 참가자들은 틀리다.

그들은 모두 공동의 훈련장을 사용한다.

북적거리는 훈련장으로 들어선 준모는 두호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준모씨!”

낯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탁현이 가벼운 웃음을 지으며 다가온다.

“탁 코치님!”

준모 또한 반갑게 맞는다.

“탁 코치님. 혹시 두호 형님 어디계신지 아십니까? 여기서 훈련한다고 했는데.”

“두호씨요?

되묻는 것이 탁현도 두호의 행방은 모르는 것 같았다.

사실 탁현도 두호를 보러왔다.

이번 대회에 우연인지 아니면 의도적인지 몰라도 이상하게 두호와의 접촉이 쉽지 않다.

직간접적인 지원책이 준비되어 있지만 두호는 전혀 이용하려들지 않은 것이다.

“난 형님 찾아 볼테니 수고 하십시오.”

“두호씨 보면 얼굴 좀 보자고 하세요.”

“옛썰!”

준모는 손을 들어보이고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훈련하는 두호를 찾았다.

다른 2라운드 출전자들은 치고 꺾고 구르며 격렬한 훈련을 하는데 두호는 그렇지 않았다.

기둥에 밴드를 묶어 자신의 몸에 건 상태로 런지(허벅지와 엉덩이에 탄력을 주며 하체 근력을 강화하는 운동)를 할 뿐이었다.

헬스 체육관에 운동 나온 초보 회원의 모습이다.

“형님!”

두호는 자세는 변하지 않은 채 고개만 돌려 준모를 바라보았다.

좌우 발을 바꿔가며 상체를 꼿꼿하게 세우며 런지를 하는데 얼굴에 땀이 수북하다.

준모의 눈이 커졌다.

팬츠 밑으로 드러난 두호의 허벅지가 단단하게 펌핑 되어있다.

‘늘 보는 거지만 하체가 정말 장난 아니네.’

주먹의 파워는 하체에서 나온다고 들었다.

어쩌면 두호는 주먹 하나만으로도 이번 대회를 거머쥘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입을 열었다.

“별 것 없던데요? 화만 잔뜩 나서 샌드백만 냅다 후려까는데. 형님한테 맞아죽을 운명인지도 모르고, 건방진 짜식이.”

두호가 무슨 말이냐는 듯 바라본다.

“복수심에 불타서 잔뜩 독이 올라있던데요.”

그러면서 도경욱의 코치가 했던 말을 그대로 전달했다.

두호는 싱긋 웃는다.

1라운드 예선에서 푸르디푸른 아마추어에게 추한 꼴을 당했으니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다.

“기분은?”

“당연히 안좋아 보이죠. 이를 갈면서 관 준비하라고 하더라니까요?”

“하긴.”

두호는 자신의 계획에 확신이 생긴 듯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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