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5화 : 물이 되게. 친구여.
백평파전의 지하실에 수미와 채호가 앉아있었다.
“어르신 덕분에 좋은 날개를 얻었습니다.”
낮에 있었던 매일은행과의 미팅을 말하는 것이었다.
수미는 채호의 찻잔에 차를 따라주었다.
“내 덕이겠나. 이 대표의 능력이 출중한거지.”
“어르신이 아니었으면 시작도 못했을 일입니다.”
매일은행장 최진철은 PRIDE-K 판이 워낙 급속하게 커져 더 망설였다가는 자리가 없을 것 같아 부랴부랴 뛰어들었다고 했지만, 과거 수미의 지하은행 시절의 영향력이 적지 않게 작용했음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금융업계와의 협업은 양날의 검이야. 조심히 다루시게.”
“명심하겠습니다.”
노장철 팀장을 만나고 회사로 돌아가는 중 수미의 전화가 왔다.
그래서 부리나케 달려온 것이다.
지금 수미가 맡아준 일들은 어쩌면 PRIDE-K에서 가장 중요할 수도 있다.
그녀만이 아는 파격적인 인맥을 동원해 판을 키우고 있었다.
그 덕분에 여기저기 광고와 협찬을 요청하며 아우성인 것이다.
그리고 이 판 자체를 위협할 위기를 수미가 일선에서 막아주고 있다.
수미는 문득 오늘 배틀먼스의 결과가 궁금했다.
“그 아이는?”
수미가 배틀먼스에서 궁금할 것은 두호밖에 없다.
채호가 준비한 기획안을 본 그녀는 내심 두호의 부상을 염려했다.
실력에는 언제나 운도 포함되는 것이니까.
채호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1라운드는 단번에 합격했습니다. 코치진들 말로는 엄청났다고 합니다.”
채호는 단번에라는 단어에 힘을 주었다.
부풀릴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기분 좋게 소식을 전해주는 것도 중요하다.
수미의 표정이 밝아진다.
“그래야지.”
별 감흥 없는 척 하지만 수미의 시선은 털실로 향한다.
두호가 선물로 가져온 것이다.
선물이란 비싸서 좋은 것이 아니라 마음이 담겨 있어야 아름다운 것이다.
수미는 찻잔을 들어 기분좋게 향을 음미했다.
그때 누군가가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타난 이는 황석희였다.
“다녀왔습니다.”
수미에게 인사를 하다 채호를 발견한 황석희는 가볍게 목례를 했다.
“고생했구먼.”
“어디 다녀오시는 겁니까?”
채호가 부드러운 시선으로 묻는다.
황석희는 곧바로 수미의 맞은편으로 걸어왔다.
“자료는 여기 있습니다.”
황석희는 서류 봉투 하나를 수미에게 넘겨주었다.
수미는 자신의 목에 걸린 안경을 쓰며 서류 봉투를 열어보았다.
스윽!
그때 채호의 시선이 황석희 소매로 향한다.
소매 끝에 묻은 핏자국이 눈에 띄었다.
“괜찮으십니까?”
황석희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예. 별일 아닙니다.”
둘의 대화에 서류를 보던 수미가 황석희의 소매를 슬쩍 바라본다.
수미는 이내 시선을 거둬 서류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
서류를 읽는 수미의 얼굴에 변화가 없어 좋은 건지 나쁜 내용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툭!
수미가 서류를 던지듯 놓았는데 그 바람에 안에 들어있는 사진 몇 장이 밖으로 삐져 나왔다.
“으흐흠!”
길게 숨을 내쉬는데 달가운 기색은 아니다.
황석희는 삐져나온 맨 위 사진을 가리켰다.
조상무였다.
“모로 해피 캐피탈이라.”
수미가 중얼거린다.
“그 친구가 모회장 오른팔이자 머리 역할을 하는 조상현 상무죠.”
삐져나온 사진 속 인물을 말하는 것이었다.
“모로 해피 캐피탈이요?”
채호가 다소 놀라는 얼굴을 하더니 손을 뻗어 사진을 쥐었다.
하지만 알지 못하는 얼굴인 듯 갸우뚱했다.
“모로해피캐피탈이라면 3금융권에 속한 대부업체로 알고 있는데.”
“아십니까?”
황석희가 묻는다.
“이름만 아는 정도입니다. 케이블에서는 광고도 많이 하니까요.”
그러나 접점도 없는 놈들이 어째서 달려든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사채와 다단계로 시작한 인물입니다. 얼마 전 저희 쪽과 직접적인 마찰이 있었습니다.”
채호가 이해하지 못한 듯하자 황석희가 지난 일들을 모두 얘기해주었다.
“모영배가 날 노린다? 그때 일 때문인가.”
수미는 피식 웃었다.
“그런데.”
황석희가 말을 더듬는다.
“놈들을 조지다 보니 조금 다른 것이 나왔습니다.”
수미가 이마를 찡그렸다.
“조상무라는 친구가 일사천리에게 약 판매상을 수배해달라고 한 모양입니다. 이 바닥에서 심지가 굵은 그 사람이 약에 손을 댄다는 것이 사실 이해가 잘되지 않습니다.”
약이라는 말에 채호의 눈이 반짝였다.
노팀장에게서도 이번에는 마약이 아닌 다른 종류의 약들이 움직이는 낌새가 있다고 했다.
운동선수들이 사용하는 약물.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고 하필 지금 시점에 PRIDE-K가 열리고 있다.
노 팀장의 말이 확실시되는 순간이었다.
“왜 그러나?”
채호의 표정이 변하자 수미가 묻는다.
“오늘 사실 강서경찰서를 다녀왔습니다.”
채호는 자신이 노반장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전했다.
채호의 얘기를 듣고 나서도 수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일단 쳐 볼까요?”
황석희가 눈을 번뜩인다.
그러나 수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돼. 환부를 정확히 알고 칼을 대야지 무작정 휘둘러서는 뒷탈 난다.”
어설프게 건드렸다가는 진흙탕 싸움이 될 수도 있다.
진흙탕 싸움에 같이 끌려들어 간 것만으로도 수미에게는 손해일 수밖에 없다.
PRIDE-K 관계자 중 한 명이 폭력집단의 이권 싸움에 개입했다는 뉴스라도 나가버리면 끝장이다.
“좀 더 분명해질 때까지 지켜보기만 해. 확실하다 싶을 때 날짜 잡아서 수술 해버리자고.”
“네. 알겠습니다.”
황석희가 지하실을 걸어 나갔다.
“참 인생 복잡해.”
수미가 한숨을 쉬었다.
“본디 열 장정이 한 도둑 못 막는 법이니 이 대표는 내부 단속에 신경 좀 써주시게.”
언제든 대회 내부로 번질 가능성을 확인했다.
바깥은 자신이 막아주겠지만. 내부는 필린이 해야한다.
“네 알겠습니다.”
수미는 자신의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모사장도 결국 이렇게 되버렸구만.”
과거 자신을 배신했던 면면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어딘가에 잠겨있다.
“당신도 열심히 발버둥 쳐봐.”
수미의 눈이 섬뜩하게 번들거린다.
* * *
오랜만에 쾌청한 날씨다.
전날 늦은 시간까지 도경욱의 관련자료를 보며 두호는 전력을 분석했다.
넘겨받은 자료에는 공식적인 프로 데뷔전부터 마지막 경기까지의 영상이 담겨있었다.
예전에 주민이 했던 말이 있다.
- 두호씨. 이제는 이 스포츠도 치열한 두뇌싸움 눈치싸움이에요.
아마추어가 프로를 이길 확률은 극히 희미하다.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다르다.
프로가 가진 기본적인 실력이 참가자들보다 훨씬 뛰어날 테지만 그들에게 없는 것이 있다.
프로는 알려졌고 이쪽은 드러난 정보가 없다는 것이다.
당장 이 관련 자료 없이도 인터넷 사이트만 돌아다녀도 도경욱의 경기들은 지천으로 굴러다닌다.
그가 사용하는 주특기는 무엇이고 숨기고 싶어하는 취약한 부분은 어떤 것인지, 또한 부지불식간에 드러내는 습관에 평소의 성격까지도.
몇 가지의 가닥이 잡혔다.
하지만 그의 약점을 알았다고 전략이 완성되지는 않는다.
경기 중 그 약점을 이끌어내는 방법까지가 계획의 완성이다.
“으음!”
도경욱의 숨소리까지도 기억할 만큼 훑고 또 살핀 두호는 복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조금 더 중요한 정보가 필요하다.
“형님!”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몸을 돌렸다.
준모가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었다.
“찾으셨습니까?”
준모는 거친 숨을 몰아 쉬었다.
“무슨 일입니까? 어떤 개자식이 형님을 괴롭힙니까? 정리할 놈이라도.”
두호는 빙긋 웃었다.
“들어봐!”
두호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얘기를 듣는 준모의 눈이 갈수록 변하더니 급기야 불덩이처럼 이글거린다.
그대로 나뒀다가는 무슨 일이라도 칠 모습이었다.
“무리하지는 말고. 수고 좀 해줘.”
지시사항을 들은 준모는 가슴팍을 탕하고 쳤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오른팔로써 맡은 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타탁!
두호는 준모의 어깨를 토닥이고 몸을 돌려 걸어갔다.
준모는 두호의 뒷모습을 지켜보다 비장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반대방향으로 뛰어갔다.
* * *
호텔 건물 곳곳이 이번 대회를 위해 적지 않은 탈바꿈을 했다.
대회를 보다 빛내기 위한 특설 경기장을 종목별로 준비한 것이다.
복싱, 킥복싱, 레슬링, 주짓수. 컨디셔닝을 포함한 여러 부대시설까지 갖추었다.
2라운드가 벌어지기 전 잠시 준비할 시간이 주어진다.
즉 선수들은 2라운드를 대비해 각 경기장을 찾아가 필린의 담당 트레이너들로부터 훈련지도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상의를 탈의한 사내들이 우글거린다.
본래는 도복을 착용하지만 종합 격투기 특성상 상의를 벗기 때문에 모두가 탈의를 한 주짓수 관(館)이다.
많은 주짓떼로들이 어울려 롤링(주짓수에서의 스파링)을 하는 중이었다.
필린에서 주짓수 관의 메인 코치로 파견된 이는 김태훈이다.
“거기서 어깨를 단단하게 잡아야지!”
롤링중인 공간을 천천히 돌아다니며 한 사람씩 코칭을 봐주고 있었다.
전체적인 참가자들의 수준이 만족스러운지 밝은 표정이다.
자신과 같은 분야를 수련하는 많은 사람들이 훈련에 정진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주짓수인으로서 즐거울 일이다.
메인 단상으로 올라가 팔짱을 낀 채 매트 위 전체적인 상황을 돌아보았다.
멈칫!
참가자들의 동작을 교정하고 살피며 돌아다니던 태훈의 시선이 한 곳에 멈췄다.
일준과 한 참가자가 롤링 중이었다.
일준이 바닥에 깔렸지만 엑스가드(상대의 한쪽 다리에 X자로 다리를 걸어 포지션 스윕을 시도하는 것)로 상대를 넘어뜨리려 했다.
순식간에 상대는 휘청하고 이내 몸이 뒤쪽으로 넘어갔다.
완전히 등으로 떨어지는 것은 곧 마운트를 내줄 위기가 오기에 한쪽 팔을 본능적으로 땅에 짚었다.
그 모습을 본 일준의 얼굴이 미소에 번진다.
훅!
일준이 재빨리 상대의 다리를 자신의 위쪽으로 당기자 중심을 잃고 무너진다.
화악
그야말로 전광석화였다.
한순간에 감아버린 니바(상대편의 다리를 팔과 양다리로 고정하고, 허리힘을 이용하여 지렛대 원리로 상대편의 하체를 꺾는 기술)가 들어간다.
당황한 상대는 바닥을 횡으로 굴러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일준은 굴러가는 상대와 함께 몸을 맞춰 구른다.
유려하게 니바에서 힐 훅(두 다리로 상대방의 한쪽 다리를 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한 후 겨드랑이에 발을 고정한 상태로 팔을 이용해 발목을 비트는 기술)으로 그립을 고쳐 잡았다.
-우지끈.
결국 상대는 통증을 견디지 못하고 일준의 다리를 툭툭 쳤다.
항복 선언인 탭이다.
그러나 일준에 표정이 의미심장해졌다.
탭을 쳤지만 일준의 그립은 풀리지 않았다.
“악!”
상대의 비명이 주짓수 관을 울린다.
“저런 미친새끼!”
태훈이 달려갔다.
“탭 쳤잖아!”
“야 떼어놔!”
다른 직원들까지 합세하여 두 사람을 떨어트려 놓았다.
일준은 그제야 붙잡았던 다리를 풀어주었다.
태훈은 잔뜩 분노한 표정으로 일준에게 다가갔다.
“왜 탭을 쳤는데도 놓지 않은 겁니까.”
일준은 양 손을 들어올리며 왜그러느냐는 제스쳐를 취했다.
오히려 뭐가 잘못됐느냐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아이 참. 미안합니다.”
가끔 훈련에 깊이 빠지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깜빡할 수가 있긴 했다.
‘뭐 이 따위가.’
태훈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일준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