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4화 : 물이 되게. 친구여.
누군가 일부러 전등을 고장 낸 듯 불이 켜졌다 꺼졌다를 반복했는데 한 번씩 켜질 때마다 돌아가는 상황이 좀 더 자세히 보였다.
황석희의 부하들이 일방적으로 사내들을 도륙하고 있었다.
한 사내가 양팔로 부하의 칼을 쥔 손을 붙잡았다.
“니...니들 뭐야... 어디서 보냈어?”
부하는 대답없이 재빠르게 반대손으로 칼을 바꿔 잡은 뒤 사내의 허벅지를 찔렀다.
“끄악!”
칼에 찔린 사내는 허벅지를 감싸안으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쥐가 이러리라.
사내들은 결코 빠져 나갈 수 없다는 걸 절감한 듯 같이 죽자는 식으로 덤벼 들었지만 체계적인 황석희 부하들을 당해내지 못했다.
“죽이면 안돼. 숨은 붙여놔!”
황석희가 한 사내의 가슴을 향해 칼을 휘두르는 부하를 보며 말했다.
“네!”
“걱정마십시오.”
부하의 칼은 가슴을 향한 듯 하다 어깨를 파고들었다.
사내는 어깨를 감싸 쥐고 무너졌다.
거친 숨을 뱉으며 부하를 올려다보지만 부하는 싸늘하게 그를 내려다 볼 뿐이었다.
촤촤촤!
잠시 지켜보던 황석희는 벽의 스위치를 똑딱이며 켰다 껐다를 반복했다.
하지만 형광등은 여전히 변화 없이 고장 나 있었다.
퍼억!
신경질적으로 스위치를 때렸더니 웬걸 불이 고장 없이 들어왔다.
아니 켜진 불이 더 이상 꺼지지 않았다.
싸움은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마치 확인사살 하듯 조금이라도 저항하는 자만 골라냈다.
딸칵!
황석희는 담배 한 개비를 피워 물었다.
“으으으!”
고통 가득한 신음이 끊이지 않는다.
쓰러진 사내들은 모두 어딘가에 기대어 상처입은 부위를 감싸쥐었다.
그들에게 더 이상 반항할 여력은 없어 보였다.
“그만!”
황석희는 나직하게 말했고 부하들이 물러섰다.
부하들 역시도 완전하게 온전할 수는 없었다.
상대의 피인지 아니면 자기 피인지 몸 여기저기가 붉게 물들었고 일부는 절뚝거리기도 했다.
툭!
바닥에 담배를 버리고 구둣발로 비벼끈다.
이윽고 쓰러진 사내들의 머리를 움켜쥐고 얼굴을 살피기 시작했다.
퍼억!
찾는 사내가 아닌 듯 팽개치듯 머리를 바닥에 박아 버린다.
퍽!
퍼어어!
황석희는 같은 동작을 반복하여 사내들 얼굴을 일일이 확인했다.
“여기 있습니다. 부사장님!”
사내의 얼굴을 알고 있는 부하중 한 명인 영준이 창가에서 말했다.
황석희는 창가의 영준에게로 다가갔는데 발 아래 한 사내가 꿈틀 거리고 있었다.
화악!
영준이 사내의 머리채를 잡아 확 꺾었다.
그러자 얼굴이 천장을 향해 돌려졌고 황석희가 내려다 본다.
확실하다.
얼마 전 수미와 자신들을 쫓던 일행 중 한 명이다.
“으...으...”
스윽!
황석희가 손을 뻗자 부하가 옆구리에 차고 있던 회칼을 뽑아 건네준다.
콱!
황석희는 칼을 단단하게 움켜쥔다.
칼을 훑어보는 황석희.
칼의 면으로 자신의 얼굴이 비춰보인다.
이내 한쪽 무릎을 꿇고 사내와 눈높이를 맞춘다.
사내는 숨을 헐떡이며 황석희를 바라보았다.
“몇 가지 물어볼거야. 신중하게 대답해.”
사내의 두 눈이 파도처럼 흔들린다.
황석희에게서 사냥꾼의 차가움이 물씬 풍겨 나온다.
“예, 예!”
이런 사내에게 저항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바보 같은 짓이라는 걸 익히 안다.
“우릴 계속 감시한 이유가 뭐지?”
사내는 자꾸 침을 삼켰는데 두려운 모양이었다.
“얼마전 그쪽 어르신이 지금 무슨 일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라는 의뢰가 있었습니다.”
사내는 또 다시 마른 침을 삼키며 눈치를 본다.
뭔가 털어 놓을까 말까 저울 추를 재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러나 황석희는 추궁 없이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지독한 고요가 현장을 덮는다.
사내는 길게 고민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뜨거운 기름은 수증기를 내 뿜지 않는다. 수증기가 나지 않는다고 멋모르고 손을 집어 넣었다가는 화를 당한다.
눈빛이 덤덤한 이런 사람들일수록 비위를 거슬리면 돌이킬 수 없다.
“모...모로 해피 캐피탈.”
스윽!
황석희가 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이 사람?”
꿈틀!
사내의 눈썹이 파르르 떤다.
“네, 모로해피캐피탈 조상현 상무라고 합니다”
사내는 포기한 듯 속 내용을 털어 놓기 시작했다.
사내의 얘기가 길어질수록 황석희의 얼굴은 굳어졌다.
비는 그쳤으나 하늘은 먹구름에 덮였다.
달리는 봉고차 안에서 황석희는 유리를 살짝 내리고 담배를 피웠다.
모로 해피 캐피탈은 얼마전 자신들의 지하실에서 태건에게 호되게 당했었다.
그 회사에서 수미의 뒤를 바짝 쫓고 있는 건 당연히 앙갚음을 하기 위해서이다.
‘내가 모영배라면.’
더 이상 어둠 속에서 살 수만 없다고 판단한 수미는 모든 걸 털고 세상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 덕에 모영배는 졸지에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어 버렸다.
수미 없이는 벌려놓은 사업이 제대로 이뤄질 수가 없었다.
결국 과거 현성회 반란 시절처럼 수미를 제거하고 직접 자신이 그 위치에 올라서려 하는 것이다.
파앗!
황석희 눈이 빛났다.
* * *
엘리베이터 번호에 불이 빠르게 움직였다.
쨍!
소리가 나며 8층에서 멈춘다.
드르륵!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활짝 웃으며 두호에게 직원 한 명이 고개를 숙였다.
“백두호씨.”
“예!”
“이쪽으로 가시죠. 방 안내 해드리겠습니다.”
방 배정을 자주 바꾼다고 한다.
물론 아직까지 그 이유를 정확히 설명해주고 있지 않아 알 수는 없지만 짐작은 가능했다.
교도소를 생각하면 답이 나온다.
가끔씩 기습적으로 수형자들의 방을 수색하는데 위험한 물건이나 금지 물품이 있는지 조사하기 위한 행위인데 필린 또한 그러했다.
대회 규정에 어긋난 물건이나 대회 성적을 향상시킬 목적의 외부 물건 반입을 차단하기 위한 조치이다.
“여깁니다.”
8087라는 글씨가 선명했다.
사내는 문을 열어주고 말했다.
“짐 푸시고 이후 일정은 따로 없으니까 기상 전까지 휴식 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사내는 작은 철제 케이스를 건넸다.
“다음 미션 관련 자료입니다. 필요하신 것 편하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직원은 끝까지 밝은 미소를 보여주며 자리를 벗어났다.
사내가 돌아가고 두호는 방안으로 들어섰다.
사내에게 받은 키를 문 옆 센서에 꽂아 넣으니 곧바로 환해졌다.
상당히 넓은 호텔 객실 그대로다.
두호는 가방속에 들어있는 옷가지들을 꺼내 단정하게 접어 옷장에 넣었다.
아무리 흔적을 지웠어도 두호의 눈은 속이지 못한다.
은밀하게 가방을 뒤졌음을 알 수 있다.
물론 필린 측이다.
그들의 방침에 이의를 제기할 필요는 없다.
글러브와 마우스 피스 그리고 헤드기어까지 옷걸이에 잘 걸어 한쪽 벽면에 걸어놓았다.
대충 정리를 하고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오랜만에 찾은 휴식이다.
똑똑똑!
차인벨이 있는데 불구하고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두호는 걸어가 문을 살짝 열었다.
문을 열자 누군가 쏟아지듯 들어온다.
준모였다.
두호는 갑작스런 준모의 방문에 눈만 크게 뜨고 바라보았다.
준모는 들고 있던 두 개의 비닐 봉지를 탁자 위에 놓더니 재빨리 문밖을 살폈다.
복도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그는 문까지 걸어 잠근다.
“왜 그래?”
“만사 불여튼튼 아니겠습니까? 형님과 접촉하는 걸 누군가 봐서 좋을 건 없잖습니까? 아무튼 1라운드 통과하신 것 축하드립니다.”
두호는 어이가 없단 듯 웃었다.
“됐어. 그런 건 신경 안써도 돼.”
그러면서 탁자 위에 올려진 비닐 봉지를 열었다.
봉투 표면에 ‘할아버지 족발’이라는 상표가 눈에 보인다.
“축하도 할 겸 해서 사왔습니다.”
준모는 봉지 안의 물건을 꺼내놓기 시작했는데 순식간에 탁자 위로 음식이 가득 차려졌다.
“예술 아니겠습니까?”
수북한 족발과 쌈채소 옆으로 상추와 새우젓, 고추와 조각 마늘, 된장과 간단한 음료수까지 빼곡했다.
족발을 싼 랩을 벗기며 말했다.
“드시죠 형님!”
그러면서 자리에 앉아 커다란 상추 잎 두 개를 포개더니 아이 손바닥 크기 정도 되는 족발 두 점을 새우젓에 푹 젖도록 찍어 올린다.
그 위로 마늘과 부러뜨린 풋고추, 그리고 된장을 찍어 싸더니 한 입에 밀어 넣는다.
금방이라도 볼이 터질 것 같았다.
급기야 입술을 밀고 나오는 족발을 손가락으로 밀어 넣으며 씹는다.
우걱우걱!
족발씹는 소리가 방안을 울린다.
꾸우울꺽!
목젖이 상하로 크게 요동치며 족발을 삼킨 준모가 트림을 하며 말했다.
“쥑이는데요. 형님!”
그러면서 다시 상추 잎 두 개를 손바닥 위에 펼치더니 또 다시 탑을 쌓기 시작했다.
“채호 옆에서 일하게 됐다고?”
준모는 주먹만 한 쌈을 입에 넣으려다 멈칫했다.
“아 예!”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들고 있던 족발쌈을 내렸다.
“예수씨가 바쁠 것이라면서 대표님이 앞으로 신세 좀 지자고 하시더군요.”
준모는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쥐고 있던 쌈을 입속에 밀어 넣었다.
“대표님 모시고 매일은행 본점과 강서 경찰서를 다녀왔습니다.”
두호의 이마가 좁혀졌다.
매일은행은 보나마나 스폰십과 관련해서일 것이다.
하지만 강서 경찰서는 그려지는 그림이 없다.
꾸억!
또다시 준모의 목구멍으로 족발이 넘어간다.
딱!
준모는 서비스로 준 작은 사이다 캔을 따고 한 모금 마신다.
“그 개새끼, 노장철이라고 있는데요.”
준모는 화난 표정으로 자신과 수사팀장 노팀장의 인연을 말했다.
물론 자신은 전혀 죄가 없고 다짜고짜 자신을 게임산업진흥에 관한 법률 위반 어쩌면서 잡아간 아주 더러운 놈이라고 못을 박은 뒤 채호로부터 들은 얘기를 해 주었다.
“해외에서도 보고된 사례가 없는 약물?”
두호의 눈이 빛난다.
“노장철이 그랬답니다. 아무래도 시점이 묘하다. 추측건데 이번 필린에서 개최하는 PRIDE-K를 겨냥하고 모종의 약물 조직이 움직이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답니다.”
약물은 삼류 운동선수를 순식간에 정상급으로 올려놓는 기적의 물건이다.
운동선수에게는 결코 외면할 수 없는 황홀한 신약이지만 도핑에 걸리면 자신이 애써 쌓아 올린 모든 영광이 눈 녹듯 사라진다.
양귀비.
화려한 꽃 뒤에 숨어 있는 검은 아편이 사람을 파멸로 몰아가듯 선수들의 약물도 그런 것이다.
문제는 그런 약물이 설자리를 잃어가야 하는데 도핑에 걸리지 않는 방향으로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 세계적인 몇몇 프로선수들은 약물 복용을 의심받지만 도핑 테스트에 걸리지 않으므로 당당하다.
오히려 일부 세력이 자신들의 영광을 시샘하여 음모를 꾸민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두호는 등받이에 상체를 기대며 허리를 폈다.
한 사내가 떠오른다.
국가대표가 되고자 금지 약물까지 투약했던 한 사람.
자신의 주먹을 한계치까지 맞고서도 끝내 쓰러지지 않았던 복서.
그렇게까지 해야 했던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 역시 진심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바로 일준이다.
두호의 눈빛이 가라 앉는다.
지금 이 시점에서 그런 신약이 들어왔다면 뻔한 것 아닌가.
“형님 좀 드십시오. 저만 먹자고 사온 것 아닙니다.”
준모는 혼자 먹기가 미안했던 듯 어색하게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