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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신이 케이지 안으로-51화 (51/204)

제 51화 : 물이 되게. 친구여.

은행장실은 건물 꼭대기 31층에 있었다.

내려다보이는 여의도에 풍경이 점점 멀어진다.

고속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이쪽으로!”

사내가 왼쪽 복도로 손을 뻗어 안내했다.

복도 끝에 원목으로 된 자색의 문을 밀고 들어섰다.

책상에 앉아 일을 보고 있던 여비서가 일어나더니 미소를 짓는다.

“오셨다고 전해주세요.”

여직원이 인터폰을 눌러 말했다.

“은행장님. 필린 이채호 대표님께서 오셨습니다.”

“저를 따라 오시면 됩니다.”

안쪽으로 또 하나의 문이 있고 채호는 여비서가 열어주는 문 안으로 들어섰다.

“그럼!”

두 사내는 들어서는 채호를 향해 가볍게 목례를 했다.

탁!

문이 닫힌다.

책상에 앉아있던 한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쉰 중반 정도로 보였는데 정장차림인데 텔레비전 화면으로 몇 번 보았던 얼굴인 매일은행장 최진철이다.

“반갑습니다.”

반가운 듯 멀리서부터 손을 내밀며 걸어왔다.

“제가 가야 하는데 오시게 해서 미안합니다.”

채호는 빙긋 웃었다.

“은행장님 위치를 생각하면 안될 말이죠. 하하”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앉읍시다!”

두 사람은 자색 소파에 마주 앉았다.

그때 조금전 보았던 여비서가 쟁반에 찻잔을 받쳐 들고 와 조심스럽게 놓는다.

여비서가 돌아가자 최진철이 권한다.

“드시죠.”

코끝으로 담배 냄새가 슬쩍 맡아지는 붉은 색의 차는 홍차였다.

홍차를 바라보는 채호의 눈이 살짝 움직였다.

자신을 배려한 준비다.

가끔 여성지 인터뷰에서 즐겨 마시는 차에 대한 질문이 나올 때면 항상 홍차라고 대답했다.

“젊다는 얘긴 들었습니다만.”

생각보다 더 젊다는 얘기다.

채호는 가볍게 웃을 뿐 여전히 침묵이다.

딸칵!

문이 열리더니 채호를 안내했던 사내중 한 명이 파일 하나를 가져와 조심스럽게 놓고 나간다.

최진철은 파일을 열어 서류 몇 장을 넘기며 살피더니 탁하고 덮는다.

스윽!

그리고 파일을 한쪽으로 밀어 놓는다.

“대표님!”

최진철이 정색했다.

“전화로 얘기 드렸다시피 PRIDE-K에 우리 매일은행도 뛰어들어야 겠습니다.”

채호의 눈이 좁혀졌다.

이미 매일은행은 메인 스폰서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하지만 이 말은 더욱 깊은 관계를 원한다는 것.

“이것을 더 크게 만들 생각 없으십니까?”

곧장 말 돌리지 않고 정면으로 훅 치고 들어온다.

그건 반드시 들어오겠다는 뜻이며 필린이 어떤 조건을 내걸어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이다.

“저희가 언제 매일은행이 들어오는데 막았습니까?”

채호의 가벼운 농담에 최진철이 소리내어 웃었다.

“격투기에 대한 관심이 이렇게 클 줄 미처 몰랐습니다. 마치 월드컵 한일전이 열린 듯 가는 곳마다 PRIDE-K에 대한 얘기였습니다. 조금 전 차를 가져온 여비서분도 굉장한 격투기 팬이라고 하면서 필린에 대해 모르는 게 없더군요.”

최진철은 인터넷 댓글은 물론 이번 대회가 실시간 검색어의 순위 상위에서 꼼짝 않는다는 것과 필린에서 광고용으로 만든 예고편이 억대의 광고 수익까지 만들어 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최진철은 지금 단순히 보고만 받는, 즉 밑에 사람들이 챙겨준 정보와 지식에 기반한 얘기만을 늘어놓지 않았다.

자신이 직접 발로 뛰며 이번 대회에 대한 흥행에 대해 알아 보았음을 알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은행장님께서 이렇게 많은 내용까지 들여다보시고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대표님. 아시다시피 은행은 냉정합니다.”

이미 주판을 튕겨보고 손해가 나지 않는다는 확신이 섰기 때문에 스폰쉽을 제의한다는 뜻이었다.

“사실 대회 직전까지만 해도 가슴앓이를 좀 했죠.”

“무슨 일 있었습니까?”

“사실 아직도 국내 일부 시선은 MMA를 불편한 시선으로 봅니다. 잔인하다는 거죠. 하지만 처음 복싱이 나타났을 때 미국의 여론이 어땠습니까? 짐승이 되고 싶은 미친 인간들이라는 혹평을 받았습니다.”

복싱의 발전사는 그야말로 눈물 없이는 볼 수가 없다.

흉악하다.

과연 사람때리는 것이 무슨 스포츠란 말이냐.

말세라며 종교단체들부터 거부운동을 일으켰다.

하지만 완전한 스포츠이고 그 어떤 스포츠보다 속임수 없는 당당한 힘의 대결이라는 인식이 퍼지면서 격투기 최고 스포츠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지구촌 수 많은 사람들이 열광했던 복싱이 침체기에 접어들면서 그 자리를 MMA가 메우고 있다.

일 등은 공백을 허용하지 않는다.

채움을 넘어 이제는 복싱의 인기를 넘어설 준비를 마쳐가는 상태였다.

“회사에서도 설명회를 가질 때 분명히 이번 PRIDE-K가 보여주려 하는 모습은 젊음과 도전 그리고 극복이라고 했지만 색안경의 시선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아니잖습니까?”

채호는 상체를 소파 등받이에 붙였다.

“단순한 폭력으로만 치부하던 싸움이 이제는 세계를 열광케하고 어느덧 한국의 수많은 젊은 친구들이 그 꿈을 향해 달리고 있죠.”

“인기선수들의 파이트 머니는 어마어마 하더군요?”

“어디나 몸값의 차이는 존재하죠. 하지만 제가 보건데 앞으로 더욱 이 시장은 커질 것입니다. 안타까운 건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불모지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표님께서는 이유가 뭐라고 보십니까?”

“판 자체가 작으니 기업 입장에서도 진입하기에 고민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그 판 자체를 키우려 합니다.”

채호의 목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

최진철은 채호의 설명에 완전히 젖어 든 듯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그렇죠 맞습니다 하면서 적극 호응했다.

스윽!

어느 정도 얘기가 마무리 되자 최진철은 서랍을 열고 통장 하나를 꺼냈다.

통장 표지를 본 채호의 눈이 커졌다.

‘PRIDE-K X 매일은행 청년희망통장.’

이라는 글씨가 적혀있었다.

글 몇 글자 보자마자 채호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이번에는 최진철의 설명이 이어졌다.

단순한 예금부터, 적금과 청약 그리고 펀드까지 다양한 종목이 가능한 금융상품이다.

채호도 장사꾼이다.

최진철의 설명을 들으며 내심 놀라고 있었다.

PRIDE-K를 이용해 새로운 상품 출시는 물론 20대를 넘어 3,40대까지 끌어들이겠다는 야심찬 포부였다.

매일 은행에서 파격적인 조건으로 금융 상품 만든다.

대신 영업은 필린이 뛰는 것이다.

필린의 영업, 그건 이번 대회를 성공적으로 마치는 것이었다.

선수들에게 미래를 제시하는 건 필린이었다.

그리고 그런 필린에게 또 하나의 미래를 제시하는 매일은행.

사사삭!

계약서에 사인이 이루어졌다.

카메라를 든 은행 직원 앞에서 두 사람은 서로가 쓴 계약서를 주고 받았다.

* * *

퍽!

사내가 날린 주먹을 구열이 황급히 어깨로 받았다.

방어에는 성공했지만 MMA에서 숄더롤(상대의 공격을 어깨로 막거나 흘리는 복싱의 방어기술)은 좋은 선택이 아니다.

‘젠장.’

역시 예상대로 상대는 곧바로 고개를 숙여 구열의 다리를 잡아챘다.

상대의 중심이 살짝 떠오르는 걸 받아 낚아채는 더블렉 태클.

구열이 중심이 뒤로 밀리며 첨벙 소리와 함께 넘어졌다.

수심은 무릎 높이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사람 한 명이 잠기기에는 충분했다.

물속에 빠져있는 구열을 올라탄 상대는 거침없이 파운딩을 꽂았다.

구열은 쏟아지는 파운딩과 연못의 물로 인하여 호흡이 불가능했다.

발버둥을 쳐 보지만 물의 저항으로 인해 쉽지가 않았다.

파운딩을 내려치는 사내 역시 필사적이었다.

얼굴에 이미 가득한 피.

그 역시 지금이 승부처임을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절체절명의 순간.

구열은 급한대로 주먹을 막기 위해 상대에게 손을 뻗었다.

순간 사내의 눈이 반짝인다.

구열의 올라온 팔을 번개처럼 낚아채며 옆으로 드러누웠다.

정석에 가까운 암바(상대편의 팔을 잡고 팔꿈치를 꺾어 둥글게 감싸 누르는 기술) 연계.

그 모습을 물가에서 지켜보던 탁현이 씨익 미소지었다.

“그라운드로? 배짱 좋네.”

일반적인 경기장이라면 당연한 선택이다.

하지만 지금 이곳은 연못이다.

물속에서는 기술과 그라운드 포지션의 제약이 많다.

암바를 잡아챈 순간 모든 걸 건 도박을 한 것이다.

구열 또한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상대가 누우면서 생기는 반동을 이용해 한쪽 어깨를 튕겨 무릎을 꿇는 자세로 만들었다.

물 밖으로 빠져나온 구열의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서로의 위치가 바뀌었다.

이번에는 사내가 물에 잠겼다.

내려다보던 탁현은 눈을 찡그렸다.

구열의 동작을 보면 자신의 팔이나 호흡을 챙길 생각은 없다.

그저 상대의 탭과 KO를 시키기 위해 살을 내주고 뼈를 치는 것이다.

‘독한 놈들.’

양손으로 팔을 잡아채는 상대를 힘으로 떼어놓기란 불가능했다.

구열은 남은 한쪽 손을 과감하게 놓았다.

그리고 그대로 상대의 얼굴에 파운딩을 꽂기 시작했다.

한쪽 팔을 포기한 것이다.

“팔은 가져가라. 근데 경기는 내가 이겨야겠다.”

-쾅

-쾅

사내 역시 파운딩을 허용하더라도 팔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필사적이었다.

구열 또한 한 쪽 손으로 죽을힘을 다해 상대의 얼굴을 때렸다.

서로의 약점을 처절하게 물어뜯는다.

그렇게 20초쯤이 지났을 때 구열을 잡고 있는 사내의 팔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호흡을 참은 채 팔의 힘을 유지하기가 벅찬 것이다.

조금 공간이 생긴 구열은 재빠르게 자신의 팔을 빼냈다.

그리고 자유로워진 두 팔을 허리의 반동을 이용하여 파운딩을 세차게 꽂았다.

- 쾅!

결국 사내는 축 늘어졌다.

구열은 무릎을 꿇은 채 거친 숨을 내쉬었다.

흐르는 피와 쏟아지는 비로 인하여 그의 얼굴은 붉게 물들었다.

마치 상처입은 맹수다.

이이잉

싸이렌이 거칠게 울렸다.

메가폰에서 채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경기 끝. 생존자 25명 확인되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구열은 연못 상황을 둘러보았다.

확실하게 처음 시작할 때와 달리 서 있는 인원이 줄어들었다.

일부는 제 발로 걸어나가 끝내 포기를 했고 어떤 이는 거의 의식이 없는데도 연못을 나가려 하지 않아 필린 관계자들이 끌어낸다.

투지는 좋지만 싸움은 몸으로 하는 것이다.

정신이 살아있어도 몸이 망가졌는데 어쩌자는 건가.

한 사내는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스물 중반 정도로 보였는데 훌쩍거리며 우는 모습에 차갑기만 하던 탁현이 고개를 돌려 버린다.

그때 생존자의 명단이 한 명씩 불렸다.

‘최구열.’

최구열의 이름이 마지막으로 흘러나왔다.

자신을 끝으로 마지막 25명이 완성된 듯 싶었다.

‘이상 25명. 배틀먼스 잔류 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더 이상의 방송은 없었다.

꽈아앙!

붉은 번개가 서쪽 하늘을 갈랐고 귓청을 찢는 천둥소리가 연못을 후려친다.

구열은 살아남은 사내들을 돌아보았다.

멀쩡한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얼굴은 다들 피 칠갑을 했었고 옷은 흙탕물에 젖어 몸에 달라 붙었다.

철퍽!

쿵!

긴장이 풀린 탓인가.

하나둘 땅바닥에 큰 대자로 누워 버린다.

“으아아아아! 씨발 살아 남았다. 살아 남았다고오오.”

“내가 이겼어...내가 이겼어!”

한 사내가 퍼붓는 장대비를 향해 소릴 질렀다.

“흐흐흐흐!”

구열도 웃는다.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모든 것이 담긴 웃음이다.

“씨바아아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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