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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신이 케이지 안으로-48화 (48/204)

제 48화 : 끝까지 바라본 주먹에는 쓰러지지 않는다.

햇빛은 쾌청했다.

살랑거리며 불어오는 5월의 봄바람에 아카시아 향기가 묻어 있었다.

그야말로 난장판이다.

푸른 잔디밭에서 벌어지고 있는 싸움은 마치 건달들의 구역 전쟁을 방불케 했다.

땅을 뒹굴며 흙을 뒤집어 쓰는 것쯤은 신경 쓰지 않고 서로를 처절하게 물고 늘어진다.

비명이 터져 나왔고, 살이 찢어지고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폭죽 터지듯 흘러나온다.

스포츠로 볼 수 없는 생존을 위한 몸부림들이 질펀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주민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어 누군가를 찾는 듯 주민의 눈이 차분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색하듯 한참을 돌아다니던 주민의 눈이 한곳에 멈춰섰다.

“저기 있네.”

주민이 손가락을 들어 한 곳을 가르켰다.

그가 가리키는 손가락 끝에 두호가 있었다.

구열의 자세는 전형적인 복서의 자세였다.

두호도 그 싸움에 응해주려는 듯 맞춰 자세를 잡았다.

둘 모두 조심스럽게 서로를 탐색할 뿐 누구도 먼저 들어가지 않았다.

슉!

결국 먼저 주먹을 던진 이는 구열이었다.

앞 손.

모든 복서들에게 가장 강조되는 주먹이다.

- 앞 손이 세계를 재패한다.

앞 손의 역할은 백번을 강조해도 넘치지 않는다.

거리 조절과 효율적인 공격 그리고 상대를 압박하는 역할 말고서도 수많은 용도로 상대를 공략할 수 있는 손.

슉!

주먹이 날아온다.

두호의 눈이 반짝했는데 근래에 경험한 주먹들에 비해 모자라지 않는 스피드였다.

하지만 두호는 뻗은 잽을 그대로 타고 들어가 원투를 찔러넣는다.

-퍼퍽

시작하자마자 강한 원투를 허용한 구열은 한 발자국 물러났다.

구열의 상태에는 전혀 변화가 없다.

그 정도 타격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덤덤한 표정이었다.

원투를 치고 재빨리 타격거리 바깥으로 빠져나온 두호의 눈이 좁아진다.

강하든 약하든 원투를 맞았는데 눈도 깜짝이지 않는 구열에게서 흥미를 느낀다.

‘튼튼하네.’

앞으로 나오는 공격을 피하며 때리는 카운터의 충격은 배에 달한다.

전력을 다한 펀치는 아니었지만 저렇게 멀쩡하게 버틸 수준은 결코 아니다.

사삭!

구열은 다시 묵묵히 타격거리를 조여왔다.

탄탄한 기본기를 만들기 위한 세월이 보이듯 자세에 군더더기가 없었다.

한 발자국도 헛 내밀지 않겠다는 듯 신중하게 걸어왔다.

가드를 올리고 턱을 당긴 채 좌우로 상체를 흔들며 접근하는 구열에게서 단단한 바위 같은 기운이 느껴진다.

평범한 상대는 아니다.

주먹의 파괴력이나 현란한 테크닉을 구사하는 복서가 아닌 근성과 지구력, 저돌적으로 파고들어 쉬지 않고 충돌하는 인파이터의 냄새가 난다.

두호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 있다.

- 기술은 체력 위에 쌓는 것이다.

두호는 목을 양 옆으로 흔들며 가볍게 몸을 털었다.

구열은 흠칫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자신의 타격 거리 안으로 두호가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툭!

투툭!

두호는 순식간에 창 같은 펀치들을 찔러넣고 다시 타격거리를 벗어났다.

치고 빠지기를 반복하는 상황이 1분이 넘게 지속되었다.

츄츄츄!

구열 역시 전력을 다해 두호를 파고들었다.

그러나 아무리 압박을 하여도 닿을 수 없었다.

더욱이 링도 아닌 툭 트인 잔디밭에서 두호의 스텝을 따라잡는다는 것이 쉽지 않다.

슉!

슈슈슈!

구열은 더욱 파고들며 주먹을 뻗었다.

하지만 두호의 얼굴은 잡힐 듯 하면서도 잡히지 않는다.

상대방은 오는데 자신의 주먹은 닿지 않는다.

퍽!

가드를 단단하게 올려도 매섭게 빈틈을 찌르고 들어오는 두호의 손.

MMA 글러브는 복싱글러브보다 작기 때문에 가드를 하여도 안면으로 주먹이 비집고 들어오기 일쑤다.

퍼퍼퍼!

점차 속도와 무게까지 더해지는 두호의 펀치에 단단하던 구열의 기세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구열에게 처음과 전혀 바뀌지 않은 것이 있었다.

자신의 목표점을 정확하게 바라보는 눈.

맞으면서도 구열의 눈은 두호에게서 벗어나지 않았다.

작정하고 날린 펀치는 없었지만 그 정도 맞았으면 쓰러져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하지만 구열은 여전히 서 있었다.

문득 두호의 시선이 한 곳에 멈춘다.

구열의 두꺼운 목.

저 목이 아마도 맷집의 근원일 것이다.

두호는 자세를 고쳐 잡고 무게중심을 내렸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하지만 두꺼운 구열의 목은 쉽게 젖을 옷이 아니다.

단숨에 무너뜨릴 큰 한 방이 필요해 보인다.

두호의 미세한 자세 변화에서 뭔가를 감지했음인가 구열의 표정이 살짝 밝아진다.

작전변경을 읽은 것이다.

그리고 그 작전은 자신에게 큰 기회가 될 것이다.

한 방을 맞더라도 자신이 더욱 강하게 때리면 된다.

그는 직선으로 두호에게 다가갔다.

어차피 앞 손은 닿지 않음을 인정한 그는 있는 힘껏 뒷손을 던졌다.

부웅!

크로스 카운터다.

그러자 두호의 눈이 빛난다.

두호는 뒷손을 순식간에 잡아채며 주먹이 다시 돌아갈 때 끌려가듯이 파고들었다.

그러면서 힘껏 뒷손을 뻗었다.

구열은 당황한 듯 재빨리 가드를 바싹 올렸다.

빵악!

뒤이어 폭발적인 뒷손이 가드 위를 때린다.

팔이 안에서부터 울린다.

가드 위에 맞아도 파괴력이 제대로 실렸다는 뜻이었다.

구열은 순간적인 현기증에 이를 깨물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런데 후속공격이 들어오지 않아 구열은 고개를 들었다.

가드를 약간 내리고 앞을 바라보았는데 조금 전까지 있던 두호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헙!

자신도 모르게 소스라쳤는데 보이지 않던 두호가 자신의 옆에 바짝 붙어 서 있었다.

재빨리 몸을 돌려보았지만 한 발 먼저 묵직한 펀치가 턱을 찍는다.

총을 쏘듯 날아와 찍히는 두호의 스트레이트였다.

아무리 목이 두꺼워도 이런 정타는 소화할 수 없다.

순간적으로 다리의 힘이 풀리고 시선이 흔들리면서 구역질이 일어난다.

꽈당!

구열은 비틀거리다 넘어졌다.

두호는 끝났음을 직감하고 원래의 자리로 걸어갔다.

몇 걸음 걷던 두호가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구열이 무릎을 잡고 일어난 것이다.

두호는 자신의 무릎을 잡고 일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는 구열을 내려다보았다.

부르르!

온 몸을 떨더니 구열은 끝내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주저 앉았다.

‘진짜 복서구나.’

두호는 몸을 바로 세우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듬성듬성 서 있는 사람의 숫자가 줄어들고 있었다,

시체처럼 바닥에 쓰러져 꼼짝 않는 사람도 있지만 어떻게 해서라도 덤비기 위해 기를 쓰고 일어나려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학학!

“아...아직이야. 더 할 수 있어.”

피를 흘리는 사람도 있으며 누군가는 팔목이 부러졌는지 고통스런 비명을 터뜨렸다.

“악! 내 팔목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채수는 직원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직원들이 쏜살같이 잔디 밭으로 내려갔다.

승패의 기록과 부상자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수많은 참가자들 사이를 분주하게 뛰어다닌다.

차분하게 주위를 상황을 살피던 두호의 눈썹이 출렁거리며 모아졌다.

찌푸린 시선 속에 한 사내가 보인다.

일준이었다.

때마침 일준 역시 고개를 돌리다 두호를 발견하고는 멈칫 하더니 이내 씨익 웃는다.

카악!

일준은 바닥에 침을 뱉더니 거침없이 두호를 향해 걸어왔다.

가까이 다가온 일준은 손을 들었다.

“오랜만인데?”

“그렇네.”

두호 역시 살짝 웃었다.

“누구와 싸웠냐?”

그러면서 두호의 어깨를 툭툭 털어주었다.

두호는 우두커니 일준의 손길을 받아 들였다.

그러면서 일준의 몸을 스피듯 살폈다.

아무리 두꺼운 옷을 입어도 몸 상태를 숨길 수는 없다.

턱하니 벌어진 어깨와 목 주변에 단단한 근육이 그 역시 끈임없이 자신을 갈고 닦았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기분 어때?”

지금 기분을 묻는 건가 아니면 고등학교 시절 자신에게 패했던 당시 링 위에서의 기분에 대해 묻는 건가.

“별일 없고?”

두호는 대답 대신 안부를 묻는다.

일준은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돈이 급한가봐? 여기까지 기어나오고.”

일준은 멀리 있는 자동차와 현금 십억이라는 숫자가 쓰인 그림을 가리켰다.

“어떡하냐? 한 놈만 챙겨 갈 수 있는데, 필요하면 말해.”

우승을 자신한다는 뜻이다.

그러면서 필요하면 말하라는 건 두호의 경제적 어려움을 비아냥 거리는 것이었다.

“근데.”

두호의 말에 걸어가던 일준이 돌아보았다.

“이번엔 괜찮겠어?”

일준이 이마를 찡그렸는데 말뜻을 정확히 짚어내지 못한 것이었다.

“우리 만나야 할 것 아냐. 케이지는 아버지 못 올라오는데?”

두호는 빙긋 웃어주며 돌아섰다.

일준의 얼굴이 굳었다.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한 판 붙어보자는 뜻이다.

하지만 두호가 던진 말의 포인트는 뒤에 있었다.

이제 그만 아버지 바짓가랑이 그만 잡으라는.

고등학교때 시합은 철저히 아버지의 힘으로 얻은 소득이었으니 이번에는 그런 것 때려치우고 어른스럽게 혼자 오라는 것이다.

“개새끼가.”

일준의 눈이 뒤집어졌다.

모욕도 이런 모욕은 없다.

“백두호.”

일준은 버럭 소릴 지르며 살기를 뿜었다.

그때 스피커로 공지 방송이 들려왔다.

“참가자들 중 누구든 메디컬 체크를 원하는 사람은 로비쪽으로 오시길 바랍니다!”

부상자 치료를 위한 방송이다.

두호는 자신의 글러브를 벗었다.

그리고는 옆구리를 살짝 짚었다.

곧 찌릿하는 느낌이 온몸으로 퍼졌다.

얼마전 황석희와 충돌하며 입은 것이다.

두호는 몸의 상태를 보기 위해 메디컬 센터를 향해 걸어갔다.

* * *

‘금일 오전 7시. 경찰은 150억원 상당의 마약과 불법 약물을 대량 유통한 판매조직을 검거하였다고 밝혔습니다’

여자 앵커의 명료한 목소리가 모영배 집무실 안에 울려퍼졌다.

모영배는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유리곽을 열어 안에 있는 담배 하나를 집어들었다.

불을 붙이고 볼이 깊게 파일만큼 깊게 빨아들였다.

그에 반해 조상무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뉴스를 보고 있었다.

더이상 듣기 싫다는 듯 모영배는 리모컨을 훽하니 들어 TV의 화면을 꺼버렸다.

“하필 이럴 때.”

계획이 조금 틀어졌다.

단순한 마약보다 도핑성 불법 약물은 구하기가 더욱 쉽지 않다.

처음 거래를 계획했던 업체가 거래 직전 걸려버린 것.

모영배는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슬쩍 조상무를 쳐다보았다.

조상무의 표정은 변화가 없다.

“이러면 계획이 틀어졌다고 봐야 하는 것 아닌가?”

“수정은 해야겠지만 달라진 건 없습니다. 오히려 더 재밌어졌죠.”

모영배는 재떨이에 담배를 톡 하니 털었다.

“결정된 업체가 저런 꼴이 났는데. 무슨 수로 구해?”

조상무는 이미 계획안에 있는 내용인 듯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리고는 서류 하나를 꺼내 모영배에게 보여준다.

서류를 받은 모영배는 안에 사진 몇 장을 꺼내 확인한다.

“대청제약?”

“네. 제약회사입니다.”

자신 역시 TV 광고에서 본 기억이 난다.

모영배는 조상무를 보며 이게 무슨 뜻이냐는 듯 서류를 흔들었다.

“얼마전까지도 뒷골목에선 마약에 대한 소문이 끊이지 않는 곳입니다.”

조상무는 서류를 직접 뒤집어 연구원 단체 사진 하나를 올려놓았다.

“하지만 실제로 마약과는 연관이 없고, 그저 대청제약에서 퇴사한 연구원 출신 몇 놈이 마약을 만들어 판매하는 걸로 확인됐습니다.”

모영배는 흥미롭다는 듯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저 텔레비전에 잡힌 놈들이랑은 다른 놈들이고?”

“네. 그리고 이것 좀 보십시오.”

그리고 사진 한 장을 다시 위에 올려놓았다.

그 사진엔 한 사내가 올라와 있었다.

일준이었다.

“이 꼬맹인 누군데.”

“대청 제약 정도봉 대표 아들입니다.”

“이 놈이 왜?”

“과거 아시안게임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승부 조작과 약물 이슈로 제명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PRIDE-K에 참가한 것으로 확인했구요.”

순간 모영배 눈이 빛난다.

그의 머릿속에서도 어떠한 그림이 그려진 것이다.

눈치 빠른 조상무는 그 생각이 맞다는 듯 씨익 미소를 지었다.

“재벌 2세들이 대체로 사고 많이 치잖습니까?”

그 말을 들은 모영배는 집무실이 떠나갈 만큼 큰 소리로 웃었다.

“그건 그렇지.”

재밌다는 듯 더욱 큰소리로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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