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7화 : 끝까지 바라본 주먹에는 쓰러지지 않는다.
뜬금없이 첫 번째 미션이란 말에 참가자들은 모두 당황한 눈치였다.
“지금 바로. 여기서 싸울겁니다.”
순간 모두가 눈을 크게 뜬다.
아직 정확한 말뜻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예?”
“무슨 얘길 하는 거죠? 지금.”
채수는 참가자들의 당황한 표정을 보며 살짝 웃는다.
“그거 가져와요.”
직원 한 명이 자그마한 상자 하나를 들고 나왔다.
채수의 룰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사람들은 모두 집중해서 듣기 시작했다.
룰은 이러했다.
100개의 공에 1~50 까지의 숫자가 있다.
같은 번호를 뽑은 사람이 곧 자신의 상대.
그렇게 정해진 상대와 MMA룰로 붙으면 된다.
사내 한 명이 불쑥 손을 들었다.
“그럼 패배한 50명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대로 탈락인가요?”
채수는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 한참을 찌푸린 채 서 있었다.
“맞네요. 나머지 50명을 어쩌죠.”
“뭐야!”
참가자들 일부가 투덜거린다.
자신들은 인생을 걸고 여기서 싸우러 온 것인데 뭔가 허술해 보인다.
“단번에 떨어뜨리는 건 조금 그렇긴한데, 아 이렇게 합시다. 나머지 50명끼리 다시 싸워서 절반만 살리는 걸로?”
일어섰던 참가자들의 눈빛이 조금 가라앉는다.
한 번의 기회가 더 있는 것이다.
‘얼마나 준비를 했는데 한 번에 절반을 날리는 건 너무 한거지. 컨디션 난조라는 것도 있고.’
실력이 있어도 갑자기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제 실력을 보여주지 못할 수도 있다.
처음 질문을 한 사내가 재차 물었다.
“그럼 어디서 싸웁니까?”
“말했잖아요. 여기라고.”
참가자들은 모두 경악하는 표정이었다.
케이지가 아닌 여기.
즉 길바닥.
맨땅에서 스파링은 전혀 생각하지 못한 방식이다.
프로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
장내는 순식간에 술렁거렸다.
두호는 흥미로운 표정이었다.
하지만 방송 화면을 통해 맨땅에서 벌이는 치고 박는 모습이 나간다면 팬들 또한 열광할 것이다.
어떤 이는 개싸움으로도 볼 것이고, 누군가는 진짜 뒷골목 싸움의 현장감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필린의 의도 역시 엿보인다.
아무나 링에 오를 수 없다.
실력을 갖춘 자만이 링에 오를 수 있다는 메시지이기도 했다.
링은 그만큼 존중되는 장소라는 뜻이다.
불만이 가득해 보이는 참가자 한 명이 손을 번쩍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길바닥에서 싸우라는 건 너무 한 거 아닙니까?”
자신들은 격투를 하러 온 것이지 길거리 싸움을 하러 온 것이 아니다.
채수는 눈을 좁히며 이마를 찡그렸다.
그러자 누군가 질문을 한 사내에게 걸어갔다.
탁현이었다.
어느새 마주 선 탁현의 싸늘한 표정에 사내가 주춤 거렸다.
“그럼 우리가 자선단체야? 너희 같은 애송이들 싸우는거 보려고 10억이나 걸게?”
해당 사항은 앞에 사내만이 아니라는 듯 탁현은 주위를 천천히 훑어보았다.
“해외 랭커급 파이터들도 파이트머니가 10억이 겨우 넘는다. 그 급은 되시고?”
그의 조롱 섞인 시선으로 현실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자신들은 춤도 노래도 못한다.
그렇다고 어느 업계에서 인정받을 만한 재주도 없다.
가진 것은 그저 알량한 싸움 실력.
“이기고 지는 건 관심 없고 그냥 싸워. 혹시 알아? 여기서 재밌게라도 싸우면 타 단체랑 계약이라도 할지?”
앞에 선 사내는 침을 꼴깍 삼켰다.
“여기서 살아남은 한 명은.”
그리고 주위를 한번 둘러보며 씨익 웃음 지었다.
“책임지고 XFC까지 밀어준다.”
사내들의 눈빛이 순간 돌변했다.
XFC.
첫 계약금이 최소 억대.
최고의 시설과 최고의 스폰서들.
수 많은 복지들이 파이터를 위해 준비되어있으며 XFC와 계약을 한 것으로도 먹고사는 문제는
해결이 되었다라고 볼 수 있는 곳이었다.
확실한 목표가 생긴 그들의 눈에 독기가 가득했다.
“그러니까 잘들 해봐.”
탁현은 참가자의 어깨를 툭 치고는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채수는 씨익 미소를 지으며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다들 환복하시고 이곳으로 다시 모이겠습니다. 이상.”
운동복으로 환복을 마친 두호도 추첨을 하기 위해 줄을 섰다.
서두를 마음은 없었지만 도착하고보니 이미 줄이 꽤 길었다.
의료진은 참가자들의 몸 상태를 확인하고 있었다.
기다리는 동안 근처에 서 있던 방송국 직원들의 대화가 엿들린다.
“역시. 필린이 뭘 좀 아네.”
“그러게요. 뻔하게 진행될 줄 알았더니.”
“그럼 전 국민이 프로 파이터들 길거리 싸움 보는거야?”
“낄낄. 이거 방송본으로 보면 진짜 재밌겠는데요?”
희희낙락하는 방송국 직원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주인공들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어떤 스타일의 상대와 싸울지.
어느 정도의 실력자인지.
그 어떤 것도 알 수 없으니 답답하기만 할 따름이었다.
추첨함이 제법 가까워졌다.
바로 앞에 사내가 추첨함에 손을 넣었다.
염원이라도 하는 듯 손을 휘이 젓더니 공 하나를 뽑아들었다.
그리고는 앞에 있는 카메라에 비췄다.
그 사내의 번호를 확인한 채수는 곧바로 인적사항에 기록하였다.
“자. 다음!”
천천히 고개를 든 채수는 두호를 발견하고는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두호는 그런 채수에게 눈빛 한번 주지 않고 냉정하게 추첨함으로 걸어갔다.
그 모습에 채수는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여간 두호씨도 참.’
그 어떤 잡음도 만들지 않겠다는 듯 두호는 묵묵히 추첨함 안으로 손을 뻗었다.
적당히 공 하나를 집어들어 확인했다.
‘39번.’
상대가 누군지 모르니 좋은지 아닌지를 확인할 방법이 없다.
그리고 두호는 공을 뒤집어 들어 앞에 있는 카메라에 비췄다.
그러자 다시 채수가 받아적기 시작했고 직원 한 명이 두호를 안내했다.
두호는 마지막까지 한 번을 돌아보지 않았다.
직원은 두호를 데리고 간이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물품들을 보관하는 곳인 듯 산더미 같이 박스들이 쌓여있었다.
“보호대 착용하시고 아까 처음 장소로 돌아가시면 됩니다. 1 회차 미션은 개인 장비 사용금지입니다.”
지급된 보호장비는 단출하기 그지 없었다.
MMA 스파링용 오픈 핑거 글러브. 그리고 얇은 헤드기어와 마우스 피스가 끝이었다.
일반 스파링이라 할지라도 부족한 장비지만 길바닥에서 싸우기엔 굉장히 위험하다.
그러나 그런 부실한 장비 지급에도 두호는 무덤덤하게 장비를 받아 나왔다.
장비 착용을 마친 참가자들은 분주히 몸을 풀면서 추첨이 끝나길 기다렸다.
두호 역시 천막 앞 벤치에 앉아 글러브를 착용했다.
오픈 핑거 글러브는 스파링용과 프로용으로 구분되어있다.
프로용은 거의 맨주먹에 가깝지만 스파링용 글러브는 앞에 약간의 패드가 대져있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부실해 때리는 사람의 정권을 보호하는 수준이다.
이번 미션에서 지급받은 것은 스파링용 글러브.
두호는 글러브에 벨크로를 꽉 조여 붙이며 헤드 기어를 챙겨 일어났다.
가볍게 몸을 풀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언제 시작하려나.”
추첨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싸움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어서인지 입을 여는 사람은 없다.
각자 자신이 뽑은 탁구공 번호를 노려보거나 살필 뿐이다.
과연 누가 내 상대일까.
키는 클까.
싸움이라는 것이 신체적 조건에 따라 결과가 갈릴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나보다 열세에 있는 사람을 기다린다.
일부는 스트레칭을 하며 곧 벌어질 싸움에 대비했고, 어떤 참가자는 자신의 주특기에 대한 모션을 만들며 전열을 정비한다.
“언제 시작합니까?”
손목에 찬 시계를 잠깐 들춰본 채수는 탁현에게 고갯짓 했다.
탁현은 질문한 참가자에게 오히려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부터 알아서 하세요.”
탁현의 대답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서로가 눈치만 보며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있을 그때 한 사내가 큰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유욱 번!”
그러자 조금 뒤쪽에서 한 사내도 크게 소리쳤다.
“나도 육 번!”
마치 초등학교 시절 같은 반이 된 친구를 찾는듯한 모습에 참가자들은 재밌다는 듯 작게 웃음 지었다.
그렇게 두 사내는 천천히 서로에게 걸어갔다.
한 사내가 악수를 내밀었다.
그 순간.
처음 육 번이라고 외쳤던 사내가 곧바로 펀치를 날렸다.
-쾅.
크게 한 방 맞은 사내가 뒤로 넘어지듯 쓰러졌고 그리고 망설이지 않고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시작된 첫 번째 싸움.
참가자들은 당황한 표정으로 채수와 탁현을 돌아보았다.
인지부조화.
자신이 아는 격투기는 적어도 이렇게 시작하지 않는다.
터치 글러브와 서로에게 존중을 표하고 시작되는 것이 격투 스포츠 아닌가.
이렇게 근본 없이 시작되는 것이 맞는지를 묻기 위해 코치진들을 돌아본 것이다.
채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히죽 웃으며 상황을 지켜볼 뿐.
어떻게 보아도 긍정의 표현이다.
그 확실한 대답을 확인하니 하나둘씩 자신의 번호를 외쳤다.
“이런 씨발. 십칠 번!”
“사십구 번 누구야!”
모두가 각자의 상대를 찾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고 그렇게 마주친 상대들끼리는 곧바로 싸움을 시작했다.
서로가 서로를 찾고 그 주위에는 싸움이 벌어지는 특이한 상황.
이 모습을 지켜보던 일준이 큰 소리로 웃었다.
“하하하! 이 대회 진짜 골 때리네. 오십 번!”
답답하다는 듯 헤드기어를 벗어던진 일준은 땅에 침을 한번 뱉었다.
그러자 한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참가자들의 평균 연령보다 조금 많아 보이는 사내였다.
상대는 정중한 얼굴로 일준에게 물었다.
“혹시 오십 번이십니까?”
그러자 일준은 목을 풀면서 상대를 내리깔아 보았다.
“어.”
자신보다 훨씬 어려보이는 일준에게 반말을 듣자 그의 이마가 꿈틀했다.
일준은 그 모습이 재밌다는 듯 히죽 웃었다.
“나잇살 먹고 무슨 욕을 볼라고 여길 나왔어.”
사내는 더이상 입씨름 하기가 싫다는 듯 잔뜩 화난 표정으로 일준에게 다가갔다.
일준은 히죽 웃으며 마주 다가갔다.
한 사내가 자신의 번호를 크게 외치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43번!”
그야말로 목놓아 부른다.
사람들을 헤집고 다시면서 자신의 파트너를 찾는데 도통 나타나질 않았다.
“아이 씨발 좆같은 새끼네.”
욕설을 퍼부으며 돌아서는데 눈앞에 태건이 서 있었다.
“누구쇼? 설마 43번?”
태건은 아무말 없이 자세를 낮추었다.
툭!
그때 태건의 주머니에 들어 있던 탁구공이 떨어졌다.
사내는 공을 따라 시선을 내렸는데 43이라는 숫자가 보인다.
시선이 옮겨져 태건을 살핀다.
핏기 없는 얼굴과 읽을 수 없는 표정.
그러나 몸은 칼 같은 기세를 내뿜고 있었다.
사내는 긴장한 표정으로 자세를 마주 잡았다.
두호 역시 자신의 상대를 찾기 위해 돌아다녔다.
다른 사내들처럼 번호를 크게 부르지는 않고 자신과 같은 39번을 부르는 사내를 찾고 있었다.
그렇게 걷던 중 큰 목소리로 39번을 부르는 사내를 발견했다.
천천히 다가가 그의 어깨를 살짝 건들였다.
그러자 그는 화들짝 놀라며 두호를 향해 자세를 잡았다.
첫 싸움의 기습을 봐서 그런지 굉장히 경계하는 눈치였다.
두호는 그런 상대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였다.
“39번 백두호입니다.”
그 정중한 인사에 사내는 자신도 모르게 마주 인사를 하였다.
“39번 최구열입니다.”
두호는 이내 터치글러브를 위해 한 쪽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최구열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마주 한쪽 손을 내밀어 터치했다.
터치 글러브.
서로가 흘려온 땀을 존중하며 최선을 다하자는 격투기의 인사.
두호도 자세를 잡았다.
“잘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