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6화 : 끝까지 바라본 주먹에는 쓰러지지 않는다.
- 찌르릉.
알람이 울리고 바로 꺼진다.
자리에서 일어난 두호 아버지는 고개를 돌렸다.
으스름한 방구석에 새우처럼 잔뜩 등을 구부린 채 자고 있는 어머니를 바라본다.
어머니는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듯 했다.
스르륵!
발목 언저리에 걸쳐진 어머니의 이불을 어깨까지 끌어당겨주며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지는 슬쩍 창가 커텐을 젖혀 창밖을 살핀다.
밤은 아직 걷히지 않고 있다.
항상 어머니가 가게를 열었지만 오늘 병원을 가는 날이다.
바쁜 가게 일로 몇 년째 정기 검진을 받지 못하다가 이번에 큰 맘 먹고 시간을 낸 것이다.
그것도 아픈 곳 없는데 왜 가냐는 걸 아버지가 강제로 예약하여 오늘 잡은 것이다.
아버지가 옷을 들고 방을 나가려는데 등 뒤로부터 어머니 음성이 들린다.
“아직은 아침 저녁으로 추우니까 외투 챙겨나가요.”
“알았어. 다녀와요.”
어머니는 이불을 더욱 끌어당기며 돌아눕는다.
탁!
문을 닦고 밖으로 나온 아버지는 옷을 식탁 위에 놓고 화장실로 향했다.
버버벅!
남은 잠을 깨우기 위해 찬물로 얼굴을 씻었다.
외투 깃을 세우고 현관문을 열었다.
찬 바람이 휭하니 몸을 치고 지나간다.
뚝!
마당으로 내려서려던 아버지가 걸음을 세우더니 고개를 돌렸다.
거실 오른쪽 끝으로 방 하나가 있다.
잠시 불꺼진 두호의 방을 바라보던 아버지는 이내 마당을 걸어 나갔다.
툭!
현관문을 열고 나가자 뭔가 떨어진다.
현관 앞 우유봉투에 꽂혀있는 신문이었다.
신문을 오른손에 든 채 버스정류소가 있는 대로를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버스 안은 벌써부터 사람들로 가득했다.
동네 앞을 지나 강남까지 가는 143번 첫차.
첫차에는 꿈이 실려 있다고 했다.
다들 어떤 꿈을 꾸길래 꼭두새벽부터 저렇게 바쁘게 움직일까.
모두가 오늘은 또 얼마나 땀을 흘려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를 계산하는 듯 지그시 눈을 감는다.
“아저씨 앉으세요.”
백팩을 맨 학생 하나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아버지는 빙긋 웃었다.
학생들이야말로 이 시대의 진정한 노동자들이다.
저 무거운 가방은 그들의 등에서 떨어지지 않고 하루 종일 괴롭힌다.
“괜찮아요. 난 아무것도 들지 않았어요. 학생 앉아요.”
마음이 고마울 뿐이다.
학생은 계면쩍은 표정을 하며 자리에 앉았다.
문득 학생을 내려다보던 아버지는 아들 두호의 얼굴을 떠올렸다.
세상은 재능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보다는 재능 없이 사는 사람이 더 많다.
학생을 포함한 이 버스의 사람들 모두가 그렇다.
특별한 재능을 가지지 못한 대신 이들은 누구보다도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성실함을 갖고 있다.
그에 비해 두호는 모두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을 만큼 아름다운 재능을 받았다.
조바심내지 말고 여기 사람들처럼 묵묵히 가야할 길을 걸어갔으면 하는 게 아버지의 바람이다.
툭!
벨을 눌렀다.
다음 정류소에서 내려야 한다.
하나둘 시장에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소복상회’
처음 두호를 가졌을 때 가지게 된 가게였다.
큰 복 말고 작은 복에 감사하며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 지었다.
셔터 끝쪽에 잠긴 자물쇠를 푸는 중 누군가가 크게 불렀다.
“형님!”
쭈그린 채 고개를 돌린다.
“어어 우홍이.”
20여미터 떨어진 맞은편 청과물 가게 사장 정우홍이 양손에 커피를 들고 다가온다.
종이컵에 가득 들어있는 믹스커피를 내밀며 입을 열었다.
“웬일로 형님이 가게를 열어요? 형수님은?”
“오늘 집사람 정기검진이야. 그쪽 잡아봐.”
정우홍은 옆 가판대에 잠시 커피를 올려놓고 셔터 양 끝을 잡았다.
“하나 둘, 세엣!”
두 사람은 신호와 함께 철문을 밀어 올렸다.
드르르륵!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가게의 철문이 열렸다.
“고맙네, 잘 마실게.”
우홍은 마시던 커피를 챙겨 천천히 걸어갔다.
“형님 아침 안 했겠네요. 와이프가 무국 끓여서 싸줬는데 이따가 같이 한 술 떠요!”
“좋지. 제수씨 무국이면 한 입 해야지.”
아버지는 웃음을 지으며 낡은 진열대를 마른 걸레로 닦아냈다.
닦아낸 진열대에 건어물을 놓기 시작했는데 멸치는 종류대로 노란색 종이 포대에 담아 세우고, 오징어, 황태, 북어는 투명한 봉지에 담아 예쁘게 쌓아 놓는다.
제수용 건어물을 맨 아래에 진열한 아버지는 잘못된 건 없는지 다시 한 번 확인 한 뒤 가게의 의자에 앉아 가지고 나온 신문을 펼쳐 들었다.
1면 머릿 기사를 읽고 오른쪽 하단에 있는 오늘자 주요 기사를 훑었다.
‘필린. 신축된 ’웨스턴코리아 파주‘ PRIDE-K 진행 용도로 임대. 이번 PRIDE-K의 이채호 대표는....’
아버지는 눈썹을 찡그렸다.
‘대회 이름이 뭐라고 했지?’
‘PRIDE-K요.’
파라랑!
재빨리 5면을 넘긴다.
자세한 기사가 5면에 실렸다고 쓰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필린이란 말이지.’
5면이다.
강력한 훅을 날리는 만화그림을 배경으로 필린 관계자와 이번 대회의 특징과 상금등에 관한 기사가 대담형식으로 쓰여있었다.
배틀먼스가 진행되는 ‘리조트 웨스턴 코리아 파주.’
한국에서는 손꼽히는 리조트 호텔로 울창한 숲과 주변 경관, 특히 이곳에서 보는 선홍빛 일몰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낙조로 소문 나 있다.
하룻밤 숙박료가 특급호텔을 웃도는 이곳에서 이번 프라이드 대회 최고의 볼거리중 하나인 베틀먼스가 열리는 것이다.
주차장 입구부터 차츰 차가 막히더니 급기야 멈춰 선다.
핸들을 잡은 준모의 시선은 창밖을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우와, 이런 곳을 두 달이나 임대를 하다니 필린이 돈이 많다는 것이 사실인 모양인데요. 이런데서 하루만 자보는 게 소원이었는데.”
준모는 침까지 삼키며 설레는 가슴을 다스리고 있었다.
그에 반해 뒷좌석의 두호는 무덤덤했다.
흘끗 창밖으로 보이는 리조트 건물은 화려하다기 보다는 우아했다.
고대 그리스 신전을 연상케 하는 커다란 돌기둥은 처음 찾는 이의 기세를 꺾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장난 아닐텐데, 임대 가격요?”
준모가 밖을 보며 말했다.
“이런 유명한 리조트 호텔이 돈만 받고 임대해 준다는 것도 뭔지 격에 맞지 않을 것 같고.”
준모의 말인즉 단순히 임대 수익료 하나 얻고자 내주는 수준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두호는 준모가 꽤 눈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베네핏이 있겠지.”
“그렇죠? 그렇다니까요.”
어쩌면 돈보다는 웨스턴 코리아 경영진을 흔들어 버릴 만큼 파격적인 거래가 있었을 것이다.
팟!
준모의 눈에서 빛이 반짝거린다.
뭔가 생각 난 모양이다.
“광고 아닐까요?”
룸미러로 두호를 보며 핏대를 올린다.
“두 달간의 배틀먼스의 방송으로 이곳을 더욱 다양한 행사를 벌일 수 있는 명소로 만드는 거죠.”
준모는 확신한다는 듯 혼자 흥분했다.
“그러니까 대회기간 동안 투숙객을 받는 임대 아니겠습니까. 메인 토너먼트가 시작되기 직전 일반인 투숙객들에게는 PRIDE-K의 경기는 특별 디너쇼인 셈이고.”
일반 투숙객중 대부분이 이번 대회에 관심을 갖고 있는 국 내외 스포츠 매니지먼트사 관계자들이거나 상품성을 노린 방송이나 연예계 인물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두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채호는 이미 놀라운 비즈니스맨이 되어있었다.
차는 천천히 주차장으로 진입했다.
주차장은 강이 내려다보이는 절벽에 있었다.
“와 바글바글하네.”
이미 주차장은 차량들이 뒤엉켜 엉만진창이었다.
호텔측에서 정리와 통제를 하고 있지만 워낙 많은 차량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진땀을 빼고 있었다.
확실히 예선장과 분위기는 주차장에서부터 달랐다.
“필린.”
준모가 한쪽을 보며 소리쳤다.
수십 명의 필린 직원들이 버스에서 내리고 있었고, PBS란 글씨가 박힌 5톤 트럭에서 많은 장비들이 쏟아져 내린다.
“와 정혁도 와 있네.”
준모가 바라보는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훤칠한 키에 눈썹이 진했지만 짧은 머리와 잘 어울려져 강렬한 인상을 보이는 사내 한 명이 보였다.
두호는 그게 누구냐는 듯 룸미러로 준모를 바라보았다.
“아니 형님 정혁도 모르세요?”
정혁.
한국은 격투기 불모지다.
타 종목의 인기 또한 해외 시장에 비할 바가 아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격투기의 인기는 처참했다.
그중 가장 큰 이유를 뽑는다면 폭력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반응.
비위가 약한 사람들의 눈에 격투기 선수란 직업은 그저 폭력적인 사람들일뿐이다.
하지만 그런 편견을 없애가는 한 명의 선수가 있었다.
국내의 가장 큰 종합격투기 단체 KFA에 미들급 챔피언 정혁이다.
화끈한 경기 스타일과 링 밖에서의 화려한 스타성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런 정혁은 이번 PRIDE-K에서 심사위원과 코치를 맡게 되었다.
그런데 금세 준모가 고개를 갸웃한다.
“그런데”
이마를 찡그리며 중얼 거린다.
“저렇게 유명한 선수가 이런 대회에 나타난 이유가 뭐지. 내가 알기로 곧 미국에서 시합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
참새처럼 한참 머리를 좌우로 갸웃거리는 준모.
두호는 차 유리로 옷을 정리하는 정혁을 바라보았다.
“몇 번의 경기를 뛰는 것보다 이런 대회 초빙되는 것이 훨씬 수입이 좋으니까.”
“예에? 설마요!”
빈 자리에 차를 세우고 두 사람은 내렸다.
“후후흡!”
막상 이곳에 도착하자 긴장이 되는지 준모의 숨이 거칠어졌다.
“형님. 이제 진짜 시작이네요.”
두호는 대답 대신 주위를 살핀다.
차에서 내린 사람들 모두가 낯설다.
또한 하나같이 표정이 굳어 있었는데 벌써부터 긴장하고 있는 것이다.
“가시죠 형님!”
준모는 당당한 걸음으로 앞장 서 걸었다.
두호는 어깨를 풀며 뒤따라 걸어갔다.
리조트 호텔 로비 바깥으로 넓은 잔디 관장이 있었다.
의자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고 그곳에 100명의 참가자들이 앉아 있었다.
일백여 명이 앉아 있었지만 떠드는 사람은 없다.
나직히 목소리를 낮춰 속삭이듯 말하거나 안면이 있는 사람들끼리는 악수를 하며 각오를 다진다.
호텔로부터 한 무리의 사람들이 걸어나왔는데 바라보는 참가자들 눈이 커졌다.
대회관계자들인 모양이었는데 상하의가 모두 검은색이었다.
또한 모자를 깊숙이 눌러써서 정확한 얼굴이 드러나지 않는다.
맨 선두에 오는 사내만 챙을 약간 밀어 올려 얼굴이 드러났는데 바로 채수였다.
자신의 형 채호와 비교하자면 상대적으로 작은 체구인 채수.
하지만 떡 벌어진 어깨와 두꺼운 몸통이 검은 옷과 어울리니 굉장한 박력이 느껴졌다.
전 J-2 라이트급 챔피언 이채수.
그가 단상 위로 올라섰다.
잠시 앉아 있는 참가자들을 살피던 그가 거칠게 소리 질렀다.
“모두!”
소리가 차갑다.
예상치 못한 기묘한 분위기다.
“반갑습니다.”
참가자들이 웅성인다.
먼 길 오느라 고생들 많았다는 위로와 격려까지는 아니어도 마치 논산훈련소 입소 때 느낌이라니.
“두 달간의 배틀먼스는 아주 괴로울 것입니다. 적어도 운 좋은 놈이 아닌 가장 강한 놈을 찾는 대회니까요.”
채수는 한 쪽을 가르켰다.
20여미터 떨어진 왼쪽으로 우승 상금과 부상으로 나온 T-90 세단이 세워져 있었다.
“딱 한 놈. 제일 쎈 한 놈이 다 먹는 겁니다.”
누군가는 그 방식이 좋아 참가했다.
많은 상을 준비해 여러 참석자들에게 각종 이름을 단 상패를 주는 것이 아닌 한 놈에게 몰아주는 게임.
“죽을 각오로 싸우세요. 자기 인생 바꾸려다 죽는 건 영광이니까.”
참가자들의 눈이 타오른다.
일부는 마른 침을 삼키며 주먹을 말아 쥔다.
채수는 다시 한 번 참가자들을 느릿하게 훑어 보았다.
“첫 번째 미션을 시작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