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5화 : 끝까지 바라본 주먹에는 쓰러지지 않는다.
두 사람은 천천히 스텝을 밟았다.
금방이라도 서로를 공격할 듯 끊임없이 움직이는 앞 손.
빈틈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이는 눈.
타탁!
파파!
손과 손이 계속 얽히고 부딪친다.
두호는 조금씩 거리를 좁혀가며 자신의 타격거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기습적으로 낸 황석희의 잽을 두호가 한쪽 손으로 패링해냈다.
계속해서 황석희가 앞 손으로 간을 보았지만 두호는 그저 펀치를 걷어낼 뿐 응해주지 않았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채호가 둘의 싸움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황석희는 앞 발을 박아놓고 주먹 싸움을 원하는 것 같고...형님은 조금씩 갉아먹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서로의 전략이 정면으로 충돌한다.
피지컬적으로 유리한 사람은 단순하게 싸우는 것을 원하고 불리한 사람은 머리싸움을 원한다.
불리한 상황 속 맞불을 놓는 건 자살 행위.
쉬잇!
별안간 황석희가 두호의 배 쪽을 노리며 잽을 길게 뻗었다.
두호는 방금전과 같이 한쪽 손을 내리며 그 주먹을 걷어내려 했지만 황석희의 눈이 빛났다.
잽으로 뻗어가던 주먹은 어느새 비어있는 두호의 안면으로 향했고 그림 같은 훅이 그의 얼굴에 꽂혔다.
황석희의 속임수에 크게 한 방을 허용한 두호는 비틀거렸다.
바라보던 채호는 신음을 흘렸다.
‘이건 큰데.’
뒤이어 재빠르게 앞으로 전진한 황석희의 뒷손 스트레이트까지 두호에게 꽂혔다.
큰 펀치를 연속해서 허용한 두호는 충격에 뒷걸음질 쳤다.
끝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임을 직감한 황석희는 멈추지 않았다.
‘길게 끌면 불리해. 여기서 끝낸다.’
황석희는 미끄러지듯 따라 붙어 두호의 뒷목을 양손으로 잡아채 니킥을 꽂기 시작했다.
당장 끝내려는 듯 그는 이마에 핏줄이 올라설 정도로 사력을 다했다.
채호는 두호의 위기를 보며 땀이 가득한 손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형님.’
그러나.
니킥을 꽂던 황석희는 당황한 표정이었다.
‘뭐 이런!’
두호가 쏟아지는 니킥을 맞으면서도 오히려 자신에게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보이는 얼굴의 미소.
황석희는 전력으로 니킥을 쏟아냈지만 두호는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그건 아직 쓰러질 만큼 데미지를 주지 못했다는 뜻. 황석희는 제대로 된 한 방이 필요함을 직감했다.
황석희는 양팔을 재빠르게 빼내며 두호의 양 어깨를 힘껏 밀었다.
곧 강력한 펀치를 낼 거리가 만들어졌다.
슈왁!
이를 꽉 문 채 펀치를 날렸다.
두호의 얼굴로 날아가는 경쾌한 왼손 스트레이트.
그런데 순간 두호의 고개가 왼쪽 아래로 더킹해냈다.
찌르듯 파고드는 황석희의 펀치를 스치듯 피해냈고 그 속도를 따라 왼발을 깊게 내밀었다.
황석희의 팔을 따라 마치 먹잇감을 사냥을 하는 뱀처럼 그에게 다가갔다.
오른팔을 귀 옆에 바싹 붙인 채 쾌속하게 찔러 들어가는 두호의 레프트 바디.
뻐억!
“커억.”
극심한 통증과 함께 황석희의 자세가 무너졌다.
머리는 다음 동작을 대비해야 했지만 풀려버린 다리는 좀처럼 그의 말을 듣지를 않았다.
두호는 자세를 다시 움츠렸고 몸을 다시 한 번 뒤틀었다.
이번엔 턱을 향한 두호의 왼손.
-쾅
마치 총을 쏘는듯한 어퍼컷이 깔끔하게 적중했다.
엄청난 파열음과 함께 황석희가 털썩 쓰러졌다.
그리고 두호 또한 넘어지듯 옆으로 쓰러졌다.
그 모습에 멀리서 지켜보던 채호와 뒤늦게 온 황석희의 부하들이 뛰어왔다.
“형님!”
“형님!”
황석희와 다르게 금방 몸을 일으킨 두호.
채호는 두호의 표정을 바라보았다.
두호는 여전히 웃으며 괜찮다는 듯 손짓을 날렸다.
그리고 이내 자신이 벗어두었던 외투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외투를 집어 든 두호는 그대로 공터를 빠져나갔다.
채호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멀리 걸어가는 그를 그저 바라보았다.
황석희는 깨어나지 못해 차에 실렸는데 도중에 의식을 차렸다.
“형님.”
“정신이 드십니까?”
부하들이 놀라 내려다보고 황석희는 이마를 찡그리며 몸을 세워 앉았다.
“그는?”
“싸움 마치더니 혼자 걸어가던데요?”
“걸어갔다고?”
황석희의 눈이 내리 깔린다.
뭔가를 생각하는 듯 잠시 그렇게 있더니 주머니를 뒤진다.
“누구 담배 있는 사람?”
“여기 있습니다.”
부하가 건네준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인다.
후후!
분명 자신의 몸 상태가 정상은 아니었다.
그러나.
문을 열고 길게 연기를 내 뿜은 황석희가 피식 웃었다.
‘전력은 아니었다. 이 말이지?’
걸어갔다는 말이 머릿속에 깊게 남았다.
늦은 저녁.
아무도 없는 텅 빈 사무실에 수미가 혼자 앉아 있었다.
황성태가 선물한 녹차의 향이 방 안에 가득했다.
두호가 선물한 실을 감개에서 조금씩 빼내 뜨개질을 하는 그녀.
얼굴에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선물이라는 것이 이토록 기분 좋은 것인가.
더욱이 자신의 마음을 가장 정확히 짚어낸 듯 털실이라니.
무엇을 만들지 기분 좋은 고민을 하는 그녀였다.
벌컹!
그때 지하실 문이 열리며 사내들이 들어왔다.
“어이! 조심조심.”
“야, 저거 한쪽으로 밀어놔라.”
사내 한 명이 한쪽에 있는 의자를 벽 쪽으로 붙인다.
수미는 입구 쪽 소란에 고개를 쳐들었는데 누군가 부축을 받으며 들어서고 있었다.
스윽!
황석희는 부축하는 부하들 손을 뿌리치고 천천히 걸어왔다.
약간 흔들리긴 했지만 수미 앞까지 자신의 두 다리로 건너와 멈춰 섰다.
“자네 설마?”
황석희는 민망한 듯 애써 웃음 짓는다.
떠날 때만 해도 자신의 이런 모습은 상상하지 못했다.
“면목 없습니다.”
“일단 앉지.”
부하 한 명이 황석희가 앉을 의자를 가져와 책상 앞에 놓았다.
그리고는 부하들은 모두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수미는 이 상황이 신기한지 옅은 미소를 띄우며 그의 상태를 살폈다.
“자네가 이런 모습으로 나타난 게 얼마만이지?”
“죄송합니다.”
“죄송하긴. 언제 내가 이기고 오라고 했나. 확인하고 오라 한거지.”
승패는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다.
하지만 황석희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자신은 무조건 이겨야 한다.
오른팔이 받는 신뢰와 부사장의 위치는 그런 것이니까.
그래서 그런지 평소와는 달리 조금 위축되어 있었다.
“그 놈이 꽤 거칠었나보군. 자네가 이 정도라면.”
수미는 급기야 하던 뜨개질을 멈추고 바구니를 살짝 옆으로 밀어놓았다.
이어 쓰고 있는 안경을 벗어 목에 건다.
“얘기 좀 해봐.”
두호의 상태는 어떠하냐고 묻는 것이다.
마치 손주의 좋은 소식을 기다리는 듯한 그녀의 얼굴.
황석희는 길게 숨을 마셨다.
“이 바닥에서 ‘진짜’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몇 있었습니다. 사업수완 빼고 순수한 완력만 따지자면요.”
수미의 눈이 반짝인다.
좀처럼 일 외에 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는 황석희다.
“그들의 공통점이 뭔지 아십니까?”
“뭔데?”
“쟁취가 아닌 생존을 위한 싸움을 합니다.”
“생존을 위한 싸움?”
황석희는 자신이 느낀점을 정리하려는 듯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이 싸움으로 얻어낼 것을 생각하며 싸우는게 아니라 그저 살아남는 것에만 집중하는 겁니다.”
말없이 듣고 있는 수미를 바라보는 황석희의 눈은 확신으로 가득차 있었다.
“군인처럼 냉철한 판단과 불리한 상황속에서 나오는 임기응변. 그리고 상대가 무슨 패를 들고있을지 모르지만 응하는 배짱. 그래서.”
쑤룩!
수미는 마시다 남긴 녹차를 소리 없이 마셨다.
어느새 차는 차갑게 식어있었다.
“쉽지 않을 겁니다.”
두호의 주먹이 예상치를 넘지만 수미가 계획하는 곳까지 도달할지 지금으로서는 장담할 수 없다는 뜻이다.
* * *
배틀먼스가 시작하는 월요일 아침.
평소보다 훨씬 일찍 준모의 차가 두호의 집 앞에 도착했다.
차 문을 벌컥 열고 내린 준모는 평소와 사뭇 달랐다.
하지만 달라졌다는 말은 언제나 멋지고 긍정적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평소보다 더욱 넓어진 바지통이 국기처럼 휘날린다.
강렬한 보라색 원단과 검은색 꽃무니가 자수로 박혀 있는 셔츠.
정장 상의는 어깨 부분이 팔꿈치 위를 겨우 덮었고, 소매를 걷어 올린 것이 패션계에서도 이례적일 것이다.
한 올도 놓치지 않고 단정하게 긁어 올린 치명적인 헤어스타일.
준모는 비장하게 서 있었다.
그가 이렇게 옷에 잔뜩 힘을 준 이유가 있었다.
오늘 배틀먼스에는 참가자 중 가장 강한 백 명이 모인다.
‘두호 형님의 카리스마를 따라 나도 발전해야 해.’
외모로라도 참가자들의 기를 죽여놓을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여 신경 쓴 차림새다.
그때 멀리 두호가 언덕을 내려오고 있었다.
두호는 느릿한 걸음으로 다가오는데 준모의 깔끔한 외모와 달리 달랑 청바지에 흰색의 티셔츠가 전부였다.
그리고 한쪽 어깨에 큰 스포츠 백 하나.
언뜻 보면 반듯한 체대생 같은 분위기가 풍겨 나온다.
멈칫!
가까이 다가온 두호가 눈을 빛냈다.
차림새에 놀란 것이다.
“시원한 아침입니다. 형님!”
준모는 힘차게 인사를 했다,
“어...그래.”
자신이 멋있다라고 생각하는지 준모는 어깨를 약간 들썩이며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어떻습니까. 오늘 같은 날은 좀 신경을 써야 할 것 같아서.”
두호는 당황한 기색을 애써 감췄다.
“그래. 오늘 더 멋있네.”
“감사합니다.”
준모는 뿌듯한 표정으로 차 뒷 문을 재빨리 열어주었다.
두호는 웃음을 참으며 차에 올랐다.
부우웅!
차가 골목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형님 이거!”
준모는 조수석에 놓은 제법 큼지막한 상자 하나를 들어 뒤로 넘겼다.
두호는 상자를 받아 들었다.
준모는 칭찬을 바라는 강아지 같은 표정이었다.
무엇인가 제딴에 크게 준비한 모양인가 보다.
“생각해 보니까 형님 전용 도구들이 없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몇 개 준비해봤습니다.”
준모는 뜯어보라고 커터 칼까지 건네준다.
두호는 칼로 포장끈과 테이프를 자르고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는 MMA 용품이 담겨 있었다.
검은색에 금색 휘장이 감겨져 있는 복싱글러브와 밝은 형광색의 MMA 글러브.
정강이 보호대와 헤드기어 그리고 훈련때 입을 스포츠 웨어 까지.
격투기의 필요한 모든 장비들이 전부 다 들어있었다.
“괜히 공용 장비 쓰면 찝찝하잖아요. 그래서 준비 해봤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모든 장비에 자신의 이니셜인 ‘BDH’가 새겨져 있었다.
주말 내내 돌아다녔을 준모가 보인다.
두호는 환한 표정으로 웃었다.
“좋네. 잘 쓸게.”
“그거 끼고 건방진 새끼들 다 패주세요 형님. 물론 전 빼구요.”
자신의 선물이 잘 먹힌 것 같아 기분이 좋은 준모는 곧 힘찬 목소리로 외쳤다.
“형님 맨날 막히던 차가 오늘은 안 막히네요. 막힘없이 달리라는 하늘의 뜻인가 봅니다.”
아닌 게 아니라 도로는 텅 비어 있었다.
부우웅!
준모의 차는 빠르게 달려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