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3화 : 끝까지 바라본 주먹에는 쓰러지지 않는다.
“아직요.”
무의 말이 대충 이해가 됐다.
자신도 알고 있다.
수미에게 누군가 계획적으로 접근한 것이 맞다면 수미의 성격상 그냥 넘어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일준의 일 또한 역시 마찬가지이다.
자신이 모르는 어떠한 흑막이 있다면 분명히 자신과 부딪힐 것이 뻔했다.
그렇다면 자신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이 일들에 어떤 식으로 맞서야 할까.
고민이 많아진 두호는 표정이 착잡해졌다.
무는 두호의 표정을 보더니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두호를 올려다보았다.
“표정이 왜 울상이야? 너 그냥 몸 조심하고 잘 하라고 한 말이야!. 혹시나 좋은 사람이 되라는 말이 강박처럼 남아서 호구처럼 맞고 다닐까봐. 만약 그런 놈들이 덤벼대면 확 혼꾸녕을 내줘버려. 난 신파극도 좋아해. 너는 죽이지만 않으면 내가 다 봐줄게!”
무는 오히려 자신의 얘기로 두호가 복잡해지지 않았는지 걱정이 된 듯 했다.
그런 모습에 두호는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해버렸다.
“아 네.”
“너에게 가장 중요한 건 극복이야. 수 많은 문제들 속 중심을 잡으며 나아가고 그 과정 중 알게 된 걸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역할인 셈이지.”
무의 말은 다른 게 아니었다.
수 많은 이해관계가 얽힌 문제를 자신의 입장에서 잘 헤쳐나가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벌어지는 일 들은 그저 흘러가게 내버려두고 그 사이에서 자신의 중심을 찾아라.
감정과 상황에 동요되어 일을 그르치지 않게.
그렇게 나아가면서 얻게되는 걸 사람들에게 전해라.
“내 말은 여기까지.”
그녀는 두호의 손목을 어루만졌다.
“여긴 좀 괜찮고?”
“네. 비 오는 날 좀 쑤시는 것 빼면 괜찮습니다.”
두호를 마주 보며 천천히 뒷걸음질 하는 그녀는 다시 언제나처럼 싱긋 웃어보였다.
“아직까지는 잘 하고 있다고 봐. 그러나 돌아가는 상황이 어디로 튈지는 모르지. 최악의 상황으로 흘러갔을 때 내 말을 잊지 않아 줬으면 해.”
무는 분명히 말했었다.
‘해야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정확하게 구별해내야 돼.’
불의라 하여 무조건 참지 못하고 덤비는 것도 무가 원하는 도혁의 새로운 삶의 조건은 아닐 것이다.
상대가 비겁하게 나왔다고 모조리 때려부셔 버리면 이 또한 대중으로부터 칭찬받을 일은 아니다.
무는 절제(節制)를 말하기 위해서 온 것이었다.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잘 해. 몸 조심하고. 무슨 일 있으면 나를 막! 생각해. 그럼 나타날게.”
천천히 걸어가던 그녀는 갑자기 몸을 훽하고 돌렸다.
“맞다. 너 인터뷰 하는거 봤는데 진짜 예쁘더라. 말도 완전 잘하고!”
할 말을 다 하더니 다시 몸을 돌려 걸어가는 무는 얼마 안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텅 빈 산책길 중앙에서 두호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거참.”
쉬울 것 같으면서도 어려운 상대다.
물론 절대자라는 선입견 때문에 더욱 가슴이 무거워지는지도 모른다.
두호는 입고 있는 외투를 벗어 오른손에 쥐고 집을 향해 걸어갔다.
황석희 일행들이 지하창고로 돌아왔다.
방 문을 열고 들어온 황석희는 수미의 모습에 조금 놀란 듯 했다.
처음 보는 표정.
심지어 작게 흥얼거리는 콧노래.
곁에서 모신지 10년이 넘어가지만 이런 모습은 그에게도 낯설었다.
수미는 조금 전 두호에게 선물 받은 실을 꺼내어 다른 감개에 감아놓고 있었다.
색깔별로 종류별로 감아놓는 것이 매우 귀찮을 듯 했지만 수미의 표정에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이걸로 만들어질 것들을 생각하니 기분이 좋은 듯 했다.
황석희가 수미에게 다가왔다.
“일 보고 돌아왔습니다.”
수미는 황석희를 바라보았지만 손은 여전히 실을 만진다.
그러더니 다 감지 못한 실들은 한쪽으로 조심히 밀어놓았고 목에 걸린 안경을 썼다.
책상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자 황석희를 바라본다.
“고생들 했어. 대충 얘기는 들었지. 예상 가는 곳은 있나?”
“명동에 시계방 골목에 예상되는 장소가 몇 곳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구체적인 물증이 없어 그 근처에서 잠복 좀 하며 주시 좀 해보려고 합니다.”
“이번엔 우리가 쫓는 차례인가?”
“네. 곧 다시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수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사내들을 훑어보았다.
그러다 한 사내의 옷깃에 피가 묻어있는 것을 발견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다친건가?”
사내는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멀쩡합니다.”
수미는 빙긋 웃었다.
“조심해. 몸 상하게 너무 무리하지 말고.”
“예!”
사내가 허리를 구부린다.
“자네 잠시.”
수미는 황석희에게 조용히 귓속말을 했다.
황석희는 그녀에게 염려 말라는 듯 가볍게 웃어 넘긴다.
“30분 정도 뒤에 출발하자. 준비들 하고 있어.”
황석희는 부하들이 나가는 것을 보고 오른쪽 벽으로 나 있는 문을 밀고 들어갔다.
체력단련실이었다.
철봉과 평행봉을 포함한 근 지구력 훈련에 필요한 장비들이 제법 갖춰져 있었는데 한 사내가 땀에 흠뻑 젖은 채 철봉에 매달려 있었다.
태건이었다.
고개를 돌려 황석희를 발견한 태건이 봉에서 살짝 뛰듯 내려와 맞은편 긴 의자에 털썩 앉았다.
“잘 되냐?”
서열상은 황석희가 높지만 둘만 있는 상황에선 편하게 대화를 나누는 관계이다.
조용한 성격과 사회성이 떨어지는 태건은 조직 내에서도 겉도는 소위 아웃사이더였다.
황석희는 태건의 그런 점을 말없이 특유의 친화력으로 덮어준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성장했다.
태건은 어려서부터 말수가 적었고 좀체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친구였다.
털썩!
황석희가 태건의 옆에 앉는다.
황석희는 등받이에 팔을 올리더니 상체를 뒤로 젖혔다.
기지개를 켜는 듯 으으으 하는 소리를 내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뭐야?”
“씨발.”
황석희의 욕지기에 태건이 슬쩍 돌아보았다.
황석희는 여전히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태건은 황석희에게 어떤 변화가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두 사람 사이에 기묘한 침묵이 이어진다.
적막을 먼저 깬 것은 황석희였다.
“오랜만에 한 판 어때?”
“뭐?”
“너 이제 대회 나가면 한동안 못 보니까. 나도 바쁠 것 같고. 옛날처럼 오케이?”
“뭔...”
태건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황석희는 시원하게 외투를 벗어던졌다.
진심으로 한 말이었는지 셔츠의 팔 부분을 걷어 올리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그.
체력단련실 중앙까지 묵묵히 걸어갔다.
여전히 의자에 앉아 있는 그를 보며 황석희가 말했다.
“나한테도 지면 운동 접어라. 그리고 지금처럼 수금이나 돌아.”
“귀찮게...”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걸어나오는 태건에게 기습적으로 달려든 황석희였다.
하지만 마치 기다리고 있었단 듯 재빠르게 오른팔을 귀 옆으로 들어 가드해낸 태건.
기습 공격은 실패했어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곧바로 태건의 뒷 목을 잡아채고는 연속으로 니킥을 꽂아 넣었다.
태건은 양 팔을 몸쪽으로 당겨 니킥을 아슬아슬하게 막아내었다.
가드한 팔 자체를 부셔버릴 생각인지 황석희는 맹렬한 기세로 그의 팔을 무릎으로 찍었다.
네 번째로 무릎이 올라오는 그 순간.
허리를 바짝 숙여 팔로 잡아챈 태건은 몸을 틀어 황석희를 자신의 뒤 쪽으로 던져버렸다.
붕 소리와 함께 날라 간 그는 몇 바퀴를 굴렀다.
하지만 이내 옷을 털며 다시 자세를 잡고 일어섰다.
그 모습을 보며 섬뜩한 웃음을 지어보이는 태건.
이제서야 제대로 할 마음이 생긴 듯 제대로 자세를 잡았다.
“죽을래?”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태건을 바라보는 황석희였다.
아무런 신호도 없었지만 둘은 동시에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잠깐의 재정비 시간을 마친 부하들은 하나둘 씩 모여 차량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자신들의 인솔자인 황석희를 기다리고 있는 그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그는 약속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질 않았다.
전화를 몇 통 해보아도 받지를 않는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인가.
“황석희 부사장 님은?”
“잠시 일 보고 오신다고는 하셨습니다. 찾아볼까요?”
“흩어져서 찾아봐들. 우리도 곧 출발해야지.”
사내들은 모두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어져 사라진 황석희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숙소부터 파전집 내부와 외부를 모두 돌아다니며 찾아보았지만 그의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지하실은 수미의 공간이다.
자신들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일단 제외하기로 했다.
지하실 출입구가 한두 곳이 아닌 만큼 안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있을 가능성은 없다.
“어떻게 된거지.”
파전집 내부와 외부를 모두 돌아다니며 찾아보았지만 그의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사내들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체력 단련실로 향했다.
태건의 PRIDE-K 출전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당분간 이곳 사용을 자제하고 태건에게 체력 단련실을 양보하기로 했었다.
수미의 공간을 통하지 않고 체력단련실로 곧장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있다.
체육관 문틈으로 불빛이 흘러나온다.
누군가 있음을 확인하고 사내들은 노크 두 번과 함께 조심스럽게 내부로 들어섰다.
방 안의 상황을 확인한 그 들은 모두 얼이 빠진듯한 표정이었다.
물론 그들이 찾던 황석희도 있었고 태건도 보인다.
‘도대체가’
체력 단련실은 엉망이었다.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운동 기구들은 옆으로 쓰러져있었고, 잘 정리되어있던 덤벨과 스쿼트머신까지 넘어져 있었다.
거기다 바닥에는 마르지 않은 피가 있다.
상황을 미루어 보았을 때 둘이 싸운 것은 확실해 보였다.
하지만 오래된 친구이자 입사 동기인 두 사람이 이렇게까지 싸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사내들은 긴장하여 바라본다.
‘서로를 바라보는 저 시선.’
친구가 아닌 원수를 바라보듯 싸늘했다.
공식적인 수미의 오른팔 황석희.
혼자서 작업을 다니지만 실패한 적 없는 해결사 태건.
누가 진짜 넘버원일까 하는 문제는 부하들 사이에선 언제나 뜨거운 화두였다.
하지만 지금 결과가 드러났다.
뚝뚝!
황석희의 귀 밑으로 피가 흘러 떨어졌다.
후욱후욱-
입에서는 거친 숨이 뱉어진다.
황석희는 팔에 이상이 있는지 오른팔을 왼손으로 받쳐 잡았다.
“인정사정 없는 새끼. 한 번을 봐주는 게 없네.”
반면에 조금 부은 것을 제외하면 큰 부상이 없어 보이는 태건이었다.
태건은 승부가 결정 났다고 생각했는지 몸을 훽하니 돌려 뒤로 돌아가버렸다.
쾅!
문이 닫힌다.
“아 죽겠다!”
황석희는 버럭 소릴 지르더니 바닥에 벌러덩 누워 버렸다.
걱정이 된 사내들이 우르르 달려갔다가 멈칫했다.
분하거나 억울해하는 기색 하나 없이 그저 웃고 있었다.
마치 십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기라도 한 듯 길게 숨까지 내쉰다.
“아이고 허리야.”
부하들의 도움으로 겨우 일어난 그는 체력단련실 벽면에 걸려있는 시계를 쳐다보았다.
“벌써 이렇게 됐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 얼른 가자.”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조금씩 걸어나가던 황석희는 한쪽에 있는 샤워실 문을 열어젖혔다.
태건은 쏟아지는 샤위기 아래 서 있다.
“잘해라! 새끼야. 쪽팔리게 쳐맞고 다니지 말고.”
황석희는 콧노래까지 부르며 걸어갔고 부하들은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쏴아아아!
태건은 꼼짝 않고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을 맞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