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2화 : 끝까지 바라본 주먹에는 쓰러지지 않는다.
콰앙!
큰 소리와 함께 책상 위를 깨끗하게 쓸며 한 사내가 책상 아래로 떨어졌다.
이윽고 전등이 깜빡거리며 켜지더니 다시 사무실 안이 환해졌다.
사무실 모습은 불이 꺼지기 전과는 딴판이다.
태풍이라도 쓸고 간 듯 실내는 엉망진창이었다.
책상과 의자들은 이미 부셔지거나 한쪽이 내려앉아 사용이 불가능해졌다.
모니터는 깨지고 한쪽 구석에 있던 정수기도 나동그라져 바닥에 물이 흥건하다.
형준의 부하들은 신음 소리를 내며 살려달라고 발버둥이다.
형준도 형편은 부하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구석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반면 황석희 부하들은 처음 나타난 모습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척!
황석희가 손을 뻗었다.
그러자 사내는 자신의 칼에 묻은 피를 사무실 커튼에 슬쩍 문질러 닦은 뒤 손잡이를 먼저 건네준다.
사내로부터 칼을 전달받은 황석희가 형준에게 다가갔다.
벽에 기대어 앉아 있는 형준은 황석희가 다가오자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였다.
스윽!
황석희가 쭈그려 앉았다.
한쪽 무릎을 대고 꿇어앉은 황석희가 품속으로 손이 들어가자 형준은 겁을 먹고 손을 얼굴 위로 쳐올렸다.
“어으...어으!”
“어으 어으는 무슨. 목욕탕 왔냐.”
그가 품속에서 꺼낸 것은 조금 전 보여주었던 사진이다.
다시 그의 얼굴에 가까이 들이밀어 사진을 보여주는 황석희였다.
“자 잘 보이지? 이제는 누군지 들을 수 있을까?”
입을 다문 형준이 고민하는 듯 망설이자 황석희는 서늘하게 웃었다.
“이걸 진짜 잘랐어야 했나.”
그리고는 처음 베었던 형준의 왼쪽 무릎을 손가락으로 누르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 그만! 말하겠습니다!”
한참을 바라보던 황석희가 왼손에 들린 사진을 다시 내보였다.
“그...그러니까 저도 자세히는 모릅니다. 얼굴만 알아요 얼굴만!”
황석희는 사진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래, 말해봐?”
“예전에 저희가 도박장 스팸 문자 돌릴 때 안면 튼 사람입니다. 신장 개업한 가게에 지역 주민들 개인정보랑 전화번호 파는 놈들에게 소개 받았습니다. 있잖습니까? 돈 되는 일은 영업 다 뛰는 애들이에요.”
황석희는 담배 두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두 개 다 불을 붙인 다음 한 개비를 형준의 입에 물려주었다.
“계속해봐.”
형준은 물려준 담배를 필 생각은 하지 못하고 물고만 있다.
담배에는 점점 그의 피가 묻어나오기 시작했다.
“명동 시계방 골목 근처에 있습니다. 저도 상호명이나 이름은 정확히 모릅니다. 이게 아는거 전부입니다. 믿어 주십시오.”
황석희는 길게 담배를 빨아들였다.
찬찬히 형준의 얼굴을 살펴본다.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
표정에 생각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 완벽히 핀치에 몰린 사람들의 표정이다.
“정말...인데!”
“후우!”
빨아들인 담배를 형준의 얼굴에 뱉었다.
“꼬리 잡혔다. 보고 올리고 청소부들 불러라.”
부욱!
황석희는 담배를 바닥에 비벼 끄고 일어났다.
“죽는 놈들은 없을 거야. 대신에 몇 년 정도 바다 건너 나가 살아야겠다. 쥐죽은 듯이 살아.”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는 형준이었다.
자신의 정장 상의를 무심하게 정리하는 황석희는 그를 싸늘하게 내려보았다.
그리고 몇 시간 뒤 사무실 안은 애초에 공실이었던 것처럼 깨끗해져 있었다.
“형님 도착했습니다.”
잠깐 눈을 붙인 두호는 차 문을 열고 나왔다.
준모 또한 차를 세워두고 두호를 따라 내린다.
두호는 길게 숨을 내쉬며 목을 좌우로 움직인다.
피로가 몰려오고 있었다.
‘나만 힘든 건 아니겠지.’
이번 대회에 꿈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같을 것이다.
훈련으로 피곤하고, 긴장으로 숨이 턱 막힐 것이다.
“내일 보자.”
두호가 준모를 향해 가볍게 손을 들어 보이고 몸을 돌릴 때였다.
“백두호!”
익숙한 목소리 하나가 들려온다.
두호는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눈을 좁혔다.
가로등이 있지만 어둠이 깔려 정확하지 않다.
동네 어귀 전봇대에 한 사람이 기대어 서 있다.
‘그 사람.’
얼굴 확인은 불가하지만 전체적인 분위기가 낯익다.
<무>였다.
무는 천천히 두 사람에게 걸어갔다.
가벼운 운동화.
연청색 청바지를 입었고 상체보다 조금 큰 바람막이 외투.
어딘가 청량함까지 느껴졌다.
편안한 옷차림이지만 그녀의 미모와 어울리니 마치 스포츠웨어 광고를 보는 듯 했다.
꿀꺽!
무가 가까이 다가오자 준모는 마른 침을 삼켰다.
뭔가를 잘못봤나 싶은 듯 세차게 고개를 흔들며 다시 눈을 부라렸다.
잘못 본 것 아니다.
예수도 보았고, 민영도 보았지만 이토록 눈동자를 고정할 수 없는 여자는 처음이다.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황홀했다.
두꺼비보다 한 치는 더 튀어나온 눈을 한 준모가 물었다.
“이이익! 너 누...누구야!”
“문데용.”
장난스러운 대답과 함께 싱긋 웃어보이는 무.
바람에 흩어진 머리를 쓸어 단정하게 묶는다.
그러자 더욱 앳돼 보인다.
준모의 눈이 더욱 가늘어졌다.
살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상대를 보는 눈이 생겼다.
준모의 눈에 비치는 무는 어린 학생 같으면서도 어딘지 선뜻 다가설 수 없는 기운이 풍긴다.
“뭐야 반응 왜 이래? 안 반가워?”
“아 예예.”
섭섭한 듯 잔뜩 삐친 표정을 지으며 그녀가 다가왔다.
천천히 다가온 무는 두호의 팔에 자신의 팔을 끼워넣었다.
“얘기 좀 할까? 오붓하게 우리 둘이.”
두호를 바라보며 한쪽 눈을 찡긋 감는 무.
꾸움틀!
준모의 눈썹이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그런데 자연스럽게 두호의 팔짱을 끼는 것도 그렇고 오붓하게 대화를 하자는 말에 두 눈에 힘이 들어간다.
보인다.
이 사람과 형님의 관계가.
어김없이 말 실수를 하기 전의 표정을 지어보이며 준모는 확신이 들어섰다.
‘그래. 우리 형님 정도면!’
허리를 폴더처럼 접어 크게 인사를 하였다.
“반갑습니다. 형수님!”
두호는 어이가 없는 시선으로 준모를 쳐다보았고, 무는 재밌다는 듯 고개를 쳐들고 웃음을 터뜨렸다.
무는 끼었던 팔짱을 풀고 준모에게 다가갔다.
무가 다가오자 군인처럼 열중 쉬어 자세로 굳어버린 준모.
형수님이 오는데 자세가 불량한 건 용서받지 못할 일이다.
무는 완전 이등병 자세가 되어 있는 준모를 살피더니 풀려 있는 와이셔츠 맨 윗단추를 발견했다.
툭!
“착한 심성을 타고 났지만 세상이 그리 살지 못하게 했구나.”
풀린 단추를 채워주고 어깨부분을 스윽 털어준다.
누나가 막내 남동생의 교복을 챙겨주는 모습이다
준모는 여전히 긴장을 풀지 않은 채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처럼 밝게 웃으며 지낸다면 좋은 일을 자주 만들어주마.”
“감사합니다. 형수님!”
그녀의 말에 무슨 뜻이 담긴지도 모르지만 준모는 힘차게 말했다.
“그럼 이제 갈까?”
“준모야 오늘은 여기서 돌아가라. 월요일 날 보자.”
준모는 망설이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어딜 가느냐고 걱정스런 표정을 했겠지만 형수님과 만난 이상 그런 염려는 쓸데없는 일이다.
두 남녀가 갈 곳이 어디겠는가.
‘우리 형님도. 참.’
부우웅!
준모 차가 마을 입구를 떠났다.
밤은 깊다.
두 사람은 조용한 거리를 걷고 있었다.
무는 무엇이 그렇게 신기한지 신나는 발걸음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걷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니 두호는 무엇인가 허망하게 느껴졌다.
통상적으로 사람들이 절대자라고 하면 떠오르는 모습들.
엄숙함, 위대함, 진중함, 비범함 등등.
하지만 나열된 단어들 중 하나라도 어울리는 게 없는 무.
문득 두호는 한 가지의 궁금증이 생겼다.
“그 모습이 원래의 모습이십니까?”
무는 바로 옆 가게의 전신거울을 보며 몸을 돌아보았다.
길거리에서 찾아볼 수 없는 미모의 그녀.
실제로 지나친 몇 남성들이 그녀를 돌아보기도 했다.
“몰라? 기억이 있는 첫 순간부터 이 몸이긴 했어.”
두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왜 저와 처음 만났을 때는 아저씨의 모습을 하신 겁니까?”
무는 허리의 팔을 올리며 두호를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처음에 이 얼굴이면 대체로 말을 안들어. 분위기 좀 잡아주는 얼굴로 해야 빨리 빨리 알아듣지. 요새 애들은 왜 이렇게 개기나 몰라. 나름 이것도 노하우야.”
“그렇군요.”
어느새 동네 가운데로 쭉 뻗은 산책로 입구까지 왔다.
지저분한 개천을 서울시에서 정비하여 산책로로 만들어 놓은 길이었다.
두호는 숨을 크게 들이셨다.
5월의 끝자락에 피는 아카시아 향기가 바람에 실려온다.
무는 조금 전과는 달리 차분한 표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사실.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서 왔어.”
두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자 좀 잘 아니?”
뜬금없이 두호의 한자 실력을 묻는 무였다.
두호는 왜 그런걸 묻냐는 듯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조금 압니다.”
두호의 대답과 동시에 뒤쪽에서 선선히 불던 바람이 매우 거칠어졌다.
무엇인가 쓸려오는 소리와 함께 작은 나뭇잎들이 두호와 무를 스쳐 지나가 두 사람의 앞쪽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나뭇잎들이 모여 손바닥만한 글씨 두 글자를 만들어냈다.
두호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와 있다 보면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일들이 자주 벌어진다.
지금처럼 나뭇잎들이 날아와 글자를 만들어 내는 무협소설에서나 볼 법한 상황이 벌어졌다.
두호는 정신을 차리고 앞에 쓰여진 글씨를 확인했다.
‘倫理(윤리)’
무는 두호의 대답을 기다리는 듯 나긋하게 바라보았다.
“윤리 아닙니까?”
“그래.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하거나 지켜야 할 도리라는 뜻이지.”
이번엔 맞은편에서 바람이 거세게 불어와 떠 있던 나뭇잎들을 날려버렸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나뭇잎들.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평소처럼 잔잔한 바람이 불어왔다.
과연 무는 자신에게 무엇을 말하려 하는 것일까.
“하지만 인간에게 윤리라는 것은 단순히 이분법으로 나눌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두호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시대는 변하고 진리라 믿던 것은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다.
지금은 틀리지만 예전엔 맞는 것.
현재는 맞아도 과거에는 틀렸던 것.
모든 윤리적인 문제는 미래에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좋고 나쁘다.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는 수 많은 것들.
무의 말은 계속 되었다.
“인간처럼 복잡하게 이루어지며 사는 생물은 없어. 수 많은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문제를 단순히 옳고 그름으로만 재단하려 하면 규격외에 문제가 생겼을 때 혼란이 생기기 마련이지.”
그때, 산책로의 풀 숲에서 길 고양이가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며칠은 굶은 듯 굉장히 날카로운 눈빛에 고양이는 왜인지 다리를 절고 있었다.
가만히 멈춰서 두호와 무를 가만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무는 천천히 그 고양이에게 걸어갔다.
사람이 다가온다면 재빠르게 도망가는 것이 고양이지만 그렇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경계하는 모습 없이 무를 받아들이는 듯 가만히 서 있었다.
무는 한쪽 무릎을 꿇어앉아 차분한 표정으로 고양이를 쓰다듬어 주었다.
기분이 좋아진 듯 고양이는 무의 손에 뺨을 비비며 애교를 부렸다.
무의 표정엔 어느새 미소가 가득했다.
이내 고양이의 엉덩이를 툭툭 쳐 주며 보내주었다.
다리를 절던 고양이는 마치 새로 태어난 것처럼 힘차게 뛰어가 금세 시야에서 사라졌다.
고양이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무는 말을 이어갔다.
“인간의 삶을 바라보는 우리 역시 수 많은 시간이 흐르고 계속해서 윤리의 기준이 바뀌어. 지금 인간들이 생각하고 있는 문제들이 과연 나쁜 마음에서 비롯된걸까. 아니면 공공의 이익을 위한 합리적인 행동일까.”
너무나 복잡한 이야기였다.
단순히 새 삶을 얻고 죗값이나 줄이자고 시작한 일이었다.
거기다 더해 두호의 꿈과 자신의 복수 정도.
하지만 이 일의 목표와 함께 생각하니 자신이 생각한 것만큼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무는 두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너의 주변에서 일어날 수도 있을 일들. 그 일을 어떻게 헤쳐나갈지 정했어?”
두호의 얼굴에 그늘이 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