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0화 : 끝까지 바라본 주먹에는 쓰러지지 않는다.
“에잉. 형님은 왜 여기로 오라고 하신거야.”
준모는 핸드폰 시계를 흘낏 보더니 차 위에 묻은 먼지를 자신의 옷 소매를 당겨 잡아 톡톡 찍었다.
두호가 시간을 미루면서 오랜만에 늦잠을 잘 수 있었던 준모였다.
하지만 이제는 성실이 몸에 배인 것인가.
귀신같이 아침에 눈이 떠진 준모는 그저 뜬 눈으로 누워있기만 하였다.
해가 중천에 떠야만 일어나던 그가 이제는 아침에 자동으로 눈이 떠지는 사람이 된 것이다.
가끔은 자신의 이런 변화가 두렵다.
‘성실하기까지 하면 어쩌자는거야. 미친 남자 양준모. 신은 정녕 완벽을 만들어낸 것인가.’
<무>는 그런적이 없었다.
준모는 번쩍 거리는 차량에 자신을 비춰보며 모델들처럼 멋진 자세를 취해 보았다.
스윽!
“으음!”
“그런게 인생이야.”
“알잖아. 내 라이벌은 내일의 나 뿐이라는 걸.”
목소리도 깔아보고 연설하듯 강하게 손짓도 해본다.
그때, 멀리서 다가오는 두호에게 준모가 차를 향해 삿대질하는 것이 보였다.
잠시 말을 잃은 두호는 헛기침을 한번 하였다.
“허흠!”
준모는 손을 크게 흔들면서 두호를 반겼다.
“형님 오셨군요.”
벌컹!
준모가 문을 열자 두호는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고 운전석으로 돌아온 준모는 시동을 걸었다.
“얼른 가자.”
“네 출발하겠습니다.”
부우웅!
차가 경쾌한 엔진음을 내며 출발했다.
-짤랑짤랑
문에 걸린 종소리가 울리며 백평파전으로 두호와 준모가 들어섰다.
전과는 달리 곧바로 주방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주방에 난 작은 창문 틈으로 사내 한 명이 고개를 내밀었다.
“어서오세요!”
첫 방문부터 두호를 맞았던 그 사내였다.
전과는 달리 수염이 많이 자란 사내가 반갑게 인사를 하자 주방 문으로 황석희가 걸어 나왔다.
황석희는 자신보다 어린 두호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오시느라 고생 많았습니다.”
두호 역시 반갑게 인사했다.
그와 달리 준모는 바짝 긴장한 눈치인 듯 황석희를 바라보았다.
몇 번 본 사이였지만 여전히 그의 눈에 제일 무서운 사내는 황석희이다.
저 떡 벌어진 어깨와 태산만한 덩치를 밤 거리에서 본다?
아마 자신은 고민 없이 줄행랑을 칠 것이다.
“계시죠?”
두호는 자신이 들고 온 짐을 황석희에게 건넸다.
짐을 건네받은 황석희는 두호에게 물었다.
“이게 뭡니까?”
“술입니다. 직원분들 드시면 좋을 것 같아서.”
두호의 말에 황석희는 희미하게 웃음을 보였다.
자신들 정도야 신경 쓰지 않아도 되지만 굳이 챙겨준다.
우호적인 관계를 조금씩 만들어갈 줄 아는 그런 사람이다.
“잘 먹겠습니다.”
두호는 대답 대신 살짝 미소를 지었다.
황석희는 받은 술들을 직원들에게 건네준 다음 두호와 준모를 데리고 수미가 있는 지하실로 향했다.
처음 만났을 때와 똑같이 수미는 그 모습 그대로였다.
하지만 실내의 분위기는 많이 달라졌다.
들어서는 사람을 위압하던 부하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인기척을 확인하고는 읽고 있던 책에 책갈피를 껴 툭 덮은 수미.
“썩을 놈.”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온 두호는 아무 말 없이 맞은편에 의자를 툭 빼 앉았다.
수미는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목 부분으로 내려놓았다.
“잘 지내셨어요?”
4개월 만에 본 얼굴이었다.
두호는 아무렇지도 않게 싱긋 웃어 보였다.
수미는 눈을 아주 실같이 뜨며 두호를 살펴보았다.
마치 그 모습은 무뚝뚝한 조부모가 손주의 몸 상태를 확인하는 듯 보였다.
오히려 좋아진 듯한 두호의 몸 상태에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연락이나 자주 하지.”
“조금 바빴습니다.”
두호는 따라 들어온 준모에게 짐을 건네받아 책상 위에 조심히 올려놓았다.
수미는 이게 뭐냐는 듯 턱으로 짐을 가르켰다.
“아 그. 뜨개질 실이랑 과일 좀 사왔습니다.”
그 말을 들은 수미는 피식 웃어버렸다.
이렇게 알다가도 모를 놈이다.
두호는 여전히 실내를 두리번거렸다.
“직원들이 안 보이네요?”
수미는 두호의 물음에 대답 없이 준모를 보며 말했다.
“네 놈도 오랜만이다.”
“이놈 저놈 하지 마세요. 저도 나이가 있는데.”
수미는 준모의 반응이 귀엽다는 듯 웃었다.
다시 두호를 보며 피곤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요새 바쁘다. 같잖은 것들이 붙어서.”
말을 하면서 수미의 손은 이미 선물 포장을 해체하고 있었다.
과일보다 먼저 뜨개질 실이 든 상자를 열어보았다.
형형색색 들어가 있는 실뭉치 하나를 꺼내어보더니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누굽니까?”
두호가 눈을 빛낸다.
상자속 실뭉치를 만지는 수미의 얼굴이 환하게 웃는다.
“사실 오늘 부른 이유가.”
그러면서 황석희를 바라보았다.
“다 가져와.”
한쪽에 서 있던 황석희가 오른쪽에 있는 책상으로 다가가 서랍을 열고 서류 봉투 두 개를 꺼냈다.
황석희는 두 개의 서류 봉투를 두호에게 건넸다.
봉투를 받아든 두호는 앞뒤로 살핀다.
스윽!
봉투속 서류를 꺼낸 두호의 눈이 빛난다.
이건 자신이 부탁했던 일준에 대한 것이었다.
일준에 대한 여러 정보와 근자의 상황을 파악해 달라고 한 이유는 사실 따로 있다.
일준과 과거 경기는 있었지만 그것 말고는 아는 것이 거의 없다.
아시안게임 승부조작 같은 대형 사건이 언론에 한 줄도 실리지 않고서 조용히 넘어갔다.
그건 아무나 가능한 일이 아니다.
즉 누군가 돈 몇 푼 먹고 덮어줄 사건이 아닌 것이다.
일준과 그것으로 인연이 끝났다면 더 이상 떠올리거나 살필 이유는 없다.
그런데 삼 년이 지난 지금 다시 그와 만나게 되었으므로 이제는 좀 더 일준에 대해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번 대회를 참가한 것이 단순한 우연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수미에게 뒷조사를 부탁한 것이다.
스윽!
이번에는 다른 봉투속 서류를 꺼냈다.
멈칫!
채호와 수미의 사진들이 가득 들어있다.
사진은 스카치 테이프로 1,2,3,4 식으로 숫자가 붙어 있었다.
“뭡니까?”
수미는 선물로 받은 뜨개질 실과 과일들은 한쪽으로 조심히 밀어두었다.
실뭉치를 받고 좋아하던 미소는 사라졌다.
“오늘 너에게 해줄 이야기가 두 개인데, 하나는 정황만 있다. 클 수도 작을 수도 있는 일이지.”
두호의 눈빛은 반짝였다.
이 사진 역시 자신과 관계 된건가.
두호는 다시 한 번 사진들을 훑어보았는데 마치 자신의 뱃속 내장을 훤히 드러내고 있는 기분이다.
남의 사진인데 마치 자신이 찍힌 듯, 속을 훤히 드러낸 것 같은 불쾌한 기분은 뭔가.
수미는 옆에 있는 책상 서랍을 열어 사진 한 장을 들어 살핀다.
두호 손에 있는 것과 동일한 사진으로 3번이란 숫자가 붙어 있었다.
“3번 들어봐!”
두호는 3번 사진을 들어본다.
여러 명의 사내들이 거만한 표정으로 서 있다.
“강재용, 최진철, 이환영, 유일범.”
처음 듣는 이름들이었다.
“각각 한대 모터스 사장, 매일 은행 은행장, 아짐 스포츠 회장, 뉴하늘 병원 대표일세.”
세계로 뻗어나가는 국산 자동차 명문 한대 모터스의 사장.
대한민국 제 1 금융권인 매일 은행의 최고 결정권자.
얼마전 필린과의 거대 MOU를 체결한 아짐 스포츠 회장.
전국에 수십 개 지점을 갖고 있는 대형 개인 병원 브랜드의 대표.
지금 언급된 인물들은 자주 텔레비전과 신문에 실리는 소위 사회 지도급 인사들이다.
사진의 배경을 보아 어느 사무실에서 미팅을 갖고 기념으로 찍은 사진인 듯 싶었다.
“나랑 가끔씩 차 한잔 마시는 사이이기도 하지.”
이 정도의 거물들을 차 한잔 마시는 사이라고 표현하는 수미였다.
“이번 PRIDE-K의 대표적인 스폰서들이야.”
두호는 이제야 상황을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PRIDE-K에는 이들 외에 매우 많은 스폰서들과 제휴한 상태였다.
운동기구를 제공한 회사부터 시작해 아주 작게는 건강식과 작은 생수들을 제공하는 회사까지 포함한다면 더욱 많아진다.
하지만 스폰서라고 모두 같을 수는 없다.
지금 언급된 인물들은 비교가 불가한 영역.
이런 사람들은 자신들의 지나간 흔적이 남는 걸 매우 꺼려한다.
즉 이런 사진 따위를 찍지는 않는 것이다.
두호는 다시 사진을 보았다.
자세히 보니 화질이 굉장히 확대되어서 찍은 듯 했다.
누군가 몰래 찍었다면 결코 찍힌 이들에게 득이 될 일은 절대 없고 또한 이번 대회 스폰들이니 채호쪽에서도 불편한 일이다.
“누군가 허락도 없이 빨대를 꽂으려 하는 것 같네.”
수미가 부드럽게 덧붙였다.
“미행이 따라 붙어서 잡아보려 했는데 기를 쓰고 도망가더군. 그 와중에 카메라를 흘렸더라고.”
두호는 호기심을 나타냈다.
큰 잔치판에 파리가 끌 건 당연하지만 그것도 상대에 따라 다르다.
아무 파리나 달라붙을 수 있는 사진속 인물들이 아니다.
또한 대회를 주최한 필린 역시도 거물이고.
두호는 채호가 찍힌 사진을 본다.
‘이 녀석도 감 많이 떨어졌네. 이런 것도 찍히고.’
두호는 사진을 봉투 속에 다시 넣었다.
“몸 상한 곳은 없으세요?”
미행을 당했다는 말에 마음이 쓰인 것이다.
“나야 늙어서 상한 것 제외하면 별거 없지.”
두호는 황석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수미의 오른팔이다.
그의 대답을 듣고 싶은 것인데 황석희는 가볍게 웃었다.
한눈에 황석희가 노력해주었음을 눈치챈 두호는 황석희에게 눈짓을 했고 희미한 웃음을 띈 황석희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
“꼬리는 잡았습니까?”
쭈욱 듣고 있던 준모가 묻는다.
수미가 준모를 깊이 바라보더니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이 대표가 짚이는 곳이 몇 군데 있다고 말해줘서 곧 애들이 인사를 가려고 한다.”
별 얘기 아니라는 듯 수미가 손을 저었다.
“알고는 있으라는 뜻이지 신경쓰라는 건 아니야. 관심을 둬야할 건.”
다른 서류 뭉치를 열어서 테이블에 쏟으니 사진 몇 장과 명함 그리고 서류뭉치가 튀어나왔다.
“자네가 설명 좀 해줘.”
황석희는 두호의 옆으로 걸어왔다.
“이름 정일준.”
서류 몇 장을 집어 넘겼다.
“1996년생으로 형제는 없습니다. 예전 아시안게임 국가대표 선발전 승부 조작 사건 이후로 별다른 공식적인 행보는 없는 친구죠.”
귀는 황석희의 말을 듣고 있지만 눈은 자료에서 떼지 못하는 두호였다.
“하지만 승부 조작 사건의 기사나 관련 자료 자체가 별로 남아있지도 않고, 협회측에서도 왜인지 그 일에 대해서는 쉬쉬하는 눈치였습니다. 그런데.”
황석희가 자료를 몇 장 넘기며 어딘가를 짚었다.
“마지막 서류 보시죠.”
두호는 일준에 대한 정보 조사의 마지막 장을 보았다.
‘대청 제약’
황석희가 말을 잇는다.
“그 친구 아버지가 대청 제약 설립자이자 대표입니다. 과거 동네 약국 수준이던 제약회사를 지금은 중견기업 급으로 키워낸 인물이죠. 회사 대표 제품으로는 TV 광고에도 많이 나오는 신장 기능 향상 건강보조제가 있습니다.”
워낙 유명한 배우들을 동원한 광고이기 때문에 알고 있다.
황석희의 설명이 이어졌고 두호는 서류를 꼼꼼히 보았다.
서류에서 눈을 뗀다.
천장에 매달린 낡은 형광등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두호의 눈이 복잡해진다.
안개가 낀 듯 자욱하던 천장의 형광등이 조금씩 선명해진다.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사건의 앞뒤 맥락이 이제야 머릿속에 정확히 들어온 것이다.
대청 제약 정도라면 큰 액수와 인맥을 동원하여 설령 문제가 생기더라도 수습이 가능하기에 협회측에서도 못 이기는 척 받아들였을 것이다.
황석희는 보충설명을 했다.
“저희 쪽 사람들은 잘 아는 이야기지만 다른 의미로 약국이기도 합니다”
두호 역시 무슨 뜻인지 모르는 듯 눈을 좁혀 떴다.
“약국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