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9화: 끝까지 바라본 주먹에는 쓰러지지 않는다.
손목 부위의 자상.
어린아이가 아닌 이상 이 부위의 상처가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알 것이다.
두호는 손목 부분을 다시 걷어 내리며 정말 아무렇지 않다는 듯 안심시켰으나 소용없다.
양성학은 자신이 지은 죄인 것 같아 착잡한 기분을 털어내지 못하고 있다.
“난 권투를 사랑했다.”
평소 자기 생각을 잘 말해주지 않던 그였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렇게 처절하게 싸우다가도 경기가 끝나면 서로를 껴안으며 상대를 존중하는 그 모습이 참 멋지다 느꼈다. 승자와 패자 모두 후련한 얼굴로 링을 내려가는 것까지 참 완벽하다 생각했지.”
두호는 그저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양성학이라는 사람에게 권투란 삶의 전부였다.
그가 지켜온 복서로서의 삶과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던 스승의 모습을 지켜봐 왔기에 잘 안다.
그런 양성학은 지금 세상 누구보다 비참한 마음일 것이다.
창밖을 보던 시선이 천천히 두호에게 옮겨졌다.
“정말로 미안하구나. 그렇게 열심히 산 결과가 그 상처라는 게 너무나 마음이 아프다.”
진심 어린 어른의 사과.
어딘가에 있을 진짜 두호가 이 말을 전해 들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다.
“그래. 이제 나왔는데 뭘 할 예정이니?”
“저 운동을 다시 시작하려고 합니다.”
양성학의 눈이 커졌다.
“운동? 복싱?”
혹시나 두호가 운동을 그만둔다고 하면 어쩌나 생각했다.
그와 같은 재능은 하늘이 몇 사람 주지 않는다.
이대로 포기하기엔 너무나 아깝다 생각했다.
너무나 반가운 소식이지만 그는 좋아할 수가 없었다.
두호에게 복서로서의 삶은 끝났다.
앞으로도 사각링 안에서 이 아이의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
두호는 품 안에서 PRIDE-K의 자료를 꺼내 보였다.
“이걸로요.”
두호가 건넨 종이를 양성학이 받아보았다.
“아, 이거구나. 요새 텔레비전에서 광고하는 것 아니니? 그럼 혹시…?”
“네. 종합격투기로 나가보려고요.”
양성학은 실망의 빛을 숨기지 못했다.
복싱과 종합격투기는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종목이다.
수많은 복서들이 자신의 실력을 자신하다 무너지는 곳이 아닌가.
하지만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 두호는 자신감 넘치는 표정이었다.
“자신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양성학은 옅은 미소를 띠었다.
‘그래. 독한 훈련속에서도 넌 항상 그 표정이었지.’
항상 스승은 가르치는 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아가는 제자를 그저 믿어주면 그 뿐.
양성학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체육관 중앙으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글러브 한 쌍을 툭 하고 던졌다.
날아온 글러브를 겨우 받은 두호는 이게 뭐냐는 듯 쳐다보았다.
“오랜만에 제자 손맛 한번 보자.”
미트 트레이닝 훈련을 해보자는 이야기였다.
두호는 씩 웃으며 입고 있던 외투를 망설임 없이 벗었다.
일반 학생들보다 조금 늦은 점심을 먹는 구탑고 권투부.
아이들은 손에 들린 아이스크림 하나로 훈련의 고됨을 잊는 중이었다.
“늘 궁금한데…. 왜 소시지야채볶음에서 소시지가 제일 적을까?”
“그러게. 소시지라는 글자가 무려 세 글자나 들어갔는데….”
돌도 씹어먹을 나이다.
하지만 그 나이대에서도 끔찍한 훈련량을 자랑하는 운동부 아이들은 실컷 먹어도 뒤를 돌면 금세 배고파지기 마련이다.
학교에서 배식하는 점심의 양으로는 도저히 배부를 수가 없었다.
“진짜 한 번만 원 없이 먹어보고 싶다.”
“나도. 지금 기분이면 치킨 두 마리도 먹을 것 같은데.”
“아, 오후 훈련은 어떻게 하냐 진짜 죽겠네….”
애들다운 푸념과 배고픔을 섞어 한탄하듯 떠들지만 기특하게도 딴짓 없이 체육관을 향해 걸어가는 아이들.
-탕
-탕
갑자기 들여오는 소리에 아이들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게 뭔 소리야?”
“샌드백 때리는 건가? 미트?”
“샌드백 치는데 이런 소리가 난다고?”
학생들은 저만치 있는 체육관을 향해 달려갔다.
문을 열고 들어선 학생들은 깜짝 놀란 표정을 했는데 감독 양성학과 처음 보는 사람이 미트 트레이닝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들이 하던 훈련과는 차원이 달랐다.
“우와….”
“저게 말이 되는 건가?”
두호의 주먹을 받아내는 양성학은 내심 신음을 흘렸다.
주 5일을 운동하는 사람이라도 주말 이틀을 쉬고 온다면 몸이 무거워져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하물며 두호는 3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다.
그것도 아무것도 할 수 없게 의지를 빼앗는 교도소에서 말이다.
“자 원투치고 레프트 보디 훅!”
-쾅 쾅
-쾅 쾅
부드럽게 나온 손은 조금만 집중을 잃으면 시야에서 사라졌다.
자신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순식간에 주먹이 미트에 닿을 때는 무섭게까지 느껴졌다.
완벽한 밸런스와 눈이 쫓기 힘든 손의 속도.
체육관 전체를 누비며 훈련을 진행하였지만 단 한 번의 실수도 없는 스텝과 지치지 않는 체력.
역시 이 아이는 자신이 만난 복서 중 최고다.
유일하게 달라진 게 있다면 마치 죽고 죽이는 싸움을 하듯 살기가 주먹에 담겨 있었다.
‘그래. 삶에 한이 많으면 이런 주먹이 나오지.’
양성학의 주문은 계속되었다.
“레프트 보디 치고 더킹 후 투!”
이 훈련은 단순히 추억을 회상하는 것이 아닌 스승의 당부였다.
‘두호야. 어른들의 욕심에 너의 찬란한 시절이 빼앗겼구나.’
양성학의 주문은 계속되었다.
“위빙하고 투 훅 투! 더 빨리!”
두호의 이마에서 굵은 땀방울이 뚝 하고 떨어졌다.
‘너에겐 복싱 기술보다 삶을 대하는 태도를 더 가르쳤다면 그런 일을 겪지 않았을 것 같아 나 역시 괴로웠다.’
양성학은 더욱더 두호를 몰아붙였다.
“어깨 힘 빼고. 잽 주고 보디 숏 어퍼!”
그의 이마에서도 굵은 땀방울이 흘러 내렸다.
두 사람 모두 너무나 위태로워 보였다.
‘두호야. 복서에게 가장 중요한 건 사실 강한 펀치력도 굳센 다리도 아니란다.’
양성학은 순식간에 두호의 옆으로 빠져나갔지만, 두호 역시 그를 놓치지 않고 재빠르게 따라가 자세를 맞춰 잡았다.
‘칠흑 같은 어둠속에서도 자신이 목표한 것을 정확히 바라보는 눈. 그리고 그 눈을 의심하지 않고 걸음을 떼는 굳은 의지다.’
양성학의 주문은 더욱 어려워졌고 두호의 움직임 역시 어지러워졌다.
두 사람의 숨소리 또한 점점 거칠어졌다.
‘몇 번을 쓰러졌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다. 몇 번이라도 다시 일어날 각오가 중요하다. 딱 한 번. 상대보다 딱 한 번만 더 일어나면 되는 것이다.’
단순히 손맛만 보는 수준이 아니었다.
한 호흡에 몇 개의 펀치를 쏟는지도 확인하지 못할 만큼 두 사람은 엄청난 훈련을 하고 있었다.
‘두호야. 두려워 하지마라. 끝까지 바라본 주먹에는 절대로 쓰러지지 않는 법이니까.’
“으아아!”
-쾅
마지막 두호의 기합과 함께 나온 펀치는 그의 손에 달려있던 미트를 뻥 소리와 함께 날려버렸다.
미트가 벗겨져 드러난 그의 맨손.
얼마나 많은 제자의 주먹을 받아 왔는지 짐작도 못 할 만큼 퉁퉁 부은 스승의 두 손이 보였다.
잠시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었다.
양성학은 옅은 미소를 띠며 두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고생했다.”
두호는 거친 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주르륵!
두호의 뺨을 타고 땀방울이 흘러내린다.
격렬했던 훈련이 끝난 후.
벗어두었던 옷을 챙겨입는 두호를 아이들은 말없이 쳐다보았다.
아이들의 앞에는 두호의 주먹에 날아간 미트가 널부러져 있었다.
단순한 훈련이어도 누가 보느냐에 따라 의미는 달라진다.
두호가 방 쪽으로 걸어가자 새끼 강아지들처럼 우르르 양성학에게 달려갔다.
“감독님! 감독님!”
“미쳤다. 저 분 누구에요?”
“와 선수에요? 프로?”
양성학은 아이들을 진정시키며 싱긋 웃어보였다.
“공부가 좀 됐니?”
또래 아이들과는 달리 건장한 몸을 가진 권투부라고는 해도 아직은 10대를 못 벗어난 아이들일 뿐이다.
자신의 생각에 한없이 솔직하며 천진난만하다.
“와 주먹이 안보여요. 대박이다.”
“저거 맞으면 진짜 아프겠다. 총 쏘는 줄.”
“저분 챔피언이에요? 근데 처음 보는데?”
아이들에게 두호는 어떠한 영역을 보여주었다.
수많은 복서들이 닿고 싶어하던 그 영역.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그 영역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저 아이들에게는 큰 공부가 될 것이다.
닿을 수 있다.
저런 움직임을 누군가 해냈다.
그렇다면 분명히 자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너희들도 할 수 있다. 저 녀석보다 너희들이 훨씬 더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니까.”
안타깝지만 복서로서 두호의 성장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기회가 없기 때문에.
하지만 이 아이들은 다르다.
앞으로 수천 번의 스파링과 수백 번의 경기를 뛰어야 하는 이 아이들에게는 많은 기회가 남아있다.
혹시나 이 아이들 중 세계를 뒤흔들 챔피언이 나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옷을 다 차려 입고 나온 두호에게 동경 어린 시선이 쏟아졌다.
하지만 두호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양성학에게 다가왔다.
처음 들고 왔던 금 보자기를 그에게 건넸다.
“이거 받으세요.”
건네받은 상자를 열어보지 않고 살짝 들어 올려 확인한 양성학은 두호에게 이게 뭐냐는 듯 쳐다보았다.
“체질 안 타는 한약으로 준비 해봤어요. 이런거 안 드셔보셨다는 기억이 나서.”
과거 한약 한 번 못 먹어보고 운동한다는 그의 농담이 기억나 준비해온 것이다.
양성학은 할 말을 잃었다.
과묵한 듯 해도 섬세한 아이다.
한 권투부 학생과 눈이 마주치자 그 아이는 화들짝 놀라며 크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두호는 반갑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아이들은 궁금한 것이 많은지 곧장 질문 세례가 쏟아졌다.
“챔피언이죠? 챔피언 맞죠?”
“마지막 레프트 그거 스텝 한 발 더 나간거에요?”
“어떻게 하면 그렇게 잘 할 수 있어요?”
쏟아지는 아이들의 질문에 두호는 살짝 당황한 듯 양성학을 바라보았다.
기자회견장 같은 분위기에 양성학이 나섰다.
“자자. 진정하고. 이 친구는 백두호라고. 과거 감독님 제자다. 삼 년전에 아시안게임 국가대표 선발전 준우승한 친구야.”
자신들의 선배임을 확인한 아이들은 함성과 함께 박수를 쳐대며 반가워했다.
부러움과 존경이 넘치는 훈훈한 시선들을 보며 두호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세상은 이렇게 살아야 하는데.
두호는 방금 전 어떻게 하면 그렇게 잘 할 수 있냐는 질문을 한 친구에게 다가갔다.
“어떻게 하면 잘 할 수 있냐고 물어봤지?”
그 아이는 경량급인 듯 참 마르고 작았다.
하지만 경량급이라 하더라도 조금 작은 키였다.
운동선수에게 체격은 절대적이다.
그 체격을 극복하기 위해서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니까.
“어제 한 걸 오늘도 하고. 오늘 한 걸 내일도 즐겁게 하면 돼.”
말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큰 눈을 끔뻑거리는 아이였다.
양성학은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이 아는 두호는 훈련이 아닌 발버둥에 가까웠으니까.
두호는 손가락으로 무엇인가를 세는 듯 했다.
“14명?”
그리고 그는 외투 품 안으로 손을 넣어 지갑을 꺼냈다.
품 속에서 두툼한 지갑이 나오자 아이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두호는 수표 두 장을 꺼내고 봉투 하나를 더 꺼내 양성학에게 건넸다.
“애들 한창 배고플때잖아요.”
그 말을 들은 아이들에 눈엔 벌써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선배님!”
“존경합니다. 선배님!”
“자주 오시면 안될까요...?”
하지만 아이들과는 달리 양성학만은 표정이 어두웠다.
봉투 안에 들어있는 건 백만 원짜리 수표들이었다.
너무 큰 금액이어서 놀라 돌려주려다 멈칫했다.
“가보겠습니다.”
“자주 오너라.”
두호는 고개 숙여 인사한 뒤 몸을 돌렸다.
“잘 될 거니까 열심히 해. 미래의 챔피언들.”
두호의 말에 아이들은 모두 조용해졌다.
복싱을 하는 자신들이 들었던 소리는 언제나 한결 같았다.
이제 복싱은 돈이 되지 않는다.
왜 힘든 길을 가려 하냐.
이런 말을 듣고 자란 유망주들의 가슴속에는 언제나 걱정과 불안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두호가 해준 말은 그 아이들에게 큰 위로와 울림을 주었다.
아주 값진 응원을 들은 권투부 아이들은 걸어나가는 두호의 뒤로 일렬로 도열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